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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만인의 형벌
    깨어라!—1992 | 8월 1일
    • 죽음—만인의 형벌

      세계적으로 해마다 약 5000만 명이 죽는다. 바꾸어 말하면 하루에 13만 7000명, 한 시간에 5700명, 1분에 약 100명, 2초마다 3명 이상이 죽는 셈이다. 죽음이라는 형벌에서 면제된 가정은 없다. 왕이든 평민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죽는다.

      미국의 유명한 출판업자이자 발명가이며 외교관을 지낸 벤저민 프랭클린은 1789년에 한 친구에게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고 편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견해가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약 2800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지혜로운 왕 솔로몬은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안다’고 언명하였다. 그렇지만 솔로몬도 그보다 약 3000년 전에 바로 지상의 첫 인간에게 주어진 말 곧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확증한 것에 불과하다.—전도 9:5; 창세 3:19.

      죽음은 인류 역사 전체에 걸쳐 늘 슬픔을 가져왔듯이, 지금도 크나큰 슬픔의 원인이다. 우리의 정상적인 욕망은 살려는 것이지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옳은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나 벗들과 끊임없이 지속되는 강한 유대 관계를 맺기 원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죽기 때문에, 그런 유대가 끊어지고 만다. 우리의 조부모, 부모, 벗들이 죽는다.

      “사실상 113세를 넘게 사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며, 현재 증명된 인간 수명의 절대적 한계로 볼 때, 120세를 넘은 사람이 또 한 번의 생일을 기념할 때까지 살 가능성은 없다”고 「세계 기록 기네스 북」(Guinness Book of World Records)은 기술한다. 그러므로 19세기 이전의 역사적 사건은 다 제쳐두고라도, 윈스턴 처칠의 출생(1874년)이나 모한다스 간디의 출생(1869년), 1867년에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 일, 혹은 1865년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된 것을 목격한 사람 중에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상 현대의 온갖 의학적, 과학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수명은 옛날 사람 모세가 지적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을 지적한 말이다. 모세 자신은 120세를 살았다.

      인생에는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가족과 사별하는 것은 유난히 아픔과 슬픔을 가져온다. 그것은 흔히 유족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병과 죽음을 재촉하기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 중 누가 사망하든지, 크나큰 상실감을 야기한다. 한 정신과 의사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부모가 사망하면, 과거를 잃는다. 자녀가 사망하면 미래를 잃는다.” 사별로 인한 고난과 감정적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살림살이가 더 어려워져서 문제가 악화되는 일도 흔하다. 특정한 장례 의식이나 관습을 따르게 하려는 압력 때문에 슬픔이 더해질 수 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오게 되는 압박감과 짐을 어느 정도 덜 수 있는 길이 과연 있는가?

  • 죽음의 짐을 더는 일
    깨어라!—1992 | 8월 1일
    • 죽음의 짐을 더는 일

      장례 관습과 매장 관행은 나라마다, 문화마다 상당히 다르다. 정부에서 특정한 절차를 따르도록 법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대개 가족과 지역 사회의 종교적 신념이다. “장례 의식과 관습에 대한 연구 결과는 종교적 신념과 고인 앞에서의 일반 관습의 관계를 인상 깊게 예시한다”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말한다.

      인도의 힌두교 장례식을 고려해 보자. 특정 교파의 의식에 따라 시체를 화장할 준비를 한다. 되도록이면 갠지스 강에서 떠온 “성수”를 바닥에 뿌린다. 그 다음 그 바닥에 흰 천을 펴고 시체를 놓는다. 향기로운 향을 피우면 깨끗한 영들이 향내 나는 곳으로 온다는 신앙 때문에 향을 피운다. 백단향 반죽과 붉은 가루를 시신의 얼굴에 바른다. 시신을 씻긴 다음 흰 천으로 감고 그 위에 꽃을 뿌린다. 그런 다음 시신을 대나무 들것에 싣고 머리를 앞쪽으로 하여 강변 화장터로 간다. 화장터에 이르면 들것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발부터 화장하는 곳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미래의 생명을 바라보는 것을 시사한다. 장남이 화장용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이렇게 해야만 고인의 “영혼”이 평화를 찾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장한 후 재를 모아 인도의 ‘성스러운’ 여러 강들 중 하나에 뿌린다.

