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아
하와이와 뉴질랜드의 중간쯤 되는 곳에는 사모아 제도의 매혹적인 섬들이 따뜻하고 푸른 태평양을 수놓고 있습니다. 이 섬들은 화산 폭발로 생긴 것으로서 구름으로 덮인 봉우리들, 울창한 열대림, 야자수가 늘어선 해변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 줍니다. 빛을 반사하여 반짝이는 초호(礁湖)들은 약 200종의 산호와 900종에 이르는 어류가 서식하는 해양 생물들의 낙원입니다. 유럽에서 온 초창기 선교사들이, 붉은플루메리아 향을 머금은 이 섬들을 가리켜 남태평양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섬들이라고 묘사한 것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기원전 10세기경에 라피타인들이 사모아 제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것 같습니다.a 대담한 탐험가들이자 숙련된 항해자들이었던 이 최초의 폴리네시아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태평양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두 개의 선체가 연결된 거대한 카누를 타고 바닷바람과 해류를 따라 그 이전의 누구보다도 광범위한 해역을 항해하였습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무리지어 있는 몇몇 섬을 발견한 그들은 사모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그들의 후손들은 태평양을 건너 동쪽의 타히티로 간 다음에, 북쪽으로는 하와이로, 남서쪽으로는 뉴질랜드로, 남동쪽으로는 이스터 섬으로 퍼졌습니다. 오늘날 삼각형을 이루는 이 거대한 해역을 가리켜 “많은 섬”을 뜻하는 폴리네시아라고 부르며,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폴리네시아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모아는 “폴리네시아의 요람”이라고 일컬어집니다.
현대에 와서 용감한 사모아 사람들은 더욱 의미심장한 여행을 해 왔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항해했던 조상들처럼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리적 탐험을 한 것이 아니라, 영적 어둠에서 영적 빛으로 “항해”해 왔습니다. 그들은 참하느님이신 여호와의 승인을 받는 숭배 방식을 찾기 위한 탐구를 해 온 것입니다.—요한 4:23.
이제 사모아b와 아메리칸사모아와 토켈라우에서 있었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펼쳐질 것입니다. 서사모아는 1962년에 독립된 국가가 되었으며, 아메리칸사모아는 미국령입니다. 따라서 사모아 제도는 두 부분 즉 사모아와 아메리칸사모아로 나뉩니다.
진리의 빛이 이르다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 최초로 사모아에 이르게 된 것은 1931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 방문객이 이곳 섬들 전역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470부가 넘는 서적과 소책자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방문객은 아마도 시드니 셰퍼드였던 것 같은데, 그는 열심 있는 증인으로서 당시에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을 다니며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로부터 7년 후에는 왕국 소식이 아메리칸사모아에도 이르게 되었습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서 일하는 J. F. 러더퍼드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왔다가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투투일라 섬에 들른 것입니다. 러더퍼드와 그 일행은 그 섬에 잠깐 머무는 사이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항구 도시인 파고파고 전역에 출판물을 배부하였습니다.
2년 후인 194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해럴드 길이 아메리칸사모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를 3500부나 가지고 왔는데, 이 소책자는 여호와의 증인이 사모아어로 번역한 최초의 출판물입니다.c
그다음 해럴드는 배를 타고 8시간에서 10시간을 가야 하는 사모아의 우폴루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소식이 나보다 먼저 그곳에 알려진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하자 한 경찰관은 내게 말하기를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여권을 제시하고 그에게 유려한 문장으로 된 여권 서문을 읽어 주었는데, 거기에는 관계자 모두에게 영국 국민이 ‘아무런 방해 없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해 줄 것과 가능한 모든 지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사모아 지사와 면담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닷새 후에 다음 배가 출항할 때까지 그 섬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나는 자전거를 빌려 섬을 돌며 소책자를 널리 배부하였습니다.”
해럴드는 아메리칸사모아와 사모아에서 성공적인 전파 여행을 마친 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전한 출판물 하나는 마침내 펠레 푸아이우폴루라는 사무직 근로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d 그 소책자에 담긴 귀중한 진리의 소식이 펠레의 마음속에 심겼습니다. 그 소식은 증인들이 다시 찾아와 물을 뿌려 주기를 기다리면서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고린도 첫째 3:6.
