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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알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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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을 알게 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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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파75 6/1 245-250면

하나님을 알게 됨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아니라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읍니다.”—갈라디아 4:9, 새번역.

1.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읍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고 있읍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이웃 사람들 사이에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입니까? 자기 나라의 통치자에 관하여 아는 것과 그 통치자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읍니다. 하나님을 아는 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분과의 실제적인 관계를 즐깁니다.

2, 3. 왜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2 물론,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보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아마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위선을 보고 실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종교의 미명하에 어떤 사람들이 자행한 무시무시한 잔악행위와 무자비한 유혈 참극을 지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한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이치적입니까? 그것은 마치 한 나라의 충실한 신민이라고 거짓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이 통치자를 그릇 대표하기 때문에 그 통치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자신의 항구적인 행복과 복지에 기여하게 될 훌륭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 이치적입니까?

3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생활 표준을 정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주장을 고안해낼지 모릅니다. 그들의 주장은 흔히 자기 기만에 불과합니다. 유명한 저술가 ‘올더스 헉슬리’가 이렇게 고백한 바와 같습니다. “나에게는 세상 자체에 의미가 없기를 바라는 동기가 있었다. 따라서 세상에는 의미가 없다고 가정하였으며, 무난히 이 가정에 대한 만족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유로운” 생활을 해 나아가기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자 한다 하여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계시며 살아 계십니다.

4. 무슨 증거를 통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케 되었읍니까?

4 이 문제를 추리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장엄한 우주, 그의 아름다움과 질서, 무수히 많은 형형색색의 동식물, 인간 자체—이 모든 것은 탁월한 설계자, 곧 생명과 물질의 창조주의 존재를 지적해 줍니다. 전세계에서 생각깊은 많은 사람은 그들이 본 것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어떤 특성들을 인식하였읍니다. 그들은 영감받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특성들[이] ···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로마 1:20, 새번역; 사도 14:16, 17.

5. (ㄱ) 양심의 기능은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어떻게 증명해 줍니까? (ㄴ) 사람이 양심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나타내 줍니까?

5 인간의 양심 기능은 이 점에 대한 한 가지 예입니다. 성서는 이 기능, 곧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 인식 혹은 감각이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증거라고 하였읍니다. (로마 2:14, 15) 인류가 그러한 “율법”을 야수(野獸)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야수에게서 그러한 기능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적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성적인 입법자 곧 하나님이 틀림없이 존재함을 증명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기능은 창조주의 지혜와 인간에 대한 그분의 크신 관심 및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사람의 양심은 인류의 생명, 복지 및 안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막아 주었읍니다. 양심 기능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일반적으로 동일한 악행을 단죄합니다. 성문(成文)법전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역사를 통하여, 살인, 도둑질, 간음, 성도착 등의 행위를 나쁘다고 인정하였읍니다. 이러한 선천적인 지식은 인간 사회에 상당히 안정성을 주었읍니다. 특히 가족 사회에 기여하였읍니다. (창세 34:7; 39:9; 욥 31장; 베드로 후 2:6, 7) 참으로, 양심 기능은 전지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법

6. 하나님을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은 왜 우리가 그분을 알게 되는데 있어서 기본이 됩니까?

6 그러나 우리는, 창조물을 통하여 자신을 밝히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참으로 알게 될 수 있읍니까? 이 점에 있어서의 첫 단계는 그분이 하나의 인격체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체와만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읍니다. (히브리 11:6) 지존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도 그분을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읍니다. 전기 작가 ‘알. 더불류. 클라아크’는 어느 유명한 과학자에 관하여, “‘아인쉬타인’의 하나님은 물질적 세계 자체인 것 같다.”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물질적 세계는 질서를 나타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질서는 지성의 한 가지 표시가 아닙니까? 그리고 지성은 언제나 인격, 혹은 인격체와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주 내의 질서에 대한 책임이 있으신 분 곧 하나님은 인격자이어야만 합니다.

