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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은 나의 인생의 전부였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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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3
파83 5/1 19-21면

음악은 나의 인생의 전부였다

‘고오든 그랜트’의 체험담

우리 집 거실에는 오래된 수형 ‘피아노’ 한대가 있었다. 내가 ‘피아노’ 의자 위에 기어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자마자 나는 그것을 쳐보려고 애썼다. 아마 내 나이 4, 5세가 되었을 때 할머니는 나를 음악회에 동반하곤 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자 양친은 나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작하였다.

나는 즉시 ‘피아노’에 전념하였으며 급속히 발전하였다. 얼마 안가서 집과 학교 음악회에서 연주하게 되었다. 나의 초기 교습은 고전 음악이었으나, 나이 십대에 들어서자 ‘재즈’에 대한 흥미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나는 ‘딕시랜드 재즈’를 좋아하였으나 나중에는 보다 현대적인 ‘스타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1950년대 중반에는 ‘록 큰로울’이 내 나이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반복적인데다 너무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로서는 그 가사들이 무의미할 뿐더러 연주자들이 미숙하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재즈’에 대한 나의 관심을 계속 추구해 나갔다. 나에게는 또한 ‘재즈’ 연주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며 얼마 안가서 우리는 학교 ‘파아티’를 위해 연주하곤 하였다. 우리는 나의 부모 집에서 오후 시간 전체를 ‘재즈’를 연주하면서 보내곤 하였다.

나의 전체 학창 시절을 통하여, 음악은 유쾌한 기분 전환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하나의 직업으로써 신중히 고려해 본 일은 없었다. 사실상, 1958년에 나는 수학을 전공하기 위해 ‘오클라호마’ 주립 중앙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재빨리 학교 안의 음악인들과 접촉하였다. 그들은 학교 ‘댄스 파아티’를 위해 연주하였으며, 또한 ‘오클라호마’ 시내에서 직업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들과 합류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윽고 나는 주말에 정기적으로 연주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지방 ‘나이트 클럽’에서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감리교인으로서의 나의 배경은 나에게 보호책이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나의 도덕적 신념은 학교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와해되고 말았으며, 나는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야간 유흥 업소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동배의 압력과 마약 사용

나는 ‘알코올’에 크게 취미를 붙이기 시작하였으며 대학 시절에 술취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얼마 동안은 마약 사용의 유혹을 저항하였으나 오래지 않아서 나는 ‘재즈’ 동배들로부터 압력을 받아 ‘마리화나’를 피워 보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매우 즐기게 되었으며 그것은 습관이 되어 약 10년간이나 계속되었었다. 나는 기분을 더 북돋기 위해 가끔 ‘암페타민’을 복용하였으나 실제로 “더 강한” 혹은 기타 어떠한 종류의 “습관성” 마약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매일 정기적으로 ‘마리화나’를 사용하였다. ‘오클라호마’ 시 ‘나이트 클럽’에서 내가 알게 된 음악인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마리화나’ 사용자들이었다. 심지어, 우리들 가운데 많은 수의 사람들은 직접 그것을 재배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1963년에 대학을 졸업하자, 전원이 과도한 ‘마리화나’ 사용자들인 ‘달라스’에서 나온 한 ‘그루우프’와 행동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 후에 나는 ‘터론토’에서 온 어느 ‘나이트 클럽’ 악단과 협연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 서부 일대의 도시들에서 일하였다. 나는 ‘오클라호마’ 시에서와 같은 마약 사용 상태는 어느 지방에서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트 클럽’ 음악인들 사이에서의 마약 사용은 거의 보편적이었다.

1968년이 되자, 나는 ‘오클라호마’ 시로 돌아왔다. 그 동안 일부 나의 친구들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있었으며 나에게 나오라고 권고하였다. 그 도시는 음악인에게 일할 수 있는 훨씬 더 광범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나는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나의 원래 의도는 단지 계약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인으로서 일하는 것이었지만, 나의 친구들은 ‘록 그루우프’를 창설하여 그것을 대중 음악계에서 대성시키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1960년대 말의 ‘록’ 음악은 보다 섬세해져서 이전의 ‘록 큰로울’보다 나의 관심을 훨씬 더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음반 제작실에서 일하여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또한 매력적인 것이었다.

음악과 영매술

‘히피’ 시대가 그 막을 내릴 무렵, 누구나가 동양 종교 그리고 점성술 및 기타 신비술에 심취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마약은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음악은 바로 이러한 철학과 생활 방식을 보여 주는 표현이었다.