12년이 지난 1952년에는 존 크록스퍼드라는 영국 증인이 우폴루 섬에 위치한 사모아의 수도 아피아로 왔습니다. 존은 펠레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존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증거하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펠레가 성서에 관심이 있음을 알아차린 존은 솔선하여 그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펠레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우리는 일요일 새벽까지 대화를 하였죠.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그는 성서를 사용하여 나의 질문에 모두 대답해 주었죠.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이 내가 찾고 있던 진리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해에 펠레와 그의 아내 아일루아는 사모아에서 최초로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펠레는 자신이 조상의 종교를 저버린 것에 대해 추궁을 받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연구하면서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는 열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펠레는 진리에 관심을 보인 한 친척과 함께 가문의 최고 추장의 부름을 받고서, 아피아에서 서쪽으로 19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고향의 큰 마을인 팔레아시우에서 열린 한 모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여섯 명의 추장, 세 명의 연설가, 열 명의 목회자, 두 명의 신학 교사 그리고 모임을 주재하는 최고 추장과 집안 노인들로 이루어진 적대적인 집단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펠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문의 명예와 조상의 종교를 더럽혔다고 비난과 저주를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최고 추장은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제의했는데, 이 토론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펠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 성서는 집어치워! 성서 이야기는 그만두란 말이야!’ 하고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그들이 제기한 모든 질문에 대해 성서로 대답하였고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마침내 상대편은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최고 추장은 힘없는 목소리로 ‘펠레, 네가 이겼다’라고 말하였죠.”
펠레는 최고 추장에게 자신이 이렇게 대답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어르신. 제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 어르신이 오늘 밤에 왕국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것이죠. 어르신이 이 소식에 귀를 기울이시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펠레가 겸손하게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인 성서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우폴루에서 왕국 진리의 씨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초창기의 모임
펠레가 갖게 된 새로운 종교에 대한 소식은 서로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섬 사회에 신속히 퍼졌습니다. 바울이 전파했던 일 세기의 아테네인들처럼 일부 사람들은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궁금해하였고 좀 더 알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17:19, 20) 마아투시 레아우아나이라는 젊은이는 이 새로운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매주 병원 구내에 있는 한 의사의 집에서 모인다는 것을 알고는 한번 가서 살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병원 문 앞에 서자 갑자기 긴장감에 사로잡힌 그는 떠나려고 돌아섰습니다. 다행히 때마침 도착한 존 크록스퍼드가 그날 밤의 그 작은 모임에 이 젊은이를 초대하였습니다. 젊은 마아투시는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연구하는 그 모임을 즐겼고 또 오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따금씩 모임에 참석하였지만, 마침내 진리는 마아투시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고 그는 195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집단과 연합한 새로운 사람들은 배운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필요성을 신속히 인식하였습니다. 크록스퍼드 형제가 아피아에 온 지 겨우 5개월도 안 되어 열 명이 그와 함께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4개월이 더 지나자 그 수는 19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사람들은 벗들과 친족들에게 증거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일례로 한 전도인은 팔레아시우에 살고 있던 자신의 사촌인 사우바우 토에투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우바우와 그의 매제인 피나우 페오마이아는 가족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진리의 편에 섰습니다.
1953년 1월에는 사모아에서 참숭배가 드높여지는 기념비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약 40명이 집회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의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사모아에서 최초로 아피아에 회중이 형성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그 후 크록스퍼드 형제가 영국으로 돌아가자 새로 침례받은 펠레가 회중을 인도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담대하고 열심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어렸고 경험이 부족하였습니다. 많은 전도인들이 왕국 소식을 좀 더 재치 있고 호감을 주는 방식으로 전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골로새 4:6) 새 인간성을 온전히 입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쁘게도 필요한 도움이 곧 베풀어졌습니다.—에베소 4:8, 11-16.
