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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잘못을 시인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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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잘못을 시인할 수 있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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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8
파78 12월호 9-11면

당신은 잘못을 시인할 수 있는가?

“어리석은 자들과 죽은 자들만이 견해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적어도, 필자 ‘J. R. 로웰’은 그렇게 말하였다. 아뭏든, 어떤 의견을 비합리적으로 고집하거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 흔히 있는 약점이다.

이러한 태도를 실증하는 두드러진 예가 기원 33년에 있었다. 그 때 이전 얼마 동안 ‘나사렛’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 일대에서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을 하셨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반대했으며, 그분이 메시야임에 대한 증거와 그의 봉사에 수반된 기적의 징조들을 배척하였다. 그 해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것을 보고 아주 고집센 반대자들이라 할지라도 확신을 가졌어야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그는 죽은지 나흘된 사람을 부활시키셨던 것이다!—요한 11:30-45.

확실히, 여호와께서 예수를 후원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기적을 예로 들 수 있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일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많은 ‘유대’인들은 이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떠하였는가? 기록을 보면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대제사장들이 [예수께서 부활시킨]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다.—요한 11:53; 12:10, 11.

완고함

그렇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모든 증거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확실히, 우리는 그들의 완고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그러한 완고함을 보인 후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들의 태도를 재고할 것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태도를 지속했으며, 후에 예수를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커다란 과오였으며 참으로 비난받을 만한 범죄 행위였다.—고린도 전 2:6-8.

다음에, 예수의 부활의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 강력한 활동의 증인이었던 사도들을 제거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은 예수가 메시야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들로 그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조절하게 한 충고를 하였다. 이 사람은 탁월한 스승 ‘가말리엘’이었다. 자칭 메시야로 등장한 사람들의 예와 그들이 시작한 운동이 실패했음을 지적하면서 ‘가말리엘’은 이렇게 충고하였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사도 5:34-39.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가말리엘’의 충고를 중시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리스도인 ‘스데반’이 그들의 악행을 지적하고 그들이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러나 회개하지도 않았고 마음이 누그러지지 않았음] 저를 향하여 이를 갈”았다. 다음에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마침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사도 7:51-60.

이러한 예에도 불구하고, 완고함이 흔히 이 세상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야 할 반역 및 악한 마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시 78:8) 성서는 또한 ‘애굽’의 ‘바로’의 예와 사사 시대의 ‘유대’인들의 예와 그들의 완고함으로 인한 고통의 예를 지적해 주고 있다.—출애굽 14:8, 26-28; 사사 2:19-23.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검토해 보고 자기가 선천적으로 완고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친절히 들어 주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이것을 개선할 점으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 결국 하나님은 완고한 자에게가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다. 또한, “땅을 차지”할 사람들은 완고하거나 고집이 센 사람들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들이다.—잠언 3:34; 시 37:11.

자존심

때로는 문제가 되는 것이 단순한 완고함이 아닐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특성 즉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생각해 보라. 과오를 범한 것이 들어날 때 그것을 시인하려 하지 않거나 다른 어떤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는 직장 감독관을 본 적이 있는가? 혹은 회중내의 장로가 무심코 부정확한 말을 하고 다음에 그것을 기꺼이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본 일이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자기의 지위로 볼 때 실수를 지적받을 수 없다는 느낌 곧 자존심 때문일 수 있다. 부모와 선생들은 자기들의 과오를 시인하면 권위가 떨어져서 존경심과 영향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때때로 그렇게 행동한다.

“체면을 유지”하려는 생각도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동양에서 어떤 사람들은 “면목을 잃”느니 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동양 사람이든지 서양 사람이든지 우리 대부분은 “체면”, 명성 혹은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보존하기를 원한다. 자존심이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존심은 그리스도인이 배양해야 할 성품인가? 우리가 교만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누가 생각나는가? ‘산헤립’, ‘바로’, ‘바벨론’ 왕 (그리고 마귀 자신) 같은 자들이다. (디모데 전 3:6) 물론, 이들 왕들은 그들과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찬양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보셨는가? 성서는 “나[여호와]는 교만과 거만 ··· 을 미워”한다고 알려 준다. (잠언 8:13) 그리고 지금 이들의 영광이 어디 있는가?

창피함과 두려움

또 다른 이유로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아마 두려움이나 창피함 때문일지 모른다. 그들은 부끄러운 어떤 일을 지적받았을 때 단순한 부끄러움 때문에 사실을 부인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려고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한 사람들은 믿음과 겸손 및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특성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여호와께서는 아주 심각한 죄도 기꺼이 용서하신다. 만일 죄지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의 희생에 대한 확신과 신임을 보이며 하나님께 거리낌없이 죄를 고백하면, 그의 양심은 깨끗해질 것이다. (히브리 9:14) 성경은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심많은 특성을 언급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 4:15, 16; 요한 1서 2:1, 2.

솔직히,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기를 거절함으로써 실제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물론, 우리가 당장 징계를 받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갈라디아 6:7)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죄를 밝히지 못할지 모르지만,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신다. (잠언 21:2)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로마 14:10-12.

이치적임과 겸손함

물론, 여기서 완고함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할 확고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종이 숭배에 있어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칭찬받을 만한 것이다. (고린도 전 15:58) 이것은 좋은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생각과 원칙을 위한 확고함이다. 또한, 그것은 두 가지 중요한 특성 즉 온유함 및 이치적임과 결부된다.

어떤 사람들은 겸손함과 이치적인 성품이 권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약 3백만명의 감독자였던 ‘모세’는 “땅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고 알려 준다. (민수 12:3 공동번역) 그리고 하나님의 회중의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이치적”이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디모데 전 3:1-3, 신세) 그렇다. 겸손하고 이치적인 사람은 잘못을 범했을 때 그것을 시인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창피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며 사실 그대로를 말하지 못할 만큼 너무 자존심이 강하거나 불안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체면을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평화를 좋아하고, 이치적이고, 기꺼이 순종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가득”한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를 나타낼 것이다.—야고보 3:17, 신세.

물론, 우리 대부분은 ‘유대’ 지도자들처럼 완고함으로 인해 살인을 범하는 일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일에서라도 우리가 완고하다면, 이것은 여호와를 불쾌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누가 16:10)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우리는 그 죄를 재빨리 인정하고 그 죄로부터 떠날 것이며, 그러한 일을 계속 “만지지” 않을 것이며, 순결한 마음을 얻기 위하여 즉시 하나님께 거리낌없이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막는 어떤 것—자존심, 수치감, 두려움 등—이 있다면,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도록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 5:16) 우리는 수치감이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잘못을 그분께 고백하지 않는 데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회개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그분의 풍부한 자비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이사야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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