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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오늘날 존중받는가?깨어라!—1992 |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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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오늘날 존중받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남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 전체에 걸쳐, 그리고 현재 세계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처우를 검토할 때, 몇 가지 간단한 질문만 해보아도 그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인간 관계에서, 주로 누가 피해자였고, 누가 가해자였는가? 결혼 생활에서 주로 누가 구타당하는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평화시에나 전시에 누가 강간을 당하는가? 어린이 성적 학대의 피해자는 대부분 누구인가? 소년인가, 소녀인가? 인간이 만든 법령에 따라 누가 이류 시민으로 취급되는가? 누구에게 투표권이 없는가? 교육받을 기회가 누구에게 제한되어 있는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그와 같은 질문들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자체가 잘 말해 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부밀러는 자신의 저서 「일백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를」(May You Be the Mother of a Hundred Sons)에서 자신이 인도에서 체험한 것을 근거로 이렇게 기술한다. “4억에 달하는 인도의 여인과 소녀들 중 약 75퍼센트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인도 여성은 시골에 산다. ··· 이런 여성은 읽고 쓰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할 줄을 모른다. 태어난 곳에서 30킬로미터를 벗어나 보는 예가 드물다.” 교육상의 이런 불평등은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역에 있는 문제다.
여러 나라에서 그러하듯이, 일본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 1991년 「아사히 연감」(The Asahi Yearbook)에 따르면, 4년제 대학교에 다니는 남학생 수는 146만 명인데 반해 여학생 수는 60만 명이다. 의문의 여지 없이, 전세계 여자들은 교육 분야에서 열등한 기회밖에 없음을 증언할 수 있다. 여자들은 ‘교육은 남자용’이라는 태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수전 팔루디는 최근의 저서 「반격—미국 여성에 대한 선전 포고 없는 전쟁」(Backlash—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에서 미국 여성의 신분과 관련된 몇 가지 적절한 질문을 제기한다. “미국 여성이 진실로 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모든 가난한 성인 중 3분의 2가 여성인 이유는 무엇인가? ··· 왜 여전히 남성에 비해 여성이 초라한 주택에서 살고 의료 보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많으며, 연금을 전혀 받지 못할 가능성이 배나 되는가?”
하염없이 고생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이 있다. 여성은 멸시와 모욕 그리고 성적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남성의 손에 천대를 받아 왔다. 이런 학대는 소위 개발 도상국에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국 상원 사법 위원회에서는 최근에 여성에 대한 폭력과 관련된 보고서를 편집하였다. 편집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 주었다. “6분마다 한 명의 여자가 강간당하고, 15초마다 한 명의 여자가 구타당한다. ··· 이 나라에서 폭력 범죄로부터 면죄된 여자는 아무도 없다. 오늘날 살아 있는 미국 여성 중 4분의 3은 적어도 한 번은 폭력 범죄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한 해에 3백만 명 내지 4백만 명의 여인이 남편에 의해 학대당한다. 이런 애처로운 상황 때문에 1990년에 여성에 대한 폭력 단속법이 제출되었다.—상원 보고서, 「1990년, 여성에 대한 폭력 단속법」(The Violence Against Women Act of 1990).
이제 전세계 남성이 여성을 존종하지 않는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이 인내해 왔는지 살펴보자. 그런 다음, 이 일련의 기사 중 마지막 두 기사는 각계 각층의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서로 존중할 수 있는지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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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정에서 존중받는가?깨어라!—1992 |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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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정에서 존중받는가?
“여자가 차례로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 그리고 살해된 방법은 달랐지만 근본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퀘벡[캐나다] 경찰은 각 여자가 과거 혹은 현재의 남편이나 애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금년[1990년]에 퀘벡에서 모두 21명의 여자가 치정 폭력의 희생자로 살해되었다.”—「매클린스」, 1990년 10월 22일.
일부 사람들이 “가정 생활의 어두운 면”이라고 부르는 가정 폭력은 가정 파탄의 씨를 심고 부부 관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가진 자녀를 산출한다. 자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이유를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부모 중 어느 쪽에 충성을 나타낼지 갈팡질팡한다. (‘왜 어머니가 그토록 잔혹하게 아버지를 때리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경우는 드물다.) 가정 폭력의 열매로서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들은 나중에 커서 그 역시 아내를 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인상 때문에 심각한 심리적 문제만 아니라 성품상의 문제도 갖게 된다.
UN 출판물인 「세계 여성—1970-1990년」(The World’s Women—1970-1990)은 이렇게 기술한다. “남성이 가정에서 여성을 공격하는 것은 가장 보고되지 않는 범죄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런 폭력이 범죄가 아니라 사회 병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배우자 학대는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앞 기사에서 인용한 상원 보고서는 이렇게 언명한다. “‘가정 폭력’이라는 용어는 부드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행위는 결코 부드럽지 않다. 통계는 배우자 학대가 얼마나 심각한지—얼마나 치명적이기까지 한지—에 대해 섬뜩한 실상을 제시한다. 해마다 2000명 내지 4000명의 여자가 학대받아 죽는다. ··· 여느 범죄와는 달리 배우자 학대는 ‘만성’ 폭력이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협박과 반복되는 신체 상해다.”