해외의 지원
1953년 5월이 되자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파이오니아인 로널드 셀러스와 올리브(돌리) 셀러스 부부가 아피아 회중을 돕기 위해 사모아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사모아 형제들과 일시적으로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그 때문에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태평양 지역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우리에게 사모아로 가서 새로 형성된 회중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로널드와 돌리는 수상 비행기를 타고 사모아로 가면서, 외딴 선교 임지에서 흔히 겪게 될 수 있는 어려움들을 생각해 보며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막상 도착해 보니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무성한 열대 식물들이 섬을 뒤덮고 있었지요. 튼튼하고 건강해 보이는 행복한 사람들이 미소를 짓는 모습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벽이 없고 깨끗한 산호 바닥으로 된 초가집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고 있었습니다. 서두르거나 시간 걱정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요. 우리는 마치 낙원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펠레 가족과 함께 머무르게 된 셀러스 부부는 즉시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형제들과 만나 많은 질문에 대답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이 기본적인 성서 교리를 알고 있기는 했지만 경건한 표준에 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변화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그 어려운 시기에 형제들을 돕기 위해 더더욱 인내심을 나타내고 평상시보다 더 사랑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 중 일부는 사랑으로 바로잡으려는 이러한 성경적 마련을 거부하였고 점차 회중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겸손한 태도를 보였고 베풀어진 훈련과 격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회중은 정련되고 강화되었습니다.
로널드와 돌리는 또한 호별 방문 증거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형제들 대부분은 그저 벗들과 이웃에게만 비공식적으로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제 형제들은 셀러스 부부와 함께 집집으로 전파 활동을 하였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한번은 관심을 나타낸 추장에게 왕국에 관해 좀 더 알려 주기 위해 그의 마을로 초대를 받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식사를 한 뒤, 활발한 성서 토의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는 토의로 시작한 것이 공개 강연이 되었는데, 우리가 아무런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청중이 거의 50명으로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전도인들이 두세 명과 성서 연구를 하다 보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에 대해 궁금해하는 구경꾼들이 10명에서 40명까지 몰려들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당국에서 로널드와 돌리의 체류 연장 신청을 거절했을 때, 로널드는 고등 판무관을 찾아가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판무관은 어떤 교직자들이 우리의 증거 활동에 대해 정부에 불평을 하였다고 말하더군요. 결국 판무관은 우리가 회중의 전파 활동을 돕는 일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하는 조건으로 비자 연장을 해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또한 판무관에게 그 누구도 하느님의 일을 중단시킬 수 없으며 그 역시 이 점을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판무관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떠나면 어떻게 될지 한번 봅시다!’”
그때부터 당국은 외국인 증인들이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년에 시어도어 재라스가 회중을 격려하기 위해 사모아로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현재 통치체 성원인 재라스 형제는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방문은 우리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으며 우리가 영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로널드와 돌리의 비자가 만료되었고 그들은 아메리칸사모아로 갔습니다. 그들은 떠나야 했지만, 사모아에 8개월 동안 머물면서 현지 형제들을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국은 알지 못했지만 다른 증인들이 곧 도착하여 이 부부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아피아에서의 발전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인 리처드 젱킨스가 1954년 5월에 아피아에 도착하였는데, 그는 침례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23세의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리처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기 전에 나는 세속 일이 확실히 자리를 잡기 전에는 현지 형제들과 연합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고 나니 매우 외로웠고 영적으로 약해졌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펠레 푸아이우폴루와 조심스럽게 접촉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어둠을 틈타 밤늦게 만났습니다.
리처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펠레는 당국이 나를 회중과 연관 지어 추방시키는 일이 없도록 내 실명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인 위티네세라는 이름을 나에게 붙여 주었는데, 위티네세는 ‘증인’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사모아식으로 발음한 것이었습니다. 사모아 형제 자매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이렇게 부르고 있답니다.”
리처드는 이 새로운 이름을 사용해서 조심스럽게 형제들과 계속 접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비공식적으로 증거하여 몇 건의 성서 연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리처드의 성서 연구생이었던 무파울루 갈루바우는 위생 검사관으로 일하던 젊은 남자였는데 후에 사모아 지부 위원회 성원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연구생이었던 팔레마 투이폴로아 역시 결국 증인이 되었으며 그의 가족 중 몇몇도 증인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에무 타아세 역시 리처드의 연구생이었는데, 그는 공공사업부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 패거리를 이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리처드는 단념하지 않고 교도소장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교도소 담장 밖으로 10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망고나무 그늘 아래서 시에무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몇몇 다른 수감자들도 성서 연구에 동참하였습니다.
