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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0 03월호 36-41면
  • 가치있는 목적을 위해 봉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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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치있는 목적을 위해 봉사함
  • 깨어라!—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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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0
깨80 03월호 36-41면

가치있는 목적을 위해 봉사함

‘차알스 타레하’의 체험담

1769년에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뉴우지일랜드’ 해안에 상륙했을 때, 우리 ‘마오리’인들은 이곳의 원주민이었다. 나의 증조부이며 족장이었던 ‘타레하 테 모아나뉘’는 1840년에 조인된 그 유명한 ‘웨이탕기’ 협정에 서명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 협정으로 ‘마오리’인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신민이 되었고, 또 영국은 재산권을 포함하여 ‘마오리’인들의 모든 권리를 보호해 주게 되었다.

‘웨이탕기’ 협정이 조인된 후—그 당시에 ‘뉴우지일랜드’에는 백인이 단지 2,000명 밖에 없었다—‘유럽’인들이 점점 더 많이 ‘뉴우지일랜드’로 들어왔다. 한 때 이곳은 평화스러웠다. 그런데, 백인들이 ‘마오리’인들의 토지를 사들이기를 원하고 ‘마오리’인들은 그것을 원치 않았을 때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마오리’ 전쟁이라고 불리워진 전쟁이 일어났고, 간헐적인 싸움은 1860년부터 1872년까지 계속되었다.

‘마오리’인들이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 점을 ‘아델레이드’ 대학의 ‘그렌펠프라이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오리’ 지도자들은 죽었거나 치욕을 당했다. ‘마오리’인들의 토지는 몰수되었다. 투기업자와 징세원은 원주민들이 쉬운 희생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20만 정도에서 단지 4만 정도로 줄어들었다. 우리 ‘마오리’인들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한 민족으로서 그 생존이 위협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그 일에 가담할 것인가?

19세기 말엽에 나의 아버지는 ‘테 아우테’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아피래나 투루파 응개타’ 경과 ‘테 랑기히로아’(‘피터 버크’ 박사)를 포함하여 아버지의 많은 ‘마오리’인 친구들은 ‘마오리’ 민족을 돕기 위해 설립된 정부에서의 여러 직책을 얻고자 힘썼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농부가 되었다. 아버지는 4‘에이커’의 대지에 이상적으로 자리잡은 하나의 훌륭하고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저택 부근에는 수백 ‘에이커’의 비옥한 농장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될 무렵 우리는 젖소를 길렀는데, 가장 많을 때는 70마리까지 길렀다. 아버지는 전문적으로 기계공, 연공 및 전공을 겸하였다. 우리는 커다란 발전소를 하나 소유하고 있었다. ‘내피어’ 부근의 이곳 시골 지역에 전기가 들어오기 수십년 전에, 우리는 이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우리 농장에 공급하였다. 우리는 ‘유럽’인들까지 일꾼으로 고용했다.

그래서 나는 성장하는 동안 우리가 백인들보다 열등하다고 결코 느껴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사실들은 우리가 열등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1769년에 ‘유럽’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마오리’인들은 문어(文語)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곧 문어가 개발되어 1827년에는 성서가 ‘마오리’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우리 ‘마오리’인들이 독서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신약”만 해도 1841-1845년에 약 60,000부가 발행되었다. 이 무렵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문명인들 가운데는 백인들보다 ‘마오리’인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주로 ‘마오리’인들과 백인 사이의 전쟁으로 인하여 ‘마오리’인들은 심각한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마오리’인들에게 저질러졌던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는 일에 가담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나는 ‘맥도넬’이란 한 ‘유럽’인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종종 아버지를 방문하여 이런 문제들을 토의하고 우리 민족을 돕기 위해 노력을 더 많이 하라고 격려하곤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그러한 일에 가담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마 그 이유는 내가 인간 통치자들에게 너무 실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볼 때, 영국의 왕 및 여왕들 중 대다수가 너무 부도덕하였고 악하였다. 그리고 ‘마오리’인들의 역사도 그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마오리’인들의 과거를 살펴봄