「세계 보건」(World Health)지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어느 나라에나, 어느 사회·경제 계층에나 있다. 많은 문화에서 아내 구타는 남성의 권리로 여겨진다. 여자와 소녀를 습관적으로 구타하고 강간하는 일이 너무 흔한 나머지 그런 것은 다른 사람들—법 당국자든 보건 요원이든—이 상관하지 않을 ‘사적인 문제’로 여겨진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런 폭력은 쉽게 학교 생활로 번진다.
1991년 7월에 케냐의 남녀 공학 기숙 학교에서 벌어진 일은 그 점을 예시한다. 「뉴욕 타임스」지의 보도에 따르면, “71명의 십대 여학생이 남학생들에 의해 강간당하였으며, 하룻밤에 다른 19명의 여학생이 기숙사 폭력으로 죽었는데도 ··· 지방 경찰이나 교사들이 그 폭력을 저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폭력이라는 이 만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비극은 케냐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역겨운 남성 우월주의를 역력히 보여 준다”고 케냐에서 가장 널리 보급되는 잡지 「주간 논평」(The Weekly Review)의 편집장 힐라리 응궤노는 기술하였다. “이 나라 여인과 소녀의 삶은 애처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 ··· 소년은 소녀를 존중하는 마음을 거의 혹은 전혀 가질 수 없게 양육받는다.”
전세계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흔히 소년들은 소녀들과 여자들을 열등한, 착취해도 좋은 대상으로 보도록 양육받는다. 여성을 공격하거나 지배하기 쉬운 존재로 생각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여성에 대한 불경과 노골적인 남성 우월주의는 예삿일이며, 그에 못지않게 친지 강간이나 데이트 강간도 예삿일이다. 그리고 강간과 관련하여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폭행은 순간에 끝날지 모르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평생토록 간다”는 점이다.—상원 보고서.
여성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지 않는 많은 남자들도 잠재 의식상의 여성 혐오자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런 남자들은 신체적 폭력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학대나 구타를 한다. 수전 포워드 박사는 저서 「여자를 미워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Men Who Hate Women & the Women Who Love Them)에서 이렇게 말한다. “배우자들이 설명한 바와 같이, [이런 남자들은] 다정하거나 사랑을 나타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돌변하여 잔인하고, 비평적이고 모욕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들의 행동은 노골적인 협박에서 끊임없이 퍼붓는 모욕적인 말이나 깎아 내리는 비평조의 좀더 교묘하고 은근한 공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어떤 형태이든, 결과는 같다. 남자는 여자를 괴롭힘으로 지배권을 취한다. 이런 남자들은 자신들의 공격으로 인해 배우자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
결혼한 지 15년 된, 아담한 체구의 일본인 야스코a는 가정 생활 체험을 본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는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하고 학대하였어요. 어머니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으며, 머리채를 잡아챘고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왜냐고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부정을 행한 것에 대해 어머니가 따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 문화에서 남자들이 첩을 두는 것은 아주 보통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진보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관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거지요. 결혼한 지 16년이 되었고 자녀를 넷이나 두었는데도 어머니는 이혼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양육비를 전혀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내 구타가 당국에 보고되는 지역에서도, 앙심을 품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의 법도 협박을 당하거나 두려움에 질린 배우자를 적절히 보호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연구 결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모든 살인 건수의 절반 이상의 경우, 그전 해에 경찰은 가정 폭력 고발건을 가택 수사해 달라고 다섯 차례나 요청을 받은 바 있다.” (상원 보고서) 일부 극단적인 경우,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해한 아내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피해자인 가정 폭력은 가지 각색의 형태로 나타난다. 인도에서 소위 지참금 살인(처가에서 보낸 지참금에 불만을 품은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것)으로 보고된 수는 1988년에 2209명에서 1990년에 4835명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 숫자를 온전한 것 혹은 정확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죽은 아내를—대개 조리용 석유로 일부러 화상을 입힘으로—가정 내 사고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에 더하여 가정에서 겪는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아내들도 있다.
아들, 딸을 구별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차별 대우를 받는다. 어떻게 그러한가? 본지는 인도 봄베이의 마두와 회견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도 가정에 아들이 태어나는 것은 경사입니다. 어머니의 걱정은 끝납니다. 이제 부모는 노후에 봉양해 줄 아들을 두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사회 보장’이 확보된 셈입니다. 그러나 딸을 낳으면 실패한 것으로 구박을 받습니다. 가정에 또 다른 짐덩이를 들여온 사람처럼 취급됩니다. 부모는 딸을 시집 보내기 위해 엄청난 지참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계속 딸을 낳으면 무능한 여자로 취급됩니다.”b
인도의 간행물 「익스프레스」지는 인도의 소녀들에 관해 “이들의 생존은 가족의 생존에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는다”고 보도하였다. 봄베이에서 실시된 한 조사는 “성 판별 검사에 이어 낙태된 태아 8000명 중 7999명은 여아였음을 밝혀 주었다”고 그 잡지는 언급한다.
엘리자베스 부밀러는 이렇게 기술한다. “일부 인도 여자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므로, 세계의 다른 지역의 소수 민족 혹은 인종 집단의 경우처럼 그들의 곤경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인권 그룹들은 그들의 복지를 지원할 것이다.”—「일백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를」(May You Be the Mother of a Hundred Sons).
