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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92 12/1 18-21면
  • “나치당은 우리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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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치당은 우리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
  • 깨어라!—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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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2 12/1 18-21면

“나치당은 우리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집이었다. 나는 문을 두드리고는, 집에 아무도 없기를 바라면서 부들부들 떨고 서 있었다. 만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였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호별 전파 활동에 처음 나온 참이었다. 때는 1934년 11월이었으며, 이 곳 독일에서 히틀러는 그런 전파 활동을 모두 엄격히 금지하였다. 소규모의 우리 집회를 인도하는 봉사자가 복음 전파하러 나갈 계획을 거론했을 때, “설마 나를 두고 한 말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였다. 어쨌든 나는 아직 침례도 받지 않았고, 아는 성구라고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내 짐작은 틀렸다. 정말로 나를 두고 한 말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서 있게 된 것이다.

집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한시름 놓았다. 다음 집에서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안에서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았다. 한 여자가 그릇을 씻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내가 아는 유일한 성구인 마태 복음 24:14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나중에 귀머거리라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한 남자가 내 옆에 나타났다. 남편이리라 생각하고 계속 증거하고 있는데, 어느새 권총이 내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나치 지도자였다! 길 건너편에서 전파하고 있는 동료가 앞서 이 남자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의 발길에 차여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었다. 나치 당원은 그 형제의 그날 증거 활동을 중단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또 나를 발견하자 체포하게 된 것이다. 동료는 단지 먼지만 털어 버리고 계속 전파한 반면에, 나는 결국 넉 달 동안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전파하는 나의 천직은 시작되었다!

강제 수용소로!

석방된 후, 형제들은 나를 신임하고서 지하 증거 활동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치 당원들이 내 일거일동을 추적했으며, 오래지 않아 다시 체포되었다. 지방 경찰은 나를 게슈타포에게 데리고 갔는데, “강제 수용소로!”라는 판결을 듣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나는 에스테르베겐으로 가야 했다. 거기에는 약 120명의 증인들(비벨포르셔)이 있었고, 나치 친위대원들이 우리의 충절을 깨뜨리려고 작심하고 있었다.

우리가 “강철 구스타프”라는 별명을 붙인 한 중사가 있었는데, 그는 우리를 타협시키려고 작심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우리 모두를 8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 강제로 격렬한 운동을—쉬지도 않고 하루 종일—시켰다. 날이 저물 때쯤에는, 형제들 중 반수가 졸도하거나 병이 나서 의무실에 누웠다. 유감스럽게도, 한 회중의 감독자가 약해져서 “타협서”에 서명하자, 그의 회중에 속한 다른 12명도 서명에 동참하였다.

“강철 구스타프”는 자신의 고문이 효력이 있어 보이자 의기 양양해져서 이제 이렇게 장담했다. “내일이면 너희 모두가 이 문서에 기꺼이 서명할 것이고, 여호와는 너희를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아, 그 날 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한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강철 구스타프”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결국 우리는 막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때까지 구스타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 날 아침, “강철 구스타프”는 수용소로 오는 길에 고통스런 방법으로 자신이 강철보다 약하게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탄 오토바이가 수용소 출입구 측면의 벽돌 기둥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던 것이다. 출입구는 폭이 9미터가 훨씬 넘었다! 그는 이마가 찢어지고 팔이 부러져서 병원으로 급송되었다. 두 달 후 드디어 다시 보게 되자,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고함쳤다. “너희들의 여호와가 나한테 이렇게 했단 말이다!” 우리들 중 그의 말을 조금이라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네덜란드로

1935년 12월에, 석방되면서 독일 군대에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는 응하지 않고, 네덜란드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서 증거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간신히 네덜란드에 들어가자마자 증인들을 찾았는데, 그들은 내게 네덜란드에 머물라고 간청했다. 다시 자유롭게 전파하고 그리스도인 집회에서 형제 자매들과 함께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웠다! 우리는 낮에는 전파하고 밤에는 텐트에서 잠을 자면서, 네덜란드의 농촌 지방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우리는 한 달에 평균 200 내지 220시간 전파했다.

식품을 사고 다른 비용을 지불할 돈이 별로 없었다. 한 농부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는 우리가 밤에 변변찮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보더니 저녁 식사에 우리를 초대했다. 진수 성찬이 차려진 식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부터 시작해서, 사랑이 많은 이 가족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버터, 계란, 치즈, 빵을 대주었고, 심지어 빨래도 거들어 주었다. 그 가족 전부가 증인이 되었다. 앞에 놓인 사업을 수행하는 동안, 그들은 매우 중요한 연줄이었다.

1936년에 스위스 베른에서 대회가 열렸다.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 조셉 F. 러더퍼드가 그 곳에서 연설했다. 그 동안 내내 전 시간 복음 전파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침례를 받은 것이 바로 그 때였다!

