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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회 사제가 진리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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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회 사제가 진리를 발견하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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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3
파83 4/1 10-14면

예수회 사제가 진리를 발견하다

‘쥴리오 이니에스타 가라시아’의 체험담

“예수회(Jesuit)”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의 머리에는 무엇이 떠오르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 말은 깊은 존경심으로부터 철저한 혐오감에 이르기까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보통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이 말은 고도로 훈련받은 사제 교육자들 및 선교인들의 집단과 같은 의미이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말에 내포된 뜻은 일부 사전들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 바와 같다. 즉 “음모나 애매 모호한 말[속일 의도에서 앞뒤가 안맞게 하는 말]을 잘하는 사람.”

1977년 11월까지 나는 예수 협회(the Society of Jesus) 즉,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진 말로는 예수회의 사제였다. 그 후 나는 그것을 사퇴하였다. 아마 독자는 내가 왜 예수회 회원이 되었으며, 무엇이 나로 하여금 25년 만에 사제직을 포기하게 하였는지 궁금할 것이다.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의 어린 시절

나는 1918년 봄에 10남매 중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부친은 ‘스페인’ 남동부에 위치한 ‘무르시아’에서 ‘나이지리아’라는 음식점을 경영하였다. 그 당시 대다수의 ‘스페인’ 사람들처럼 나도 통상적인 ‘가톨릭’ 종교 교육을 받았으며 일요일에는 ‘미사’에 참석하고, 금요일에는 고해 성사 등을 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나는 영적으로 들떠 있었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르시아’ 소재의 ‘마리아’ 신앙 회중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주로 대학 및 중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청소년 단체로서 예수회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포교단 대변인으로 임명되었으며 ‘가톨릭’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 그 직후의 ‘스페인’ 내란의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섬길 필요성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양심 문제로 투옥되다

1936년이 되면서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였다. 18세가 된 나는 내가 보기에 무신론적이었던 정권을 수호하도록 소집을 받았다. ‘가톨릭’ 신자들인 나의 형제들을 대항하여 무기를 잡는 일을 비인도적인 일로 생각하여 나는 군대의 소집에 불응하였다. 그 결과로 나는 체포되었으며, 2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리하여, 18세의 나이로 나는 끝이 없어 보이는 투옥형을 받게 된 것이다. 몇 개월 후에 나는 ‘스페인’ 중부의 ‘톨레도’ 지방에 있는 ‘산 파블로 데 로스 몬테스’ 중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심한 굶주림과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아래 18개월을 보내고 난 뒤에 ‘프랑코’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어 우리는 석방되었다. 크게 자유롭게 된 나는 ‘무르시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많은 고통을 겪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도 보았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은 잃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악행들을 보고 나는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싶은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다. 예수회 회원들과의 접촉으로 인하여 나는 예수회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것은 달성하기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 예수회의 기율은 복종과 궁핍 및 순결에 관한 서약을 요한다. 나에게도 다른 젊은이들처럼 육적인 욕망이 있었지만 독신 생활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바란 것은 하나님을 섬기며 선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회 사제가 되기 위한 엄격한 훈련

1947년에 예수회 사제들이 내가 수련사로서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하여 복종과 겸손에 대한 여러 가지 시험을 하였다. 기쁘게도 나는 합격하여 예수회의 기율적인 생활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마침내 20대 후반기에 나는 선교인이 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내 앞에는 12년간에 걸친 부지런한 공부와 엄격한 인격 수련의 기간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수련사로서의 처음 2년 기간 속에는 마루 닦기 및 화장실 청소와 같은 천한 일을 하는 30일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마루를 말끔히 닦아 놓자 한 “형제”가 내가 한 일을 검사하기 위해 들어왔던 일이 생각난다. 그는 나의 겸손과 복종심을 시험하려고 더러운 물이 담긴 물통을 고의적으로 뒤집어 엎어서 모두 다시 닦지 않으면 안 되게 해 놓았다.

나는 다른 수련사와 함께 또 다른 30일 동안을 마을들을 방문하며 다녔는데, 우리가 받은 보시로 스스로 연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다른 30일 기간은 병원에서 전염병 환자들 가운데서 일하는 데 바쳤다.

1949년에 나는 ‘바르셀로나’의 ‘산 쿠가트 델 발레스’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신학교에서 수학에 들어갔다. 학과 가운데는 철학, 심리학, 신학, 윤리학 및 승문(僧門) 등이 들어 있었다. 그 기간 중에 나는 ‘볼리비아’ ‘라파스’에 있는 ‘산 칼릭투스’ 학교의 강사로 첫 선교 임명을 받았다.

