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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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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0
파80 03월호 26-31면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믿음의 극렬한 시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봉사에 바친 100여 년 간

일제 운테르되르페르의 체험담

1939년 9월 내 친구 엘프리이데 뢰르와 나는 독일 라벤스브뤼크 집단 수용소에 갇힌 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한 때였다.

우리가, 새로 지은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이송되기 직전에 나찌 SS(친위대) 대장 하인리히 히믈러가 리히텐베르크 수용소로 우리를 방문하였다. 그의 목적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나찌의 전쟁 노력을 지원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거절하였다. 그러자 히믈러는 격분하여 이렇게 외쳐댔다. “너희 좋은 대로 해라. 너희 여호와는 하늘에서 다스릴지 모르지만, 여기 지상에서 다스리는 건 우리란 말이다! 누가 더 오래 견디는지, 너흰지 우린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거의 기나긴 6년 동안이나 엘프리이데와 나는 여러 동료 그리스도인 자매들과 함께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역경을 인내하였다. 그러나 우리 증인들은 살아 남았지만, 히믈러와 히틀러 그리고 그의 일당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보다 몇년 전 우리가 아직 십대였을 때, 엘프리이데와 나 두 사람은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봉사에 바치고 어떠한 일로 인해서도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에, 나찌의 박해가 증가하는데도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어 위로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우리 두 사람의 헌신한 봉사의 햇수는 오늘로 막 100년이 찬다. 여기서 어떻게 우리가 라벤스브뤼크에 있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봉사에 바친 처음 몇 해

1926년 엘프리이데가 겨우 열여섯 살이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다. 그가 1930년 겨울에 전 시간 전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바라는 욕망은 성취되었다. 중병으로 한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제약을 받았지만, 내가 1937년 3월에 엘프리이데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는 지하 활동에서 매우 열심이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호와의 증인의 사업은 독일 나찌 치하에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구속될 것을 각오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걸고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 걸쳐 영적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가담하였다.

내 개인의 목표는 동료 인간들을 돕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1931년에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여호와의 증인의 한 대회에 참석하였다. 거기서 듣고 경험한 것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 이듬해 19살 때 나는 침례를 받았다.

히틀러와 나찌당은 1933년에 정권을 장악했으며 그와 거의 동시에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작센의 지하 활동에서 연락원으로 봉사하는 특권을 받았을 때 나는 매우 기뻤다. 1936년 8월 독일 게스타포(비밀 경찰)는 우리 지하 조직에 대항하는 특별 운동을 시작하였다. 우리 활동을 감독해 왔던 프릿츠 빈클러와 대부분의 지역 지휘자들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36년 9월 나는 약 300명의 독일 형제들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러 스위스의 루체르네에 갈 수 있었다. 거기서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J. F. 러더포오드는 심한 타격을 받은 우리 지하 활동을 재조직하는 책임을 에릭 프로스트에게 맡겼으며 며칠 후에 나는 그와 함께 일하도록 임명되었다.

프로스트 형제의 임명으로 나는 뮌헨에 가서 엘프리이데 뢰르의 거처를 알아내도록 파견되었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아버지가 치과 의사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전화 번호부에서 그들의 주소를 찾아내었으며 신중을 기하기 위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엘프리이데를 만나 그가 우리와 함께 전 시간 봉사하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거의 43년간의 친밀한 우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집단 수용소에서 함께 생활하고 전 시간 전파 사업에서 짝으로서 함께 일하는 데 40여 년을 보냈다.

지하 활동

비밀 경찰은 우리 모두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밤 열차를 이용했으며 가능한 한 자면서 여행하였다. 낮에는 여러 지정된 장소에서 형제 자매들을 만나 그들에게 등사된 「파수대」지들과 다른 중요한 지시 사항들을 전달해 주곤 하였다. 종종, 우리는 관심자들과 밤을 지내거나 비밀 경찰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형제들의 여름 별장에서 밤을 지내곤 하였다.

