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항상 즐거워함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시 32:11.
1. (ㄱ) 어떤 면에서 여호와는 비할 바 없이 우월하십니까? (ㄴ) 여호와는 인류를 위하여 무슨 마련을 하셨으며, 어떻게 그 마련을 하셨읍니까?
여호와께서 나타내시는 사랑의 친절은 비할 바 없이 큰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생각하면, 진정한 감사가 우러나오며,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무쌍한 이름과 목적을 선포하고자 하는 감동을 받습니다. (시 107:21, 22) 살아계신 하나님 여호와는 그의 장대함과 지혜면에서 다른 모든 신들을 능가하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수여자가 아닙니까? 여호와는 기쁨의 동산에서 자기를 영원히 섬기도록 사람을 창조하시지 않았읍니까? 그리고 감사할 줄을 모르는 우리의 첫 조상이 죄와 사망의 문을 열어 놓은 후에도, 여호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영원히 무덤의 세력에서 대속하려는 감탄스럽고 분에 넘치는 마련을 하시지 않았읍니까? 오늘날 이 하나님의 부활된 아들이 하늘 왕국에서 통치하고 있는 “징조”를 보는 것은 실로 큰 즐거움입니다. 그분은 지상에서 모든 악을 제거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얼마 안가서 회복된 낙원에서, 호흡있는 모든 자가 다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이사야 42:8; 창세 2:7-9; 요한 11:25, 26; 히브리 1:1-3, 13.
2. 온 인류에게 항상 절대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비할 바 없이 큰 즐거움을 느껴야 하지 않겠읍니까! 이 섬기는 일 곧 봉사는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라는 영원한 축복 가운데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할 필요한 요건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진정으로 온 인류에게 절대 필요한 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권고를 받았읍니다. (신명 11:13) 새로 형성된 그리스도인 회중은 날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섬겼읍니다. (사도 2:46)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는 인류를 위한 새 질서라는 하나님의 창조를 내다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권고하고 있읍니다.—65:17, 18.
3. 오늘날 큰 ‘바벨론’의 상태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상태와 어떻게 다릅니까?
3 오늘날 인류의 세상은 기뻐하고 있읍니까? 국제적인 또는 국내적인 상태를 보면 어떻습니까? 현 사물의 제도의 종말의 특징이 되리라고 예수께서 예언하신 “재난”은 날로 심해지고 있읍니다. (마태 24:3-12)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바벨론’에 근거한 그들의 제도와 교리로는 다루기 힘든 교인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의 목사들은 텅텅 빈 교회를 한탄하고 있으며, 교황 ‘바오로’ 6세는 사제들의 위기가 자기에게 “커다란 고민과 고통”을 준다고 탄식하고 있읍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그대로입니다. 반면에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인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 양식을 풍부히, 배불리 “먹”으며, 생명을 주는 성서 진리를 배부르게 “마시”며,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힘을 얻어 여호와를 즐거이 섬기고 온 땅에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고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이사야 65:13, 14; 12:2-5.
4. 우리는 여호와의 마련에 대하여 어떻게 그리고 왜 감사를 표시해야 합니까?
4 여호와를 즐거이 섬기는 이 일은 장차 올 사물의 제도에서 영원한 생명을 즐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해야 할 요건입니다. (마가 10:28-30) 이 봉사를 저버리고서 손해를 보지 않을 수는 없읍니다. 여호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를 위해 준비하신 감탄스럽고 사랑에 찬 마련은 모든 사람들이 감사의 표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훌륭한 마련입니다. (로마 11:33-36) 이러한 올바른 인식이 충분히 깊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만 나타낼 수 있읍니다. 현재와 같은 “마지막 때”의 절정이 임하기 오래 전에도 사도 ‘바울’은 그 점을 피력하여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것은 내가 아무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린도 전 9:16, 새번역.