리처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감시를 받지 않았는데도 수감자들 중 아무도 도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시에무는 출소하였고 그 후 결국 장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955년에 리처드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파이오니아인 글로리아 그린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기 전까지 15년 동안 사모아에서 35명이 진리를 알도록 도왔습니다. 그들은 지금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살고 있으며 리처드는 그곳에서 사모아어 회중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또 다른 부부인 윌리엄 모스와 마저리(걸리) 모스도 그 초창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장로이며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윌리엄과 24년간 파이오니아를 해 온 걸리는 1956년에 아피아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아피아 회중에는 28명의 전도인이 연합하고 있었고 아피아와 팔레아시우에 하나씩 서적 연구 집단이 있었습니다. 이후 9년간 윌리엄과 걸리는 그 회중과 연합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1965년에 걸리의 건강이 나빠져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야만 하였는데, 그 무렵 팔레아시우에 있던 집단은 별도의 회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사모아 정부는 선교인들의 입국 요청을 거듭거듭 거절하였습니다. 분명히 정부와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점차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증인들은 그 수가 증가하였고 활동적이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에서의 발전
셀러스 부부의 사모아 비자가 1954년에 만료되기 전에 로널드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는 대신 아메리칸사모아에 거주 신청을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로널드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의 법무 장관과 만났을 때, 그는 사모아 정부가 종교적인 이유로 내 비자 신청을 거절했다는 것을 알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셀러스 씨, 아메리칸사모아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합니다. 당신이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로널드와 돌리는 1954년 1월 5일에 아메리칸사모아의 파고파고에 도착하였습니다. 법무 장관은 로널드에게 입국 조건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정기적으로 와서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훌륭한 영적 토의를 몇 차례 즐겼습니다.
그달에 로널드와 돌리는 법무 장관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하자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지방 가톨릭 사제와 런던 선교회 목회자 역시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활발한 성서 토의가 벌어졌습니다. 로널드는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날 밤 식사가 끝나고 법무 장관은 우리 모두에게 초대에 응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오늘 밤 토의는 셀러스 부부가 우세했던 것 같네요.’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우리 부부는 영구 거주 비자를 받았습니다. 나중에 법무 장관은 우리에게 정부가 증인 선교인들의 추가 입국 신청을 환영할 것이라는 통보를 해 왔고, 나는 즉시 이 사실을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에 알렸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최초로 여호와께 헌신한 사람은 토켈라우 태생의 19세 된 왈레시(월리스) 페드로였습니다. 그의 친족이자 피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고 있던 리디아 페드로가 1952년에 아메리칸사모아를 방문했을 때, 월리스의 형에게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 한 권을 전했습니다. 젊은 월리스는 형의 집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는 주의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로널드와 돌리 부부는 1954년에 페드로 가족을 알게 되었고 월리스의 형과 누나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월리스는 여호와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지만 처음에는 종교에 대한 불신 때문에 연구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진리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파가토고에서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월리스는 영적으로 신속히 발전하여 1955년 4월 30일에 파고파고 항구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로널드와 돌리가 이곳에 온 지 겨우 일 년이 지난 1955년 1월 무렵에는, 파가토고에 있는 그들의 초라한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일곱 명이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좌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바닥에 앉았습니다. 얼마 안 있어 세 명의 새로운 사람이 로널드 부부와 함께 야외 봉사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그처럼 작아 보였지만 곧 놀라운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55년 2월 4일에 두 쌍의 선교인 부부, 폴 에번스와 프랜시스 에번스 그리고 고든 스콧과 퍼트리샤 스콧이 미국에서 아메리칸사모아로 왔습니다. 그들은 파가토고 선교인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주위로는 다채로운 이웃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해에 파고파고를 방문했던 순회 감독자 레너드(렌) 헬버그는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선교인 집은 구식 잡화점 위에 지은 큰 공동 주택이었습니다. 집 옆에 나 있는 실개천 건너편으로는 술집이 있었는데, 선원들은 밤이면 그곳에 모여 즐겼습니다. 술집에서 싸우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거리까지 들리면,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파출소장이 입에 담배를 꽉 문 채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좌우로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가라앉혔죠. 뒤뜰 바로 너머에 있는 교회에서는 지옥불 설교 소리가 귀청을 울렸습니다. 앞 베란다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정부가 월급을 지급하는 날에 사람들이 은행 주위로 몰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섬 전역에서 모여든 교회 선교사들은 사람들이 돈을 쓰기 전에 십일조를 거두기 위해 사람들 사이로 눈에 불을 켜고 신도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처럼 생동감 있는 주위 환경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하였습니다. 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 선교인은 새벽 6시에 집 건너편에 있는 이발소로 가서 주인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와 성서 연구를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제과점으로 가서 빵 굽는 사람과 연구를 하고 나서 그곳에서 빵을 가져와 아침 식사를 했지요. 또한 하루 중 그 형제는 마을 광장에서 그 지방 교도소에 수감 중인 몇몇 수감자들과 연구를 했습니다.” 그해 연말이 되었을 무렵에는 선교인들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약 6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 무료 영화 상영이 있습니다”
이처럼 관심이 증가하게 된 데에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가 한몫을 하였습니다.e 이 영화는 거의 40년 앞서 “창조 사진극”이 나온 이후로 조직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서 세계적인 전파 활동과 인쇄 업무를 강조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렌은 1955년에 아메리칸사모아를 4주간 방문하는 동안 이 영화를 15차례에 걸쳐 총 3227명의 청중에게 상영해 주었습니다. 매번 평균 215명이 영화를 본 셈입니다.
