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교와 인종 분리 정책
「사우스 아프리칸 다이제스트」지에 실린 한 기사는 DR(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인종이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 교회당, 예배, 신자 자격의 개방을 선언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수십년 동안 DR 교회는 전면적 인종 차별 정책을 지지하였었다. 그런데 1986년 10월에 열린 교회 지도자 회의에서 채택된 이 역사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무엇이었는가?
지난 세기에는 백인, 흑인 노예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계 혼혈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의 DR 교회에 속했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1857년, 한 교회 회의는 고조되어 가는 인종적 적대감에 굴복하여 혼혈인을 위한 예배를 별도의 건물에서 개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 교회 회의는 성서가 그러한 결정을 권하지 않는다고 시인하였지만, 그 결정은 “일부 신자의 유약함 때문에” 내려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1881년, 혼혈인 신자를 위한 별도의 교파인 Nederduitse Gereformeerde Sendingkerk, 즉 DR 전도 교회라고 하는 것이 설립되었다.
그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시작했는지를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흑인과 인도인을 위한 별도의 교파들도 생겨났다. 많은 DR 교회의 참석자는 단지 백인으로만 제한되었다. 한때 “유약함”으로 고려되었던 것이 굳건한 교회 정책이 되었다. 흑인들은 그들의 백인 고용주의 장례식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한 굴욕으로 인해, 흑인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분노가 치밀게 되었다.
“인종 분리 정책은 ··· 교회 정책”
1937년, FC(DR 교회 연방 협의회)는 백인과 혼혈인과의 혼인 금지법을 통과시켜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정부는 거부했다. 1939년, FC는 그 법안을 다시 요청함과 동시에, 이번에는 백인에게 별도의 주거 지역과 대학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를 따로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교직자들로 구성된 여러 대표단이 그 일에 대해 정부와 교섭하였다. 1942년, DR 교회 연방 전도 협의회는 “본 교회가 원하는 바는 이 인종 분리 정책이 앞으로 엄격히 실시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정부에 보냈다.
그러던 중 1948년이 되자, 백인계 국민당은 인종 분리 정책을 법률로 제정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선거에서 이겨 집권하게 되었다. 이내 새로운 인종 분리 법이 뒤따랐다. DR 교회의 기관 잡지, 「디 케르크보데」는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하나의] 교회로서 우리는 ··· 의도적으로 이 두 그룹의 사람을 분리시킨다는 목표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 이 점에서 인종 분리 정책은 정당하게 교회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성서의 가르침인가?
그때까지 인종 분리 정책에 관한 교회의 요청은 주로 전통에 근거해 있었다. 1948년, 트란스발 교회 회의에서 그들은 “성서 원칙에 입각해 있다는 의식적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여세를 불러 모은 새로운 한 가지 시도가 있었으니, 곧 인종 분리 정책을 성서의 가르침으로서 제시하는 것이었다.
1974년, DR 교회 총회는 「Ras, Volk en Nasie en Volkereverhoudinge in die lig van die Skrif」(성경으로 비추어 본 인간 관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상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성경에서] 인종 분리 신학은 성경의 정통적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고, 「Die NG Kerk en Apartheid」(DR 교회와 인종 분리 정책)의 편집자, 요한 킹호른은 기술한다. 그 보고서는 바빌에서의 인류의 분열에 관한 기록을 장황하게 상술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여러 인구 그룹의 개별적 발전 ··· 에 근거한 정치 제도는 성서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또한 그 보고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이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라고 한 요청에 관해서도 해설하였다.(요한 17:23) 그 보고서는 그러한 연합을 “하나의 제도 내에서 꼭 나타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용도 위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로테스탄트교는 수많은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1982년, 개혁 교회 세계 연맹은 캐나다의 오타와에서 회의를 가진 후, 인종 분리 신학을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DR 교회는 회원 자격이 박탈되었다. 그에 더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 자체도 이른바 잡혼 금지법을 포함하여 일부 인종 분리 법을 폐기시킴으로써 교회에 압력을 넣었다.
교회는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는가? 일부 DR 교회 교역자들도 인종 분리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인종 분리 정책은 이단이다」(Apartheid Is a Heresy)라는 책에서 DR 교회 신학자, 다비드 보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칸스 개혁 교회는 그 근원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들이 현재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이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 정책은 교회 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DR 교회 신학자 베르나드 콤브링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관점이나 정책이 다년간 성경적인 것으로 진척되어 오다가 이제 와서 ‘난데없이’ 다른 관점이 성경과 일치한 것으로 진척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일부 신자들은 교회에 신용도 위기가 닥쳤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DR 교회 내의 “신용도 위기”는 그 교회 총회에서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한 하나의 결의문을 채택하였을 때인 1986년 10월에 그 절정에 달했다. 그 결의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인종 차별과 국민의 분리를 강요하는 일을 성서의 규정으로 추정할 수 없다는 신념이 커졌다. 성서로부터 그러한 규정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며 배격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인종 분리 신학을 거부한 이 결의문은 백인 가운데 미묘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DR 교회 총회가 충분한 공헌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교회가 흑인 개혁 교회와 하나의 단체로서 기꺼이 연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교회가 도에 지나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1987년 6월 27일 토요일, 그 결의문에 반대하는 2,000명의 DR 교회 신자들은 프리토리아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압도적 다수표로 백인만의 새로운 교파를 결성하였으며, 그 명칭은 Afrikaanse Protestantes Kerk (아프리칸스 프로테스탄트 교회)였다.
네덜란드 프로테스탄트교가 인종 분리 정책을 제정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의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은 물의를 빚는 이 정책을 공개적으로 정죄하였다. 그러함에도 두명의 백인 교역자—감리교 교역자와 회중 교회 교역자—는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 내의 신앙 생활에서도 여전히 “인종 분열과 차별이 반영되며, 때때로 아프리칸스 개혁 교회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고질적이며 강렬하다”고 인정한다.—「인종 분리 정책은 이단이다」
흑인 교회 신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백인 신학자들이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해 격론을 벌이는 동안, 일부 저명한 흑인 신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견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6면 네모]
가톨릭교도 분열되어 있다
1986년 9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가톨릭 교직자 회의는 인종 분리 정책의 폐지와 관련된 한 결의안을 승인하였다. 「케이프 타임스」지는 이렇게 보도한다. “전국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는 일을 지지하는 남부 아프리카 가톨릭 주교 회의의 입장에 공식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해 초에 요한네스버그에서 열린 미사에서 그러한 견해가 공개적으로 발표되었을 때 수많은 가톨릭 교인들은 교회를 떠났다. 한 남자는 가족과 함께 교회를 떠나면서 사제에게 큰 소리로 반대를 표시하였으며, 교인들 대부분은 그 남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의미 심장하게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많은 가톨릭 교인들은 가톨릭 교직자가 정치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하는 조직을 결성하였다.
[5면 삽화]
교회 지도자들은 인종 분리 정책을 성서의 가르침으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