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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성서를 믿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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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성서를 믿을 수 있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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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8
파98 10/15 4-7면

당신은 성서를 믿을 수 있는가?

이 현대 세상에서도, 성서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미국의 갤럽 여론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0퍼센트가 성서가 영감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독자가 사는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그처럼 높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성서를 가르쳐 주기를 기대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히 그들은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못합니다. 사후에 영혼이 벌을 받는다는 교리를 예로 들어 봅시다.

성서에는 연옥이나 불타는 지옥을 가르치는 내용이 있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학자들은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신 가톨릭 백과 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결국, 연옥에 관한 가톨릭 교리는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근거해 있다.” 지옥에 관해 「그리스도교 신학 사전」(A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신약에서 우리는 지옥불이 초기 전파 활동의 일부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실, 영국 국교회의 교리 위원회가 최근에 지옥불 가르침을 완전히 거부할 것을 추천했을 때, 그 뉴스는 대서 특필로 보도되었습니다. 리치필드 대성당의 수석 사제인 톰 라이트 박사는, 지옥에 대한 과거의 묘사가 “하느님을 괴물로 만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뜨거운 화상을 입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위원회의 보고에서는 지옥을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합니다.a 이와 비슷하게, 「신 가톨릭 백과 사전」은 가톨릭의 견해에 관해 이렇게 지적합니다. “오늘날의 신학은 지옥 문제를 하느님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시각으로 본다.”

실제로, 성서가 영혼에 관해 가르치는 내용은 연옥이나 지옥불 가르침과는 전혀 다릅니다. 성서는 흔히 영혼의 죽음에 관해 말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4) 성서에 따르면, 죽은 사람은 무의식 상태에 있으며 고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느니라].” (전도 9:5) 성서가 죽은 사람을 위해 제시하는 희망은 장래의 부활에 대한 희망입니다. 예수의 벗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는 죽음을 잠에 비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희망을 표현하여,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저는 압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심으로써, 인류를 위한 그 희망을 확증하셨습니다.—요한 5:28, 29; 11:11-14, 24, 44.

역사가들은 사람이 분리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이 성서가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 기원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신 가톨릭 백과 사전」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물질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기술합니다. 그 백과 사전은 히브리인들의 신앙에 관해 이렇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첫 사람에게 생명의 호흡이 들어갔을 때, 그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창[세기] 2.7). 죽음은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듯이 사람에게 있는 두 가지 별개의 요소가 분리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생명의 호흡이 떠나 사람이 ‘죽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레[위기] 21.11; 민[수기] 6.6; 19.13). 각각의 경우에 ‘존재’라는 말은 히브리어 [네페시]였으며, 이 단어는 흔히 ‘영혼’으로 번역되었지만 실은 사람과 거의 동일한 말로 생각되었다.”

그 백과 사전은, 가톨릭 학자들이 최근에 “신약은 헬레니즘[그리스]식 의미의 영혼불멸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그 백과 사전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철학적인 추측에서보다는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선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서인가, 전통인가?

그런데 비성서적인 사상이 어떻게 교회의 가르침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많은 교회들은 성서가 그들의 최고 권위라고 공언합니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경을 “신자들이 온전한 진리로 그리고 우리 믿음의 최고의 표준으로 받아들일” 필요성에 관해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가르침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런 변화를 교회 교리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의 일부로 봅니다. 더욱이, 가톨릭 교회는 교회 전통이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신 가톨릭 백과 사전」에서는, 교회는 “전통을 떠나서 성경에만 근거한 진리를 갖지도 않고, 성경을 떠나서 전통에만 근거한 진리를 갖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역사를 보면, 교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전통에만 근거해 있는 가르침으로 대치해 왔습니다. 실은, 이제는 많은 교회들이 성서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신 가톨릭 백과 사전」에서는 “성서의 많은 진술은 현대의 과학 지식과 역사에 따라 판단해 볼 때 전혀 옳지 않음이 명백하다”고 기술합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성서의 가르침에 관해, 이렇게 덧붙입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구약은 ·⁠·⁠· 사후 생명에 관한 지식이 불충분함을 입증한다.” 그 백과 사전은 시편 6:5(일부 성서에서는 6절)의 이러한 내용을 그 예로 듭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스올 혹은 하데스]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일부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와 대학들은 성서에 오류가 없다고 더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편,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교권, 즉 가르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 권위를 사용하여 성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해석이 성경과 모순되는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의 중요성