“여자가 하는 일은 끝날 줄 모른다”
흔히들 “여자가 하는 일은 끝날 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남성이 흔히 가볍게 보아 넘기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자녀를 둔 여인은 남자들처럼 흔히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정해진 일과만 따르면 되는 호강을 누리지 못한다. 아기가 밤에 울면 보나마나 누가 일어나는가? 청소, 세탁, 다림질은 누가 하는가? 남편이 직장에서 집에 돌아오면 밥상은 누가 차리는가? 누가 설거지를 하고 또 자녀의 잠자리를 돌보는가?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더해서, 많은 나라들의 경우 물을 길어 오고, 심지어 아기를 등에 업고 밭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체로 어머니다. 어머니의 일과는 하루에 단지 8, 9시간이 아니라 12시간 내지 14시간 혹은 그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가외 시간 근무에 대한 수당도 없고, 수고했다는 인사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세계 보건」(World Health)지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경우, 많은 “여자들은 하루에 16시간 내지 18시간 일할 것으로 기대되며, [그런데도] 수입 수준이 아주 낮아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 ··· 굶주림은 매일의 실상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땔감을 모으거나 운반하는 여자들]은 하루에 불충분한 식사 한 끼밖에 먹지 못하며, 대개 조반을 거르고 집을 나선다.”
결혼한 지 20년이 된, 홍콩 태생의 시우는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인의 배경으로 볼 때, 남성은 여성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으며, 여성을 가정부나 아기 낳는 사람으로 혹은 정반대로 인형, 장난감, 성관계 대상으로 보기도 하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 여성은 지성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남자들이 귀기울여 주고 우리를 허수아비처럼 취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Men and Women) 책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어디서나, 여성을 대단히 존중하는 곳에서도, 남성의 활동은 여성의 활동보다 훨씬 높게 평가된다. 사회가 남녀간의 역할과 임무를 어떻게 정하는가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전체 공동체가 보기에 남성에게 속한 역할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일반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세계 여성—1970-1990년」의 머리말은 이렇게 알려 준다. “여성의 생활 여건—그리고 여성이 가정, 경제, 살림에 기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많은 통계 자료는 단순히 성을 무시하고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여건과 기여도를 묘사하는 관점에서 규정된다. ··· 아직도 여성이 하는 일 중 상당 부분은 경제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아예 평가받지도 못한다.”
1934년, 북아메리카 저술가 제럴드 W. 존슨은 직장 여성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성이 남성의 일을 떠맡는 일이 자주 있지만, 남성만큼 봉급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매일의 작업중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류 양재사와 여성 모자 제조업자는 남자다. ··· 일류 요리사도 한결같이 남자다. ··· 바로 이러한 사실로 남성이 일을 더 잘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어느 고용주든지 같은 일을 해도 여성보다 남성에게 기꺼이 더 많은 급료를 주고자 한다.” 이 말에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논평은 여전히 이 시대의 많은 남성들의 정신에 자리잡고 있는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
존중의 결여—세계적 문제
어느 문화든지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그 나름의 태도, 편견, 선입견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이런 태도는 여성의 존엄성을 합당히 존중하는 것인가? 아니면 대체로 남성의 신체적 힘이 더 우월하다는 이유로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남성 우월주의를 반영하는 것인가? 여성이 노예나 착취 대상으로 취급받는다면, 여성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어디로 간 것인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문화는 여성의 역할을 몰락시켰고 여성의 자부심을 침식시켰다.
세계 도처의 여러 사례 중 아프리카의 일례를 생각해 보자. “[나이지리아] 요루바 여자들은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는 무식하고 고분고분한 체해야 한다. 식사 시중을 들 때는 남편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이런 굴종이 갖가지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아내가 남편보다 어느 정도 뒤에 떨어져 걷는 일, 남편은 말이나 노새를 타고 가지만 아내는 걷는 일, 남편은 빈손으로 가면서 아내는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 따로따로 식사하는 일 등이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에드윈 라이샤워는 저서 「일본인」(The Japanese)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일본에서 남성 우월주의 태도를 역력히 볼 수 있다. ··· 남성에게는 자유를 주고 여성에게는 제약을 가하는 성에 대한 이중 표준이 여전히 횡행한다. ··· 더욱이 기혼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충실할 것이 기대된다.”
성적 괴롭힘은 많은 나라들에서 그러하듯이 일본에서도 문제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만원 차량에서 더 심하다. 도쿄 외곽, 히노 시의 야스코는 본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젊은 여성으로서, 저는 한동안 도쿄로 출퇴근하였어요. 일부 남자들이 기회를 틈타 몸의 이곳 저곳을 만지고 아프게 하여 아주 당황했습니다. 여성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참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지만 남자들의 그런 행동은 아주 천박한 짓이지요. 아침 출근 시간에는 여성용 차량이 별도로 있어서, 적어도 일부 여성은 그런 무례함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때 일본에 살았던 수는 그렇게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터득하였다. 그는 큰소리로 “후자케나이 데 구다사이!”라고 외치곤 하였다. 그 말은 “바보 같은 짓 그만하시죠!”를 뜻한다. 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말을 하면 즉각 시선과 행동이 따르지요. 여러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삽시간에 아무도 나를 만지지 않게 됩니다!”