드디어, 1957년 7월 29일, 내 나이 39세 때에 오랫동안 고대하던 나의 예수회 사제 임명식 날이 왔다. 그 때 나는 감독 관구 주교 앞에서 복종과 순종의 상징으로 ‘산 쿠가트 델 발레스’의 신학부 교회 마루 바닥에 부복하고 있었다.

나는 보다 빈곤한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볼리비아’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으며, ‘안데스’ 산맥 높은 곳에 위치한 ‘운시아’라는 한 광산 지대의 교구 사제로 임명을 받았다. 나중에는 ‘산타 베라-크루즈’의 교구 사제로서 ‘코차밤바’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의 일로 말미암아 가르치는 일에 관계하게 되었으며 나는 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7개의 중학교 및 고등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또 다른 임명을 받았으며 이번에는 ‘수크레’ 시로 가서 ‘산 미구엘’ 교구를 맡게 되었다.

나의 최초의 의혹

내가 의혹을 품기 시작한 것은 ‘볼리비아’의 빈곤한 교구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 이 의혹은 교회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대표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매월 헌금 및 특별 ‘미사’, 결혼식, 장례식 등을 주재한 대가로 받은 돈의 일정액을 지방 주교에게 바쳐야 했다. 나의 교구는 가난하였으므로 주교에게 바치는 몫도 변변치 않았다. 그가 봉투를 열고는 “나에게 가져온 기부금이 고작 이것뿐이오?”라고 경멸적으로 말하였을 때 내 마음은 몹시 상하였다. ‘과부의 동전 두닢’이 그에게는 가치가 없었음이 분명했다.—누가 21:1-4, 듀웨이역.

나는 교구민들에게 베풀어준 봉사에 대하여 대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의견 충돌이 있게 되었다. 나는 복음서에서 읽은 일이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 (마태 10:8, 듀웨이역) 그러나, 나는 이러한 혁신적인 조치가 용납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다른 교구의 “동료 사제들의 권익이 손상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내 마음을 혼란시킨 또 다른 요인은 나의 교구 교회에서 사용되는 형상인 ‘크리스토 데 라 베라-크루즈’(그리스도 성 십자가상) 숭배와 관련하여 교권층이 지방의 이교 사상과 관습을 선뜻 받아들여 허락한 사실이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악귀적 광신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게다가 이들 종교적 축제들에는 종종 술취하는 일이 관련되어 있었는데도 이러한 이교적 주신 숭배자들을 배척한다는 여하한 공식적인 선언도 없었던 것이다.

‘수크레’에 있은지 5년 후에 나는 ‘스페인’에 있는 병환 중의 부친을 방문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여 누이인 ‘로라’(도로레스)와 ‘안젤리타’(안젤레스)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과 성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나의 놀라움을 상상해 보라. 특히 ‘로라’의 변화는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보인 일이 없었던 그가 이제는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볼리비아’에서 ‘증인’들과 접촉해 본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가르침을 조사해보기로 하였다. 누이들은 나에게 「모든 사물을 확인하고 훌륭한 것을 굳게 잡으라」는 작은 책을 주었으며 나는 즉시로 그것을 읽어 보았다. 나는 ‘증인’들의 신앙이 온전히 성서에 근거해 있음을 알고는 기쁨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성서를 존중해 왔으며 교부들의 저술물이나 “성인들”의 전기 대신에 성서를 매일의 묵상의 근거로 사용하였었다.

나의 ‘가톨릭’ 신학에 대한 도전

나는 이제 ‘증인’들이 그들이 전파하고 있는 대로 실천하는지 알아 보기 위하여 행동 면에서 ‘증인’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누이들은 지방 ‘증인’들이 집회를 보는 왕국회관에 나를 초대하였다. 나는 그 첫 집회를 호기심에 가득차서, 그러나 약간은 회의적인 마음으로 참석해 보았다. 그러나 나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힘쓰는 겸손한 남녀와 아이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내가 ‘볼리비아’에서 발전시키지 못한 것 즉 일단의 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여기 내 목전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작용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들의 책에서 읽어본 것 가운데 상당한 부분에 공감하였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그 회중 장로들 중 한 사람인 50대 초반의 ‘엔리크 르레이다’에게 소개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 어느 화학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차 안에서 오래도록 우리가 대화를 나눈 것이 생각나는데, 거기에서 나는 ‘증인’들의 가르침에 이의를 갖고 있는 주된 점들을 말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달리 나는 ‘미사’ 때의 성체(떡)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재하시는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또한 나의 영혼이, 하나님이시기도 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단 한번의 대화만으로는 나의 의문은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 나의 부친이 사망하고 나는 ‘볼리비아’로 돌아갔다.