예수께서는 거듭거듭 성경을 권위의 근거로 인용하시면서, 흔히, “기록되어 있다”라는 말씀으로 요점을 뒷받침하셨습니다. (마태 4:4, 7, 10; 누가 19:46) 실제로, 예수께서는 사람의 결혼에 관해 말씀하실 때, 그리스 철학의 추측에 의존하지 않고 창세기의 창조 기록에 의존하셨습니다. (창세 1:27; 2:24; 마태 19:3-9) 확실히, 예수께서는 성경을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사실이 담겨 있는 기록으로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한 17:17.b

성서에는 예수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이렇게 책망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전통을 존속시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교묘하게 제쳐놓습니다. ·⁠·⁠· 그리하여 당신들은 ·⁠·⁠·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효케 합니다.” (마가 7:6-13) 이와 비슷하게,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이나 잘못된 전통을 자신의 가르침 안으로 흡수하게 만드는 압력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혹시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자기 먹이로 끌어갈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것[입니다].” (골로새 2:8; 고린도 첫째 1:22, 23; 2:1-13)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지하도록 강력히 권하는 전통 또는 가르침도 있었지만, 이런 것들은 성경에 근거해 있었고 성경과 온전히 일치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둘째 2:13-15)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완전히 갖추게 해줍니다.”—디모데 둘째 3:16, 17.

바울은 성경으로부터 떠내려가는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참지 못[할] ·⁠·⁠·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귀를 돌이[킬] ·⁠·⁠·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십시오].” (디모데 둘째 4:3-5)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까? 한 가지 방법은 ‘생각이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그리스어 사전은 이 성서 단어를, “어떤 것을 배워서 공정하게 평가하려는 자진성”이라고 정의합니다. 누가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인 1세기의 베레아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이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릇 인도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들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생각이 더 고상하여, 아주 간절한 정신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매일 성경을 주의 깊이 조사하였다.” 베레아 사람들은 생각이 고상하였기 때문에 회의적이 되어 아무 것도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정직하게 조사한 결과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17:11, 12.

성서에 따라 생활할 때 오는 유익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대한 고착과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유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경건한 정성의 형태는 있으나 그 능력에 대하여는 거짓됨을 드러”냅니다. (디모데 둘째 3:5) 오늘날 어떤 형태의 그리스도교이든지 그 원형에 충실하지 않은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선을 위한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국의 대부분에서 증가하는 폭력, 부도덕, 가정의 붕괴, 물질주의를 보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일부 “그리스도교” 나라들에서는, 심지어 같은 종교 성원들 사이에서도 포악한 민족 전쟁이 벌어집니다.

생각이 고상한 베레아 사람들의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습니까? 오늘날 성서를 믿고 그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의 단체가 과연 존재합니까?

「카나디아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기원 1세기와 2세기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실천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흥이며 재건이다.” 「신 가톨릭 백과 사전」은 증인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들은 성서를 자기들의 신앙과 행동 기준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틀림없이 바로 이 점이, 세계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영적 번영과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로 알려지게 된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자 여러분이 영적으로 건전한 성서의 가르침에 관하여 더 많이 배우도록 격려하는 바입니다. 지식이 더 많아질수록, 성서를 더욱더 신뢰할 수 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영원한 유익은 노력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각주]

a 전국 공영 라디오 방송—“아침 방송”

b 성서의 신빙성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발행한 팜플렛인 「모든 사람을 위한 책」 참조.

[6면 삽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장터에서 전파하였다

[7면 삽화]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를 자기들의 신앙과 행동 기준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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