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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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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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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8
파98 8/1 19-24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조지 카우치의 체험담

오전에 호별 방문 봉사를 마치자, 내 짝은 샌드위치 두 개를 내놓았습니다. 함께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서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웠습니다. “진리 안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하고 내 짝이 물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했습니다”라고 나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1917년 3월 3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애번모어라는 조그만 도시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부모는 네 형제와 누이 그리고 나 모두 육 남매를 양육하였습니다.

우리는 종교 교육은 그다지 많이 받지 못하였습니다. 부모는 한때 교회에 나갔지만, 자녀들이 아직 어렸을 때 다니기를 중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조주의 존재를 믿었고, 성서에 있는 기본 원칙들에 따라 가정 생활을 하였습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가장 훌륭한 훈련은 책임에 관한 것, 즉 책임을 받아들이고 이행하는 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농장 생활은 온통 책임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이 늘 일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농구나 야구, 승마, 수영과 같은 건전한 오락을 즐기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돈은 귀했지만 농장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초등 학교 시절에는 교실이 하나밖에 없는 학교에 다녔으며, 고등 학교 시절에는 도시에 있는 학교로 다녔습니다.

어느 날 밤 한 친구와 함께 시내를 걷고 있었습니다. 예쁜 소녀가 자기 집에서 나와, 내 친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내게 펀 프루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마침 펀은 고등 학교가 있는 거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종종 펀의 집을 지나갈 때면 펀은 밖에 나와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펀은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그 점이 내게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친밀한 우정을 키워 나갔고, 사랑하게 되어 1936년 4월에 결혼하였습니다.

성서 진리에 접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한 연로한 여자가 시내에 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그를 박대하였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토요일에 장을 보러 시내에 갈 때면 그 노인을 방문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집을 청소해 주고 심부름을 해주었는데, 노인이 사망할 때까지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성경 연구생—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그렇게 불렀음—이었던 그 노인에게 매우 친절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어머니를 축복해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후에 고모의 어린 딸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고모는 교회에서는 별로 위로를 얻지 못했지만, 성경 연구생인 이웃 사람에게서는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 성경 연구생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고모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욥 14:13-15; 전도 9:5, 10) 이 말은 대단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고모가 어머니에게 부활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말은 어머니의 관심을 불일듯이 일으켰는데,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몹시 알고 싶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비공식 증거를 할 기회를 항상 이용하는 일의 중요성을 내 마음속에 깊이 심어 주었습니다.

1930년대에 어머니는 당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장인 조셉 F. 러더퍼드의 일요일 아침 라디오 방송 프로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증인들은 우리가 살던 곳에서 호별 방문 봉사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우리 집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휴대용 축음기를 설치하고는 녹음이 된 러더퍼드 형제의 연설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녹음 내용과 「파수대」 및 「황금 시대」(지금은 「깨어라!」) 잡지는 어머니의 관심이 살아 있게 해주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인 1938년에 「파수대」 예약자들에게 엽서가 왔는데,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개인 집에서 열리는 특별 모임에 초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참석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우리 부부는 두 형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들인 존 부스와 찰스 헤슬러가 십여 명 되는 우리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다음날 아침 봉사에 참여할 집단을 조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헤슬러 형제는 나를 지목하고는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도와서는 안 되는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오 무렵까지 호별 방문 봉사를 하였고, 그런 다음 헤슬러 형제가 샌드위치 두 개를 내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계단에 앉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담배를 꺼낸 후에야 헤슬러 형제는 내가 집회에 한 번밖에 참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 날 저녁 식사를 우리 집에서 할 수 있겠는지 물어 보았으며, 성서 토론을 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그는 우리와 성서 연구를 하였고, 이웃에서 온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매주 성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우리 부부는 매주 가정 성서 연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발전하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우리 부부는 야외 봉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우리가 차 뒷좌석에 앉아 담배에 막 불을 붙였을 때, 형이 우리 쪽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인데 증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던 걸.” 아내는 즉시 담배를 창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나도 담뱃불을 껐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담배를 즐겨 피웠지만, 두 번 다시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1940년에 침례를 받은 후에, 어느 집회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격려하는 기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파이오니아 봉사란 전 시간 전파 활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형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파이오니아를 하지 그러세요? 장애가 될 만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서, 파이오니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30일 후에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사직 통고서를 직장에 제출하였고, 우리 부부는 파이오니아를 하기 위해 일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봉사해야 할지 워치 타워 협회와 의논한 후에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곳에는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집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한 달 숙식비가 10달러였습니다. 우리는 저축해 둔 돈이 좀 있어서, 그 돈이면 아마겟돈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시 16:14, 16) 아무튼, 우리는 항상 아마겟돈이 목전에 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집을 포기하였고, 전에 추구하던 것을 모두 그만두었습니다.

