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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운 생애에 대해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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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운 생애에 대해 감사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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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4
파84 1/1 19-24면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운 생애에 대해 감사함

‘존 부우드’의 체험담

1921년 10월에,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란 강연이 ‘뉴우요오크’ 주(미국) ‘월킬’ 공회당에서 개최된다는 광고가 있었다. 호기심은 있었지만, 우리 가족 중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단에 설명된 서적을 보내달라고 편지하였다. ‘C. T. 러셀’이 쓴 「지옥에 관하여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란 소책자와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란 책이 도착했을 때, 그 책자들이 너무나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해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인생의 목적을 찾고 있었다. 우리의 인생 목표는 내가 주일 학교 선생으로 봉사하던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종교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그 교회 교역자는 내가 대학에 가서 교역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교역자들이 이기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실로 인간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해외에서 봉사하는 선교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성경 연구생’(당시 ‘여호와의 증인’의 명칭)이 모임을 갖는 곳을 알고서, 그 이듬해 여름에 나는 ‘뉴우요오크’의 ‘뉴우버어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24‘킬로미터’를 여행하였다. 그 무렵 우리가 다니던 교회의 교역자가, 죽은 사람들은 무의식이라는 성서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을 때, 어머니와 나는 둘 다 탈퇴하였다. (전도 9:5, 10) 나의 아버지는 우리의 성서 서적을 즐거이 읽기는 하였지만, 자기가 어릴 때부터 다니던 교회에 계속 다녔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나의 두 남동생과 세 누이 동생은 ‘증인’이 되었다.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의 봉사

1923년 여름에, 나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워치 타워 협회’의 새 ‘라디오’ 방송국 WBBR을 건설하는 일을 도우라는 초대를 수락하였다. 주말에 돕기 위해 ‘브루클린’ 본부로부터 온 사람들 가운데는 18세의 ‘나단 H. 노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1942년에 ‘워치 타워 협회’의 제3대 회장이 되었다. 1923년 10월 19일에 내가 침례를 받은 것은, 바로 내가 거기서 일하는 동안 ‘뉴우요오크’ 시에서 개최된 한 대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려는 나의 헌신을 상징한 최초의 기회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나는 ‘월킬’ 근처에 있는 우리 가족의 조그만 낙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봄이 되어 나는 조경과 도로 건설을 위해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갔다. 그곳에서의 나의 임시 작업 임명이 끝나갈 무렵, 많은 사람들은 1924년 7월에 열리는 ‘오하이오’ 주 ‘콜룸부스’의 큰 대회에 참석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본부 가족과 함께 특별 열차를 타고 그곳으로 여행하는 특권을 가졌다. 이 대회에서 모든 회중 성원들은 호별 전파를 위해 조직되었다.

‘월킬’ 주변에서 전파함

‘콜룸부스’에서 돌아온 후, 나는 현재 ‘워치 타워 농장’이 위치한 우리 가족의 농장 주변에서 증거하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자전거를 타고 그 구역을 돌았지만, 그 다음에는 ‘T 모델’ ‘포오드’ 자동차를 구입하여, 더 먼 구역에서 봉사하는 데 사용하였다. 1926년에 「구출」 책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월덴’ 근처의 ‘스코츠 코오너’의 한 가정에서 한 성서 연구 집단을 조직하였다. 그곳에 참석하던 얼마의 사람들은 발전하여, 나중에 ‘증인’이 되었다.

나의 가족과 나는 ‘뉴우버어그’에서 열리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다. 주간 기도, 찬양 및 증거 집회들이 결국 ‘봉사회’로 바뀌어 우리의 호별 방문 전도 봉사를 강조하자, 몇몇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사도적 방법으로 왕국 소식을 전파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좋아했다. (사도 20:20) 1928년 4월에, 나는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전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남부에서의 전파

당시에는 ‘파이오니아’들이 여름에는 북부 지방의 구역에서 봉사하고, 겨울이 되면 남부 지방으로 가서 증거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1928년부터 1935년까지 겨울에 ‘파이오니아’ 짝인 ‘루돌프 암볼’과 나는 ‘버어지니아’ 주, ‘웨스트 버어지니아’ 주, ‘노오드 캐롤라이나’ 주, ‘조오지아’ 주, ‘테네시’ 주, 및 ‘켄터키’ 주에서 봉사했다.