가정에서 여성에 대한 존중의 결여는 세계적인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직장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여성은 직장에서 더 존중과 인정을 받는가?
[각주]
a 회견자들은 익명을 원하였음. 이 기사 전체에서 사용된 이름들은 가명임.
b 남편은 거의 언제나 딸을 낳은 것에 대해 아내를 탓한다. 유전 법칙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본 면 네모 참조)
[6면 네모]
아기의 성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태아의 성은 수태 순간에 결정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요소는 아버지의 정세포다. 여자가 산출하는 난자는 모두 여성 염색체인 X 염색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로 여성이다. 남자의 정세포 중 단지 절반에 X 염색체가 있으며 나머지 반에는 남성 염색체인 Y 염색체가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X 염색체가 결합되면, 여자가 된다. 남성 Y 염색체와 여성 X 염색체가 결합하면 남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를 낳을지 여자를 낳을지는 남성 정자의 염색체 유전 인자에 따라 결정된다. (「인체에 관한 기초 상식」[ABC’s of the Human Body], 리더스 다이제스트 출판물) 딸만 낳는 것에 대해 남편이 아내를 탓하는 것은 논리에 어긋난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출산의 제비뽑기다.
[8면 네모와 삽화]
엄청난 비극
엘리자베스 폭스 제너비스는 저서 「헛된 꿈이 아닌 여권 신장 운동」(Feminism Without Illusions)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많은 남자들이 ··· 갈수록 [자신들의] 힘을 자신에게 분명히 유리한 한 가지 상황—여자들과 갖는 관계—에서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는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 추리가 옳다면, 우리는 엄청난 비극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엄청난 비극에는 날마다 난폭한 남편이나 아버지, 다른 남성—“평등과 공의라는 시험에 응하지” 못하는 남성—의 손에 시달리는 수많은 여자들이 포함된다.
“[미국의] 30개 주의 경우,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강간하는 것은 지금도 합법적이다. 10개 주에만 가정 폭력을 단속하는 법이 있다. ··· 달아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여자들도 달아나는 것이 그다지 상책은 아님을 알게 된다. ··· 해마다 구타당하여 비상 대피소를 찾는 1백만 명의 여자들 중 3분의 1은 대피소를 찾지 못한다.”—「반격—미국 여자들에 대한 선전 포고 없는 전쟁」(Backlash—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의 서문, 수전 팔루디 저.
[삽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정 폭력은 가정 생활의 어두운 면이다
[7면 삽화]
수억 명의 사람들은—살 집이 있다 해도—집에 상수도나 하수 처리 시설, 전기 시설 없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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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직장에서 존중받는가?깨어라!—1992 |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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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직장에서 존중받는가?
“독신자이든, 기혼자이든,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사냥감으로 보더군요.”—제니, 전직 법률 서기관.
“병원에서 자행되는 성적 괴롭힘과 여성 학대는 악명이 높습니다.”—세러, 정간호사.
“직장에서 끊임없이 부도덕한 제의를 받습니다.”—진, 정간호사.
이런 사례는 특이한 경우인가, 아니면 널리 퍼져 있는 일인가? 본지는 직장 경험이 있는 여러 여성과 회견을 하였다. 그들은 남성 동료들로부터 존중받거나 존귀한 대우를 받았는가? 회견에 응한 여성들의 말은 이러하다.
세러는 미국 뉴저지의 간호사로 미국 군(軍) 병원에서 9년간 일하였다.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근무할 때, 신장 투석부에 자리가 하나 생겼어요. 일단의 의사들에게 그 자리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의사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책임자 의사와 하룻밤 지내면 되지’라고 대답하더군요. 나는 ‘그런 조건이라면 그 자리를 원치 않아요’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승진이나 일자리가 흔히 그런 식으로 결정됩니다. 여성은 호색적인 남성 상관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지요.
“또 한번은 집중 치료실에서 환자에게 정맥 주사를 놓고 있는데, 한 의사가 곁에 오더니 엉덩이를 꼬집더군요. 화가 나서 방을 나가 근처에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그 의사가 따라오더니 저속한 말을 하더군요. 그를 쳐서 쓰레기통 안으로 쓰러뜨렸습니다! 곧바로 환자에게 다시 왔지요. 두말할 나위 없이,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않더군요!”
카이로에서 비서로 일한 적이 있는 이집트의 한 기혼 여성 미리암은 이집트의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직장 여성들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여성의 옷차림은 서방 사회보다 훨씬 수수합니다. 직장에서 결코 신체적인 성적 괴롭힘을 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카이로 지하철에는 성적 괴롭힘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지하철의 첫째 차량은 여성 전용으로 되어 있더군요.”