즐거움이 있는 속박
5. 여호와께 한 헌신에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5 참으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께 감사하는 사람들은 여호와께 헌신합니다. 우주 내에서 가장 높으신 분 곧 지존자이신 사랑의 하나님께 자기 자신과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은 실로 큰 특권입니다. (느헤미야 9:5, 6)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가치있는 것은 여호와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풍부한 것들을 여호와께 다시 드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욥 41:11; 시 116:12, 13; 야고보 1:17) 헌신을 함으로써, 우리는 창조주의 속박 안으로 들어옵니다. 즉 그분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섬겼던 고대 ‘여호수아’와 같이 오늘날 헌신한 가장(家長)들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고 선언할 것입니다.—여호수아 24:14, 15.
6. 여호와의 속박은 고된 부담입니까? 설명하십시오.
6 하나님께 대한 이 속박은 우리가 회피해야 할 하나의 부담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와 그의 법의 지배를 받으면 축복과 즐거움만 얻습니다. 지상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들은 하나님의 법 아래서 번성하고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들에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 6:28, 29) 그 안에 들어 있는 성장 법칙에 따라 자라가는 들의 백합화가 그러한 감탄스런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의로운 법과 원칙을 옹호하는 인간들의 도덕적 아름다움은 여호와 보시기에 얼마나 더욱 즐겁겠읍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법에 속박되는 것이 고난이 아니라, 지상의 풍부한 생물에게 축복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생명을 창조주에게 헌신함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속박은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가져올 뿐이며,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것입니다.—시 104:24; 145:16, 17.
7. (ㄱ) 하나님의 속박에 들어온 사람들은 어떠한 보상을 받습니까? (ㄴ) 어떠한 위험성 때문에 적극적 행동이 필요합니까?
7 하나님의 속박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아름다움과 목적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 즉 그를 매일 섬기는 데는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이 있읍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약이 있읍니다. (잠언 10:22) 그러나 들에 자라는 아름다운 꽃이 오염된 공기나 흙으로 인해 병이 드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성장도 ‘사단’의 영 곧 “공기”의 침입, 부도덕한 생각, 물질주의의 해악 및 낭비하는 생활에 의하여 방해를 받습니다. 이러한 오염은 사람에게도 창조주에게도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유독 물질을 제거하거나 건전한 자양분으로 대치시키지 않는 한 병든 초목은 시들어 죽고 말 것입니다.—계시 16:17; 유다 12; 디모데 후 1:13, 14.
8. 하나님의 법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8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수긍하기 꺼려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물리적 법칙에 속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한 법칙의 경계 밖으로 이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장난 ‘아폴로’ 13호에 탑승한 세 우주 비행사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여 있었을 때에 그 우주 비행사들과 지상에 있는 보조자들은 지상으로 안전히 귀환시키기 위해 그 우주선을 창조주의 법칙에 맞추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읍니다. 사실상, 첫째 그들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위대하신 법 수여자의 목적을 이탈한 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외계 공간이 아님]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물리적 및 도덕적 법을 존중히 여깁니다.—시 115:16.
기타의 여러 가지 신권적 띠
9.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헌신은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헌신과 어떻게 다릅니까?
9 기원전 1513년에 전체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속박 안에 들어왔읍니다. 개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날 때부터 그 헌신한 민족에 속하였읍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 있는 영적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입장이 다릅니다. 개개인은 반드시 여호와께 개인적인 헌신을 할 정도까지 정확한 지식과 인식에 있어서 성장하여야만 합니다.—에베소 3:14-19.
10.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던 원칙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지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10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게 적용되었던 동일한 원칙에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회중에게 유익이 되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읍니다. 예를 들면, 자녀들은 그래도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며,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관하여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법을 마음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녀 교육은 언제 시작하여야 합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언제 시작하였읍니까? 기록을 보면, “유아”들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의 대회에 참석하였음을 볼 수 있읍니다. (신명 29:10-13; 31:12; 역대 하 20:13) 동일한 원칙이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에도 적용되었읍니다. 그랬기 때문에 ‘로이스’와 ‘유니게’는 ‘디모데’에게 성경을 가르쳤읍니다. 다섯 살부터였읍니까? 세 살부터, 아니면 한살 때부터 가르쳤읍니까? “어려서부터”라고 하였읍니다.—디모데 후 1:5; 3:15; 또한 누가 1:80; 2:40-52, 참조.
