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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내로써 무관심과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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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내로써 무관심과 싸우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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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파69 9/1 394-399면

인내로써 무관심과 싸우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것을 생활로 보여 주었읍니다. . . . 변함없이 참았읍니다.”—고린도 후 6:4, 새번역.

1. ‘예레미야’는 무슨 경고를 전파하였으며, 백성들은 그에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읍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유다’ 왕 ‘요시야’ 13년(기원전 647년)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로부터, 자기의 백성들에게 ‘유다’ 왕국이 멸망될 것과 수도 ‘예루살렘’과 그 나라 전 영토가 무섭게 황폐될 것을 경고하라는 임명을 받았읍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갖게 된 이후 800여년 동안 여호와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정확하였었다는 과거 기록으로 보아 백성들이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이치적이었읍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예레미야’가 전파하던 기간에 살던 그 백성들은 그의 경고에 무관심하였읍니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읍니다.

2, 3. (ㄱ) 무관심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에 기인할 수 있읍니까? (ㄴ)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무관심함을 나타냈읍니까?

2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흥미 혹은 관심이 없는 것, 그것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중요성도 없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무관심의 원인은 그들이 ‘예레미야’의 경고에 감화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기심이었을 수도 있고, 악한 것에 대하여 둔감해진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하지 못해도 또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범해도 무관심하였읍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자기들 보기에 좋은 것만 원하였고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괘념치 않았읍니다.

3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25:3-7) 그리고 나서 그는 이러한 이유로 그 땅이 황폐할 것을 예언하였읍니다.

4. 사람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어떠한 영향을 받았읍니까?

4 ‘예레미야’가 이 사람들에게 40년 간이나 전파하였어도 뚜렷한 결과가 없었을 때에 그가 얼마나 실망하였겠는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도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읍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의 수고가 결실이 없기 때문에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 번은 그가 다음과 같은 말로 자기의 실망을 표현한 일이 있읍니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레미야 20:7-9.

5. 왜 ‘예레미야’는 오늘날의 하나님의 종들에게 본이 됩니까?

5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이 임박하였음을 현 세대 사람들에게 경고하려고 할 때에 바로 그러한 감을 느낄 수 있읍니다. (계시 16:14) 사람들이 관심이 없고 냉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들 현대 증인들은 때때로, 자기들이 정력을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것같이 느끼고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느낍니다. 아마 당신이 하나님의 왕국의 기쁜 소식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아마겟돈’ 전쟁에 대하여 경고를 선포할 책임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도 그러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도 ‘예레미야’와 같이 사람들의 무관심을 인내하고 예수께서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전파하라고 하신 이 임무를 꾸준히 수행할 필요가 있읍니다.—마태 28:19, 20.

6, 7.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의 전도 봉사와 ‘예레미야’가 수행한 전파 활동을 비교하십시오.

6 ‘예레미야’ 시대를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이 그의 말 듣기를 거절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시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경고가 근거있는 경고였음을 알고 있읍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607년에 파괴되었으며, ‘유다’ 왕국의 전 영토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황폐되었었읍니다. (예레미야 25:11) 그가 전파하던 40년 동안 그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그가 예언한 재난이 들이닥쳤을 때에는 그의 경고가 입증되었읍니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어리석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났읍니다.

7 기원 1877년 이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물의 제도에 불리한 심판을 집행하시고 새롭고 더 나은 마련으로 그것을 대치하실 때가 가깝다는 사실을 경고해 왔읍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들도 ‘예레미야’의 경우와 같이 동일한 무관심에 직면하였읍니다.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전파하였다고 하여 ‘유다’ 왕국이 멸망을 면하지는 않은 것과 같이 현대 증인들이 이 경고를 시작한지가 오래되었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목적이 실현되지 않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다’ 왕국의 예언된 멸망이 분명히 임한 것같이 현 사물의 제도에 대한 멸망도 기필코 올 것입니다. (이사야 55:11) 그러한 일들이 다 지나간 다음에, 생존자들은 우리 시대를 돌아다 보고, 마치 우리가 현재 ‘예레미야’의 전파의 결과를 되돌아 보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의 왕국과 ‘아마겟돈’을 전파한 것이 올바른 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들이 사람들의 무관심을 인내한 것이 지혜로왔음을 모두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8. 가정 내의 무관심과 싸우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며, 그로 말미암은 시련을 어떻게 간주할 수 있읍니까?