우리는 1942년부터 1947년까지 볼티모어에서 파이오니아를 하였습니다. 그 기간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한 반대가 매우 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 연구생들의 집에 갈 때 이따금 우리 차를 몰고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차의 타이어가 칼에 찢기는 일을 면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반대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항상 야외 봉사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는 데서 약간의 흥분을 느끼게 하는 것을 기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저축해 두었던 돈을 모두 써버렸습니다. 차의 타이어는 다 닳았고, 의복과 신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두세 차례 한동안 병을 앓았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계속 해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본 적도 없습니다. 단순하게 생활한 덕분에 파이오니아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임명의 변경

우리는 1947년에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회에 갔습니다. 그 곳에 머무르는 동안 형 윌리엄과 나는 각자 편지를 한 통씩 받았는데, 회중들을 방문해서 돕는 여행하는 활동에 우리를 임명하는 편지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그 활동을 위한 특별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임명을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 후 칠 년 동안 우리 부부는 오하이오 주, 미시간 주, 인디애나 주, 일리노이 주, 뉴욕 주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우리는 1954년에, 선교인을 훈련시키는 길르앗 학교 제24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곳에 있는 동안 아내는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다행히도 아내는 잘 회복되었고, 우리는 뉴욕 주와 코네티컷 주에서 여행하는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우리가 코네티컷 주 스탬퍼드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네이선 H. 노어가 주말을 함께 보내자고 청하였습니다. 노어 부부는 우리에게 맛있는 스테이크 요리와 여러 가지 다른 음식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 부부와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나는 노어 형제가 우리 부부와 교제하면서 저녁을 먹는 일 외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릴 정도로 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늦은 시간에 그는 내게 “벧엘에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확신이 서지 않는데요. 벧엘 생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라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관해 몇 주 동안 생각한 끝에, 우리는 노어 형제에게 우리를 원한다면 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음주에, 우리는 1957년 4월 27일에 벧엘에 오라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날은 우리의 결혼 21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벧엘에 간 바로 첫날, 노어 형제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지침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제는 더는 순회 감독자가 아닙니다. 이 곳 벧엘에서 일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 일은 형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가 이 곳 벧엘에서 받는 훈련을 적용하는 데 시간과 활력을 바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형제가 벧엘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의미 있는 벧엘 생활

내가 받은 첫 임명은 잡지 및 우송 부서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약 3년이 지나서 노어 형제는 자기 사무실로 오라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그 때 노어 형제는 내가 벧엘에 오게 된 실제 이유가 벧엘 집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단도 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습니다. “당신은 벧엘 집을 관리하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벧엘 집을 관리하는 일은 내가 농장에서 자랄 때 부모에게서 받은 교훈을 생각나게 해주었습니다. 벧엘 집은 보통 가정 집과 매우 흡사합니다. 옷을 세탁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침구를 정돈하는 일과 그 밖의 일을 해야 합니다. 벧엘 집의 조직은 벧엘을 살기에 안락한 곳으로, 자기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가정이 벧엘 운영 방식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일용할 성구를 고려함으로 하루를 영적인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할 것으로 그리고 균형 잡혀 있으면서도 바쁜 생활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벧엘은 일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수도원과 같은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짜여진 생활 방식 때문에 많은 일을 수행합니다. 이 곳에서 받은 훈련이 후에 가정에서나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책임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벧엘에 들어오는 젊은 남녀는 청소나 세탁 혹은 공장 일을 하도록 임명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육체적인 일은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벧엘에 있는 젊은이들은 우리 가족이 적절하고 행복하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작업 임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세상은 또한 당신이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위와 명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조장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명된 일을 할 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로 인해 여호와의 축복을 받습니다. (누가 17:10)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여호와의 뜻을 행하고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는 일—을 기억한다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어떠한 임명도 즐겁고 만족스런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확장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림