우리 ‘그루우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점성술에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 때 우리는 어느 영매술사에게 가서 우리 개개인 및 ‘그루우프’의 행운을 점쳐 보기도 했다. 우리는 ‘이칭’(동양의 한 점술 서적)을 들여다 보곤 하였다. 친구들 가운데는 ‘힌두’교 교도사와 마법사도 끼어 있었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영매술에 깊이 빠진 것으로 나는 생각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익살로써, 우리는 우리 ‘그루우프’를 “메피스토 펠레스” (‘파우스트’ 전설에 나오는 악마)라고 지칭하였다. 우리의 ‘앨범’ 표지에는 우리 자신들의 괴상하게 일그러진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그 당시를 회고해 보면, 마약과 영매술이 음악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 아주 쉽사리 알 수 있다. 10년이 지난 오늘날, 마귀 숭배, ‘사단’ 숭배 및 부도덕이 대중 음악에 만연하고 있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나는 내 자신이 취했었던 인생 행로를 돌아보고 1969년 봄에 특정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던들 내가 어떻게 되고 말았을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새로운 인생관

많은 점성가들이 1969년 4월에 미국 서부 해안에 대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사정상, 우리 ‘그루우프’의 대부분은 그 당시 시외에 있었다. 우리는 그 때가 ‘오클라호마’를 다시 방문하기에 좋은 시기라는 판단을 내렸다. 지진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으나, 우리는 주위의 상태를 보고 모종의 대격변이 임박했다고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연기로 화하기 전에 많은 돈을 벌어 산으로 피신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내가 ‘오클라호마’로부터 돌아온 직후에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이 나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성서로부터 우리는 사실상 마지막 날에 살고 있으며, 현 제도의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시작하였다. (마태 24:3-42) 그들은 세상 질서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내가 그토록 선뜻 받아들인 점에 놀라움을 나타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나님께서 온 땅을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변모시키실 것이라는 말은 매우 좋은 것으로 들렸다. 그러나 일찌기 그리스도교국과 연합했었던 나는 성서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였으며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나 의혹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호기심을 느꼈으며 그 ‘증인’들은 분명히 성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기적인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다.

처음에는 이기적인 생각에 앞뒤를 재었다. 나는 성서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표준을 요구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마태 16:24; 요한 4:23; 야고보 4:4) 그런데 이제껏 음악은 나의 인생의 전부가 되다시피 해 왔던 것이다.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을 성서에서 금한다는 말은 없지만, 나의 환경 때문에 그러한 직업을 계속 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헌신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아주 여러 해 동안 음악에 헌신해 왔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 6:24.

중요한 변화

얼마 후, 나는 성서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또한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욕망에 있어서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그분이 약속하신 새 질서에서의 생명을 원하였다. (디도 1:2) 그 때까지 나의 전체 생활은 음악을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었으나 이제 그 음악은 이차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1971년 2월에 나는 침례를 받았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캘리포오니아’ 주 ‘헐리우드’에서 ‘파이오니아’ 봉사자로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메피스토 펠레스”의 이전 성원이었던 다른 두 명과 우리의 가까운 동료들 중 두 사람 역시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음악인으로서 계속 일하고 있었지만 내가 받아들인 일이, 하나님께서 단죄하시는 것임을 내가 알게 된 일에 빠져들지 않도록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또한 봉사의 직무를 이행하면서 자활하기 위해서 청소부와 자가용 차 운전수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1973년에 나는 ‘뉴우요오크’ 주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세계 본부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되었다. 그 후 나는 줄곧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다. 내가 음악에 관여한지는 여러 해가 지났으나 나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그리스도인 집회에서나 동료 ‘증인’들과의 사교적인 모임에서 연주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긴다. 나는 생계 유지를 위해 음악에 계속 종사해 온 다른 ‘증인’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음악인으로서나 그리스도인 봉사자로서나 공히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도 음악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둘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의 첫째가는 사랑은 여호와와 그분의 봉사에 대한 그들의 헌신에 있었다. 또한 그들은 비그리스도인 동료 음악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경계하기 위해 몹시 주의해 왔다.—고린도 전 15:33.

이제 나는 타락하고 부도덕한 제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음악을 연주하고 즐기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의로운 원칙들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이고 모든 음악은 건설적인 것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될 것이다.—이사야 11:9; 54:13; 시 135:3.

[20면 삽화]

15년전

[21면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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