우리는 주소 기록이나 다른 노우트를 결코 휴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였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체포되더라도 경찰은 죄를 뒤집어씌울 증거를 얻지 못할 것이었다. 우리는 여호와의 보호를 거듭 느꼈다. 루체르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 배부를 조직하고 있었을 때 특히 그러했다. 이 결의문은 로마 가톨릭과 독일 내의 그 동맹자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을 잔혹하게 학대한 데 대한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1936년 12월 12일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에 3,459명의 형제 자매들이 독일 전역에서 이 강력한 메시지 수십만 부를 배부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그 후 1937년 3월 21일 내가 엘프리이데를 처음 만난 지 2주일도 채 못되었을 때 프로스트 형제와 나는 체포되었다. 거의 때를 같이해서 일부 지역 봉사 지휘자들도 비밀 경찰의 손에 넘어갔다. 아직 자유로운 지역 봉사 지휘자 하인리히 디이치 형제가 프로스트 형제의 부재중 사업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3월 말에, 미리 계획된 집회에 프로스트 형제도 나도 나타나질 않자 엘프리이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비밀 경찰이 그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프로스트 형제 후임자가 누군지? 그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그는 궁금히 여겼다. 여호와께 기도하고 나자 그는 뮌헨에서 1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로이트키르히 읍에서 접촉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로이트키르히에서 바로 그 날 엘프리이데는 디이치 형제가 자기를 찾아보라고 보낸 형제를 만났다. 이것은 천사의 인도였음이 분명하였다!

우리가 12월 12일에 배부한 결의문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나찌가 주장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한 세세한 증거들을 실은 “공개장”을 독일 전역에 배부하려는 준비가 진행되었다. 프로스트 형제와 내가 이 대대적인 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중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이 준비를 완료하는 일에 이제 엘프리이데는 디이치 형제와 밀접하게 일하였으며 그 운동은 1937년 6월 20일에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라」에 실린 엘프리이데의 보고는 이러하였다.

“디이치 형제는 그 운동을 조직하였다. 우리는 한결같이 담대하였고, 모든 것은 놀랍도록 마련되어 있었으며, 각 지방에는 충분한 양의 공개장들이 할당되어 있었다. 나는 브레슬라우 근처 구역의 기차 역에서 그것들이 든 커다란 옷 가방을 가지고 리이그니츠의 형제들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내 몫도 받아서 지정된 때에 모든 다른 형제들처럼 그것들을 배부하였다.”

이 운동이 시작되기 전 몇 달 동안 비밀 경찰은 우리 조직을 붕괴시켰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니, 그러한 조직적인 방법으로 수십만 부의 이 편지가 독일 전역에 배부되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놀랐고 굴욕을 느꼈겠는가! 그것은 참으로 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다시 만남

엘프리이데가 자유로울 때 나는 비밀 경찰의 손 안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처음에 나는 단지 1년 9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 형기를 마치자 즉시 다시 체포되어 1939년 초 리히텐베르크 수용소로 보내졌다. 매우 놀랍게도 내가 도착했을 때 엘프리이데가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1939년 여름 리히텐베르크의 우리 그리스도인 자매들 모두는 새로운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우리는 재삼재사 이러한 협박을 받았었다. “라벤스브뤼크로 끌려갈 때까지만 기다려라. 거기서 너희를 아주 없애 버리겠다.” 새로운 수용소 주위는 모래 지대의 사막과 흡사하였다. 꼭대기가 가시 철망으로 된 높은 담벼락, 죄수들의 막사 및 친위대 숙소들이 완공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외 모든 것은 엉성한 상태여서 일손 즉 수감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믿음의 시험

1939년 가을에 라벤스브뤼크에는 여호와의 증인 여자가 약 500명 있었다. 몇몇 자매들이 군복에 탄약 주머니를 꿰매는 일을 거절한 것은 12월 19일이었다. 양심상 그러한 방법으로 전쟁 노력을 지원하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수용소 마당으로 불려 나갔으며, 그 일을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 모두는 거절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을 강제로 포기시키고 전쟁 노력을 지원하게 만들려는 운동이 시작되었다.—이사야 2:4.