1800년대 초 이전에 ‘마오리’인들은 기록이 없었지만, 수백년간의 오랜 역사의 세세한 점들을 기억하여 구두로 전해 내려 왔다. 나의 조부와 고모들은 종종 족보를 20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거나 우리 조상들이 ‘커누우’ 선대를 타고 ‘뉴우지일랜드’에 상륙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여러 친척들과 우리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다. 사실, 그들은 때때로 ‘커누우’에서 있었던 이야기들과 일어났던 일들을 마치 지난 주에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 해 주었다. 이와 같이 구두로 전해진 이야기들은 신빙성이 있었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구전의 역사 이야기들은 여러 차례 전해지면서 유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세한 점들 중 많은 것들은 그 정확성이 확정되었다.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기원 1350년에 상륙한 그 선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외부의 증거에 의해 그 확실성이 증명되었으므로 확정된 역사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전해 준 역사적 이야기들은 종종 종족간 치렀던 싸움들 및 “누가 누구를 잡아 먹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 ‘마오리’인들은 한 때 식인종들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가?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가? 이 점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진 바에 의하면 결코 그렇지 않으며 연구가들도 이 점에 동의하고 있다. ‘T. E. 돈네’는 그의 저서 「‘마오리’인들의 과거와 현재」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입수된 지식에 의하면 ‘마오리’인들의 식인 풍습은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의 의식으로 시작된 것 같다.”

아다시피, 모욕에 대해서는 복수를 꼭 하는 것이 ‘마오리’인들의 전통이었다. 더우기 ‘마오리’인들은 패배는 결코 용서치 않았으며 복수에 대한 환상을 마음에 품었다. 그래서 어떤 모욕에 대해서 성공적으로 보복을 할 때에나 복수를 성취할 때에는, 승리한 군 지휘관이 패배자의 심장을 먹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종족에게 갚아 줄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하지만, 한편 패배자의 친족들은 가문이나 종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복수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릴 적에 종족간의 대집회에 여러 차례 가서 웅변가들이 군중 가운데 일어나서 종족의 고대 역사를 들추면서 어떤 족장이 어떤 다른 족장을 언제 “먹었다”는 사실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조상들이 ‘커누우’를 타고 상륙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승리한 일들과 패배한 일들의 세세한 점들을 기억하였다.

하나님을 존경하도록 양육받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러한 역사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그리 영예로운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이러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생활에서 받은 다른 영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조모님은 밤이 되면 취침 전에 그가 사랑하고 있던 ‘마오리’어 성서를 손자녀들에게 읽어 주곤 했다. 성서에 들어 있는 교훈들—‘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은 인류가 살아온 방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나는 성서에 들어 있는 지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마태 7:12; 5:39; 로마 12:17.

나의 증조부 ‘타레하 테 모아나뉘’도 역시 ‘마오리’어 성서를 읽고 나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나의 증조부는 성공회의 한 교역자로부터 성서 한권을 얻었기 때문에 성공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우리 농가에 접해 있는 넓은 대지를 ‘마래’ 즉 모임 장소로 기증했고, 우리 집에서 단지 3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교회를 짓게 했다. 나의 아버지 역시 성서에 들어 있는 지혜를 인식하고서 성공회의 평신도 전파자가 되었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10명의 자녀들을 성서에서 배운 것과 일치하게 양육하기 위해 정말로 최선을 다하였다. 나는 네번째이자 장남이었다. 그러나 우리집은 우리 모두가 편히 살 만큼 충분한 크기였다. 우리들은 모두 식사 때가 되면 가장 좋은 ‘카우리’나무로 만든 커다란 식탁 주위에 둘러 모여 앉곤 했다. 우리집에는 방문객들을 맞는 응접실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종종 방문객들을 맞이하곤 했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성서의 잠언을 진실하게 믿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언 13:24) 실제 회초리를 찾을 수 없었을 때에, 아버지는 경우에 따라 손바닥이나 장화를 사용하시어 목적한 바를 아주 정당한 방법으로 관철시키곤 하였다. 나는 오늘날의 부모들도 이러한 성서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적용한다면 청소년의 비행을 제거하지는 못할지라도 크게 감소시킬 수는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머니 또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양육하는 일에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잠언 31:10-31에 설명되어 있는 현숙한 아내의 성품들에 대해 읽을 때면 나는 나의 어머니가 정말로 그러한 성품들을 소유하였다고 느낀다. 아버지가 분명히 가장이지만, 어머니에게도 자기 책임의 영역이 있었으며, 자기 책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어머니는 솔선력을 나타내었고 관리를 잘 하였다.