7. 창조물과 추리를 통해서는 무슨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7 추리와 관찰을 통해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과연 인격체이심과 그분이 감탄할 특성들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의 관계를 즐기려면, 물질적인 우주의 관찰에 근거한 추리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이는 사물에 관한 추리로서는 하나님께 대한 많은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추리를 해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가 밝혀집니까? 추리에 의하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영원히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해답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러한 상태가 언제 끝날 것인지 밝혀집니까?

8. 하나님을 자세히 알기 위하여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8 그렇다면,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묵시[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고대의 「잠언」은 말하고 있읍니다. (잠언 29:18)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인도가 없다면 많은 사람들은 행동이 방자하게 되는 경향이 있읍니다. 특히 그렇게 하고도 발각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면 그러합니다. (전도 8:11) 불완전한 양심은 그들을 억제하는 데 충분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그분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 가운데 계시를 주셨읍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임이 밝혀져 있으며,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알게 될 수 있도록 그분의 행적, 목적, 느낌, 태도 등이 기록되어 있읍니다. (시 83:18) 성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승인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가를 명확히 알려 줍니다.

9. 성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 그러나 성서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기원할 수 없는 사실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몇개월 앞 일도 어떻게 될지 정확히 예측을 못합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오래 전에 기록된 예언들이 많이 들어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정확히 성취되었거나 현재 성취되고 있읍니다. 16세기 이상의 장구한 기간에 걸쳐 기록되었지만, 성서는 모순되고 변천되는 여러 가지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 기원한 책이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책의 내적 조화는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하였음을 명백하게 지적해 줍니다. 성서에 들어 있는 법과 원칙들은, 인간이 생활상의 지침으로 만들어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읍니다. 성서에서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점들은 선한 양심에 잘 부합되며, 양심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동시에 성서는 입법자인 하나님의 높은 표준을 알려 줍니다. 성서의 한 가지 부분, 곧 중보자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및 신명기에 들어 있음)이 하나님을 공정하고 자비로운 입법자로 알게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고려해 봅시다. 이 점을, 인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겠읍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관하여 알아 봄

10, 11. (ㄱ) 사람들은 도둑질과 같은 사회악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였읍니까? (ㄴ) 도둑에 관한 ‘모세’의 율법의 규정은 하나님이 자비하심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읍니까?

10 거의 모든 나라의 법은 도둑질과 같은 사회악을 단죄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도둑을 어떻게 처리하였읍니까? 인간은 오랫 동안 이 문제를 붙잡고 씨름을 하였으나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였읍니다. 불완전한 인간 양심은 해답을 완전히 나타내 주지 않습니다. 고대 ‘바벨론’의 ‘하무라비’ 법전은 엄격하였으며, 예를 들어, 도둑이 모닥불 곁에서 붙잡힌다면 그 도둑을 불 속에 집어넣게 되어 있었읍니다. 밤도둑은 그가 집에 들어갈 때에 침입한 장소의 맞은 편에서 공개적으로 목매달게 되어 있었읍니다. 오늘날에는 도둑질로 유죄판결을 받은 남녀들은 일반적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거기서 그들은 더욱 완고한 범죄자가 되는 예가 많습니다. 한편, 도둑질의 피해자는 재산상의 손해를 당한 채 살아가야만 합니다.

11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나라에서 도둑질의 사건을 어떻게 다루도록 규정하셨읍니까? 자비롭고, 그러나 공정한 방법을 주셨읍니다. 출애굽기 22:1-4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찌니라.” 이렇게 하여 도둑은 자기가 도둑질한 것을 배상하되 더 많은 양을 갚았읍니다. 이것은 그의 악행의 영향을 깊이 인식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읍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어떤 희생을 바치도록 요구되어 있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도 범죄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였읍니다. (레위 6:2-7) 피해자는 도둑맞은 물건을 되찾았읍니다. 도둑에게 부과되었던 부가적인 금품은 피해자에게 유익을 주었으며, 자기 재산을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한 손해와 기타의 문제로 인한 손해를 변상하게 해 주었읍니다.

12. 도둑이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였읍니까?