처음에 그들은 우리를 추운 바깥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얇은 여름 옷만 걸친 채 서 있게 하였다. 그 때는 종종 섭씨 영하 15도 내지 20도까지 내려가는, 독일에서 가장 추운 겨울 중 하나였다! 우리는 밤이면 감방 건물에 갇혔고, 그 곳에서 담요도 없이 맨바닥에서 자야만 하였으며, 창문은 열려 있어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들어왔다. 더우기 첫 날에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협박이 계속된 나흘 동안 우리는 겨우 하루 양식의 반밖에 안 되는 음식을 받았다. 그 다음 우리는 어두운 감방에 3주일간 더 갇혀 있었으며 겨우 나흘에 한 번씩 따뜻한 것을 좀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됐다. 다른 날에는 아침에 빵 한 조각과 코오피 한 잔을 받았다. 그들의 크리스마스 축제 기간(12월 25일부터 27일까지)에는 전혀 아무 것도 받지 못하였다.

그 후에 우리 막사로 돌려보내 주었는데 그 막사는 3개월 동안 형벌의 막사로 포고되었다. 이것은 음식이 줄어들고 더 형편없어지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칠 일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힘든 땅파는 작업을 의미하였다. 우리에게는 의료 수단이 허락되지 않았다. 재삼재사 친위대 지휘관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너희가 전쟁 노력을 지원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귀신이 되기 전에는 여기서 나갈 수 없을거다!’

1940년 봄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파리처럼 죽어 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히믈러에게 정면으로 도전을 받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최악의 상태하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지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우리 500명의 자매들 중 중병을 앓은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으며 또한 아무도 죽지 않았다. 일부 친위대 대원들까지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건 너희 여호와가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충성을 유지한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승리였다!

엘프리이데와 나는 생명을 내놓았었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지 여호와께 성실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 14:8.

라벤스브뤼크의 하루하루

그러나 상태는 좋은 방향으로 변하였다. 농업 종사자들이 많이 군대로 징집되어 가서 농장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용소 재감자들이 라벤스브뤼크 인근의 농장들에서 일하도록 보내졌다. 그러한 일꾼들이 탈출할 위험성이 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도망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우리 중 여러 사람이 일하도록 농장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우리는 강제 수용소의 빈약한 분량에 더하여 먹을 음식을 받았다.

그러나 영적인 급식이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투옥되기 전에 배웠었던 성서 지식을 교환하여 영적으로 서로 세워주곤 하였다. 또한, 수용소로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최근에 성서 연구에서 배운 것을 알려 주곤 하였다. 성서 몇 권이 수용소 안으로 몰래 반입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가능한 때는 언제나 수감자 및 감독관들에게 증거하였다. 아무 것도 우리가 여호와께 대한 충성을 과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결심은 “항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으리이다!” 하는 것이었다.

엘프리이데는 친위대 장교들의 정원을 돌보는 일에 임명되었고 나는 다른 자매들과 함께 친위대 농장에서 일하도록 보내졌다. 1942년 말엽 우리는 수용소 막사로 돌아가지 않고 농장에서 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당한 자유를 즐겼다. 1943년 봄에 나는 프란츠 프리체 형제를 편지로 접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집단 수용소에 영적 양식을 몰래 투입하는 일에 열심인 용감한 형제였다. 한 번은 농장과 인접한 숲 속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파수대」와 다른 출판물들이 정기적으로 들어오도록 마련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용소 안으로 인쇄물을 들여왔다.