      파푸아뉴기니에는 친족이 고인의 시신을 만지고 입을 맞추고 시신 위에서 울며 맹세를 하고 고인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관습이 있다. 슬퍼하는 것에 더하여 심하게 애곡하며 장송가를 부른다. 장례 후 가까운 시일 내에 적어도 두 차례의 성대한 제례를 거행하는 것이 관습인데, 고인의 “영”에 영예를 돌리고, 그 영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어떤 보복도 막으려고 그렇게 한다.

      아프리카의 장례 관습과 전통은 영혼불멸 신앙에 역점을 둔 것이다. 고인이 친족들을 패망케 하는 일이 없도록 고인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인이 산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기를 기대하면서 많은 돈을 들여 갖가지 제물을 바친다. 고인이 숭배받는 동물로 혹은 당시 임신한 여인을 통해 다른 가족의 성원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을 믿는 사람도 많다. 나이지리아에서 들어온 한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수의를 입힐 때, 시체의 전체 모양이 반듯한 상태에 있도록 각별히 신경을 쓴다. 예로서, 고인의 손이 관에서 펴 있지 않으면, 고인이 환생할 때 결함 있게 출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혹은 수의를 제대로 입지 않은 고인은 미친 사람으로 환생한다고 믿기도 한다.” 죽은 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는 추측이 대개 아프리카 장례 절차의 주요소다.

      그리스의 여러 시골 지역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오랜 기간 정성을 들이는 의식을 치른다. 「사이언스」지는 이렇게 지적한다. “장례 후 5년 동안 고인의 여성 친족은 제사를 여러 차례 준비하고 관리한다. 아내, 어머니, 딸들의 주된 임무는 애도하는 것이다. 이들은 매일 밤 묘소에 가서 촛불을 켜고 묘석을 닦고 고인에게 이야기를 하며 애가를 부르고 애곡한다. 이런 의식을 완벽하게 치르면 고인의 영혼이 하늘에 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 후에는 유골을 파내어 마을 공동 납골당에 안치한다.

      일본에서는 대부분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른다.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힌 후 흰 천으로 덮고, 악령들을 물리치도록 가슴에 칼을 놓는다.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놓은 후, 승려가 시신 옆에서 수다라(불경의 경문)를 음송하고 고인에게 불교식 사후 이름을 붙여 준다. 이 이름에 사용된 글자 수에 따라 거액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 다음 칠하지 않은 나무 관에 시신을 넣는다. 고인을 애도하고 고인의 영혼의 휴식을 빌기 위해 밤새도록 혹은 절반 동안만 철야를 한다. 승려가 수다라를 음송할 때 애도자들은 차례로 향을 조금씩 태운다. 다음 날 장례식 때에도 제단 위에 관, 고인의 사진 및 불교 의식상의 여러 제구를 놓고 그 앞에서 비슷한 의식을 행한다. 그 다음 법으로 요구된 화장을 한다. 그 후 얼마 동안 주기적으로 향을 피우며 승려는 수다라를 음송한다. 그 영혼이 인간사에 미치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조상의 영혼이 되어 자연의 본성에 속하게 되었다고 여겨질 때까지 그 일을 한다.

      유언을 분명하게 남김

      그와 같은 장례식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오게 되는 압박감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라 짐을 더 무겁게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짐 중에 하나는 비용이다.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데는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 승려나 사제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주재하는 장례식에 대해 거액의 기부금이나 대가를 기대한다. 성대한 제례와 의식 또한 비용이 많이 든다. 고인의 소원을 넉넉히 들어주라든가 고인이 믿지도 않은 의식을 거행하라는 압력이 있을 수도 있다. 지역 사회의 표준에 맞추어 품위 있는 장례를 치르지 않을 경우 가족이나 벗들이 원성을 높일지 모른다. 자신의 장례식 처리 방법에 대해 유언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그런 유언을 문서로 남기고 증인을 세우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일본의 한 주부는 85세 된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그런 교훈을 배웠다. 아버지는 단지 가족끼리 모여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를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통에 따른 장례식을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후 그 주부는 도쿄의 「아사히 신문」에 이렇게 기고하였다. “여느 사람과 다른 방법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장례가 자신에게 아무리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평상시의 대화에서 가족과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족의 동의를 얻어 놓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한 유서를 남김으로 유족이 비난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지방 관습에 어긋나는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예로서 일본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죽을 때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족들이 장례식을 치르면서 불단 앞에서 하듯이 그의 관이나 사진을 놓고 숭배하는 태도로 절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미리 지시 사항을 문서로 남겨 놓을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조의를 표한 후에는 자신의 시체를 화장하고 그 후 납골 상자나 사진을 놓는 일 없이 추도식을 간소하게 하라고 일러둘 수 있다. 문제를 피하기 위해 가족을 포함한 친족에게 그 절차를 미리 알려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장의사를 상대하는 일

