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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살 때 정한 목표를 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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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섯 살 때 정한 목표를 추구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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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2
파92 3/1 26-30면

여섯 살 때 정한 목표를 추구함

샌드라 카원의 체험담

많은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음악이나 발레와 같은 천직을 정해 주고 아주 어릴 때부터 자녀를 훈련시키기 시작한다. 나의 어머니도 바로 그러한 일을 나에게 베풀었다. 생후 두 주가 된 때부터 모든 그리스도인 집회와 야외 봉사에 나를 동반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네 살 때 혼자서 전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처음으로 전도한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는 차를 타고 큰 농장으로 갔는데,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이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려서 문간 쪽으로 걸어갔다. 한 친절한 아주머니가 내 말을 귀담아듣고는 열 부의 소책자를 받았다. 아주머니는 그 값으로 커다란 비누 한 개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가슴이 뭉클하였다!

같은 해인 1943년에 선교 활동을 위한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자들을 훈련시킬 목적으로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가 개설되었다. 어머니는 선교 봉사를 생의 목표로 삼도록 나를 격려하였다. 그 무렵 유럽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는데, 어머니는 부모에게서 강제로 격리된 유럽의 어린 증인 자녀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어떠한 시련도 견딜 만큼 강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나는 1946년 여름에 오하이오 주(미국),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만 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약속을 이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여름에 처음으로 파이오니아로서 봉사하였다. 어느 날 오전에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의 광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40부의 잡지를 전한 일이 생각난다. 그렇게 전한 것은 다분히, 자그마한데다 말을 곧잘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종종 벳사림 근처에서 전파하였다. 그곳은 워치 타워 협회장인 러더퍼드 형제가 1942년에 사망하기 전에 요양차 겨울을 여러 번 보내던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의 전 시간 종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하였다. 그러한 즐거운 방문을 통하여 바로 이것이 참으로 내가 원하는 생활이라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때 길르앗 학교와 선교 봉사를 생의 목표로 삼았다.

이듬해에 부모가 이혼하였다. 하지만 가정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영성이 약화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파이오니아였는데, 남동생과 내가 받는 훈련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우리의 작은 이동 주택은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길르앗 졸업생들과 만날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졸업생들 중에는 로이드 배리와 멜바 배리 부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외국 임명지인 일본으로 갈 날을 기다리면서 여행하는 봉사자로 방문중이었다. 그 부부는 시간을 할애하여 선교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어린 소녀인 나를 격려해 주었으며, 그 일은 실로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내가 열 살 때 어머니는 역시 파이오니아 봉사자인 훌륭한 증인과 결혼하였다. 새 아버지는 서류상으로뿐 아니라 진심으로 남동생과 나를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나타낸 여호와께 대한 사랑과 봉사에 대한 열심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두 자녀가 험난한 십대 시절을 헤쳐 나가도록 지도하는 데 한 팀으로 일하였다. 우리 집은 즐거이 회상할 수 있는 영적 안식처였다. 두 자녀를 양육하면서 적은 수입으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자기 희생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왕국 권익을 첫째 자리에 두었다.

1950년에 뉴욕 시에서 열린 국제 대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버지는 은행에서 대부를 받았으며, 우리는 비용에 보탬이 되도록 세 명의 승객을 차에 태웠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나는 샌디에이고에서 뉴욕으로 가는 동안 함께 앞자리에 앉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뒷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고용주가 두 주간의 휴무를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회에 참석하면서 직장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우리를 안심시켜 준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필요로 하는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었으며 과연 그렇게 해주셨다. 아버지는 은행에서 대부받은 돈을 갚기 위해 차를 판 다음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였다. 그와 같은 경험들은 여러 해가 지나서 나와 남편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왕국 농장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길르앗 학교를 견학하였다. 어느 교실 안에 서서 이렇게 혼잣말한 것이 생각난다. ‘나는 만 열한 살도 채 안됐지. 이곳에 결코 올 수 없을거야. 그보다 아마겟돈이 먼저 올걸.’ 하지만 그 방문을 통해서 이전 어느 때보다도 길르앗을 목표로 삼기로 더욱 결심하게 되었다.

목표를 향해 노력함

1학년 때부터 학창 시절 내내 여름 방학 때마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 고등 학교를 졸업한 지 2주 후인 1957년 6월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1957년에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열린, 길르앗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역 대회 모임은 나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모임에 참석하러 천막 안으로 들어가다가 빌을 만난 것이다. 그는 내가 여섯 살 때부터 알고 있는 젊은 형제였다. 그는 그 지난해에 루이지애나 주에 있는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서 봉사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 다 선교 봉사에 관심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고는 놀랐다. 우리는 6개월 후에 그것을 공동 계획으로 삼기로 하였다. 우리는 협회에 임지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으며 결혼하기 한 달 전에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람니를 임지로 받았다.

우리는 1958년에 열린 뉴욕 대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그 대회 기간에 우리는 길르앗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였다. 수백 명이 와 있었다. 모인 사람들을 보았을 때 우리가 길르앗에 초대될 가망이 실로 희박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비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결혼한 지 11주밖에 되지 않았으면서도 말이다. 이듬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두 번째로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람니에 있을 때 우리 부부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람니는 주민이 2000명 정도 되는 읍이었다. 일자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캘리포니아 날씨에 맞게 고안하여 개조한 5미터짜리 이동 주택에서 살았다. 수돗물도 냉난방 기구도 없었다. 실내가 너무 추워서 물을 쓰려면 물통의 얼음을 깨야 하였다. 형제들은 힘닿는 대로 우리를 도왔으며 사냥한 고깃감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사슴과 너구리와 다람쥐를 먹었다. 그날 먹을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면 몇 개의 사과나 치즈가 문 앞에 놓여 있곤 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정도로 살면서 9개월 동안 악전 고투하였다. 마침내 남편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인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로 이사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라고 결정하였다. 형제들에게 우리의 결정을 말했을 때 그들도 울었고 우리도 울었다. 따라서 우리는 좀더 버텨 보기로 하였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메릴랜드 주, 웨스턴포트의 어느 슈퍼마켓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증인이 남편에게 시간제 일자리를 제안하였다. 바로 그달에 성서 연구생 중 한 사람이 커다란 석탄 난로와 함께 가구가 딸린 아담하고 작은 집을 제공하였다. 그때부터 말라기 3:10은 내가 좋아하는 성구가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기대 이상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셨다.