렌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매번 영화 상영에 앞서 차를 타고 마을들을 다니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광고지를 뿌리며 광고를 했지요. 그와 동시에 우리는 영화가 상영될 마을의 이름을 대면서 ‘오늘 밤 무료 영화 상영이 있습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매번 상영이 있고 나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였습니다. 관심을 갖게 된 많은 사람들은 증인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선교인 집으로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러면 선교인들은 선교인 집 안의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이 떠나면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이 연구를 하였습니다. 로널드 셀러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여호와의 증인’ 하면 여전히 그 영화에서 본 멋진 장면들을 연상하곤 했지요.”
꾸준히 전파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다
렌 헬버그의 방문이 있고 나서 두 달 뒤에는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파가토고에 형성되었습니다. 일 년 내에 회중 전도인 수는 14명에서 22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무렵, 성장하고 있는 회중을 지원하기 위해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프레드 웨그너와 셜리 웨그너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프레드는 현재 사모아 전국 위원회 성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과 선교인들은 ‘영으로 타올랐습니다.’ (로마 12:11) 렌은 이렇게 썼습니다. “전도인들의 꾸준함과 성서에 대한 지역 사회의 높은 관심으로 인해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파가토고 마을에 있는 모든 집에서 성서 연구가 한 번쯤은 사회되었습니다. 또한 섬에 있는 모든 집을 매달 한 번씩 방문하였죠.”
이러한 철저한 전파 활동은 성서에서 다루는 문제들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습니다. 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땅에서 누리게 되며, 지옥불이 없고, 죽은 사람은 무의식 상태라는 것이 상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본 진리들을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에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배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 자신의 성서를 가지고 추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가족적 유대 관계로 인해 배운 것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참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 표준보다 교회가 용인하는 느슨한 도덕 표준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예에 나오는 여행하는 상인처럼 진리를 값진 진주같이 여기고 그것을 붙잡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진실한 마음을 지닌 많은 섬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진리를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했습니다.—마태 13:45, 46.
사모아식 증거
1960년에 월리스 페드로와 결혼한 캐나다 출신의 파이오니아인 캐럴린 페드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초창기에는 증거하러 나가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이었어요. 방문한 거의 모든 집에서 누군가 성서에 대해 기꺼이 대화하고자 하였죠. 성서 연구를 쉽게 시작할 수 있었고 가족 전체가 연구에 참여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외딴 마을들에서 전파하던 기억은 특히 잊혀지지가 않아요. 어린아이들은 호별 방문을 하는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귀를 쫑긋하고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보다 앞서 다음 집으로 가서 집주인에게 우리가 오고 있다고 알려 주었죠. 아이들은 집주인에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떤 성구를 사용하고 있는지 말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마을 아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제공 방법을 준비하였죠.”
