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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찌’ 독일에서 충절을 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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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찌’ 독일에서 충절을 고수함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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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9/15 10-13면

‘나찌’ 독일에서 충절을 고수함

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독일에 살던 많은 젊은이들처럼, 나는 ‘스포오츠’ 특히 체조나 축구를 무척 즐겼다. 나의 인생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이 마침내 변화되었다.

아버지의 한 직장 동료를 통하여, 나는 성서를 잘 알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이 ‘비벨포르셔’(성경 연구생, ‘여호와의 증인’이 그 당시에는 그렇게 알려졌었음)가 말하는 것들에 대해 제법 회의적이었다. 나중에, 그가 말한 내용으로부터 나는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알고나서 그러하였다.

시험 기간이 시작되다

1933년에, ‘나찌’당이 독일을 장악하자, 내가 소속되었던 ‘스포오츠 클럽’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일은 성경으로부터 내가 배웠던 내용과 함께 나로 하여금 영적인 문제들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35년에,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꺼이 헌신하였고 물 침례로써 그것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거의 같은 때에 나는 한 동료 신자와 결혼하였다.

어려운 시기가 시작되었고,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내가 근무하던 사업체의 소유주는,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즉 ‘나찌’당)의 일파로서 하나의 조직체였던 ‘독일 노동 전선’으로부터 서신 한통을 받았다. 그 서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 기회에 본 기구는 귀하가 고용하고 있는 ‘성경 연구생’이 ‘독일 노동 전선’의 한 회원이 되지 않음으로써 귀하의 기업체의 평화를 교란시키고 있음이 명백한 바, 그 자를 귀 회사의 제반 법규 및 규정에 따라 해고시킬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회사의 소유주는 그 서신에 순응하였고, 나는 양심상 어떤 정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실직하고 말았던 것이다.

일년 후에 나는 장모와 함께 체포되었다. 나의 믿음을 좌절시켜 영적 형제들을 배신케 하려는 숱한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끝내 협력하기를 거절하자, 나는 1937년 11월 25일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나의 장모도 역시 한 강제 수용소에 송치되었다.

‘부헨발트’에서의 충절에 대한 시험

‘부헨발트’에서의 나의 수감 생활은 거의 8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곳이 내 인생을 종식시킬 곳처럼 보였고, 극악 무도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였다. 독일 ‘나찌’ 친위대 경비병들은 내게 반복하여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너는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할걸.” 나는 거의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새벽 4시부터 해질 때까지 강제 노역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내가 충절을 지키고자 하였던 바로 그분 즉 여호와 하나님 덕분에 나는 계속 버텨 나갈 수 있었다.

그러한 역경의 시절에 영적인 양식은 매우 중요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강제 수용소에서 그것을 입수하였는가? 때때로, 더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부헨발트’로 이송되어 왔다. 그들은 독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네덜란드’, ‘벨기에’ 및 ‘프랑스’로부터도 이송되어 왔다. 그들이 「파수대」 최근호를 읽고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필기해 두었고, 우리의 극비 배포 수단을 통하여 동료 증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그토록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영적 자양분들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경비병들이 우리가 영적 양식을 입수한 통로를 알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적 양식의 공급은 늘 비밀을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언젠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최후 통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만일 모든 인쇄물들을 내일 12시까지 내놓지 않는다면, 동조자들까지도 모두 총살할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그 말이 반드시 협박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필기물들을 책임맡은 우리 형제들은 함께 모여 그 문제들을 의논하고 기도로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손으로 쓴 “양식 비축량” 중 일부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필기물들에는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지 비그리스도인 관습들이 폭로되어 있었다. 그러한 필기물들을 내놓기로 한 결정은 좋은 결과를 가져 왔다. 어느 누구도 처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훌륭한 증거가 되었다. 사실, ‘나찌’ 친위대원들 중 얼마는 적혀 있는 내용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또한 다른 수용소들에도 영적 영양물들을 공급할 수 있었다. 형제들이 ‘부헨발트’에서 다른 수용소로 이감갈 때마다, 그 형제들은 손으로 베껴 필기한 성서 진리들을 생명을 무릅쓰고 몸소 숨겨가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헨발트’ 내에서도 우리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한 특별 전도 운동을 조직하였고, 수천명의 수감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이르도록 하였다.

믿음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죽느냐

1939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우리는 가장 어려운 시험을 겪어야 했다. 우리의 믿음을 단념하고 성경 연구생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꺼이 대겠다는 진술이 들어 있는 한 선언서에 서명하도록 우리는 요구를 받았던 것이다. 만일 서명을 한다면 우리는 석방될 것이었다.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증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총살당하게 되어 있었다.

재삼재사 이러한 위협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명령이 발해지기도 하였다. “성경 연구생들은 모두 정문 쪽으로!” 우리는 거기로 가 섰다—피골이 상접한 채 너덜너덜한 넝마옷을 걸치고서. 망대 위에는 무장한 경비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자는 사형에 처하고 말리라는 위협을 수용소 소장은 되풀이하곤 하였다. 하지만, 철저한 침묵뿐. 그 어느 누구도 나서려하지 않았다.

한번은, 이전에 그 서류에 서명을 했던 두명의 증인들이 앞으로 걸어나가 자신들의 서명을 취소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자기 형제들과 함께 기꺼이 죽기를 택하였던 것이다. 평소 냉혹한 ‘나찌’ 친위대원 쪽에서 일말의 경악감, 심지어는 불안감까지 가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욕설이나 협박도 없이 오로지 “해산! 작업 보고는 하지 말라”는 명령만 하는 것이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이러한 지시가 울려 퍼졌다. “성경 연구생들은 정문쪽으로!” 이러한 놀림감의 절차가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우리가 들을 만큼 큰 소리로 친위대원들은 우리를 어떻게 일렬로 세워서 총살시킬 것인가를 서로 의논하곤 하였다. 우리는 장교 중 한명이 이렇게 말하는 것까지 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저 자들 주위에 둘러서서 마구 갈겨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순전히 우리의 사기를 꺾기 위해 재미삼아 한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다시 연병장에 나가야 했을 때 분명해졌다.