당시 남부에서 증거하는 일은 추억할 만한 경험이었다. 흔히 포장 도로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돌맹이들 때문에 꼼짝못하거나 진흙에 빠지는 일 없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갈 수 있을 것인지 알아맞추는 데 전문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이 걸어야 했다.

시골 지역의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고, 현대의 편의 시설도 없이 지냈다. 사실상, ‘켄터키’ 주의 여러 지역에서 통나무 오두막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아직도 물레방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다소 볼 수 있었다. 150여년 전인 ‘다니엘 분’ 시대로부터 생활이 달라진 것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숙박을 위해 우리는 월세 10‘달러’로 방을 빌리곤 하였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지방 사람들의 가정에서 머물기도 하였는데, 식사를 포함하여 하룻밤 숙비로 약 1‘달러’를 지불하였다. 종종, 우리 빨래를 해주고 출판물을 받아보는 주부도 있었다. 사람들이 현금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서적 중 많은 양을 식품과 교환하였다.

가정 주부들은 흔히 “잡을 수만 있다면, 닭을 잡아 가”라고 말하곤 하였다. 우리는 자동차 뒷 부분에다 닭장을 싣고서 준비를 하고 다녔다. 갈고리를 단 철사줄을 사용하여, 다리에 걸어 닭을 잡는 데 우리는 전문가가 되었다. 교환물로 받은 또 다른 것은 계란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온갖 종류의 통조림과도 교환하였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품목은 팔아서 ‘가솔린’을 사는 데 사용했다. 한때 우리는 서적 값으로 받은 물품을 음식점에 파는 단골 판로를 갖기도 했다.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것이, 우리가 반대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한 일이 ‘조오지아’의 ‘클리블랜드’에서 있었는데, 거기서 주일학교 교사였던 한 변호사는 우리가 무허가 판매 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우리를 체포당하게 하였다. 재판 때에 우리가 묵고 있던 집 주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변호해 주기 위해 왔다. 우리가 우리 일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었을 때, 그 사건은 기각되었고 우리에게 사면이 베풀어졌다.

다른 일부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버어지니아’ 주 ‘페룸’ 근처의 구릉지에서는 밀주가 보편적이었다. 무장한 사람들이 증류소들을 지키고 있었으며, 낯선 사람이 그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몰랐으나 그 지역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그래서 우리에 대한 좋은 소문이 우리보다 먼저 전해졌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방해를 받거나 다치지 않고 그 지역에서 증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게 된 한 여인은 우리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들은 결과로 서적을 구하였고, 또 자기가 배운 것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인식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여인은 후에 침례를 받았고, 여러 해 동안 충실한 ‘증인’으로 생활하였다.

우리가 ‘켄터키’ 주의 ‘하알란’ 군에 있을 때, 그곳은 유혈의 ‘하알란’으로 알려졌고 그것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총을 소유하고 사용하였다. 한번은 나의 ‘파이오니아’ 짝인 ‘레이몬드 홀’이, 분명히 그를 겁내 주려고 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어깨에 총을 맞았다. 그를 치료하기 위해 데리고 간 병원에서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부상은 분명히 예사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구역에서 증거한 후에, 우리는 우리가 머문 그 해에 여덟 명의 보안과 대리와 약 백명의 다른 사람들이 살해됐다는 보고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에 호응하는 두 가족을 발견하여 기뻤다. 나중에 그 가족의 아들들 중 한 사람은 ‘브루클린 벧엘’에 들어왔다.

북부 지방에서 전파함

여름철에는 ‘월킬’ 부근의 우리 농장이, 인접 지역의 4개 군에서 증거하는 나의 본거지가 되었다. 나는 공급품을 갖고서 일주일간 ‘캠프’ 생활을 하면서 그 구역에서 증거하고, 주말에는 ‘뉴우버어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나는 먼 구역에서의 전파 사업에 하루 열 시간씩 여러 날을 바칠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관심자들을 재방문하는 것이 보람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훗날 어느 대회에서 한 여인이 내게 와서, 내가 그에게 전해 준 책들 덕분에 자기가 생명의 길을 걷기 시작했노라고 말했을 때,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당시 ‘증인’들은, 특히 ‘뉴우저어지’ 주에서 계속 체포되었다. 여름철에 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곳 근처에 있었고 문제 지역에서 증거하기 위한 운동이 조직될 때 나는 그 부름에 응하곤 하였다. 때때로 우리는 체포되어 저녁 때에 풀려나곤 하였다. 하지만 구금되어 재판을 받은 때도 더러 있었다. 한번은 10일간 구류를 살고 있는 동안 다른 수감자들 중 한 사람에게 증거하였는데, 그는 좋은 소식을 받아들였고 나중에 ‘증인’이 되어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이 무렵 우리는 호별 전도 봉사에서 짧은 성서 연설이 담긴 축음기 ‘레코드’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확성차를 만들기 위해 자동차에 휴대용 축음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나는 ‘브루클린’ 본부로 가서 175‘달러’의 비용으로 나의 자동차에 확성 장치를 설치하였다. 여름철의 저녁에는 계곡의 높은 곳에 설치하여 일 ‘마일’ 이상이나 멀리 ‘레코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그후 여러 해 동안 나는 자동차에 대형 확성기를 장치하여 수천 ‘마일’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이 이르게 하였다.