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농장 주변의 일을 도왔다. 동시에 나는 기술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면서 경험을 쌓게 되자 나는 능숙한 기계공이자 전공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의 아버지의 기계를 다루는 능력이 내가 내 인생 행로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성서 연구 방식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약 1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 도시인 ‘와이로아’에 살던 이모들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모들의 차를 수리해 주기 위해 ‘와이로아’에 가서 며칠간 머물렀다. 아버지는 이모들의 생활 양식이 우리의 것과 비슷하지만, 종교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침 마다 하나의 성귀를 성서로부터 낭독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해설을 했다. 어느날 아침에 토론된 성귀는 전도서 9:5, 10이었다. 그 성귀들은 이러하다. “살아 있는 자들은 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 당신의 손이 닿는 대로 무엇이든지 힘을 다하여 하시오. 당신이 가는 무덤 안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혜도 없읍니다.”—「흠정역」

근래에 있었던 한 장례식에 가셔서 아버지는 한 ‘마오리’ 교역자가 죽은 자의 영혼은 죽지 않고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있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 이것은 물론 성공회의 신조 즉 일부 영혼은 천당에 가고 저주받은 영혼은 지옥에 간다는 신조와 매우 비슷했다.

조반시에 있었던 또 한번의 계몽적인 성귀 토론은 예수가 자기 아버지보다 못하며, 자기 아버지는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에 집중되었다. (요한 14:28; 시 83:18) 이 점은 아버지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이호와’(영어, Jehovah)가 ‘마오리’어 성서에 6,000번 이상이나 나오기 때문이었다.

종교의 변경

집으로 돌아오실 때, 아버지는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발행한 「성서 연구」란 제목의 책을 7권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즉시 매주 정기적인 가족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이 이 연구에 가담하게 되었다. 교역자가 우리의 연구를 알게 되자 그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영혼불멸의 교리와 삼위일체의 교리를 지지하는 성서적인 증거를 보여달라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단지 이 말만 했다. “교회에 충실하시오.”

이 일 때문에 아버지는 자기가 성서로부터 배운 것이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 6:14-17에 있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오라].” 하는 성서의 말씀을 기억하고서 우리 가족 전체가 성공회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알리는 탈퇴서를 그 교회에 제출하였다. 그 당시 내 나이는 19세였고, 나는 아버지의 조처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버지는 그 탈퇴서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아버지가 ‘마오리’인들의 지역 사회의 유지였기 때문에, 탈퇴서를 낸 일은 교역자들 사이에 동요를 일으키게 했다. 그들은 아버지로 하여금 탈퇴서를 철회하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를 위해 당장 특별 집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다. 아버지는—교회 안에서가 아니라—그러한 대 집회를 위해 세운 커다란 연단이 준비되어 있는 우리 대지 위에서 그러한 집회를 갖는 것에 동의하였다.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뉴우지일랜드’의 성공회 주교 ‘F. 베네트’를 포함하여 많은 교역자들이 참석했다.

그 집회

그 교회의 ‘마오리’인 대변자는 의도적으로 성서 사용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감정에 호소했다. “우리 조상들은 영혼이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읍니다.” 하고 상기시킨 다음 그는 “그런데도 당신은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종교를 선택하기로 했읍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성서를 펴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영혼이며, 그래서 사람이 죽을 때 영혼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다시 산 영혼으로 부활시키실 수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그 성공회의 교역자는 자기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지자, 나의 증조부가 세운, 옆에 있는 교회를 향하여 성급한 몸짓을 하면서 감정에 복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의 훌륭한 조상들이 당신에게 물려 준 이 거룩한 유산을 버리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그런 다음에 아버지가 일어서서, 집회에 모인 모두에 대해 감사하고, 이제 진리를 가지게 되었음을 확신한다고 설명하였다, 아버지는 우리의 정기적 성서 연구의 일시를 모두에게 알리고 모두가 참석 하도록 초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

나의 인생 행로를 선택하는 일

그 집회는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우리가 성서 연구를 계속해 감에 따라 내 마음 속에는 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이 ‘마오리’인들의 문제들 뿐 아니라 인류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정부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서에 설명되어 있는 왕국 전파 사업을 수행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마태 24:14.