얌전하지만 다부진 여성 진은 간호사로 20년간 일하였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직장 동료와는 누구하고도 결코 데이트를 하지 않겠다는 엄격한 방침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을 대하거나 병원의 남자 잡역부들을 대할 때 성적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에게 심리적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우리 간호사들이 그들의 성적 욕망에 ‘협조’하지 않으면, 잡역부들은 우리가 환자를 침대로 올리는 일과 같은 일을 할 때,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제니는 7년간 법률 서기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법률가들과 일하면서 보아 온 것을 설명한다. “독신자이든, 기혼자이든,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사냥감으로 보더군요. 그들의 태도는 ‘우리는 법률가로서 명망을 얻었으니 여자는 우리가 받는 특전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직업에 속한 여성들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그러면 그런 괴롭힘을 덜 받기 위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비서로서 그리고 식당 종업원으로서 일한 적이 있는 미국 흑인 여자 달린은 이렇게 말하였다. “자신의 행동의 한도를 정하지 않으면 일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남자가 추근거릴 때 같이 응수하기 시작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되지요. 내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나는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좋겠군요’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기혼 여성인 제게 그런 말은 좀 언짢게 들리는군요. 제 남편이 들으면 달가워하지 않을겁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점은 존중받고자 한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들 못지않게 상스러운 말—저속한 농담과 성적 암시를 주는 말—을 하는 여자라면 존중받을 수 없겠지요. 말과 행실에 있어서 받아들일 만한 것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 놓는다면 일부 남자들이 그 경계를 넘나들려고 할겁니다.”
괴롭히는 남성
14년간 간호사로 일한 코니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괴롭힘을 설명하였다. “평상시처럼 의사와 함께 환자의 붕대를 갈아주고 있었습니다. 배운 대로 표준 절차를 다 따랐지요. 무균 기법이라든가 그 외의 여러 가지 처치법을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의사는 전부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내게 화를 내면서 내가 하는 일에 일일이 트집을 잡더군요. 이런 식으로 여자를 깔보는 일이 너무 흔해요. 일부 남자들에게는 자만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남자들은 함께 일하는 여자들에게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앞서 언급한 세러는 이런 사실에 체험을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수술 준비를 하면서 환자의 생명 징후를 검사하였습니다. 환자는 심전도가 아주 불안정하였기 때문에 수술받을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의사에게 알린 것이 실수였죠. 의사는 화를 내면서, ‘간호사는 심전도가 아니라 변기만 살피면 돼’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마취과장에게 그 점을 알렸고, 과장은 이런 상황에서 그의 팀이 수술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게도 의사는 환자의 아내에게 환자가 아직 수술을 받지 못한 것이 내 탓이라고 말하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어쩔 도리가 없지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고요? 부지중에 남성의 자만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직장에서 괴롭힘과 수모를 당하는 일이 자주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면 법 앞에서 여성의 입장은 어떠한가?
여성과 법
일부 나라들의 경우 여성이 법 앞에서 이론상으로나마 평등을 얻는 데도 수세기가 걸렸다. 그리고 법이 그런 평등을 부르짖는 지역에서도 흔히 이론과 실제가 천지 차이다.
UN 출판물인 「세계 여성—1970-1990년」(The World’s Women—1970-1990)은 이렇게 기술한다. “토지를 소유하고 돈을 빌리고 계약을 맺을 권리에 있어서 남녀 평등을 부인하는 법률에 그런 격차[정부 정책상의 격차]가 많이 나타나 있다.” 우간다의 한 여인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우리는 여전히 이류 시민 아니 삼류 시민입니다. 우리 아들들이 우리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귀나 트랙터가 우리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타임-라이프의 출판물 「남자와 여자」(Men and Women)는 이렇게 기술한다. “1920년에 미국의 헌법 수정 제19조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보장하였다. 이 권리는 이미 오래 전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928년이 되어서야(그리고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론자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은 여성에 대한 정치적 불공정에 항거하기 위해 1913년 더비 경마 때 왕의 말 앞에 몸을 던져 죽게 되었다. 그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라는 대의 명분을 위해 순교한 셈이다.
199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국 상원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 단속법”을 고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성이 지배하는 입법 기관들이 여성의 필요에 대해서는 반응이 느림을 알 수 있다.
지상 전역에서 여성이 받는 처우를 이렇게 간략히 살펴볼 때, 이런 질문이 생긴다. 문제들이 과연 달라질 것인가? 상황이 바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다음 두 기사는 그런 질문을 검토할 것이다.
[11면 네모와 삽화]
누구의 형편이 더 어려운가?
“세계의 일 3분의 2를 여성이 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품 중 60 내지 80퍼센트를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식품 중 40퍼센트를 여성이 생산한다. 하지만 세계의 수입 중 여성이 차지하는 것은 10분의 1뿐이며, 세계의 부동산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것은 1퍼센트도 채 안 된다. 여성은 세계의 빈민 중 가장 빈곤한 편에 속한다.”—「일백 아들의 어머니가 되기를」(May You Be the Mother of a Hundred Sons), 엘리자베스 부밀러 저.
“[세계의 일부 지역들에서] 소녀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실 만한 식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실이다. ··· 십대 소녀들이 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어떤 경우에는 3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루 종일 걸리는 일이다. 이 소녀들은 열네 살이나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으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자크-이브 쿠스토, 「유네스코 쿠리어」, 1991년 11월.
[10면 삽화]
성적 괴롭힘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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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일깨어라!—1992 |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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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일
여성이 현재보다 더 존중받으려면, 언제 어디서 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가? 우선, 일반적으로 언제 어디서 편견과 선입견이 형성되는가? 가정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성장기에 형성된다. 우리의 태도는 대부분 부모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볼 때, 젊은 남성이 앞으로 여성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분명히 아버지와 어머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책 중 하나는 가정에 스며들어 부모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합당한 교육이다.