여름에 나의 생활의 한 가지 특징은 큰 대회에 참석하는 일이 있다. 1931년 ‘오하이오’ 주 ‘콜룸부스’에서 있은 대회는 특히 추억할 만하였는데, 그 대회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성서적 명칭을 채택하였다.

새로운 임명

1935년 늦가을에 우리는 남부의 ‘파이오니아’ 임지를 떠나 ‘브루클린 벧엘’에서의 일을 돕기 위해 돌아왔다. 내가 공장에서 단지 며칠간 일한 후에, ‘노워’ 형제는 나를 사무실로 불러 부회(당시에는 회중을 그렇게 불렀다) 등을 방문하는 지역 봉사 지휘자로 일하겠는지 질문하였다. “부회에게 연설을 해본 일도 없고, 부회 조직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고 나는 대답했다.

‘노워’ 형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필요한 것은 달변가가 아니라, 봉사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가운데 인도하고 집회에서 봉사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두 달 동안, 나는 ‘노워’ 형제와 다른 형제들을 동반하여 주말에 부회들을 방문하면서 나의 새로운 임명을 위해 약간의 훈련을 받았다. 나의 큰 임무는 당시 비교적 새로운 활동이었던 재방문과 성서 연구 봉사를 위해 부회들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한 주말에 나는 집을 방문(6년 동안 나의 마지막 방문)하여, 불필요한 물품들을 처분하고 여행 준비를 하였다. 그리하여 1936년 3월에, 나는 그러한 임명에 아주 부적합하다고 느끼면서 출발을 했다.

여행을 하면서

나의 첫 방문지는 ‘펜실베이니아’ 주 ‘이이스톤’이었다. 나는 보통 아침에 야외 봉사를 나갈 수 있는 시간에 한 지역에 도착하여 봉사를 하고, 이른 저녁에 부회의 종들과 모임을 갖고, 그 다음에 전체 부회 성원들과 집회를 가졌다. 대개 나는 한 부회에서 이틀, 보다 작은 집단에서는 단지 하루를 보냈고, 때때로 한 주일에 그러한 집단을 여섯개 방문하였다. 나는 쉴새없이 계속 활동하였다.

1936년에서 1937년까지, 나는 ‘펜실베이니아’, ‘웨스트 버어지니아’, ‘오하이오’, ‘인디에나’, ‘일리노이’,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콜로라도’, ‘뉴우 멕시코’와 ‘텍사스’ 주 같은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다. 서부는 모든 것—생활 방식, 평야, 산지 및 먼 거리 등—이 나에게 생소하고 흥미로왔다. 나는 ‘뉴우 멕시코’ 주에 있는 모든 부회들을 2주일 만에 다 방문하였다. 1937년 여름 무렵에 나는 ‘텍사스’ 주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스페인’어를 말하는 종들이 없어, 나는 ‘스페인’인 부회들을 방문하여 통역을 통하여 그들에게 연설하였다.

‘텍사스’ 주의 한 조그만 영어 부회에서는 18세 된 소녀가 그 집단을 위한 부회의 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날 사망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실제로 그는 그날에 사망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머물러서 장례식을 주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리는 야외 봉사를 나갔고, 저녁 집회를 가졌으며, 그 이튿날 아침에 나는 장례식을 주재하였다. 그 행사는 슬픈 것이었지만, 그들은 내가 와서 연설을 하게 된 것을 대단히 즐거워했다.

