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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을 위한 윌리엄 틴들역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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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을 위한 윌리엄 틴들역 성서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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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7
파87 7/15 21-23면

대중을 위한 윌리엄 틴들역 성서

1530년a 5월 어느 날, 런던의 성 폴 교회의 뜰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서점의 책 진열대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최근 소식과 화제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여느 때와는 달리, 사람들은 눈에 띄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평범한 모닥불이 아니었다. 그 불 속으로, 몇몇 사람들이 바구니에 가득히 담겨 있는 책을 쏟아 버리고 있었다. 책을 소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타고 있는 책들 또한 평범한 책들이 아니었다. 다름아닌 성서, 즉 사상 최초로 인쇄된 영어판 윌리엄 틴들의 “신약”과 모세 오경이었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성서가 런던 주교, 커스버트 턴스털의 명령에 의해 소각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 주교는 자기가 찾을 수 있는 한 모든 성서를 사들이는 데 막대한 돈을 소비했었다. 이러한 성서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었는가? 틴들이 그 성서를 발행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당국자들이 이 책들을 불태우면서까지 없애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서—폐쇄된 책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성서를 사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15세기와 16세기 초만 해도 영국에서 성서는 교회의 재산으로서 공개 예배 시간에 사제들만이 읽고 오로지 그들만 설명할 수 있는 책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항상 라틴어 성서를 읽어 주었으므로, 평민들은 내용을 이해할 수도 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교직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도덕적 교훈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성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평민들만이 아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왕 에드워드 6세 통치 기간(1547-53년)에, 글로세스터의 한 주교는 311명의 교직자 중 168명은 십계명을 암송할 수 없었고, 31명은 성서에서 십계명을 찾지도 못함을 알게 되었다. 40명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못하였고 약 40명은 그 기도문의 창시자를 모르고 있었다. 사실상, 존 위클리프가 1384년에 영어 성서를 발행했었으며, 복음서와 시편 등 성경의 여러 부분이 영어로 의역되어 나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는 사실상 폐쇄된 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틴들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평신도 앞에 그들의 모국어로 명확하게 내놓지 않고서는 그들을 어떤 진리로 세우는 일이 참으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성서를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틴들은 당국자들의 분노를 샀다. 왜 그랬는가? 일찌기 1408년에 교직자들이 영국 옥스퍼드에서 가진 한 회의에서, 그들은 평민이 자기 자신의 언어로 된 성서를 개인용으로 갖지 못하도록 금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정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주교구의 주교나 지방분구 회의가 필요하다면 번역을 승인을 할 때까지, 허가받지 않고 성서의 한 부분이라도 영어나 여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자는 대파문에 처할 것임을 규정하고 명하는 바이다.”

그로부터 1세기가 더 지난 후, 틴들이 사전에 턴스털의 승인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턴스털 주교는 이 법령을 틴들의 성서를 소각하는 일에 적용하였다.b 턴스털에게는, 틴들의 번역판에 약 2,000개의 오류가 있었고 그리하여 “유해하고, 중상적이고, 순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성서를 소각시키는 주교의 행동을 정당화할 만한 변명이 되었는가? 틴들은 과연 히브리어, 희랍어, 영어에 있어서 필요한 학자적 자질이 부족한 서투른 번역자였는가? 틴들은 얼마나 훌륭한 번역자였는가?

틴들—서투른 번역자였는가?

당시에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같지는 않았지만, 이 언어에 대한 틴들의 파악력은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의 그것과 잘 비교되었다. 틴들의 번역판이 탁월한 점은, 그가 단지 라틴어 「벌게이트역」과 루터의 독일어 번역판을 참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516년에 에라스무스에 의해 최초로 발행된 희랍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였다. 틴들은 또한 자신의 목적, 즉 성경을 “농사 짓는 소년”에 이르는 평민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번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문체와 용어는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또한 생동감 넘치는 운율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그 일을 하면서 경험한 기쁨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사실상 “틴들은 판단력이 보기 드물게 뛰어난 번역자였다. 당시 성서 언어에 대한 학문이 미개척된 상태에서, 그는 엄청난 역경 속에서 번역에 착수하여 모든 영어 번역자가 따라야 할 본을 세운 번역판을 내놨다”고 말할 수 있다.—제럴드 해먼드 저 「영어 성서의 제작」, (The Making of the English Bible) 42, 43면.

정확한 번역

정확성에 있어서도 틴들은 높은 표준을 세웠다. 예로서, 히브리어를 번역할 때에는 쉽고 매끈한 문체를 사용하면서 가능한 한 직역을 하려고 애썼다. 그는 한 문장 내에서 절과 절을 연결하는 데 접속사 “그리고 (and)”를 자주 반복 사용함으로써 히브리어의 설명을 충분히 되살리는 일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참조 「제임스 왕역」의 창세기 33장, 여기에는 틴들이 사용한 표현 거의 전부가 들어 있다.) 당시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의역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틴들은 문맥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원문에 추가나 생략을 피하였다.