우리가 벧엘에 오기 10여 년 전인 1942년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노어 형제는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것이며,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하여 전파 활동을 확장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1943년에, 선교인을 훈련시키는 길르앗 학교와 형제들의 공개 연설 능력을 향상시키는 신권 전도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큰 대회들도 조직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특히 주목할 만한 대회는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들이었습니다. 1950년과 1953년에 그 곳에서 열린 대회에서 나는 각 대회의 8일 동안 수만 명을 수용할 대규모 트레일러 도시를 마련하는 일을 도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1958년에 열린 가장 큰 대회를 비롯하여 그러한 대회들이 열린 후에는 왕국 전도인 수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그 증가는 벧엘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도 곧바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벧엘 봉사자들을 수용할 공간과 숙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늘어나는 벧엘 가족을 수용하기 위해, 숙소와 주방과 식당을 늘려야 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공장 감독자인 맥스 라슨 형제와 나에게 확장에 적합한 부지를 물색해 보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내가 벧엘에 왔던 해인 1957년에는, 약 500명의 벧엘 가족을 한 채의 큰 숙소 건물에 다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협회는 여러 해에 걸쳐 근처에 있는 세 개의 큰 호텔—타워스 호텔, 스탠디시 호텔, 보저트 호텔—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작은 아파트 건물을 구입해서 개조하였습니다. 1986년에 협회는 마거릿 호텔이 있던 부지를 매입해서 그 곳에 아름다운 새 건물을 세워 약 250명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초에는 30층짜리 숙소 건물을 한 채 지어 1000명의 벧엘 봉사자를 더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브루클린 벧엘은 현재 3300명이 넘는 벧엘 가족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브루클린 벧엘에서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뉴욕 주 월킬에서 부지를 매입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부터 여러 해에 걸쳐 그 곳에 숙소 건물과 큰 인쇄 공장을 건축하였습니다. 현재 약 1200명의 벧엘 가족이 그 곳에서 살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1980년에는 뉴욕 시에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주요 도로에 진입하기에 편리한 약 250헥타르의 땅을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부지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날 아침 우리에게 전화를 해서 “그런 부지를 찾았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현재 그 곳은 뉴욕 주 패터슨에 있는 워치타워 교육 센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곳에서는 학교들이 운영되고 있고, 1300명이 넘는 봉사자로 이루어진 한 가족이 있습니다.

내가 배운 교훈

나는 훌륭한 감독자란 다른 사람에게서 귀중한 지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벧엘 감독자로서 내가 시행할 특권을 받았던 아이디어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벧엘에 왔을 때, 많은 사람이 지금의 나처럼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현재 사망하고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사망하는 사람들을 누가 대신할 것입니까? 반드시 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벧엘에 있으면서, 충실하게 맡은 일을 하며, 자기 자신을 기꺼이 바치는 사람들이 대신하게 됩니다.

기억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훌륭한 아내가 지니는 가치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인 펀의 지원은 내가 신권 임명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편들에게는 아내가 자신의 임명을 즐기고 있는지 확인할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즐길 만한 일을 계획하려고 노력합니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도 되며, 단순히 일상적인 일에서 좀 벗어난 일이면 충분합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는 것은 남편의 책임입니다.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소중하며 빨리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날에 살고 있는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지금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약속된 신세계의 출현에 대비하여 자신의 조직을 어떻게 발전시키시는지 믿음의 눈으로 지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며 보낸 나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이 조직을 운영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의 종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으로서 언제나 그분의 인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일단 그분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밝혀 주시면, 우리는 즉시 그 일에 뛰어들어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조직과 온전히 협조하십시오. 그러면 만족스럽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 보장됩니다. 어떤 일을 하든—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든, 순회 활동을 하든, 회중과 함께 전도인으로 봉사하든, 벧엘 봉사를 하든, 선교 활동을 하든—정해진 지침에 따르고, 자신의 임명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여호와를 섬기는 모든 임무와 매일의 활동을 즐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이따금 지칠 때도 있고, 과로하거나 낙심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여호와께 헌신한 목적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헌신한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을 즐기지 못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 영혼을 다하여 자신을 바칠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오는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면 삽화]

잡지 부서

[19면 삽화]

트레일러 도시, 1950년

[19면 삽화]

볼티모어에서 파이오니아를 하던 시절, 1946년

[19면 삽화]

트레일러 도시에서 아내와 함께, 1950년

[22면 삽화]

네이선 노어 부부와 함께

[23면 삽화]

뉴욕 주, 패터슨에 있는 워치타워 교육 센터

[24면 삽화]

아내와 함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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