      백 년 전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가족과 벗들이 있는 가운데 집에서 운명하였다. 자녀들도 임종의 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죽음에 대해 배워 알았다. 그러나 세계의 진보된 산업 국가들에서는 이 모든 일이 바뀌었다. 사람이 죽어갈 때 많은 경우, 신속히 병원으로 옮겨 수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한다. “현대 의사들은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당한 것, 용납할 수 없는 것, 자신들이 강구한 온갖 치료법의 패배, 때로는 거의 개인적인 패배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기술한다. “종종 환자를 고려하지 않은 채—때로는 여전히 하나의 ‘인격체’를 대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은 채—가능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병을 치료하려고 든다.”

      현재 미국에서 장례비는 묘지 비용을 포함하지 않고도 평균 3000달러가 넘는다. 사람들은 동정심을 나타내는 장의업자를 대할 때, 그 업자가 돈을 벌려고 그 사업을 하는 것임을 잊는 경향이 있다. “장의업계에서 영리 추구가 유달리 성행한다”고 「변모하는 시대」(Changing Times)지는 말한다. “여느 상업계와 마찬가지로 구매자가 비윤리적인 판매자로부터 돈을 쓰라는 압력을 받거나 기만당하거나 부당한 대금을 청구받거나 속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장의 물품을 구해 보는 것이고, 사별의 슬픔을 안고 있는데다 조속히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위험이 더 많다.”

      하지만 취할 수 있는 대비책들이 있다. 한 가지는 자신의 장례비를 준비해 놓는 것이다. 특별한 예금 계좌로 유족에게 신탁해 둘 수 있다. 미국 은행법에 따르면, 그런 계좌(토텐 신탁이라고 함)의 금액은 수익자가 신분증과 사망 진단서를 제출하면 찾을 수 있다. 그때까지는 본인이 금액을 관리할 수 있다. 기반이 든든하고 명망 있는 보험 회사에 생명 보험을 들어 놓는 것도 대비책이 될 수 있다.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에게 특히 재정 문제에 대해 반드시 일러 두어야 한다. 유서를 작성하는 것 역시 매우 유익하다. 부부가 함께 죽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내가 남편보다 오래 산다. 흔히 아내들은 그런 조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가슴아픈 일과 고통을 더 당한다. 뜻하지 않게 죽음이 닥칠 수 있으므로, 그런 문제를 미루지 말고 가족과 함께 이야기해 두어야 한다.

      슬픔에 대처함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을 견뎌 온 사람은 가슴에 큰 상처를 안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울고 애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슬퍼하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그 길이가 다르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사별의 슬픔을 비교적 빨리 이겨 내는 한편 1년이나 그 이상 지나도록 이겨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슬퍼하는 일을 그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슬픔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는가?

      공동 사회에서 자신을 고립시켜 외따로 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가서 벗들과 친족에게 전화를 하거나 그들을 찾아감으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슬픔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일이다. 혼자 있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솔선하여 연락함으로 그들이 당신과 의사 소통을 하고 도움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좋다.

      불과 3년 사이에 어머니 그리고 오랫동안 암과 싸워 온 41세 된 사랑스런 아내를 포함하여 친족 다섯 사람을 잃은 한 남자는 훌륭한 조언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실로 하염없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삶을 현실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없이 슬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역경에 적응하고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지원과 격려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는다. 우리는 서로 감정이 터져 나와 당황할 수도 있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이 우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때인데도 그런 사람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다른 길로 피해 간 것 때문에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한 과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혼자 슬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절실히 필요하였지만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더군요.”

      초상이 났을 때 신속히 달려와 도움을 주다가 금방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상을 당한 후, 유족이 시초의 충격을 이겨 내는 데는 수주일 혹은 여러 달이 걸리기도 한다”고 심리학 교수 퍼트리샤 민스는 말한다. 그리고 비통함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슬퍼할 줄 모르는 냉정하고 인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슬픔을 이겨 낸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부 사람들은 슬픔을 견뎌 내는 내적 힘을 더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벗들이 솔선하여 유족을 도와 문제를 처리하고 필요한 서류를 갖추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덕이 되는 일이다! 장례 마련을 할 때 지원해 주는 듬직한 손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 있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겠는가! 자녀들을 돌봐주고 조상하러 온 친척들과 벗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고마울 것이다! 벗들과 이웃 사람들이 날마다 음식을 가져오고 집안의 허드렛 일을 해주고 애도하는 유족들을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는 것은 얼마나 사려 깊은 일인가! 슬퍼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둘 때 얼마나 좋겠는가! 위로의 말을 듣고 따뜻하게 감싸 주는 손길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위안이 된다! 심지어 여러 달이 지난 후에도 슬퍼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보고 사랑스런 말을 해주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런 희망이 있는가?