12 그러나 그 도둑이 가난하여 그러한 배상을 할 수 없을 경우는 어떻게 하였읍니까? 그는 노예로 일하여 빚을 갚도록 팔리게 되어 있었읍니다. (출애굽 22:3) 그러한 제도가 공정하고 자비롭다는 점을 누가 부정하겠읍니까? 피해자는 영구적인 손실을 당하지 않았읍니다. 도둑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읍니다. 그의 생명은 그가 도둑질한 하찮은 재산과 동등시되지 않았읍니다. 투옥으로 인하여 그의 기를 꺾지도 그의 정력을 소모시키지도 않았읍니다. 그가 일시적으로 속박되는 것은 그의 악행을 시정해 주었읍니다. 그렇게 현명하고 자비로운 해결 방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에 틀림없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낸다

13. (ㄱ) 신명기 21:18-21에 있는 기록을 보고 어떤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읍니까? (ㄴ)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나타내고 있읍니까?

13 그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율법의 형벌이 때에 따라서는 무자비하고 잔인하였다는 뜻입니까? 신명기 21:18-21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어떠합니까?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이것은,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자녀에 대한 극도의 잔인성의 표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내용은, 시정할 수 없을 만큼 악하고, 자비로운 처우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나타내 줍니다. 이 경우의 그 “아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가 될 만큼 나이가 들었읍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가 누차 그에게 경고를 하였어도 그가 그들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였읍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점으로, 그가 “그 성읍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기 전에는 죽임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공의로운 표준은, 일부 족장 사회에서 실시되었던 습관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입니다. 중동의 어느 사막에 사는 부족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라파엘 파타이’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사실, 자기 가족 성원의 생사에 대한 족장의 절대권 가운데는 아기가 출생할 때에 그를 살려둘 것인가 아니면 죽이라고 명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역사 문헌을 통하여 ··· ‘이슬람’ 시대 이전부터 19세기까지, 아버지가 딸을 출생 직후든지 혹은 얼마 후에 죽이라고 결정한 예가 종종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갓낳은 딸을 죽이는 일반적인 방법은 사막의 모래 속에 딸을 생매장하는 것이었다.”—「가족, 사랑 및 성서」 122면.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족장이 전단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에 가족 성원들이 공정한 취급을 받을 기회도 받지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성읍 장로들”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함으로써, 고발당한 가족 성원이라도 보호를 하였고 공정한 재판의 기회를 갖도록 하였읍니다. 이 사실은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을 나타내 줍니다. 그분의 율법에는 자비와 공의가 실로 완전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읍니다!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됨

14. 예수의 생애는 하나님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이 됩니까?

14 율법을 통하여도 그렇듯이 성서의 다른 부분을 통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감탄스런 특성들을 인식하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점이 잘 밝혀져 있읍니다. 그 아들은 지상에 내려오기 전 수없이 오랜 기간을 하늘에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 거하셨읍니다. (요한 17:5; 골로새 1:13-17) 그분들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고 또 그분들은 매우 완전히 일치하셨기 때문에, 아들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읍니다. (요한 14:9; 1:18) 지상에서 봉사하시던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나머지 ‘히브리’어 성경에 나타나 있는 원칙들을 강조하셨읍니다. 그분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생활하셨으며, 율법의 참된 정신을 나타내셨읍니다.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감탄스런 특성들을 더 잘 인식할 수 있읍니다.—예로써, 마태복음 5:21-48; 19:3-9; 23:23 비교.

15, 16. (ㄱ) 예수께서 아버지와 아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무슨 의미였읍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主)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는 왜 그분을 “아는 것”의 전부가 아닙니까?