틴들의 단어 선택 역시 세심하고 정확했다. 예로써, 그는 적합한 곳에서는 “자선”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란 단어를, “교회”라는 말 대신 “회중”이란 단어를, “사제”란 말 대신 “장로”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번역은 전통적으로 숭상되어 오던 용어들을 바꾸어 놨기 때문에 토마스 모어 경과 같은 비평가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원문에서 어떤 단어의 반복 사용이 필요한 귀절에서는, 틴들은 그것을 그대로 살려 번역하기 위해 주의하였다. 예로써, 창세기 3:15에서 그의 번역판은 여자와 뱀의 씨에 의한 “짓밟음”이란 단어를 두번 사용한다.c

틴들은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여호와를 영어 성서에 도입한 책임도 있다. 작가 J. F. 모즐리가 관찰한 바와 같이, 틴들은 이 이름을 “그의 구약” 번역에서 “20번 이상” 사용하였다.

틴들의 노력의 결과와 그 지속성을 돌이켜 보면, 그의 활동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를 이와 같이 요약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틴들의 정직성, 진실성 그리고 철저한 충절, 그의 기술법의 단순 지향성, 매력적인 간결성, 그의 소박한 음악은 그후 모든 번역판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권위를 그의 기술법에 부여하였다. ·⁠·⁠· 「흠정역 신약」(제임스 왕역)의 10분지 9는 아직도 틴들역 그대로이며, 가장 잘된 번역 역시 그의 것이다.”—「고대 및 영어판 성서」(The Bible in Its Ancient and English Versions), 160면.

틴들의 활동은 헛되지 않았다

당국자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틴들은 유럽 대륙으로 피난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체포되었다. 이단자란 유죄 판결을 받고, 1536년 10월에 교수 화형에 처해졌다. 틴들이 한 최후의 기도는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였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상황이 변할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틴들이 죽은 지 일년이 채 못되어 1537년 8월에, 왕 헨리 8세는 일반적으로 「마태의 성서」로 알려진 성서를 공인하였다. 그는 자기 왕국 내에서 그 성서가 자유로이 판매되고 읽을 수 있게 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마태의 성서」란 어떤 것인가? F. F. 브루스 교수는 이처럼 설명한다. “조사해 보면, 그것은 대체적으로 틴들의 모세 오경, 역대 하까지의 구약 역사서에 대한 틴들의 번역판 ·⁠·⁠· 구약 성서의 나머지 책들 및 성서 외전 (聖書外典)에 대한 코버데일 번역판, 1535년의 틴들의 신약에서 따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필자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왕의 인가하에 발행된 최초의 영어 성서는, 틴들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아직 바람직하지 않을지라도, 틴들의 성서라고 (틴들의 번역이 미친 정도까지는) 하는 것이 ·⁠·⁠· 공평한 처사였다.”

몇년이 더 지난 후에, 사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대성서」(Great Bible)—「마태의 성서」의 개정판—라고 알려진 번역판이 1541년에 출간되어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사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 표지에는 “국왕 폐하의 명령에 따라, 정의의 신부들인, 두레스메의 커스버트 주교와 로체스터의 니콜라스 주교가 감독하고 숙독하였음”이란 말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 이 더햄 주교란 다름아닌 한때 런던 주교였던 커스버트 턴스털이었다. 틴들의 번역을 그토록 심하게 반대하였던 그가 이제 와서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틴들의 번역판인 「대성서」의 출간을 승인하고 있었다.

마침내 인정

성서에 대한 논쟁과 성서 번역자를 둘러 싼 증오의 기록이 오늘날에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반대자들이 그렇게 노력하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평민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8.

틴들과 다른 번역자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 사망의 그늘을 의식하며 일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성서를 모국어로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 앞에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열어 놓았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부지런히 연구하도록 하자.

[각주]

a 1526년에도 그리고 그외 다른 때에도 여기에 묘사된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b 틴들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더 상세한 점을 알기 위하여 「파수대」 1982년 1월 1일호 (영문) 10-14면을 참조할 수 있다.

c 많은 현대 번역자들은 상호적 의미로 여기에 반복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에 주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상하게 할 것이며 ·⁠·⁠· 상하게 할 것이다” (신세계역; 개역 표준역)라고 번역하는 대신, 그들은 “부술 것이며 ·⁠·⁠· 칠 것이다” (예루살렘 성서; 신 국제역), “부술 것이며 ·⁠·⁠· 물 것이다” (오늘날의 영어 역본), “짓밟을 것이며 ·⁠·⁠· 칠 것이다” (람사), 혹은 “부술 것이며 ·⁠·⁠· 매복할 것이다” (녹스)라고 번역하였다.

[21면 사진 자료 제공]

From an old engraving in the Bibliothèque Nation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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