8 어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커다란 난관이 되는 것은 그들이 분열된 가정에 살고 있어서, 믿지 않는 가족이 가끔 혹은 항상 냉담하고 심지어는 반대하기 때문에 실망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실을 예언하셨읍니다. (마태 10:35, 36)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타협하지 않고 이런 역경을 인내하는 것은 그것을 타개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얼마 후에 입장이 호전될 수도 있읍니다. 여러 햇 동안 무관심 혹은 반대를 인내한 후 반대하던 남편의 태도가 개선된 경험을 한 그리스도인 아내들의 예가 얼마든지 있읍니다. 그들은 가정 내의 그러한 시련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리라고 예언된 여러 가지 시련 중의 하나로 간주하였읍니다. 그러한 시련은 그리스도인 믿음, 성실 및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시험할 수 있는 ‘형주’에 비할 수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형주]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10:38) 우리는 가정 내에서의 그러한 시련을 인내함으로써 예수께 합당함을 증명할 수 있읍니다.

9. 무관심이 어떻게 회중 내의 사람들에게 시련이 됩니까?

9 심지어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시련을 겪을 때가 있읍니다. 때로는 회중 내의 어떤 사람들이 진리에 대한 그들의 처음 사랑이 식어져서, 그들의 그리스도인 활동이 자극적으로 뜨겁지도 않고 시원하게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되는 수가 있읍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급하신 생명의 진리에 무관심하였던 ‘라오디게아’ 회중과 같이 되었읍니다. 그 회중에 대하여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시 3:15, 16) 오늘날의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도 만일 그들이 여호와의 신원의 날이 이르기 전에 자신의 태도를 변경시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이 태도를 변경시키기까지는 회중 내에서의 그들의 미지근한 태도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시련이 될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이 그들의 전도 봉사의 긴급성에 대하여 무감각하고 그들 자신의 영적 필요성에 대하여도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실망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행동을 늦추거나 자신들의 견해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무관심과 싸워야 할 이유

10. 다른 사람의 무관심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하여 무의식 중에 ‘사단’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읍니까?

10 그리스도인 전도 봉사에 대한 사람들의 달갑지 않은 태도는, 만일 자신이 경계하지 않는다면 여호와의 증인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목적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하나님의 봉사에 대한 증인들의 열의를 저하시키고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전도 봉사를 중지하게 만들 수 있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전하는 진리의 소식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사는 자기 구역에서 전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단’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우리가 중단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장차 하실 일에 대하여 우리가 잠잠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가 종교적 암흑과 미신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 분열적인 국가주의 정신에 얽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의 진리를 전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 구역 내에 있는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고 하여 우리가 전도 봉사 활동을 중지한다면 우리는 ‘사단’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면 입장이 변하여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계속적인 전파가 가치있게 될 수도 있읍니다. 그들은 이 사물의 제도가 존속하는 한 언제든지 들을 수 있읍니다. 과거에도 하나님의 종들은 많은 경우에 실망을 느꼈지만, 우리가 ‘예레미야’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그러한 실망에 제압되지 않았읍니다. 우리도 그러해서는 안됩니다.

11. ‘모세’와 ‘엘리야’는 무관심과 싸운 성공적인 투사로서 어떻게 우리에게 본이 됩니까?

11 ‘모세’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실망을 느껴 자기가 ‘바로’에게 말하는 것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라고 느꼈었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출애굽 6:12) 그러나, 그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니었읍니다. 백성들의 태도가 그러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식을 선포하라고 명하셨읍니다. “너 곧 네가 내가 네게 명한 모든 일들을 말할 것이다.” (출애굽 7:2, 신세)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하였으며, 참 하나님을 위하여 진리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하였읍니다. 예언자 ‘엘리야’도 자기의 전도에 결실이 없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에 역시 실망을 느꼈읍니다. ‘이스라엘’ 열 지파 왕국의 백성들이 그들을 참 숭배로 불러들이려고 하는 그의 노고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읍니다. 그는 그 사업을 중지하고 어디론가 가서 죽어버리고 싶었읍니다. (열왕 상 19:4)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목적을 이루는 것은 되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다시 ‘엘리야’를 보내셔서 그의 일을 마치도록 하셨읍니다. (열왕 상 19:15-18) 이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이 자기를 무활동으로 만들도록 하지 않았읍니다.