‘볼리비아’의 증인들이 나를 방문하다

나의 요청에 따라 나는 임지를 다시 바꾸어 ‘코차밤바’의 ‘산타 베라-크루즈’ 교구로 돌아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진리를 찾으려는, 그리고 그릇된 행로를 걷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사물을 확인”하려는 나의 결의를 새롭게 하였다. (데살로니가 전 5:21, 신세) 겸손한 ‘볼리비아’ ‘증인’ 두 사람이 나를 방문해 주었다. 그들은 ‘카탈로니아’에서 온 ‘스페인’ 사람 ‘기네스 나바로’와 ‘볼리비아’ 태생의 ‘아리엘 아라오즈’였다. 나는 그들의 겸손과 확신으로 인해 큰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나를 열띤 논쟁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나는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도리어 우리는 생각하는 바들을 단순히 주고 받았을 뿐이었다.

나는 교구 내의 격무에도 불구하고 일을 조정하여 「모든 사물을 확인하고 훌륭한 것을 굳게 잡으라」는 서적을 사용하는 조직적인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미사’가 끝난 뒤 저녁에는 나의 발걸음이 왕국회관으로 향하는 날이 많았으며 그곳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파수대」를 연구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다.

‘가톨릭’ 교리 대 성서의 가르침

내가 가장 쉽사리 버릴 수 있었던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는 아마 영혼불멸 및 그에 부수되는 모든 교리들(지옥불의 고초, 연옥, 임보 등)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성귀 하나가 나에게서 그 방해물을 없애주었다. 그 성귀는 창세기 2:7로써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 하나님이 땅의 진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얼굴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 (듀웨이역) 그 내용은 사람이 사망시에 살아남는 산 영혼을 받게 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영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보아 나 자신이 바로 하나의 영혼인 것이다. 이것은 ‘산 쿠가트’ 신학교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조세 마리아 보버’가 ‘스페인’어로 번역한 고린도 전서 15:45과 잘 부합된다. 그 귀절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또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혼으로 만들어졌다.’” 영혼의 멸성에 대하여는 ‘보버 칸테라’의 ‘스페인’어 성서 민수기 23:10을 조사해 보았을 때 충분히 확증되었다. 왜냐하면 그 성귀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은 의인의 죽음과 더불어 죽으리라!”

삼위일체 교리에서 배운 것처럼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며 또 하나님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요한 복음 1:1이 나의 주된 버팀대였으나, 마침내 나는 희랍어 원문을 면밀히 조사하여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성 즉 근본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성귀들과 더불어 예수의 역할 곧 그의 아버지를 섬기는 가운데 항상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움이 되었다.—고린도 전 15:28; 요한 14:28; 마태 24:36.

이러한 간단한 성서의 빛과 부가적인 조사로 말미암아 나는 그토록 여러 해 동안 나를 눈멀게 했던 신학적 암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모든 진보된 신학 및 철학 연구가 진실한 그리스도교의 실제적인 열매를 산출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가톨릭’ 교회에서 그런 열매들을 볼 수가 없었다.—마태 7:16, 17; 갈라디아 5:22, 23.

수도원장의 놀라움

나는 여러 세기에 걸쳐 ‘가톨릭’ 교회가 성서 진리를 인간의 전통과 철학으로 대치하면서 성서 진리로부터 이탈해 왔으며 잘못된 것은 개개인들로서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마음으로는 이제 더 이상 ‘가톨릭’ 신자가 아님을 자인하게 되었다.

나는 예수회 지역구 수도원장에게 개인적으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나의 서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나의 요청을 들었을 때의 그의 놀라움을 상상해 보라! 그는 나에게 그 이유가 결혼에 대한 욕망 때문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그러한 생각은 나의 염두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례받은 ‘증인’이 되자 상황이 변하였으며 1978년 10월에 한 참한 그리스도인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쥴리오’, 나는 늘 당신이 균형잡힌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소. 하지만, 이제보니 정신병 의사에게 가봐야겠소.”