      [5면 삽입]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7면 네모와 삽화]

      자녀에게 무슨 말을 해줄 것인가?

      자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춰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죽음과 죽어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이 좋다. 모호한 표현을 하지 않아야 한다. “할아버지가 떠나셨다”라든가 “할아버지를 잃었다”고 말하면 자녀는 할아버지가 돌아올 것으로 혹은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지 모른다. 자녀가 죽음이라는 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질문들에 성경적으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자녀는 자연을 통해 죽음에 대해 배우기 시작할 수 있다. 자녀에게 동물, 새, 곤충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다. 참을성을 나타내고, 자녀가 영화나 TV에서 배웠을지 모르는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는 것이 좋다. 죽음에 대해 자녀에게 전혀 알려 주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나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다.

      어린 자녀는 죽음에 대해 책임을 느낄지 모른다. 특히 죽은 사람에 대해 화난 감정을 품은 적이 있다면 그럴 것이다. 자녀의 잘못이 아니므로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음을 이해시켜 주어야 한다.

      어버이를 잃은 자녀는 버림받았다는 두려움을 매우 절실히 느낀다. 되도록이면 자녀를 차분하게 진정시키고, 그들이 사랑과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좋다. 자녀는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어버이를 데려가셨다는 말을 듣는 자녀는 하나님에 대해 증오심을 가질지 모른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성서 진리를 아는 것은 도움이 된다. 자녀를 안심시키고 자녀에게 사랑과 지원을 베풀어야 한다.

      [8면 삽화]

      슬퍼하는 사람에게 지원과 격려를 베풀라

  • 죽음의 가시가 제거되다
    깨어라!—1992 | 8월 1일
    • 죽음의 가시가 제거되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 혹은 정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실은 실제로 그렇지 않음을 성서는 알려 준다. 죽음은 죄로 인해 오게 된 원수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성서는 로마서 5:12에서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죽도록 의도하시지 않았으므로, 인자하시게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사형을 상쇄시킬 상응하는 대속물을 마련하셨다. (마태 20:28; 요한 1서 2:2) 그분은 또한 완전히 새로운 정부의 다스림 아래 온 인류가 거할 지상 낙원을 약속하셨다. 그 정부는 죄와 사망의 영향을 깨끗이 없앨 것이다. (누가 18:30) 성서는 계시록 21:3, 4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면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에게는 부활 희망이 있다. 즉 그 지상 낙원에서 완전히 건강한 몸과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다시 살 전망이 있다. 그렇다.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소리를 듣고 나올 때가 오고 있다.’ (요한 5:28, 29, 「새번역」) 소리를 발하실 분은 인류를 대속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더 보증하신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한 6:40.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탱할 힘을 주는 것이 바로 이 부활 희망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 안에서 자는”(「신영어 성서」) 것임에 불과함을 잘 알기 때문에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전 4:13)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사물의 제도에서 사별한 사람과 재회할 즐거움을 고대한다. 그들은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로마 15:4, 13; 고린도 후 1:3; 데살로니가 후 2:16.

      이런 이유로 여호와의 증인의 장례식은 여느 장례식과 두드러지게 다르다. 증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그분의 말씀인 성서에 위배되는 어떤 관습도 피한다. 성서의 가르침이 아닌 신앙을 근거로 한 관습과 물품을 피한다. 증인은 참 하나님 여호와만을 숭배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 숭배하는 태도로 영예를 돌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나 지위를 과시하려는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1서 2:16) 증인의 장례식은 간소하고 품위 있으며, 유족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한다. 고인을 회상하는 연설을 하고 성서에서 볼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한다. 증인도 애도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하지는 않는다.

      여호와의 증인은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인 죽음’이 곧 제거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때가 되면 이러한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죽음이 이김에 삼킨 바 되었으니 죽음아, 네 이김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가시가 어디 있느냐?”—I 고린도 15:26, 54, 55,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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