12. 그리스도인은 무관심에 대하여 무엇을 인식할 필요가 있읍니까?

12 우리는 무관심이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읍니다. 무관심은 사람들을 여호와로부터,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심지어 영원한 생명의 길로부터 이탈시킬 수 있읍니다.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실망하거나 무관심이 자기 안에 뿌리를 박아 점점 자라도록 한다면 그러한 일이 발생될 수 있읍니다. 그러한 상태가 얼마 진전 되면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영적 활동을 마비시키고 영적으로 죽음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관심을 대항하여 힘차게 싸우는 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무관심과 싸움

13, 14. (ㄱ) 어떻게 무관심과 성공적으로 싸울 수 있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이긴 점에 있어서 이 점을 어떻게 볼 수 있읍니까? (ㄴ) 왜 어떤 사람은 박해 아래서는 믿음을 유지하고도 무관심에 직면해서는 믿음을 상실합니까?

13 우리는 인내함으로써, 무관심이 하나님의 봉사에 있어서의 우리의 손을 늦추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무관심의 악영향과 싸울 수 있읍니다. 박해는 굳건한 결의를 가지고 인내해야 할 성질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박해하던 약 280년 동안에도 그들은 인내로써 박해를 이겼읍니다. 오늘날 우리도 박해와 전파 활동에 대한 무관심을 인내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추천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것을 생활로 보여 주었읍니다. . . . 변함없이 참았읍니다.”—고린도 후 6:4, 새번역.

14 어떤 사람이 극심한 박해를 이겨 낸 후에 무관심의 악영향에 말려들어가는 수도 있읍니다. 무관심이라는 것은 그처럼 교묘하게 침입하는 것입니다. 신체적 박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무관심은 얼마의 기간을 통하여 이루어 버립니다. 그것은 마치 건물의 내부에서부터 먹어들어가는 좀벌레와도 같습니다. 좀이 먹어들어가면 기둥이 약해지기 때문에 얼마 후에 집이 무너집니다. 만일 우리가 무관심의 영향력이 우리를 침식하도록 허락한다면 우리의 믿음의 기둥도 그렇게 될 수 있읍니다.

15. 우리 믿음의 질(質)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합니까?

15 우리 믿음의 질(質)은 온갖 시험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점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 전 1:6, 7)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시는 일은 다가오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 즉 ‘아마겟돈’ 전쟁에서 있게 됩니다. 그 때에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것입니다. (계시 16:14; 데살로니가 후 1:8) 만일 지금 무관심이라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시험받은 믿음의 질이 어떻게 그 때를 당해 내겠읍니까?

16. 올바른 인식을 유지하는 것이 왜 유익하며,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16 무관심을 인내할 만한 양질(良質)의 믿음을 쌓는 훌륭한 방법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생명의 진리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강력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적 양식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웅대한 약속과 하나님께서 이미 수행하신 업적 등을 명상할 필요가 있읍니다. 올바른 인식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의 영적 필요를 항상 깨닫는 것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필요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에서 이탈할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조직과 말씀은 그 영적 필요를 충족시켜 줄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조직에 모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기 때문에,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는 초대에 응하였읍니다. (계시 22:17) 그러나 만일 이러한 부름에 응하였던 어떤 사람이 후에 자기의 영적 필요에 대한 의식이 둔하여지게 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올바른 인식과 믿음을 잃게 되고 드디어는 하나님의 조직에 들어오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베드로 후 2:2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유지할 필요가 있읍니다.

17, 18.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조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증가시킬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을 설명하십시오.