우리는 오랫동안 토론하였으며 나는 교회의 잘못된 점들에 관한 나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나도 당신이 이야기한 많은 점들을 시인하고 있소.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교회의 오류들을 시정하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교회에 머물러 있을 의무가 있다고 생각지 않소?”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모든 오류가 절대 무류의 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러한 오류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맨먼저 없애야 할 것은 그 무류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점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보았으며 복음서를 실천해 보려고 해 보았읍니다. 나는 교회 당국이 나에게 복음서와 상반되는 것들을 행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읍니다. 따라서, 내가 교회를 바로잡거나 변화시킬 수가 없으므로, 내가 종교를 바꾸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내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것을 떠나 참 교회를 찾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나는 그 후 지역구 수도원장에게 사임하려는 의도를 재차 밝혔다. 그는 나에게 한번 더 재고해 볼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이제 그 문제를 더 이상 지연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이 문제를 신중히 연구해 보도록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교구를 버리고 ‘볼리비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과 함께 살면서 그곳에서 그 문제를 연구하겠소.”

이 마지막 제의만은 그들에게 있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게 되면 ‘볼리비아’ 종교계에 상당한 소동을 야기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나의 누이 ‘로라’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마침내 자유케 되다!

나는 1976년 12월에 ‘스페인’에 돌아오자마자 ‘가톨릭’의 모든 종교적 관습을 버리고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과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얼마의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58세나 된 이전의 예수회 사제를 ‘스페인’에서 누가 고용하고자 할 것인가? 마침내 나는 개인 교수직을 얻게 되었으며, 가외로 조그만 사업을 경영하게 되었다. 나는 그날 그날 생활비를 충분히 벌 수 있으며, 내가 항상 바라던 바도 그것이 전부이다.

1977년에는 ‘볼리비아’ 포교구의 지역구 수도원장이 ‘로마’로 가는 도중 ‘스페인’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나의 최종 결정을 알고 싶어하였다. 나의 결정이 확고 부동함을 그에게 말하자 그는 ‘로마’ 예수회의 총회 및 수도원 총장에게 제출하도록 나의 동기를 서면으로 기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로마’에서 나에게 한 말에 의하면, 예수회 사제가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협회를 떠나겠다고 요청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요. 마치 예수회들은 그들의 온갖 연구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듯이 말이요!”

인간의 신학—“오물 덩어리”

이제 와서 신학교에서 연구하던 시절을 회고해 보면서 내가 공부했던 온갖 신학과 철학을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볼 때 그것들은 사실상 한갖 오물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참다운 지혜를 나에게서 감추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고 말한 일이 있지 않은가? (고린도 전 1:20) ‘바울’과 함께 나도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뛰어난 지식에 비추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게 되었읍니다. 그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상실하였읍니다. 나는 그밖의 모든 것을 쓰레기[“오물 덩어리”, 신세]로 간주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부가 되시게 하기 위함이었읍니다.”—빌립보 3:8, 신 미역 성서.

1977년 11월 11일에 마침내 나에 대한 해임 통고서가 도착하였다. 나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거기에 서명하였다.

같은 해 11월 27일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순회 대회에서 완전히 물에 잠김으로써 침례를 받았다. 그 행위로 나는 예수의 본을 따르고 그분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주신 임명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 여호와께 헌신하였음을 공개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마태 28:19, 20) 그날의 만족과 기쁨은 그보다 20여년 전에 예수회 사제로 임명되던 날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이 된 것이다.

침례받은 이래 나에게는 많은 축복들이 있었다. 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전파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관심가진 사람들과 몇 건의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특권을 즐기고 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설명된 그리스도의 본을 따름으로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행복하다. 나는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와 하나님과 같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진리를 찾아 구한 나의 오랜 노력은 이제 그 끝을 본 것이다. 당신도 그러한가?

[11면 삽입]

‘아마 독자는 무엇이 나로 하여금 선교 봉사 25년 만에 사제직을 포기하게 하였는지 궁금할 것이다’

[12면 삽입]

“나는 증인들의 신앙이 온전히 성서에 근거해 있음을 알고는 기쁨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13면 삽입]

“내가 교회를 바로잡거나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내가 종교를 바꾸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14면 삽화]

이전에 예수회 사제였던 ‘이니에스타’가 그리스도인 침례를 받은 후 ‘풀’장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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