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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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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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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6
파76 12/15 564-568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 1:4.

1, 2. 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내의 문제를 직면합니까? (마태 10:22, 36)

하나님께 믿음을 둔 사람은 누구나 믿음의 시험을 피할 수 없읍니다. 이것은 세상의 영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반대되어 있으며, 그것의 경향이 믿음을 가진 자에게 압력을 가하고 믿음을 파괴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내의 문제를 직면하게 됩니다.

2 믿음의 시험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부터 올 수 있읍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가족과 벗들의 직접적인 반대일 수도 있읍니다. 그것은 조롱, 증오, 오해받는 것, 거짓 비난 혹은 중상일 수도 있읍니다. 그것은 신체적인 박해일 수도 있고, 심지어 질병과 관련될 수도 있읍니다.

3.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당할 때에 어떤 점들을 자문해 보는 것이 좋습니까?

3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내 믿음은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시들어지지 않을 것인가? 나는 올바로 이해하고, 내 믿음이 더욱 튼튼해진다는 것을 즐거워하면서 인내를 할 것인가? 내 동기는 의를 위해서,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인내하려 하는가?—마태 5:10.

인내는 훌륭한 목적을 이룬다

4, 5. 베드로 후서 1:5-7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인내가 하나의 목적을 이룬다는 것을 설명하십시오.

4 사도 ‘베드로’는 인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베드로 후 1:5-7.

5 그러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의 인내는 하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것은, 경건한 사람들, 형제 우애를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 속에 더 큰 사랑을 만들어 내며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랑을 이 세상에서 동료 인간에게 나타내도록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새 사물의 제도에서 사는 것을 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종들이 고통을 당하고 곤경을 인내하는 것을 좋아하시지는 않으나 그들을 단련시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 즉,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그들의]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일을 마음으로부터 수행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미가 6: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내를 통하여 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매우 중요합니다.

6, 7.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인내는 본인에게 어떤 좋은 일을 이룩합니까?

6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인내는 하나님의 승인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십니다. (로마 5:3-5; 야고보 4:8) 성공적으로 인내를 한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 더욱 커집니다. 극심한 시련을 통하여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여호와만을 의지해야 하고 다른 자를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여호와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자에게 필요한 것과 또 힘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4:13) 자신이 인내한 결과 그는 시련을 당하고 있는 형제들, 곧 종류는 다르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인 시련을 당하는 형제들에 대해 깊은 우정을 발전시킵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문제들과 약점 때문에 형제들이 실수를 범할 때에 그는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하게 됩니다.—베드로 전 5:9.

7 이 모든 것은, 여러 면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인식을 높여줍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리 내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더 큰 자비를 마음 속에 발전시킵니다. 그는 사람들이 난관 속에서 탄식하며 고통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로마 8:22) 그리고 그의 사랑이 그들에게 표현되어 생명을 주는 진리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마태 9:36.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함

8. 베드로 후서 1:8에 있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은, 인내와, 인내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의 특성들이 그를 온전하게 해 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줍니까?

8 그러나 어떻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온전하고 구비”하게 됩니까? (야고보 1:4) ‘베드로’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정확한 지식”, 신세; “개인적 지식”, 로더함]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리라].” (베드로 후 1:8)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한 개인적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읍니다.—요한 14:9.

9, 10. 마태복음 11:27, 요한복음 17:3 및 요한 1서 4:8 등의 성귀에서 “알다”라는 단어의 성서적인 뜻은 무엇입니까?

9 예수께서는 여기에 인용한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셨읍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태 11:27)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 17:3.

10 아버지를 “아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아는 것입니까? 아니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종으로서 침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점들을 아는 것도 포함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알다”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안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뜻을 지니고 있읍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에 우리가 그 사람과 그의 성품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합니다. 이 성서 귀절에서 “알다”라는 뜻의 동사는 “알게 되다, 친숙해지다, 이해하다”를 뜻합니다. 요한복음 17:3에서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의 계속적인 관계를,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증가시켜 주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에 관해 알려진 것은 단순히 부분적인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얻은 사람에게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긴밀하게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요한 17:3, 행간) 사실상,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읍니다.—요한 1서 4:8.

11, 12. 그러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떠할 것입니까?

11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의 이해성있는 우정 관계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머리 속의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식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과 또 그분의 길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하나님과 같이 느껴야 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사물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길에 관하여 거짓 개념을 만날 때에는 즉각적으로 그릇된 것을 알아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시련과 난관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야고보 1:13.

12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옳고 그른 것을 분변’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 5:14) 그는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에 관해 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 성서 해설 서적을 찾아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훈련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 습관화될 것입니다.—로마 12:9.

예수의 본

13. 악한 일에 대한 예수의 행동은 그분이 하나님을 참으로 알았음을 어떻게 나타내었읍니까?

13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높이 발전한 점에 훌륭한 본이 되셨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나이다].” (요한 17:25) 예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완전하게 조화되셨기 때문에 선한 것을 깊이 사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셨읍니다. 그분은 ‘사단’의 제의와 ‘베드로’의 그릇된 조언을 즉각 배척하셨을 때에 깊은 마음으로부터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누가 4:1-12; 마태 16:21-23) 그분은 하나님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모독이 돌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음이 없는 것에 대해 가슴아파 하셨읍니다.—마가 3:5; 8:11, 12; 로마 15:3.