여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가정에서 선입견이 심어진다는 사실을 제니의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네 딸 중 장녀로서 비서직에서 일하는 결혼한 제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미국의 젊은 여성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합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눈길을 끌 수 있게 처신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가 하면 여자들은 자신들이 조금 열등한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게 길들여집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녀에게 여자보다는 남자가 낫다는 생각을 주입하는 경우가 있지요. 여성의 생활에 남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남성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암시를 줍니다.
“그런데 왜 여자의 자부심이 주로 몸매와 재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일까요? 남자도 그렇게 평가되나요?”
결혼한 지 32년 되었고 상점 관리인을 지낸 베티는 다른 점을 지적하였다. “여자를 경험이나 능력, 지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여성이라는 성별로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발 남자들이 제 말에 귀기울여 주면 좋겠어요. 성을 근거로 얕잡아 보지 말고요!
“흔히 남성은 여성을 아둔하거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옳은 결정을 하기에는 너무 아둔한—사람으로 봅니다. 제 말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남성은 자신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여성을 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물을 보는 남성의 관점이 곧 바뀔겁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남성이 황금률을 적용해 달라는 것이다.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마태 7:12.
이 여자들은 타당성 있는 점들을 제기한다. 여성의 참다운 가치는 겉모양이나 미모 혹은 문화적 선입견에 근거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스페인의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여자는 눈을 기쁘게 하고, 선한 여자는 마음을 기쁘게 한다. 전자가 보석이라면 후자는 보물이다.”
성서에서도 그와 비슷한 점을 이렇게 조금 달리 표현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우리가 책을 표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람을 성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베드로 전 3:3, 4.
가정에서 존중하는 일
많은 여자들, 특히 직장에 다니는 주부나 어머니는 남편이 가사를 가외에 해야 할 일로 인정하지 않고 대개 자기 몫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데, 이런 불평도 일리가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수전 팔루디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은 집에서도 평등을 누리지 못합니다. 집안 일 중 70퍼센트를 떠맡아야 하니까요.” 이런 불공정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아마 일부 문화권의 많은 남편들이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가사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아내 역시 직장에 다닐 경우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임무를 분담할 때는 일반적으로 남성이 책임지고 해야 할 분야—자동차 관리, 잔디 깎기와 정원 손질, 배관, 전기 작업 등등—를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내가 가사에 바치는 시간의 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일부 나라들에서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세차할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마치 그 일이 집안 일의 연장인 것처럼 말이다!
가사를 분담하라는 이런 제안은 남편들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해야 한다는 사도 베드로의 교훈과 일치한 면이 있다. (베드로 전 3:7) 무엇보다도 이 말은 남편이 결코 비인간적이고 무감각한 방짝이나 동거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남편은 아내의 지성과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 남편은 또한 아내가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생계 유지자로서 집안에 생활비를 벌어오는 것 이상이 포함된다. 직장에 다니는 많은 주부들도 그 정도는 한다. 남편은 아내의 신체적, 감정적, 심리적, 성적 필요를, 무엇보다 영적 필요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원칙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남편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즉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할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사람에게 이렇듯 반가운 초대를 하셨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마태 11:28, 29) 그리스도인 남편과 아버지들에게 참으로 도전이 되는 일이다! 각자는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아내가 쉼을 얻게 하는가, 아니면 아내를 억압하는가? 나는 친절하고 접근하기 쉬운 사람인가, 아니면 폭군처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인가? 나는 그리스도인 집회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집에서는 참을성을 나타내지 못하는가?’ 그리스도인 회중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같이 이중 인격을 가진 남편이 있어서는 안 된다.—베드로 전 3:8, 9.
그러므로 학대받은 한 그리스도인 여자가 묘사한 바와 같이, “왕국회관에서는 매우 훌륭하게 처신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다 주면서도 아내를 천대하는 독단적인 그리스도인 가장”인 남편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아내를 합당하게 존중한다면 억압과 모욕을 가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상대성이 있다. 아내 역시 남편에게 합당한 존경을 나타내야 한다.—에베소 5:33; 베드로 전 3:1, 2.
이제까지 언급한 것을 근본적으로 확증하여, 수전 포워드 박사는 “좋은 관계는 상호 존중을 근거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한다. 이 말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계속 말한다. “여기에는 서로 배우자의 감정과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포함될 뿐 아니라, 배우자를 매우 돋보이게 해주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 사랑을 품은 배우자들은 의견 차이를 다루는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한다. 그들은 의견 대립이 있을 때마다 결판을 내야 할 싸움으로 보지 않는다.”—「여자를 미워하는 남자,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Men Who Hate Women & the Women Who Love Them).
성서는 또한 에베소서 5:28에서 남편들에게 훌륭한 교훈을 한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 말이 참된 이유는 무엇인가? 결혼이란 두 사람이 50퍼센트씩 예금한 공동 은행 예금 계좌와 같기 때문이다. 남편이 그 돈을 오용한다면 두 사람 모두의 재정 상태가 해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어떤 면으로든 아내를 해롭게 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결혼은 공동 투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투자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양편 모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존중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점이 있다. 존중은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배우자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지만 존중은 획득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탁월한 능력이나 지위를 내세워 존중을 얻으려고 하지 않으셨다.a 마찬가지로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는 존중을 강요하려는 수단으로 성서 구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사려 깊은 방식으로 행동함으로 존중을 획득한다.