11. 어린 아이들을 유아시절부터 가르치는 것은 어떠한 가치가 있읍니까?
11 어린 아이들을 심지어 유아들까지도 신권적 마련에 포함시키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아 시절부터 웅대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면 재난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유아시절부터 그리스도인 집회에 동반한다면 그들은 성장하여 이러한 집회를 그리스도인 생활의 일부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잠언 4:1-13.
12. (ㄱ) 자녀 징계에 대하여 성경은 어떠한 교훈을 하고 있읍니까? (ㄴ) 부모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에 찬 고려를 나타낼 수 있읍니까?
12 그러나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부모가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되면 문제가 있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지체없이 자녀들을 신권적 방법으로 교육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잠언 22:6; 23:13, 14) 어미 곰이 본능에 따라, 잘못을 저지른 새끼 곰을 때려 주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명백히 기술되어 있는 하나님의 법은 인간 부모들에게 자녀를 징계할 것을 요구하고 있읍니다. 화를 내거나 노엽게 하는 잔소리를 하면서가 아니라 이치적으로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 징계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6:4) 징계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이라면 부모들은 왕국회관에 참석할 때에도 거칠은 아이들 때문에 방해가 심하게 되지 않을 만한 장소에 앉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사랑의 고려를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13. 가정 교육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실시할 수 있읍니까?
13 가장 효과적인 징계는 매일 자기 가정에서 실시하는 징계입니다. 사랑이 있는 부모는 가정에서 시간을 내어, 법과 원칙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 줄 수 있고, 아이들과 상의할 수 있고, 질문에 대답할 수 있고, 가정에 대한 사랑을 길러 주며, 여호와의 지상의 가족 내의 신권적 마련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명 11:18, 19; 32:45, 46) 사랑이 있는 부모가 성서 보조물을 사용하여 어린 마음에 재미있는 사건들과 성서 기록에 나타난 교훈을 들려줄 때에, 어린애들을 5분 동안, 15분 동안 30분 동안 부모 곁에 앉아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읍니다. (갈라디아 6:6; 시 78:4) 「파수대」지에는 특별히 자녀들에게 읽어주도록 준비한 기사가 게재되었읍니다. 부모들은 이러한 기사들을 잘 사용하여 어린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세워 주었읍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부모들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계획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매일 교육하면 가족의 띠가 강해질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가 자기들과 교제해 주고 자기들을 위하여 희생한 데 대하여 부모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격려를 받아 도움이 되어 줄 것이며,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신권적으로 성장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한 단계에까지 이를 것입니다.—신명 29:29.
14. 어떻게 유익한 띠를 강화할 수 있읍니까?
14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띠는 다른 여러 가지 띠 곧 가족의 띠, 결혼의 띠,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사랑의 띠에 대해 존경심을 갖도록 해 줍니다. (에베소 5:33; 6:1-4; 골로새 3:14)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합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은 그 날의 성서 귀절을 고려하고 그 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읍니다. 최대의 가족인 1,500여명의 ‘브루클린 벧엘’ 가족은 그렇게 하고 있읍니다. 식사 때에나 다른 기회에 온 가족이 함께 성서 질문이나 「파수대」 혹은 「깨어라!」에 실린 최근 보도 혹은 야외 봉사에서의 경험 등을 논할 수 있읍니다. 가족은 건전한 가족적 오락이나 외출을 할 수도 있읍니다. 또는 아직 가족이 함께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과 연합하여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읍니다.—마태 19:29; 로마 12:13.
15. 우리는 헌신의 띠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15 이 헌신의 띠는 어려운 것입니까? 그것은 끊임없는 즐거움이며,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맛보지 못하는 생기와 만족을 주는 것입니다.—마태 11:28-30.