그러나 그 후 사정은 다시 변하였다. 프리체 형제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비밀 경찰은 마침내 성서 인쇄물이 조직적인 통로를 통해서 수용소 안으로 직접 정기적으로 몰래 반입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러한 발견은 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던가! 그리고 10년간의 심한 박해로도 하나님의 백성의 영이,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파괴되지 않았다는 얼마나 강력한 증거였던가! 즉시 히믈러는 의심스러운 모든 수용소를 수색하여 성서 인쇄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하였다.

최악의 해를 살아 남다

비밀 경찰이 1944년 5월 4일 라벤스브뤼크에 예고없이 나타났다. 그들은 성서와 성서 인쇄물들, 특히 「파수대」를 찾아내기 위하여, 갑자기 철저한 수색을 하였다. 또한 그들은 엘프리이데가 친위대를 위하여 정원 일을 하고 있던 곳과 내가 임명받은 친위대 농장에도 갔다. 마침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로 간주되는 15명의 자매들이 모두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도록 결정되었다. 엘프리이데와 나는 그 수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 우리는 악명 높은 감방 건물에 감금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작고 어두운 방들에 갇혔다. 7주 동안 우리는 햇빛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형벌 건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엘프리이데와 나는 다시 가까이 접촉하게 되었다. 라벤스브뤼크에서 마지막 해에 겪은 역경들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여호와의 보호와 사랑스러운 보살핌을 느꼈다. 그분은 우리가 인내하도록 힘을 주셨다. 크게 도움이 된 것은, 농장에 남아 있던 자매들이 우리에게 몰래 넣어 준 영적 양식이었다. 비밀 경찰은 거기서 인쇄물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숨기기에 아주 좋은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몇 달 동안 수용소의 형편은 점점 더 악화되었으며, 특히 우리가 있던 형벌의 건물에서는 그러하였다. 막사들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원래 그 건물들은 100명의 죄수들을 수용하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마침내 형벌 건물은 1,200에서 1,500명까지 수용해야만 하였다. 6명 내지 7명이 두 침대에서 잠을 자므로 아무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변질되고, 종종 제대로 씻지 않은 음식으로 인해 위장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죄수들은 비참하게도 수백 명씩 죽어 갔다.

엘프리이데도 중병을 앓게 되었다. 그는 폐렴에 걸려 체온이 갑자기 높아졌다. 내가 그것을 예방해 주기도 전에 그는 병동 중 하나로 옮겨졌는데, 그 곳에는 죽기 직전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형벌 막사에서 혼자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장의 도움으로 나는 때때로 밖으로 나가서 엘프리이데에게 마실 것을 좀 날라다 줄 수 있었다.

엘프리이데의 상태로 보아 그곳에서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 분명해졌다. 트럭들이 정기적으로 환자 막사 앞에서 시체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던져 싣고 화장터로 날랐다. 그래서 실장의 도움으로 우리 중 두 사람이 엘프리이데에게 갔다. 그의 침대는 창가에 있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 다음 우리는 그를 형벌 건물로 데리고 왔다. 그 곳에서 러시아 여자로 의사인 한 수감자가 간단하지만 고통스러운 치료를 해주었고 그리하여 엘프리이데의 폐의 염증은 가라앉았다.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1945년 이른 봄에 이르러서 제2차 세계 대전은 신속히 그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나찌 친위대 군대는 수용소를 폭파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전진해 왔기 때문에 나찌는 그들의 흉악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4월 28일에 라벤스브뤼크는 전투 없이 러시아인들 손에 넘어갔다. 그리하여 거의 6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후에 우리는 그 ‘풀무’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 기간에는 라벤스브뤼크에 오기 전에 투옥된 2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굳은 결심을 유지함

우리 두 사람은 여호와께 다시 자유롭게만 된다면 우리의 시간과 정력 모두를 그분의 봉사에 바칠 것을 약속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힘든 여행중에 우리는 프로스트 형제를 방문하였는데, 그도 동일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마그데부르크로 오도록 초대하였는데, 그 곳에서 독일에서의 전파 사업을 재조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올베른하우에 있는 집에 도착하자 지방 행정 기관에서 내게 범죄 수사과를 지휘하는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나는 이 제공에 대해서 전혀 생각이 없었다. 오래 전부터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려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3주 후에 엘프리이데와 나는 마그데부르크로 돌아가 다섯 명의 첫 벧엘 봉사자들 가운데 끼었다.