드디어 길르앗으로!

길르앗에 초대받은 1959년 11월의 그날은 우리 생애 중 가장 가슴 설레는 날 중 하나였다. 우리는 왕국 농장에서의 마지막 학급인 제35기 학급에 초대받은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들렀던 바로 그 교실에 들어서자 말로는 적절히 묘사할 수 없는, 흥분이 되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길르앗은 영적 오아시스였다. 5개월 동안 신세계에서 사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여러 해 동안 기다리다가 얻은 것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생애중에서 드물다. 하지만 길르앗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우리는 인도로 임명되었지만 끝내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뉴욕 시에서 1년 간 대기한 후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가도록 워치 타워 협회로부터 재임명을 받았다.

모로코의 선교인들

우리는 모로코에서 24년 간을 즐겁게 보냈는데, 도착하면서부터 이내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배웠으며, 그러한 언어는 그곳에 사는 여러 국적의 사람들과 의사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왕국 소식에 호응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와 함께 성서를 연구한 한 여자는 카사블랑카의 어느 카바레에 고용된 스페인계 플라멩코 댄서였다. 그는 성서 원칙을 배워 안 후에 동거하던 카바레 주인 곁을 떠나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온 가족에게 증거하였는데, 일부는 그가 전한 성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후 그는 카사블랑카로 돌아와서, 1990년에 사망할 때까지 하나님께 충실함을 유지하였다.

모로코에서 처음 몇 년 동안은 왕국 전도인의 수가 증가하였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직장과 거주 허가를 받기가 어려워지자, 증인들이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우리와 함께 연구했던 일부 사람들은 현재 뉴질랜드, 캐나다, 미국, 불가리아, 러시아 및 프랑스에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1973년 4월에 갑자기 모로코에서의 우리의 전파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뜻밖의 타격이었다! 어느 목요일 저녁, 우리는 귀가 시간을 알리는 소등이 있을 때까지 왕국회관에서 행복한 무리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한 공개적인 그리스도인 모임에 불빛이 비치는 것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금지된 상황에서 집회와 순회 대회의 규모는 개인 집에서 모이는 작은 그룹으로 제한되었다.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증인들은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여행하였다.

성원 수가 줄어듦에 따라, 모로코에 남아 있는 소수의 증인들은 서로에게 매우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워치 타워 협회가 마침내 지부를 폐쇄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우리 모두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중앙 아프리카로

새로운 임지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었다. 북아프리카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모로코의 기후는 캘리포니아 남부와 아주 비슷했는데, 이제는 고온 다습한 열대 지방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기어다니는 동물들에 대한 두려움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간을 지나가는데 도마뱀이 머리 위에 떨어진 적이 세 번이나 있었다. 때로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동안, 쥐가 우리와 자리를 함께하고자 하였다! 오싹해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참는 법을 배웠다. 서생원이 떠나기로 결정할 때까지 서생원에게서 시선을 결코 떼지 않았고 서적 가방과 발을 바닥에서 떼어놓았다. 끈기있게 하기만 하면 무엇에든지 익숙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있은 지 6개월이 되었을 때 우리의 활동이 금지되었다는 라디오 발표가 있었다. 그리하여 왕국회관은 폐쇄되었고 선교인들은 출국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우리 부부와 다른 한 부부만이 그후 3년 동안 간신히 지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일요일 오전, 「파수대」 연구 도중에 무장 경찰이 들어와서 우리를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경찰은 여자와 어린이들은 풀어 주었지만 남편 빌을 포함하여 23명의 형제들을 감금하였다. 엿새 후 경찰은 남편을 풀어 주면서 귀가하여 짐을 꾸리라고 하였다. 3일 후 정부의 명령으로 우리는 1989년 5월에 그 나라를 떠났다. 공항에서 또 한차례 눈물겨운 작별이 있었다. 많은 사랑하는 형제들이 공항에 나와서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마침내, 시에라리온으로

현재의 임지는 멋진 백사장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인,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이다. 사람들은 매우 우정적이며 야외 봉사는 즐거움을 준다. 우리는 매 집에서, 흔히 망고나무나 코코야자나무 그늘에 초대받아 앉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며 개인용 성서를 구하여 함께 찾아본다.

우리 부부는 프리타운 벧엘 숙소에서 일한다. 나는 안내원으로 봉사하며 예약과 회중 회계에 관한 업무를 맡고 있다. 전파 활동이 금지된 나라들에서 16년 간 봉사한 후에 왕국 사업이 자유롭고 번창하는 나라에서 일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91년 6월로 선교 봉사를 시작한 지 30년이 되었다. 참으로 어머니는 내 앞에 가치 있는 목표를 세워 주었다! 어머니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다시금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고 싶다. 다행히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아직도 할 수 있다.

[26면 샌드라 카원의 사진]

[27면 샌드라 카원의 어릴 때의 사진]

[28면 삽화]

뉴욕 대회, 1958년

[29면 삽화]

제 35기 학급—7월, 1960

[30면 삽화]

빌 카원과 샌드라 카원, 1991년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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