그 무렵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로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클리포오드’와 ‘에드나 케오간’이 우리가 살고 있던 지역으로 왔다. 그래서 우리는 조그만 집 한 채를 그들이 사용하도록 제공했다. 그들은 함께 전파 사업에 가담하자고 우리들을 초대했다. 나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전파 사업에 가담했다. 전파 사업을 하면 할 수록 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더욱 더 인식하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결정되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파이오니아’ 봉사를 나의 천직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아버지의 승인으로 나는 1931년 초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나는 나의 ‘파이오니아’ 짝인 ‘프랭크 듀어’가 있는 북쪽 섬의 서해안에 있는 한 도시인 ‘왕가뉘’로 이사했다.

‘파이오니아’ 경험

우리는 ‘왕가뉘’를 우리의 본거지로 삼아 봉사하면서 여러 시골 지역에도 가서 전도했다. 한번은 성서에 나오는 여러 지명들 즉 ‘베들레헴’, ‘예루살렘’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여러 마을이 운집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왕가뉘’ 강변을 따라 새로 생긴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동이 틀 때 출발하면 오후 늦게는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는 늦가을이었고 이미 장마철이 시작되었다. 진흙길이 너무 질퍽질퍽하여 짐을 가득 실은 ‘사이클’을 진흙탕 속으로 밀고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두움이 닥쳤다. 나는 시간과 방향 감각을 모두 잃어 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는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계속 밀고 나갔다. 얼마 안가서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하나 보였다. 나는 그 불빛을 향하여 곧장 앞으로 갔다. 얼마 안가서 개짓는 소리들이 나의 귀에 음악 소리처럼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등불을 밝혀 들고 나왔다. 가까이 와 나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이와 같이 질문했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나는 대답했다. “‘왕가뉘’에서 왔읍니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 어이없다는 듯이 “설마 그럴리가!” 하고 말했다.

그는 흙묻은 옷을 바깥에 벗어 두라고 말하고 나를 목욕탕으로 안내했다. 목욕을 하고 깨끗한 ‘파자마’를 입은 후, 나는 ‘팬 케이크’와 따끈한 차를 대접받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제 말해 보시오. 여기는 왜 왔읍니까?” 우리는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했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상대적인 지위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중요성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는 독신자로서 양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성서를 크게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제공한 성서 서적들을 기쁘게 받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잠을 깨어 보니,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이미 일터로 떠나고 없었다. 나는 ‘예루살렘’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그곳과 그 인근 여러 마을에서 많은 서적을 전했다. 여러 해 후에, 내가 ‘내피어’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했을 때, 한 여자가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접근해 와서 질문했다. “나를 기억하시겠읍니까?” 나는 기억이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15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나에게 성서 서적을 몇권 전해 주었어요.” 그도 이제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옴

1932년 3월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열리는 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약 15년간 머무르게 되었다. 그 대회가 끝난 후 나는 「하나님의 거문고」및 기타 협회의 간행물들을 ‘마오리’어로 번역한 것을 교정하는 일과 ‘벧엘’의 자동차를 정비하는 일을 돕기 위해 ‘벧엘’ 가족이 되도록 초대를 받았다.

그 동안 나의 양친은 연로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양친께서는 나에게 집으로 돌아와서 농장일을 관리하는 데 도와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 이후로 전 시간 봉사를 하지는 못 했지만 계속 ‘파이오니아’ 정신을 유지했으며, 처음에는 ‘해스팅’에, 다음에는 ‘내피어’에 회중들을 세우는 일을 도왔다.