직장에서 존중하는 일
남자는 여자를 남성 자존심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보아야 하는가? 엘리자베스 폭스 제너비스는 저서 「헛된 꿈이 아닌 여권 신장 운동」(Feminism Without Illusions)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여성은 많은 남성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즉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고 보람 있는 개인 생활을 갖고 너무 많은 문제에 휘말리는 일 없이 세상을 살아 가기를 원한다.” 남자들은 그런 욕망이나 야망을 위협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그는 또한 이렇게 언명하였다. “세계가 겪어온 혹은 겪을지도 모를 온갖 변화에도 불구하고, 차이점은 지속되며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음을 도대체 왜 인정하지 않는가?”
특히 직장 상사나 감독자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 남자들은 함께 일하는 여자들의 존엄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으며, 성서적인 의미로 기혼 여성의 “머리”는 오직 한 남자 곧 남편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감독의 직책에 있는 다른 남자들도 그 직책으로 인해 존중받는다.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엄격히 성서적 의미에서 남편을 제외한 어떤 남자도 그 여자의 “머리”가 아니다.—에베소 5:22-24.
직장에서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덕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중적 의미 혹은 성적 암시가 담긴 대화를 하는 남자는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의 품위를 높이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 5:3, 4.
여자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자리를 바꾸는 것 역시 존중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간호사인 진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일자리를 변경하기 전에 몇 마디 상의라도 있었더라면 아주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 처리 방식일겁니다. 여성은 동정심을 필요로 하며 자신이 가치 있고 귀중하게 여겨진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존중과 관련된 또 다른 부면은 일부 여성이 “유리 천장”이라고 부르는 장벽이다. 이 말은 “개인 기업에서 여성이 고위 관리직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제도적 편견”을 뜻한다. (「뉴욕 타임스」 1992년 1월 3일) 그 결과 미국에서 최근에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고위직 종사자 중에 여성 점유율이 낮은데, 하와이는 14퍼센트, 유타 주는 18퍼센트, 루이지애나 주는 39퍼센트다. 존중을 나타내는 경우 세속 직장에서 승진의 근거는 성이 아니라 능력과 경험일 것이다. 조사 책임자 섀런 할런은 이렇게 말하였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 아직도 여성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물이 많이 있습니다.”
[각주]
a 「파수대」 1989년 5월 15일 호 10-20면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는 일—남편으로서”, “ ··· 아내로서” 참조.
[14면 네모]
존중—여성이 할 일은 무엇인가?
● 자중심을 갖고 유지한다
● 함께 있는 자리에서 허용되는 말과 행동을 분명히 밝힌다
● 받아들일 만한 행동과 말의 합당한 한계를 정한다
● 남자들과 더불어 외설적인 말이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농담을 주고받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숙녀다운 품위나 신사다운 품위를 감퇴시킨다
● 현재 유행이 어떠하든, 선정적인 옷차림을 하지 않는다. 옷차림은 자중심의 정도를 나타낸다
● 행실로 존중을 획득한다. 남성에게 기대하는 대로 남성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한다
● 새롱거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존중—남성이 할 일은 무엇인가?
● 모든 여자를 존중하고 품위 있게 대한다. 여자가 독단적인 태도를 나타내도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 아내가 아닌 여자에게 부당하게 애정 어린 용어를 사용하면서 지나치게 친근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다
● 상스러운 농담과 암시적인 눈길을 멀리한다
● 과도하게 칭찬하는 일을 피하고, 부당한 신체적 접촉을 피한다
● 여자가 한 일을 얕보거나 여자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는다
● 편견 없이 상의하고 귀기울이며 의사 소통을 한다
● 여자가 한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 집안 일을 돕는다. 이런 일이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 부모와 함께 산다면, 아내가 견디는 압력에 민감해야 한다. 현재 당신이 첫째로 책임져야 할 대상은 아내이며, 아내는 당신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마태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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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일깨어라!—1992 |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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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에서 여성을 존중하는 일
그리스도인을 위해 성서에서 규정한 신권적 머리 직분 단계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고, 남자는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며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고린도 전 11:3) 하지만 이 복종은 독재를 암시하는 말이 아니다. 가정의 머리 직분은 신체적으로든지, 심리적으로든지, 말로든지, 결코 폭력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머리 직분은 상대적인 것으로서 이 말은 남편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여기는 전제 군주가 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a “미안하오, 당신이 옳았소”라고 언제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많은 결혼 생활이 서로에게 활력소가 되고 오래 지속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겸손한 표현은 목에서 걸려 나오지 않기가 일쑤다!—골로새 3:12-14, 18.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결혼에 대해 교훈하면서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본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세워 놓으신 본을 따라 새 힘을 주는 본을 보임으로 존중을 획득한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기 때문이다.—에베소 5:23.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고 명확하게 교훈하였다. (베드로 전 3:7) 현대의 한 스페인어 번역판은 그런 사상을 해석하여 이렇게 말한다. ‘남편에 관해서는, 함께하는 생활에서 기지를 나타내야 하며, 아내에 대한 배려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 표현은 부부 관계에서 민감해야 할 필요성을 포함하여 많은 요소를 암시한다. 남편은 아내를 단순히 성적 만족의 도구로 보아서는 안 된다. 어렸을 때 학대를 당한 한 아내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런 경험을 한 아내에게 남편이 줄 수 있는 지원에 대해 여러분이 좀더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내들은 자신들이 참으로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감정적 애착은 전혀 없이 단지 어떤 신체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혹은 가정부 역할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b 결혼 마련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동반자이자 반려자가 될 수 있다. 결혼 생활에는 공동 활동과 상호 존중이 중요한 요소다.—창세 2:18; 잠언 31:28, 29.