1937년 9월에 ‘오하이오’ 주 ‘콜룸부스’ 대회에 참석한 후, 나는 북부 ‘노오드 다코타’ 주, ‘몬태나’ 주, 그리고 ‘아이다’호 주에 있는 부회들을 방문하는 데 겨울을 보냈다. 1938년 2월에 나는 산맥을 횡단하였는데, 기후가 훨씬 더 온화하고 태평양 해안을 따라 초록의 잔디가 깔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당시 ‘시애틀’에는 집회 장소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회중이 21개나 있다.

지구(地區) 대회

1938년 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만(灣) 지역에서 부회들의 특별 모임이 마련되었고, 그 대회에 약 600명의 ‘증인’들이 참석하였다. 그것이 지구 대회(지금은 순회 대회라고 불린다)의 선구자가 되었다. 1938년 10월 1일에는 정기적인 지구(순회) 감독자의 방문과 지구 대회를 위한 새로운 마련이 시작되었다.

지역의 종으로서 나는 매주 지구 대회를 개최할 책임이 있었다. 영적 교훈을 위한 이러한 대회에서는 참석한 사람들이 호별 전파 사업에 참여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지구 대회가 있기 전에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나는 ‘오리건’의 눈 덮인 산속의 개천의 얼음 물에서 한 사람에게 침례를 준 일과, 다른 한 번은 한 사람을 그의 헛간 마당에 있는 물통에서 침례를 준 일을 기억하고 있다.

이러한 지구 대회에서 우리는 광고 행진을 갖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한 면에는 “종교는 덫이며 가짜다”라고 쓰고, 다른 한 면에는 “하나님과 왕 그리스도를 섬기라”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다녔다. 이 일은 많은 주의를 끌었고 또 때때로 반대를 일으켰다. 그런데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활동에 대한 반대도 커졌다.

‘미주리’ 주 ‘한니발’과 ‘네브래스카’ 주 ‘콜룸부스’ 그리고 ‘미네소타’ 주 ‘세인트 클라우드’에서 폭동이 일어나 우리의 대회가 해산되었다. ‘위스콘신’ 주 ‘마리넷’에서는 그곳 시장이 우리에게 대회장에서 나가라고 명령했지만, 그곳 경찰은 우리가 거기에 있을 합법적 권리가 있음을 알고서 우리를 보호해 주었다. 반면에 ‘웨스트 버어지니아’ 주 ‘후턴즈 빌’의 경찰은 우리가 ‘엘킨즈’에서 대회를 갖는 동안 우리를 반대하는 폭도들에 가담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고, 그들은 500‘달러’의 보석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 사건은 여러 차례 연기되다가 결국에는 기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곳 경찰은 우리의 일을 다시는 방해하지 못했다.

나는 걸핏하면, 그러한 사건과 관련하여 법정에 출두해야 했다. 때때로 피고인을 위한 변호인으로 나가야 했고, ‘일리노이’ 주 ‘퀸시’에서와 같은 다른 여러 경우에는 내 자신이 피고인이 되었는데, 그 사건에서 우리는 승소하였다. 당시 협회의 변호사였던 ‘하이덴 코빙튼’과 현재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프레드 프랜즈’는 ‘켄터키’ 주 ‘런던’에서의 사건과 같은 얼마의 사건에서 우리를 도와 주었으며, 그때 또한 우리가 승소했다.

약 60명의 ‘증인’들이 치안 방해죄로 고발된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법정 사건에서는, ‘프랜즈’ 형제와 내가 5일간의 재판 중 ‘증인’석에 섰다. 우리 형제들이 유죄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나중에 그들은 고등 법원에서 무죄가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 주간에, 나는 ‘일리노이’ 주 ‘졸리엣’에서 있은 또 다른 사건의 피고인으로 그리고 ‘인디애나’ 주 ‘매디슨’에서 발생한 또 다른 사건에서 한 형제를 위한 변호인으로 나갔고, 그에 더하여 매 주말에는 지구 대회를 개최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한 흥미 진진한 일에 관해 세세하게 기술하면, 한권의 책이 될 것이다.