수용소 소장 ‘후티히’는 이러한 기분나쁜 말로 자기 연설을 시작하였다. “너희 악당 놈들, 너희 돼지 같은 놈들 ·⁠·⁠·” 그러나 우리는 무슨 말을 듣게 되었는가? 으례적인 죽음의 위협이 아니라, “총통 각하께서는 너희들에게 너무나도 너그러우신 분이다. 고로 너희들의 사형 집행은 승리의 그 날까지 연기하는 바이다”라는 말이었다. ‘후티히’가 “그러나 기억해 둬라 ·⁠·⁠· 관용해 준다고 해서 석방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큰 소리를 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 속에서는 여호와께 대한 깊은 고마움이 넘쳐 흘렀다. 결국 적들은 우리를 죽이지 못했다.

또 다른 승리

이듬 해엔 제반 사정이 좀더 견딜만해졌다 하더라도, 숱한 고난들이 여전히 앞에 놓여 있었다. 혹한의 어느 겨울 날, 우리는 우리의 의복들을 동부 전선의 독일군에게 기증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전쟁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하자, 우리는 우리의 방한용 장갑과 귀덮개 및 내복까지 강제로 벗겨지고 말았다. 가죽 신발들도 몰수당하였다. 그 대신, 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나눠주고는 우리를 ‘네덜란드 녀석들’이라고 불렀다.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섭씨 영하 15도의 기온 속에서도 작업을 하기 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젠가 성경 연구생들에게는 수용소 진료소 내의 모든 의료 혜택이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선언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더 서로 시중들어 주고, 병든 형제들을 도와주고 보살펴 주어, 다시 말하면 사랑을 기울여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갈라디아 6:2) 우리의 믿음을 꺾기 위해 작정되었던 이러한 조처는 실제적으로 반대 효과를 가져 왔다. 그렇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도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사랑으로 병든 형제와 약한 형제들을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죽음을 겪지 않았다. 한편, 수용소 내의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았던 많은 수감자들이 죽어 갔다.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친위대원들은 비인간적이 되어 갔기 때문에 사랑이 무엇을 달성해 낼 수 있는지를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 모두가 여전히 점호 보고를 하는 것을 보고 한 친위대 의사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저어대며 이렇게 말했다. “의학적 경이로군, 참.”

주의 만찬을 기념함

1942년 3월이 되면서, 주의 만찬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 강제 수용소 내에서 그것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한 형제는 탁자보로 쓰기 위하여 침대 ‘시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한 친위대 장교가, 생일 축하용으로 쓰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고서 사용 허가를 승인해 주었던 것이다. 기념식은 우리 막사 구획 D동(棟)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형제들의 첫 번째 집단이 D동으로 잠입해 들어 왔고, 그들은 기념식을 위해 미리 모였다. 다른 형제들은 별일 없는 듯 감방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느닷없이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 장교가 일상 점검을 하기 위해 순찰 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D동을 향해 곧장 오고 있었다. 망보고 있던 형제들의 심장이 거의 멎을 지경이었다. 그 형제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장교는 층계를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형제들은 잠자코 기도만 드렸다. 그런데, 그 장교는 층계를 중간쯤 올라오다가 문득 서더니 주위를 획 둘러보고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냥 되돌아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한 우여 곡절이 담긴 사건들을 추억하는 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도록 도와준다. 그분은 외견상 절망적인 상황마저도 웅대한 구원으로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이사야 26:3, 4.

구원의 시기

전쟁이 끝나자, 우리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느꼈던 바 그대로의 느낌을 가졌다. 그들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즐거운 외침, 신세]이 찼었도다.”—시편 126:1, 2.

제 2차 세계 대전의 종료 직전에 나의 아내는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송치되었다. 나의 장모는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으며, 전쟁 종료 겨우 몇달 전에 친위대는 장모를 더 윗쪽인 ‘바바리아’로 이감보냈다. 그러나, 1945년에 우리 모두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함께 있게 되어 행복했으며, 우리가 충절을 지키게 된 것을 감사하였고, 다시 자유롭게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숭배를 계속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고맙게 여겼다.

다시 체포되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몇년 후에,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체포되어 거의 4년 동안이나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였다. 이 힘든 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 여호와의 도움을 재삼재사 느꼈다.

전후에, 우리는 축복받아 아들 하나를 갖게 되었는데, 성년이 되자 그 역시 성서 이사야 2:4에서 알려 주는 바 중립의 원칙과 관련된 결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쁘게도 우리 아들은 여호와께 대한 충절의 길을 택하였다. 이리하여, 2년 동안 그는 감옥 생활을 익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충절을 고수했기 때문에, 우리의 조그만 가족은 현재 강제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보낸 총 23년이라는 세월을 회고해 볼 수가 있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매일 이 몰인정한 세상에서 충절을 유지해야 하는 도전을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도 역시 여러분의 충절을 확고히 유지하고자 결심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어느 누구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 필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나의 충절 때문에 붙들어 주셨고, 신세]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찌로다.” (시 41:12, 13)—본 기사의 필자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된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성명을 기재하지 아니함.

[10면 삽화]

내가 8년간의 비참한 세월을 보냈던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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