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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 진리의 힘은 강력했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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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10
파10 12/15 26-30면

성서 진리의 힘은 강력했다

체험기—비토 프라에세

여러분에게는 트렌티나라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트렌티나라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나의 부모님과 형 안젤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형이 태어나고 나서 부모님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 주 로체스터 시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나는 1926년에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1922년에 성경 연구생을 처음으로 만나셨는데,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성격이 차분하고 생각이 깊은 분이었지만 불공정한 일을 보면 의분을 느끼셨습니다. 아버지는 교직자들이 사람들을 무지 가운데 방치하는 것을 참다 못해, 기회만 생기면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해 주셨습니다. 은퇴 후에는 계속 전 시간 봉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었고 겨울 날씨도 혹독했기 때문에 74세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중단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90세가 넘어서까지 계속 한 달에 40 내지 60시간을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셨지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내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머감이 있으면서도 진지한 분이셨던 아버지는 “진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해”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우리 다섯 자녀 모두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애쓰셨습니다. 나는 1943년 8월 23일에 침례를 받았고, 1944년 6월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누나인 카르멜라는 뉴욕 주의 제네바에서 펀이라는 쾌활한 아가씨와 짝이 되어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었지요. 오래지 않아 펀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1946년 8월에 결혼했습니다.

선교 활동

우리 부부가 처음 받은 임명은 뉴욕 주의 제네바와 노리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948년 8월에는 길르앗 제12기 학급에 참석하는 특별한 경험도 했지요. 그러고 나서 칼 리지웨이와 조앤 리지웨이라는 또 다른 선교인 부부와 함께 이탈리아의 나폴리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나폴리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집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우리는 몇 달 동안 방이 두 개 있는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나폴리 지방 사투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구사하는 이탈리아어는 미국 억양이 섞이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했습니다. 아내는 언어 때문에 고생을 하긴 했지만, 어느새 나를 따라잡더니 결국 나보다 이탈리아어를 더 잘하게 되더군요.

우리가 나폴리에서 처음으로 찾은 관심자라곤 식구가 네 명인 한 가족뿐이었습니다. 그 가족은 밀수된 담배를 팔았지요. 그들 중 한 명인 테레사는 일하는 날마다 매번 놀랍게 변신을 했습니다. 아침에는 치마에 달린 많은 주머니에 담배를 쑤셔 넣어서 뚱뚱해 보이다가, 저녁이 되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홀쭉해 보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리는 이 가족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이 가족 중에서 16명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현재 나폴리 시에 있는 증인의 수는 거의 3700명에 이릅니다.

우리의 활동에 대한 반대

나폴리에서 산 지 겨우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부 당국은 우리 4명에게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는 한 달 정도 스위스에서 머물다가 여행 비자를 받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부부는 토리노에 임명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아주머니가 세놓은 단칸방에 살았는데, 부엌과 욕실은 주인집 것을 사용해야 했지요. 나중에 리지웨이 부부가 토리노에 도착하자 우리는 함께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섯 쌍의 선교인 부부가 한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1955년에 정부 당국의 명령으로 토리노를 떠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미 4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중 일을 돌볼 유능한 현지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은 “당신네 미국인들이 떠나는 순간 당신들이 한 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거요”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후에 이루어진 증가를 보면 우리의 활동이 성공을 거둘 것인지의 여부는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토리노에는 56개 회중에 4600명이 넘는 증인이 있습니다.

피렌체—멋진 도시

우리의 다음 임명지는 피렌체였습니다. 누나 카르멜라와 매형인 멀린 하츨러의 선교 임지가 피렌체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도시에 대해 종종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곳에서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 다리, 미켈란젤로 광장, 피티 궁전 같은 명소들이 있는 그 멋진 도시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얼마의 피렌체 사람들이 좋은 소식에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되어 기뻤습니다.

우리는 어떤 가족과 성서 연구를 했는데, 부모가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요. 1973년에 「파수대」지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불결한 습관임을 지적하면서 독자들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강력히 권했습니다. 그러자 큰아들과 큰딸은 아버지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애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러겠다고 약속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기도를 해 주지 않은 채 아홉 살 난 쌍둥이 아들들을 잠자리에 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려서 나중에 아이들 방에 가 보았더니, 아이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기도를 해 버린 것이었어요. 어머니가 “뭐라고 기도했니?” 하고 묻자, 아이들은 “여호와 하느님, 제발 아빠가 담배를 끊게 도와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와서 애들이 뭐라고 기도하는지 들어 보세요” 하고 남편을 불렀습니다. 기도 내용을 들은 남편은 눈물을 왈칵 쏟으며 “두 번 다신 담배를 피우지 않겠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약속을 지켰고, 현재 그 가족 중에 증인이 된 사람은 15명이 넘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봉사

1959년에는 우리의 임지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두 명의 선교인들인 아르투로 레베리스와 나의 형 안젤로와 함께 소말리아의 모가디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정치적으로 긴장이 고조된 상황이었습니다. 국제 연합의 위임을 받은 이탈리아 정부는 소말리아가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게 되어 있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됐습니다. 우리와 연구하던 몇몇 이탈리아인은 소말리아를 떠났으며 회중을 조직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지구 감독자로부터 그의 보조자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지역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와 연구를 하던 몇몇 사람은 잘 발전했지만 박해 때문에 고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심한 고난을 견뎌야 했음에도 고국에 남은 사람들도 있었지요.a 충실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인내해야 했던 일들과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게 됩니다.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에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날씨가 무더울 때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그 지역의 매운 음식까지 먹으면 정말 온몸이 화끈거렸지요. 성서 연구생의 집에서 그런 음식을 처음 먹던 날, 아내는 자신의 귀에 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 같다고 농담을 하더군요!