왜 “더 연약한 그릇”인가?
베드로는 또한 남편들에게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교훈한다. (베드로 전 3:7) 베드로는 무슨 뜻으로 여성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한 것인가? 일반적으로 여성은 남성보다 신체적으로 더 연약함이 분명하다. 골격과 근육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내적인 도덕적 힘으로 말하자면 여자가 결코 남자보다 연약하지 않다.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이 잠시라도 참기 어려워하는 상황—폭력적인 배우자나 알코올 중독자인 배우자의 학대 등—을 여자들은 여러 해 동안 인내해 왔다. 그리고 산고의 시간을 포함하여 아기를 키우기 위해 여자가 인내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출산의 기적을 목격한 민감한 남편이라면 아내를 그리고 아내의 내적 힘을 좀더 존중하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내적인 도덕적 힘이라는 이 문제에 대해, 라벤스브뤼크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유대인 한나 레비 하스는 1944년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여기서 나를 몹시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보다—신체적으로나 종종 도덕적으로도—훨씬 더 약하며 고난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남자들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애처로울 정도로 도덕적 강인성이 몹시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낸다.”—「조국에 있는 어머니들」(Mothers in the Fatherland), 클라우디아 쿤츠 저.
이 경험은 여성이 단지 신체적으로 더 약하다는 이유로 여성을 차별할 만한 확고한 근거가 조금도 없음을 예시한다. 에드윈 라이샤워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현시대에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강한 의지력과 심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일본인」[The Japanese]) 이 힘은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사용될 수 있다. 회중에서 장성된 자매들은 심한 감정적 압박을 받는 자매들을 도울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학대받은 자매가 당장 위안을 얻기 위해 형제를 찾아가기보다는 장성된 자매를 찾아가기가 훨씬 쉽다. 좀더 지침을 구할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인 장로와 상의할 수 있다.—디모데 전 5:9, 10; 야고보 5:14, 15.
여성의 반응을 일괄적으로 감정에 치우친 것이라느니, “생리” 탓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많은 여성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는 베티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도 베드로가 기록한 것처럼 우리 자매들이 여성으로서 특정한 면으로 ‘더 연약한 그릇’이고 생물학적으로 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은 책임자나 감독자가 생색을 내는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듯하면서 여성의 모든 반응을 생리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성도 지성을 가지고 있기에 존중하는 태도로 귀기울여 주기를 원합니다.”
여성이라고 다 감정에 치우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이라고 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사람마다 별개의 인격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앞서 언급한 베티는 본지에 이렇게 말하였다. “성을 근거로 구분짓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분위기에 치우쳐 우는 남자들도 보았어요. 그리고 목석같이 무감각한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성에 대한 선입견 없이 객관적으로 여성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려면, 여성의 권리와 공정한 대우를 위한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또한 남성이 여성에 대해 약간의 존중의 표시를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모든 문화와 배경에서 남성은 상황에 따라 해야 할 역할을 검토해 보고, 여성의 생활을 더 행복하게 하고 새 힘을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마태 11:28, 29.
저술가이자 시인인 카타 폴릿은 「타임」지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남성은 강간하거나 구타하거나 살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남성의 생각과는 달리, 남성이 여성에게 결코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 생활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규정하는 문화적 개념과 가설을 형성한다. ··· 내가 논하는 남자들은 다소 진지하게 자기 분석을 하면서 자신의 선입견과 특권에 이의를 제기해 보며, 여성이 처해 있는 곤경에 대해 공정한 몫의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세계 남성이 여성에 대한 태도를 급격히 바꾼다 해도, 인류를 괴롭히는 불공정한 일들이 온전히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남성은 여성에게만 아니라 같은 남성에게도 불공정한 일과 잔혹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전쟁, 폭력, 살인, 암살단, 테러 행위는 많은 나라들에 으레 있는 일이다. 필요한 것은 온 땅을 다스릴 완전히 새로운 통치 체제다.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을 다스릴 그분의 왕국 통치를 통해 약속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때가 되어야 모든 사람—남자, 여자, 어린이—을 위해 참다운 공의와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가 되어야 남성과 여성이 서로 진정으로 존중하게 될 것이다. 성서는 이사야 54:13에서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한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는 크게 평강할 것이[라.]” 그렇다. 여호와의 의로운 원칙에 따른 합당한 교육은 상호 존중하는 신세계에 이바지할 것이다.
[각주]
a 「파수대」 1991년 12월 15일 호 19-21면 “결혼 생활에서 복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조.
[16면 삽화]
장성한 여자는 때때로 도움이 되는 교훈을 줄 수 있다
[17면 삽화]
남편이 집안 일을 거드는 것은 아내를 존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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