왕국 관심사
16.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가 우리 생활에 있어서 맨 먼저 그리고 맨 앞에 와야 하지 않겠읍니까? 우리는 사랑많은 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며 우리도 그와 같이 되고자 합니다. 그의 웅대한 성품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영되었읍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천적 아버지를 나타냈읍니다. (요한 1:14, 18; 8:19; 15:15; 17:3-6)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처럼 열정적이어야 하지 않겠읍니까? 예수께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4:34) 우리에게도 그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고 인생에 있어서 지속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제일 관심사가 여호와이고 우리가 진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기쁨으로 드릴 것입니다.—신명 6:4-7; 마가 12:28-30.
17, 18. (ㄱ)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ㄴ) 하나님의 도덕 원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 대한 어떠한 예가 있읍니까? (ㄷ)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평화를 즐길 수 있읍니까?
17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여호와의 의로운 법과 일치한 도덕적 관심사여야 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고 시편 필자는 말합니다. (97:10) 여호와는 악한 것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브올’의 ‘바알’과 부도덕한 관계를 맺었을 때에 명확히 증명되었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재앙을 내려 24,000명을 죽이셨으며, 이 재앙은 의로운 ‘비느하스’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여 창으로 부도덕한 ‘시므리’와 그의 ‘미디안’ “여자 친구”를 찔러 죽인 다음에야 그쳤읍니다. 제사장 ‘비느하스’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였으며, 행동도 그렇게 하였읍니다. 오늘날의 많은 제사장 곧 사제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습니다. 여러 신문 보도에 잘 나타난 바와 같습니다. 그러한 예로 1970년 6월 5일자 ‘에이 에프 피’ 보도에 의하면, ‘네델란드’의 동성애 집단과 ‘네델란드’의 ‘로마 가톨릭’ 추기경 사이에 “대단히 우호적인 회합”이 있었음을 보도하였읍니다. 토론의 제목은 동성애자들을 위한 “종교적 축복”이었다고 보도되었읍니다. 하나님과 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앉아서 그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어떻게 동성애자들을 용납하겠읍니까!—갈라디아 5:19-21; 로마 1:24-27, 32.
18 오늘날에는 ‘뉴스’와 오락 수단을 통하여 엄청난 부도덕 현상이 사람들에게 밀어닥치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러한 유독한 양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것은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비느하스’와 같이 순결한 도덕 표준을 옹호하는 일에 열정적이어야 하겠읍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하나님의 말씀의 깨끗한 것들을 섭취함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즐겨야 하겠읍니다.—빌립보 4:8, 9.
19. 세상 사람들과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배양합니까?
19 현대 세계는 교만하고 독립적이고 반항적이고 명령적이 되어버렸읍니다. (디모데 후 3:1-13) 예수의 본을 따라 겸손과 순종심을 배양한 여호와의 숭배자들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정신적 태도, 신세]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형주]에 죽으심이라.” (빌립보 2:5-8) 여호와의 왕국 관심사를 첫째로 두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훌륭한 본입니까!—마태 6:33.
세상적 관심사를 경계하라
20, 21. (ㄱ) 세상적 관심사를 추구하는 것은 왜 무익하며, 심하면 해롭기까지 합니까? (ㄴ) 무슨 가치있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할 수 있읍니까?
20 오늘날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갑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짧은 일생 동안에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자기를 위하여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돈을 축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건을 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드릴”을 추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도덕적으로 신체적으로 파멸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와 명성을 목표로 삼고 있읍니다. 얼마나 근시안적입니까? 역사상 가장 부유하게 살았던 현명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도 2:11) 당신은 이와 같이 헛된 것을 위하여 노력합니까? 아니면 당신의 목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물의 제도 안에서 항구적인 위치를 정하는 것입니까?
21 세상의 찬란한 물질적 전시품이 당신을 매혹시킵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위험한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릇된 욕망은 그것이 “잉태한즉 죄를 낳”기 때문입니다. 밀려 들어오는 세상적 관심은 자신의 생활을 점차 침식하여 급기야는 자신을 죄 속으로 몰아넣게 합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자기 마음 속에 첫째로 두는 자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야고보 1:14, 15; 요한 1서 2:15-17.