14.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행동은 그분이 하나님을 참으로 아셨음을 어떻게 나타내었읍니까?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마가 10:18) 그러므로 그분은 ‘지나친 의인’이 되지 않으셨으며, ‘영적 경찰관’인 양 제자들의 흠을 잡지 않으셨읍니다. (전도 7:16) 또한 그분은 ‘바리새’인들처럼 제자들에게 부담을 지우거나 실망을 주지도 않으셨으며, 그들에게서 완전을 요구하심으로써 양심을 괴롭게 하시지도 않았읍니다. (누가 6:1-4; 11:46) 그분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의 감정에 대해 그리고 죄로 인한 인류의 서글픈 입장에 관하여 깊은 동정심을 나타내셨읍니다.—요한 11:33-36.

15.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원칙은 예수의 경우에 어떻게 적용되었읍니까?

15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원칙은 예수의 경우에도 적용되었읍니다. 기록을 보면 이러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니라].” (히브리 5:8, 9) 예수께서 괴로움 가운데서도 완전한 인내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읍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 4:15.

16. (ㄱ) “온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인내해야 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ㄴ) 고린도 전서 13:12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16 우리는 예수의 본으로부터 모든 면에 “온전하고 구비”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읍니다. 항상 그리스도인다와야 하고 시련들을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읍니다. 사도들은 이 점을 인식하였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노라].” (빌립보 3:8-10)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목표를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 전 13:12) ‘바울’은 당시에도 하나님을 알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정수와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는 자기가 그리스도인 행로에 대해 온전한 보상을 받을 때에 얻을 것임을 인식하였읍니다.

17. 하나님을 오랫 동안 섬기고도 그분을 알지 못할 수가 있읍니까? 예를 드십시오.

17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회중에서 봉사를 하고도 실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할 수 있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예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적과 그분의 기적까지도 보았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노라].”—히브리 3:9, 10; 시 95:9-11.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법

18. 하나님을 알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8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틀림없이 하나님을 알게 될 수 있읍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을 꾸준히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에 의해서만이 하나님의 정신과 성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내심을 토로함으로써 하나님을 가장 친밀한 친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힘이 있읍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 실제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여 간구하는 자에게 가장 유익한 결과가 오도록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 65:2; 로마 8:28.

19. 하나님을 알게 되기 위하여 성서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19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부와 명상이 필수적이란 말은 많이 들었읍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부가하여 그리스도인은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행동에 관한 질문이나 생활상의 문제가 제기될 경우 그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견해에 따라 행동합니까? 아니면, 자기가 하나님의 길과 조화되는가를 검토해 봅니까? 자기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면,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자기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성서적인 뒷받침이 있는가를 확인해 봅니까? 다른 사람에게 주는 그의 대답은 자신의 의견 혹은 개인적 견해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말을 성서의 명백하고 분명한 증거로 증명할 수 있읍니까?

20. (ㄱ)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친밀하셨으며, 그분을 아셨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알기를 원하셨음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ㄴ) 본 항에 기재되어 있는 성귀를 몇가지 들어서 예수께서 「히브리어 성경」을 사용하여 듣는 사람들을 어떻게 확신시켰는가를 설명하십시오.

20 이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의 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한 5:30) 예수께서 매번 성귀를 찾아보셨거나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설명이나 책망을 하실 때에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시든지 그 원칙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그 대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었읍니다. 예수의 말씀을 읽어보면, ‘히브리어 성경’을 직접 인용 혹은 참조한 부분이 많은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다음을 비교하십시오. 요한 5:31, 32과 신명 19:15; 마가 10:27과 창세 18:14과 욥 42:2; 마태 10:35과 미가 7:6; 요한 10:34과 시 82:6.

21. 로마서 12:1, 2의 사도의 말씀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기 위하여 실천이 필요함을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며, 그 목표를 위해서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였읍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 12:1, 2)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우리 생활에서 적용하고 실천함으로써 그것의 유익성을 경험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뜻과 그 안전성을 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한 사고 방식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하여 그분의 승인을 받고 또 훌륭하고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필요한 때에 언제나 돌보아 주시고 부축해 주시는 인자한 아버지에 대해 아들이 느끼듯이 느낄 수 있읍니다.

22. ‘바울’이 로마서 12:3에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생각으로부터 자신의 사고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취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2 그 사도는 선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한 다음에 그들이 이 세상과 그 사고 방식과 습관에 일치하지 않는 정신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 12:3)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을 존경하게 되고, 자신을 남과 비교하거나,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자신이 더 낫다고 혹은 더 큰 존경과 특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도는 계속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였읍니다.

23. 믿음에 “온전”하기 위하여 우리는 회중 내에서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까?

23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 12:4, 5) 우리가 회중에 속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서로 인내하도록 도와서 인내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중 내에서 우리의 위치를 잡고 그곳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사도는 이렇게 결론 지었읍니다.

24. 로마서 12:6-8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 분야와 그러한 활동을 할 때에 나타내야 할 정신을 설명하십시오.

24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 가운데는 말하는 것과 전파하는 것이 포함된다]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로마 12:6-8.

25.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온전”하게 되도록 어떻게 격려하였읍니까?

25 만일 이러한 말씀을 가슴깊이 받아들이고 심중히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게 될 것이며,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쓴 바와 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베드로 전 5:10; 야고보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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