1947년 그 당시 협회장인 N. H. 노워 형제가 서부 독일을 방문하였다. 그는 몇몇 형제 자매들을 워치 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래서 엘프리이데와 나는 이 선교인 교육을 받을 것을 신청하였다. 얼마 후 우리는 초대장을 받았으며 1949년에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여호와의 조직의 정기적인 집회와 봉사 활동으로부터 여러 해 동안 격리되어 있다가 길르앗에서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우리는 그것을 여러 가지 역경을 겪은 것에 대한 커다란 상, 훌륭한 보상으로 생각하였다. 그 다음 절정으로서 1950년 여름에 우리는 뉴우요오크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신권 확장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길르앗 15기 졸업식이 첫 날 거행되었다.

선교 봉사

우리의 첫 번째 선교 임명지는 라인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독일 쾰른이었다. 우리는 35명의 전도인으로 된 그 지방 회중과 봉사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생산적인 성서 연구를 여러 건 사회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왕국 봉사에 참여하도록 도와주었다. 3년 반 후에 우리는 새로운 임명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갔다. 그러나 그 동안에 쾰른의 회중은 발전하여 전도인이 214명에 이르렀으며 우리는 새로운 왕국회관의 봉헌식을 보았다.

지난 24년간 오스트리아에서 봉사하는 동안 우리의 임명지는 여러 곳이었다. 가스타인 계곡, 아름다운 트라운제 호수가에 있는 그문덴, 보르아를베르크의 호엔엠스, 티롤의 텔프스 등이 임명지였다. 현재 우리는 브레겐츠 숲 속의 보르아를베르크에서 다시 일하고 있다. 다양한 임명지들에서 우리는 일곱 개의 왕국회관을 세우도록 도왔다. 또한 세 임명지에서는 일을 시작할 때에 왕국 전도인이 아주 없거나 한두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러한 곳들에 새로운 회중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았다. 비록 우리 자신의 자녀들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영적 자녀, 손자녀들이 많이 있어 그들과 따뜻한 사랑의 탁월한 띠로 연합되어 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준 것

강제 수용소에서의 믿음의 어려운 시험을 살아 남은 후에도, 우리에게는 여호와를 위한 전 시간 봉사를 포기케 하는 여러 유혹들이 있었다. 여러 해 동안의 수용소에서의 생활의 후유증과 나이가 들어감으로 인한 건강 문제들이 있었다. 그리고 근년에는 물질주의가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지역에서 사람들의 무관심은 종종 실망을 주었다. 그래서 전 시간 왕국 전파자로서 즐기는 것보다는 안일하고 편안한 더욱 안정된 생활을 하려는 욕망이 때때로 생겼다. 무엇이 우리가 인내하도록 도와주었는가?

한 가지는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제쳐 놓은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 즉 아브라함, 사라, 모세, 사도 바울 및 우리의 가장 위대하신 본 예수 그리스도 등의 본에 계속 유의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참으로 가치 있는 것에 고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충고를 항상 기억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산상 수훈에서 그보다 먼저 말씀하신 것도 기억하였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 6:33, 21.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항상 행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왕국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그분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켰다. 이 일을 귀한 보물처럼 간직한 것이 우리가 나찌의 잔학한 학대를 인내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동일한 왕국 희망을 굳게 간직한 것이 그 때 이후로 여러 해 동안 포기하는 일 없이 전 시간 하나님의 봉사를 계속하도록 도와주었다.

참으로 우리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것이었다! 우리는 말라기 3:10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재삼재사 경험해 왔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원히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는 것이다.

[29면 삽화]

일제 운테르되르페르와 엘프리이데 뢰르의 오늘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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