15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에 그분과 그분의 아들을 다 아는 것이 포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에 이 점을 지적하셨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그렇게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아는 것”은 단순한 머릿 속의 지식,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 하나님과 그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거기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종업원이 자기의 지배인으로부터 특정한 임무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밑에 있는 상사가 그와 상반되는 일을 지시한다면, 그는 그러한 사람에게 ‘난 다른 지배인은 모른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가 그 낮은 상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거나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직속 상관이며, 자기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지배인으로서는 다른 지배인을 “알지 못한다” 즉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6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가 인류 세상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자신의 말씀을 빌리면, 그분은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읍니다. (요한 17: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러한 권세를 받은 분으로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 점을 나타냅니다. (요한 14:15; 15:10) 사도 ‘요한’은 동료 신자들의 주의를 다음과 같이 불러일으켰읍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 1서 2:3, 4) 예수의 명령은 실제로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유래하였기 때문에, 그 아들을 순종할 만한 분으로 알고 인정하는 것은 또한 그 아버지를 온전히 복종할 만한 분으로 알고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요한 7:16-18; 14:10.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시는 바 됨

17. ‘아브라함’의 경우에,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나타났읍니까?

17 하나님을 인격체로 알게 되고 그분의 권세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또한 그분의 아시는 바가 됩니다. 그것을 충실한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볼 수 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알았’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것은 그분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친숙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었읍니다. 전능자께서는 여러 햇 동안 ‘아브라함’의 순종과 참 숭배에 대한 그의 관심을 관찰하셨읍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자기 자손을 정확히 교훈할 믿음의 사람으로 알게 되셨읍니다. (창세 18:19; 22:12)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그분의 승인받은 종, 그분의 벗으로 알고 인정하셨읍니다.—야고보 2:23.

18, 19. 성서의 사실에 관한 지식을 갖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으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승인받은 종으로 인정받는 데 충분치 않음을 무엇으로 보아 알 수 있읍니까?

18 ‘아브라함’의 예와 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성서에 대한 단순한 사실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흔히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원어로도 성서를 알고 있읍니다. 그들은 아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신 주라는 것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적인 종들임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그들을 그분들께 속한 자들로 인정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디모데 후 2:19; 디도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읍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 7:21-23.

19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배척하시는 그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그들을 자기와 승인된 관계를 가진 자로서 알거나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들을 권한을 받은 대표자들로 알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과 그분의 아들에 의하여 승인된 자로서 인정을 받도록 하나님의 개성, 방법, 및 행적에 일치하게 행동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갈라디아 4:9) 이렇게 한 경우에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분들의 권세를 알거나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닥칠 멸망을 피할 수 있읍니다.—데살로니가 후 1:6-9.

20.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신 바 된다면, 자기와의 관계가 개인적인 것이라는 어떤 증거를 들 수 있읍니까?

20 하나님께 알려지고 인정받는 사람은 창조주와 개인적 관계를 즐깁니다. 그는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지도와 도움을 체험합니다.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결정을 요하는 심각한 입장을 당할 때에 여호와를 전지하시고 전능한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은 자기 명철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잠언 3:5, 6) 그는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과 인도를 간청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을 통하여 그 사람의 머리에 성서에 들어 있는 적절한 원칙들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며, 그것을 올바로 적용하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요한 14:26 비교) 상황이나 문제거리가 아무리 까다롭더라도 그 사람은 번번히 다음과 같은 제자 ‘야고보’의 말이 자기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야고보 1:5.

21.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승인하시는 행로를 계속 따르면 어떤 결과에 이릅니까?

21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 가운데 나타나는 경건한 지혜에 일치하게 계속 행동할 때에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경건한 성품을 발전시키도록 계속하여 도우실 것입니다. ‘정신에 작용’하는 “힘” 곧 추진 요소가 우리를 움직여 하나님의 의로운 표준에 더욱 더 가깝게 해 줄 것입니다. (에베소 4:20-24, 신세) 하나님의 명령은 책에 인쇄되어 있는 단순한 말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일부분으로서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새겨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것이며, 그것에 순종함으로써 얻은 체험을 통하여 그의 극도로 높은 가치를 인식할 것입니다. (시 119:1-16, 74-77, 164-168)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로마 12:2.

[247면 삽화]

도둑이 소를 도둑질하여 팔았다면 소 다섯마리로 갚아야 하였다

[248면 삽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은 그분의 자비에 한계가 있음을 나타내었다. 부모의 자비로운 책망에 순종하기를 거절한 반항적인 아들은 “성읍 장로들” 앞에 끌려나와 재판을 받았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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