참으로 절정이 된 일은 1941년 8월에 있은 5일간의 ‘세인트 루이스’ 대회였다. 나는 대회가 있기 2, 3주 전에 요청을 받아 ‘트레일러 캠프’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다. 한 농부의 목초를 베낸 후, 그 초장에다 5,000명을 수용할 하나의 도시를 세웠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그 ‘캠프’에는 10,000명이 몰려왔으며 자동차며 ‘트럭’이며 ‘캠프’를 할 사람들이 들어가기 위해 도로 위에 줄을 서고 있었다. 결국 그 ‘캠프’에는 15,000명 이상이나 모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머물러서 유선으로 ‘프로그램’을 들었다. 15,000명의 어린이들이 주 청중석에서 일어나 「어린이」 책을 무료로 받을 때, 나는 바깥 ‘캠프’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그 책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왕국 및 ‘워치 타워’ 농장

‘세인트 루이스’ 대회가 있은 직후, 우리의 지구 대회를 개최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 대회들을 중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브루클린 벧엘’에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내가 단지 며칠간 있은 후, ‘러더포오드’ 형제는 나에게 ‘뉴우요오크’ 주 ‘이다카’ 부근의 ‘왕국 농장’에서 봉사하겠는지 물었다. 이 새로운 임명을 위해 떠나기 전에, 나는 ‘월킬’ 근처에 있는 고향 집을 방문하였다. 어머니는 사망하였고, 나의 남동생들과 누이 동생들은 모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왕국 농장’으로 차를 몰았으며, 그후 28년 동안 나의 거처가 된 방에 임명되었다.

13년 이상을 전 시간 전파 활동에 바친 후, 농업에 정착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정착하였고, 또 ‘왕국 농장’ 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특권을 즐겼다. 하지만, 동시에 저녁과 주말에는 정기적으로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고, 그들 중 다수는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주요 활동은 농장에서의 작업 임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인근에 있는 ‘코오넬’ 대학교와 그 도서관을 이용하여 동물과 식물 영양을 연구하는 데 열중하였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는 농산물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농장에서 소용되는 식품은 물론, 불어나는 ‘브루클린 벧엘’ 가족을 위한 식품의 대부분을 생산하게 되었다.

1943년 2월 1일에는 농장에서 인원이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이 때 새로운 ‘길르앗 학교’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부터 6개월마다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온 약 100명의 학생들로 구성되는 새 학급을 맞이하였다. 1961년에 ‘길르앗 학교’가 ‘브루클린’으로 이사할 때까지, 이 농장에서 선교 사업을 위해 훈련받은 35학급의 약 3,700명의 학생들과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많은 반대를 인내하였다. 한번의 폭동 사건과 한번의 법정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서 우리가 이겼다. 이 지역의 조그만 하나의 집단이 결국은 4개의 회중으로 불어났다.

‘길르앗 학교’의 운영이 ‘왕국 농장’에서 끝날 무렵, 회중의 감독자들을 위한 새로운 ‘천국 전도 강습’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후 7여년 간에 걸쳐 약 7,000명의 장로들이 한달간의 과정에 참석하였고, 이 과정은 나중에 2주일간으로 축소되었다.

1963년 1월에 ‘협회’는 ‘뉴우요오크’ 주 ‘월킬’에 있는, 내가 자라난 곳 인근의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땅은 ‘워치 타워 농장’이라고 명명되었다. 수년에 걸쳐 시설은 확장, 개발되었고 심지어 인쇄 공장까지 부가되었다. 1970년 1월 1일자로 나의 임지는 이곳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약 45년 전에 증거를 시작했던 바로 그 지역에 다시 온 것이다! 그 지방에서 몇몇 연로한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워치 타워 농장’에 도착했을 때, 가족 성원은 55명이었는데, 지금은 750명이 넘는 성원들이 거기서 봉사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셋은 나의 조카들이다. 또한 나의 조카딸 하나는 남편을 따라 순회 봉사를 하며 여행하고 있다. 나의 가족 중 30명 이상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즐거움이 된다. 1974년 11월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성원으로 임명되는 특권을 받았으며, 그 임명과 더불어 나는 다시 ‘브루클린’ 본부로 이사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을 섬기는 인생의 웅대한 목적을 볼 수 있도록 나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참으로 기쁘다. 지난 60년 동안, 그 목적을 추구한 일은 참으로 보람되고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우리의 천적 아버지와 친밀해졌고 또 그분의 보호와 축복이 그분의 백성에게 매우 실제적인 방법으로 베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면 삽화]

전도한다는 이유로 철장에 갇히다

[21면 삽화]

1930년대에 나는 증거 활동을 위해 확성차를 사용했다

[22면 삽화]

나는 ‘길르앗 학교’ 설립 장소인 ‘왕국 농장’에서 28년간 봉사하였다

내가 만난 ‘길르앗 학교’ 졸업생 3,700명 중의 두 사람

[23면 삽화]

나는 또한 ‘워치 타워 농장’에서 5년간 봉사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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