헤이그

나는 헤이그 지역에 임명되었다. 그 곳에서 여러 가족이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직도 그들 중 얼마와 서로 연락하며 지낸다. 1939년에 네덜란드 경찰이 나를 체포했다. 하필이면 나치 스파이로 말이다! 감옥에서는 외부로 나가는 내 편지를 판사가 모두 읽는다는 것을 잘 알고서, 최선을 다해 편지로 증거를 계속했다. 다섯 달 후에 석방되었는데, 그중 마지막 두 달은 독방에 있었다. 헤이그에 있는 집에 돌아온 지 며칠도 안 되어서, 독일 루프트바페가 그 지역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게슈타포가 침략군을 뒤따라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제 다시 지하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그러나 어떻게 적발되지 않고 돌아다닐 것인가? 자전거포를 운영하는 형제가 내게 특수 자전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비밀 경찰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아서, 똑같은 독특한 색깔에다 핸들이 높이 달리고, 군도(軍刀)를 꽂는 클립도 있었다. 비밀 경찰은 내가 동료인 줄 알고, 심지어 인사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차도와 산울타리로 가려진 자전거 길로 가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차도로 자전거를 타고 오던 경찰관 두 명이 산울타리 틈새로 나를 발견하고는 도망자로 생각했다. 나는 생애 최고의 속도로 자전거를 달렸다! 그들이 방향을 바꾸어 나를 따라오기 위해서는 먼저 고가 교차로를 지나야 했으며, 열심히 따라왔지만, 급기야 나는 그들을 떨쳐 버렸다.

여러 번의 구사일생

이제 경찰은 내가 헤이그에 있음을 알았다. 나는 안전을 위해서 여러 다른 집에서 숙박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자녀가 셋 있는 가족의 집에서 숙박했다. 여느 때처럼, 경찰이 급습할 때 재빨리 입을 수 있도록 옷을 펴 놓았다. 또한, 내가 떠날 때 빈 침대에 한 아이를 옮길 수 있도록, 두 아이가 함께 자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나치 당원들은 온기가 있는, 빈 침대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이러한 방책이 효력을 발휘했다. 계속해서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아홉 살짜리 소년을 내 침대에 뉘어 놓고는, 옷가지를 서류 가방에 챙겨 넣고,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자마자, 맨발로 뒤 창문에서 눈 속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 시간이 겨우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뒤뜰에 경비를 배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성서 연구를 하는 한 가족의 집으로 달려갔다. 비록 새벽 5시 30분이었고 겨울이라 어두웠지만, 이 남자는 아무 말없이 나를 들어오게 하여 숨겨 주었다. 그의 가족 세 사람 모두 나중에 증인이 되었다.

내가 막 떠나고 나서, 게슈타포는 그 가족에게 질문할 때 어린 소년에게 집중했다. 그들은 “아저씨”가 최근에 왔었는지 말해 주면 돈을 주겠다고까지 했다. 그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네, 오래 전에 왔었지요.”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소년은 몰랐다. 그들은 낭패를 당하고 떠났다. 후에 어머니는 소년에게, “톰 아저씨”(지하에서의 내 이름)가 거의 밤새도록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대답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스물네 시간은 분(分)으로는 무척 많으니까, 긴 시간이지요.” 사실 그렇다!

다음 임지는 그로닝겐이었다. 그 도시의 일부 증인들에게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전파 활동은 실제로 중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형제들은 다시 아주 담대해져서 네덜란드에 있는 포악한 게슈타포를 문제시하지 않게 되었다. 1942년 어느 날 밤, 우리는 심지어 “습격”에 참가하기까지 하여 미리 정해 놓은 십 분 동안 그 도시 전역에 수천 장의 성서 전도지를 배부했다. 신문들은 영국 공군이 여호와의 증인을 위해 수백만 부의 팜플렛을 배부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우리가 살아 있고 건재하다는 것을 게슈타포에게 알린 것이다. 나치당은 우리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결코!

전쟁은 질질 끌었고,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일은 점점 더 위험해졌다. 어느 날 밤, 한 형제와 내가 힐베르숨에서 비밀 집회를 가진 후에 떠나는 참인데, 누군가가 내 등에 부딪히면서 어떤 물건이 덜컹하고 내 발 밑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집어들고 보니까 독일 군인의 헬멧이라서 매우 놀랐다! 헬멧 임자가 자기 자전거 옆에 서 있다가, 그 때 손전등을 내게 비추었다. 나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내 손에서 헬멧을 잡아채고, 권총을 뽑아 겨누더니,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너를 체포한다!”