17 우리가 개인 문제나 난관에 직면하였다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조직의 충고를 적용하여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였다면, 우리는 그러한 충고가 없었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하였겠는가를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인식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기 전에 행하던 일을 회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만일 우리 생활 방식을 변경시켜 준 진리의 힘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우리의 입장이 어떠할 것입니까? (베드로 전 4:3)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대속 희생물로 주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을 생각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또한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면 어떠한 생활을 할 것인가도 명상해 볼 수 있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올바른 인식을 세워 줄 것이며, 올바른 인식은 다른 사람의 무관심으로 말미암은 실망을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8 가정 성서 연구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올바른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은 그 사람의 무관심한 경향을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말레이지아’에 사는 한 여호와의 증인이 그러한 경험을 하였읍니다. 그 전도인과 연구를 하던 한 소녀는 한가한 시간이 있어서 연구는 하지만 진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읍니다. 그 증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조직에 대한 인식을 세워 줌으로써 이 무관심을 극복하려고 하였읍니다. 그는 연구를 하다가 성서 원칙이 나오면, 그에 관계되는 문제를 제시하여 그 소녀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이 일을 수행하였읍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에 성서에서 해결책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갈 바를 모르지 않겠읍니까?” 하고 그 증인은 질문하였읍니다. 또 다른 경우에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연구 중에 취급될 때에 이러한 질문을 하기도 하였읍니다. “만일 여호와의 조직에서 해결책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해결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겠읍니까?” 이와 같은 질문은 그 소녀에게 도움이 되었읍니다. 이윽고 그 소녀의 인식은 증가되었고 그 소녀의 무관심은 사라졌으며, 그는 결국 여호와의 조직과 활동적으로 연합하는 길을 택하였읍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올바른 인식을 세워나갈 수 있으며, 우리 믿음의 질에 대한 시험을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의 훌륭한 본

19, 20. (ㄱ) 예수께서는 무관심과 싸우는 데 있어서 어떻게 본을 세우셨읍니까? (ㄴ) 이렇게 하심으로써 어떻게 유익을 받으셨읍니까?

19 ‘히브리’ 예언자들이 여러 세기 전부터 예수의 오실 것을 예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전도 봉사를 행하시던 동안에 자기 동족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무관심한 대우를 받았읍니다. 자기를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자기의 본 고장인 ‘갈릴리’에서도 사실상 부락 전체가 자기의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에서 그랬고, 심지어 그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그러하였읍니다. (누가 10:13-15; 마가 6:1-6) ‘예루살렘’에서도 그의 입성(入城)을 환영하였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600여넌 전에 ‘예레미야’에게 무관심하였던 바와 같이 그에게 무관심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누가 13:34)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의 무반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꾸준히 수행하심으로써 훌륭한 본을 세워놓으셨읍니다. 그는 인내로써 그들의 무관심과 싸웠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추천하셨읍니다.

20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인내로서 자기 믿음의 질(質)이 우수함을 증명하셨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승인을 받으셨고 기타 많은 축복을 받으셨읍니다. (빌립보 2:9-11) 그 분을 우리의 본으로 지적하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 12:3) 만일 우리가 이 인내의 본을 따른다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승인을 받고 우리 앞에 임박한 하나님의 큰 전쟁을 생존할 것을 확신할 수 있읍니다.

21. 무관심과 싸움으로 오는 유익 가운데는 어떠한 것들이 있읍니까?

21 우리가 끝까지 충실히 인내한다면 행복할 이유가 있읍니다. 우리가 이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을 살아 보존될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을 유지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을 나타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을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관심과 싸우고 인내로 박해를 이긴 사람들이 받을 여러 가지 유익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야고보 1:12에서 그리스도와 기름부음받은 추종자들에게 한 다음의 말은, 어느 의미로는 하나님의 왕국의 지상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 [여호와, 신세]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와 같이 인내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보상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는 말로써 이 점을 지적하셨읍니다.—누가 21:19.

22. 예언된 이 사물의 제도의 종말이 이를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느낌을 가질 것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2 이 사물의 제도의 완전한 종말이 기필코 이르렀을 때에 인내한 그리스도인들은 만족을 느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일을 완수한 데 대하여 그리고 자기 믿음의 질을 입증한 데 대하여 만족과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생애의 종국에 그러한 느낌을 가졌었읍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4:7) ‘예레미야’도 그가 하나님이 명하신 사업을 완수하였을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데 대하여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물의 제도의 종말은 아직도 우리 앞에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무관심과 싸워야 하며 무관심 때문에 실망하여 중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갈라디아 6:9.

23. 우리가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신을 추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23 옛날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이 무관심과 성공적으로 싸웠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것과 싸우기 위하여 기꺼이 철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무관심의 악영향을 인식하고 그것이 사람을 좀먹어서 급기야는 믿음이 몰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하여, 그의 말씀의 신뢰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조직의 필요성에 대하여,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개선시켜 주었는가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계속 가질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조직이 우리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가도 회상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는 성서에 들어있는 훌륭한 인내의 본들을 생각해 보고 격려를 받도록 할 필요가 있읍니다. 인내로써 무관심과 성공적으로 싸움으로써, 예언자 ‘예레미야’처럼 그리스도인 전도 봉사에 있어서 계속 충실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추천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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