22. 우리는 예수의 희생에 대하여 어떠한 인식을 나타내야 합니까?
22 여호와의 헌신한 증인들은 예수의 소중한 피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의의 종이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세상적 관심사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겠읍니다!—로마 6:17, 18; 갈라디아 5:1.
“마음”으로부터 여호와를 섬김
23, 24. (ㄱ)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수 있읍니까? (ㄴ) 과거에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실패하였읍니까?
23 입술로만 섬기는 것은 여호와의 요구 조건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종교인들에게 이사야 29:13의 말 곧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고 하는 말을 하셨읍니다. (마태 15:8)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순종하는 것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의 한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길 때 온 마음과 다른 모든 기능을 다 해야 합니다. (마가 12:29, 30) 우리는 해마다 적극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있어서 즐겁게 인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호수아’가 자기 집이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결의를 분명하게 표현하였을 때에 모든 ‘이스라엘’은 이렇게 대답하였읍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여호수아 24:15-18.
24 “결단코 하지 아니”하겠다고 그들은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다른 신들을 따라 갔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 하면, 그들이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 흐려지도록 방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봉사는 적극성을 상실하였읍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명상하는 일을 중지하였으며, 발전하는 일을 중지하였읍니다. 그들은 믿음과 영적 상태가 후퇴하였읍니다. 그들은 정신이 세상적인 일에 구부러졌으며, 그들의 양심은 둔해져서 옳고 그른 것을 더 이상 분별하지 못하였읍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하여 여호와을 섬기는 일에서 진정으로 즐거워하였다면 재난이 그들 위에 덮치지 않았을 것입니다.—신명 4:3-10; 여호수아 1:7-9; 히브리 10:36-39; 디모데 전 4:1, 2.
25. 우리는 여호와께 어떠한 종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까?
25 이 사실은 오늘날의 여호와의 백성에게도 경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그치지 않고 여호와를 즐겁게 섬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영적 상태와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연구하고 모이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의 증인으로서 여호와를 섬기는 비할데 없는 특권을 즐겁게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온 땅의 창조주이시며, 소유자이신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그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출애굽 19:5; 베드로 전 1:13-16.
26. 다음 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ㄱ) 하나님의 왕국, (ㄴ) 세상과 세상 나라들, 그리고 (ㄷ)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
26 우리의 모든 희망, 우리의 모든 봉사, 우리의 일상 생활 등은 하나님의 왕국에 중심을 둔 것이라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 있는 모든 관심사는 왕국 관심사입니다. 매일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왕국이 임하며,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권능이 영화롭게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마태 6:9, 10; 데살로니가 후 1:6-8) 우리는 세상의 타락, 통치자들의 고민, 나라들의 고뇌들을 조금도 원치 않습니다. 세상 나라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예수를 대항하고 있읍니다. 얼마 안가서 그들은 산산 조각으로 부숴질 것입니다. (누가 21:25, 26; 시 2:2-9)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큰 환난”이 인류 세상에 급격히 다가오고 있읍니다. “재난”이 악화됨에 따라 우리는 제1세기 그리스도인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읍니다.—마태 24:7, 8, 21; 사도 4:24-30.
27.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읍니까?
27 우리는 삶에 있어서 무엇을 원합니까? 우리는 흔들거리는 세상의 도덕 표준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그러한 도덕 표준은 최근에 함정과 같이 되어 경계하지 않는 사람들을 빠뜨려 파멸시켰읍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지리멸렬한 종교와 부패한 정치와 그의 사상들 곧 증오, 좌절감, 혼란 등과도 관계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삶을 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바와 같이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여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야 할 것입니다. (시 11:7; 잠언 6:16-18; 디모데 전 6:17-19) 우리는 계속 사랑을 더욱 증가시켜 하나님의 봉사에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빌립보 1:9-11)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목표로 바라보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와 다른 충실한 증인들과 함께 일치해야 할 것입니다.—역대 상 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