안젤로와 아르투로는 다른 임지로 떠났고 이제 우리는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격려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힘들더군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 있다 보니 여호와와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그분을 더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금지령하에 있는 나라들을 방문하는 일도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지요.

소말리아에서 살다 보니 이런저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당일 먹을 음식만 사야 했습니다. 망고, 파파야, 자몽, 코코넛, 바나나 같은 현지 과일을 사기도 하고 귀상어 몇 조각을 사기도 했지요. 날벌레와 씨름할 때도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엔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동안 날벌레들이 우리 목에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스쿠터가 있어서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장시간 걷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시 이탈리아로

관대한 벗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1961년에 바나나 수송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토리노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임명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우리는 1962년 9월에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나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작은 차를 사서 5년 동안 타고 다니며 두 순회구에서 봉사했습니다.

아프리카의 무더위 속에서 살아 왔던 우리는 이제 추위를 견뎌야 했습니다. 첫 번째로 맞이한 겨울에 알프스 산기슭에 있는 회중을 방문했는데, 건초 창고 위층에 있는 방에서 난방 장치도 없이 잠을 자게 되었지요. 너무 추워서 우리는 코트를 입은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얼마나 추웠던지 그날 밤 인근에서 키우던 닭 네 마리와 개 두 마리가 얼어 죽을 정도였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나는 지역 감독자로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이탈리아 전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칼라브리아나 시칠리아 지역을 포함하여 몇몇 지역은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회중의 감독자나 여행하는 봉사자나 베델 봉사자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섬겨 온 충실한 벗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관대함, 형제들에 대한 사랑, 기꺼이 적응하려는 태도, 자기희생 정신과 같이 그들이 나타내는 훌륭한 특성들을 우리는 참으로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결혼식에도 참석해 보았습니다. 성직자로 법적 인정을 받은 증인들이 결혼식을 집전하더군요. 예전 같았으면 이 나라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지요. 회중들은 과거에 토리노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형제들의 가정집 부엌에서 집회를 열거나 판자에 앉아 집회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대부분의 회중이 여호와께 영예가 되는 아름다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즐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류 극장에서 대회를 열지도 않지요. 널찍한 대회 회관이 있으니까요. 또한 우리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전도인 수가 490명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그 수가 24만 3000명을 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올바른 선택

우리는 향수병에 시달리거나 몸이 아파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아내는 바다를 볼 때마다 고향을 그리워했고, 큰 수술도 세 번이나 받아야 했지요. 그리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러 가던 중에 쇠스랑을 든 반대자에게 공격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사고로 또 한 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지요.

낙담이 될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애가 3:24의 말씀처럼 ‘여호와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말 위로의 하느님이시더군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지요. 우리가 무척 힘에 겨워하고 있었는데, 네이선 노어 형제가 아내에게 아름다운 편지를 한 통 보내 준 것입니다. 노어 형제는 그 자신도 펀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던 곳인 펜실베이니아 주 베슬리헴 인근 출신이기 때문에, 펀과 같은 그 지방 독일계 여성들이 얼마나 강인한지 잘 안다고 썼습니다. 정말 맞는 말이었지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이처럼 여러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방법으로 격려를 받았습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봉사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열정을 맛 좋은 이탈리아산 스파클링 와인인 람브루스코에 빗대어, “열정에 김이 빠져 버리면 안 되죠” 하고 농담조로 말합니다. 40년이 넘게 순회와 지역 활동을 하고 나서, 우리는 외국어 집단과 회중들을 방문하고 조직하는 새로운 특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집단들에서는 가나, 나이지리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인도, 중국, 필리핀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힘이 여호와의 자비를 맛본 사람들의 인생을 놀랍게 바꾸어 놓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쓰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미가 7:18, 19.

우리는 봉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신체적·감정적 힘을 계속 주실 것을 매일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참으로 주의 기쁨이 우리의 힘입니다. 그 기쁨은 우리의 눈을 빛나게 하고, 우리가 성서 진리를 전하면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 왔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에베소 3:7; 골로새 1:29.

[각주]

a 「1992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95-184면 참조.

[27-29면 도표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부모님, 뉴욕 주 로체스터

1948

길르앗 제12기 학급이 열린 사우스랜싱에서

1949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 카프리에서

1952

토리노와 나폴리에서 다른 선교인들과 함께

1963

성서 연구생들과 함께한 아내

“열정에 김이 빠져 버리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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