몸이 떨려 왔다. 만일 체포되면 필시 죽게 될 것이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했다. 소란스런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때 잘 보니까 그 군인은 약간 휘청거리고 있어서, 술에 취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독일 군대의 규율은 장교가 민간 복장으로 다니는 것이 허용된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 군인에게 뚜벅뚜벅 다가가서 있는 힘을 다해 권위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 그 군인은 깜짝 놀랐다. 그는 헬멧을 얼른 쓰고 내게 경례를 했다! 그는 자신이 장교를 모욕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둠 속으로 슬그머니 도망쳐 버렸다. 구경꾼들도 흩어졌다. 나는 또다시 위기를 넘긴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할 뿐이었다!

벨기에에서의 지하 활동

다음 임지는 또 다른 나라인 벨기에였다. 엔트워프에서는 주임 봉사자가 되었다. 금지령 때문에, 나는 매주 다른 집에서 소규모 집회를 여러 번 사회하였다. 그리고 또 배달 요원 역할도 했는데, 그 일은 그 어려운 시기에 영적 양식이 끊이지 않게 한 놀라운 전달 사슬에서 또 하나의 연결 고리였다.

네덜란드 국경에서 벨기에로 서적을 밀반입하기 위해 만나는 장소는 한 식당이었다. 그 건물 자체는 벨기에에 있지만, 정원은 네덜란드에 있어서, 내가 접선할 사람을 만나고 서류 가방을 교환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주인은 우리가 영국 정보부 첩보원이라고 생각하고는 우리에게 협조했다. 그는 심지어 담당 경관에게 우리를 간섭하지 말라고 말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새로운 순찰 경관이 근무중이었는데, 그는 나치 사상을 지닌 벨기에인으로, 나를 전혀 몰랐다. 그는 큰 가죽 가방을 든 나를 보자 가방을 열어 보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나는 거절했다. 아무튼 가방은 삼, 사백 부의 「파수대」지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체포하여 경찰서로 데려갔다. 그 곳에서 담당 경관은 순찰 경관에게 자신이 나를 맡는 동안 나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 번에는 좀 작은 가방을 들고 오십시오.” 나는 다시 여호와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디데이(1944년 6월 6일)가 도래하여 연합군이 벨기에로 진격하기 시작한 후, 전선은 즉시 엔트워프로 밀려들었다. 양편에서 벌인 포격전으로 포탄이 삽시간에 도시 전역에 난무하였기 때문에, 증거 활동과 집회 참석이 정말 도전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지부의 종은 내가 더 이상 지하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잘못 판단했다. 내 정체를 드러내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 친절한 경찰 서장의 충고를 거스르고, 지부의 종의 말에 순종했다. 열한 달 후에서야, 내 생애 가장 끔찍한 체험에서 벗어났다. 당국은 내 이야기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나를 게슈타포 요원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 때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가장 혹독한 상태로 나를 감금했다. 나보다 젊은 많은 남자들이 그 몇 달 사이에 병들어 죽어 갔다. 마침내 석방된 후, 나는 신체가 완전히 쇠약해져서 고생했다.

충실한 봉사를 계속하다

지긋지긋한 지연과 심문 그리고 투옥을 더 겪고서야 비로소 독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독일을 떠난 지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충성스러운 증인인 어머니와 재회하게 되었고, 우리는 많은 체험을 함께 나누었다. 건강이 서서히 회복됨에 따라, 전 시간 증거 활동을, 이제는 슈바인푸르트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오만하게 자신의 군대를 사열하던 바로 그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후 첫 대회 준비에 기여한 것은 참으로 큰 즐거움이었다! 후에 미국에서 열리는 워치 타워 길르앗 학교에 선교인으로서 훈련받기 위하여 가도록 수락되어 가슴이 설레었다.

길르앗으로 떠나기 바로 전에 가졌던 모임에서 릴리언 고비터스를 만났다. 그는 미국에서 기 경배 문제에 대한 종교적인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었다. 그 자매는 모임에서 내가 부른 독창을 즐겼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는 미소만 지었다. 나는 계속 미소를 지었고, 릴리언은 계속 이야기했다. 결국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 둘 다 길르앗을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선교인으로 일할 때 결혼하였다.

끝내는, 내 건강 문제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아들 딸 하나씩 사랑스런 두 자녀를 두었다. 둘 다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되어 기뻤다. 건강이 나아지면서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회중들을 도왔다. 이 사업은 결코 중단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에 보조를 맞춰 나가려고 노력한다. 나는 지금도 지하에서 일한 나날들을 회상하며 흐뭇해한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나치당은 우리를 중단시킬 수 없었다. 분명히 그분은 아직까지도 이 활동을 축복하시며, 그분이 만족하실 정도로 수행될 때까지는 아무 것도 이 일을 중단시킬 수 없을 것이다!—에르빈 클로제의 체험담.

[18면 삽화]

에르빈 클로제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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