이 무렵 ‘오오클란드’ 북쪽 ‘와이마’에 있는 ‘화레라우’란 한 ‘마오리’ 가문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 가문에서 약 100명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1950년에 ‘와이마’에 있는 ‘마오리’ 형제들이 ‘뉴우지일랜드’에서 최초의 왕국회관을 건축했다.

1953년 12월에, ‘엘리자베드’ 영국 여왕이 ‘에딘버어그’ 공작을 동반하여 한달간의 ‘뉴우지일랜드’ 방문을 시작했다. ‘뉴우지일랜드’ ‘웰링턴’의 「도미니온」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투이리 타레하’ 씨 부처[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은 다른 74명과 함께 여왕과 그의 방문단에게 소개되었다. ‘타레하’ 여사는 여왕과 악수를 하는 대신 여왕께 갈색 종이로 깔끔하게 포장한 조그만 상자 하나를 선사했다.” 이 포장된 상자에는 「신세계역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서」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두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여왕께서는 한때 ‘솔로몬’의 지혜를 가지고 백성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다스릴 수 있으면 좋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우리는 이 책들이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뉴우요오크’로 그리하여 선교 사업으로

나는 1956년에 다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안가서 나는 순회 사업을 하도록 초대받았다. 그후 1958년에 ‘뉴우요오크’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받았다. 그 대회가 끝난 후 나는 남아서 제33기 ‘길르앗’ 선교인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았다. 그 때에도 나의 양친은 살아 계셨다. 그리고 양친은 내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나의 생명을 여호와의 봉사에 바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나의 선교 봉사 임명지는? 인도양에 있는 현재 ‘스리랑카’라고 개명된 ‘실론’ 섬이었다. 나는 고향을 멀리 떠나서 이 아름다운 열대 지역의 섬에서 약 18년간을 봉사했다. 고향에 계시던 나의 사랑하던 양친은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에 사망하였다. 이곳에서의 증거는 정말로 색다른 것이어서 도전이 되었다.

매일 처음 만나는 사람은 불교인일 것이며, 그는 아마 하나님이 없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다음에 만나는 사람은 회교인일 것이며, 그는 유일신 ‘알라’만을 믿는다. 그 다음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아온 ‘로마 가톨릭’ 신자일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는 수백만의 신들이 있다고 믿고 있는 ‘힌두’ 교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매우 우호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성서 진리의 소리를 듣고 분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풀레나이에겜’ 가족이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나는 ‘윌리엄’과 그의 아내 ‘올리브’ 그리고 그들의 세 아들 및 두 딸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한 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심있는 ‘증인’이 되었다. ‘바산트’란 아들은 이제 ‘스리랑카’의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이 되었고, ‘모한다스’는 연로자가 되었고, 두 딸 ‘비랜자니’와 ‘바이노디니’는 연로자들과 결혼하였다. 그 후 ‘윌리엄’은 사망했다. 그러나 ‘올리브’는 ‘파이오니아’ 정신을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가능할 때는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다.

1977년 4월에, 나는 나의 ‘비자’를 갱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뉴우지일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서 나는 ‘벧엘’ 가족의 한 성원이 되었고, 이 나라에 있는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이 되는 특권을 받았다.

보람있고 가치있는 목적

나는 지난 12월로 이제 70이 되었다. 내가 10대였을 때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 내가 선택한 행로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한다. 왜냐 하면, 나는 ‘마오리’인들의 이익 뿐 아니라 다른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든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내는 계획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 제공하는 해결책 뿐이라는 것을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욱 확신하고 있다.

나의 민족 중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해결책을 깨닫는 것을 보면 나의 마음은 마냥 즐겁다. 왜냐 하면, ‘뉴우지일랜드’에 있는 약 6,500명의 ‘증인’들 가운데 약 1,000명이 ‘마오리’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 수십명은 그리스도인 장로들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세 사람은 순회 감독자로 봉사해 왔고, 다섯명은 ‘길르앗’ 성서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먼 임명지에 가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 정부의 다스림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하나로 연합되면, 그것은 얼마나 웅대하겠는가!

[36면 차알스 타레하의 사진]

[36면 삽화]

추장, ‘타레하 테 모아나뉘’의 모습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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