형제들은 증거 활동을 하면서 훌륭한 예의를 나타내고 합당한 지방 관습을 따르기 위해서도 노력했습니다. (고린도 첫째 9:20-23) 현재 뉴질랜드 지부 위원이며 이전에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선교인으로 일했던 찰스 프리처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뜨거운 열대성 기후 때문에, 마을의 팔레(집들)에는 벽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집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지요. 서 있는 채로 말을 걸거나 집주인이 정식으로 우리를 맞아들이기 전에 말을 건네는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 가까이 가서는 집주인이 인기척을 느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집주인은 깨끗한 깔개를 집 안의 자갈 바닥에 깝니다. 이것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와 책상다리를 하고 깔개 위에 앉으라는 초대였지요.” 많은 선교인들에게는 그런 자세로 오랫동안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다리와 발을 뻗고 단정하게 그 위에 깔개를 덮는 것은 지방 관습이 허용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선교인들은 발을 가리지도 않은 채 집주인 쪽으로 뻗는 일—사모아 사람들에게는 매우 모욕적인 행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사모아와 아메리칸사모아에서 20년간 선교인으로 봉사한 존 로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주인들은 정식으로 우리를 맞아들인 뒤 누추한 집에 성서의 소식을 전하러 와 주어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대화는 ‘어디 출신이지요? 자녀는 있나요? 가족은 어디에 삽니까?’와 같은 사적인 문제로 넘어가지요.”
존의 아내인 헬렌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는 집주인에게 언제나 깍듯한 경어를 썼습니다. 이러한 경어는 집주인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성서 소식에도 품위를 더해 주었습니다.”
캐럴린 페드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한 서로 간의 소개를 통해 우리는 만나는 개개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잘 알게 되고 그들 역시 우리와 아는 사이가 되지요. 이렇게 하면 그들의 영적 필요를 좀 더 효과적으로 충족시켜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대화가 오가고 나면 이제 전도인들은 왕국 소식을 거리낌 없이 전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전에 선교인으로 일했던 로버트 보이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집주인들은 보통 우리가 얼마나 길게 말을 하든지 간에 잘 들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듣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전한 소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들은 내용의 상당 부분을 되풀이하여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성서를 잘 알았기 때문에 성서의 가르침에 대한 긴 토의가 이어지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러한 토의는 내가 여러 가지 성서 주제에 대해 더 예리한 이해를 갖는 데 도움이 되었죠”라고 캐럴린 페드로는 말합니다.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흔쾌히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전도인들은 사람들이 단지 호기심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적인 것들에 대해 진지한 관심이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많은 새로운 관심자들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를 열망하였습니다. 존 로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모아 사람들은 타고난 언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훈련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않고도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표현할 줄 압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출판물에서 제안하는 증거 방법을 사용할 것과 타고난 화술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성경을 사용해서 사람들과 추리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한 훌륭한 훈련을 통해 마침내 유능한 복음 전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사모아어 출판물로 인한 강력한 효과
사모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펠레 푸아이우폴루는 진리를 사랑하는 이러한 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1954년에 네 가지 전도지를 사모아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펠레는 오랫동안 조직의 주된 사모아어 번역자로 일했습니다. 그는 종종 석유등 아래서 구식 수동 타자기로 번역물을 타자하면서 밤늦게까지 일했습니다.
펠레는 번역 일을 하면서, 아내와 여덟 명의 자녀를 돌보았고, 회중 활동을 인도하였으며, 매주 닷새 반은 섬 전역에 있는 코코아 농장을 검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렌 헬버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처럼 지칠 줄 모르고 일하던 그 시절, 펠레는 인정을 받거나 칭송을 얻는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여호와에 의해 사용되는 특권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충성과 겸손과 열심 때문에 훌륭한 증인이 되었으며 우리 모두의 애정 어린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1955년에 전도인들은 32면으로 된 사모아어 소책자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을 1만 6000부 배부하였습니다. 이 소책자는 쉬운 표현을 사용하여 성서의 기본 가르침들을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하고 사회하기에 이상적인 도구였습니다. 리처드 젱킨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 소책자를 두세 번 연구하고 나면 침례를 받을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책을 좋아했지요!” 사모아어로 된 다른 소책자들 역시 뒤이어 나왔습니다.
사모아어판 「파수대」는 1958년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인쇄 기술을 가진 프레드 웨그너가 한 장 한 장 등사하고 철하여 잡지를 생산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잡지가 미국에서, 그 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생산되었습니다. 몇몇 출판물은 번역되어 사모아어 「파수대」에 매달 연재되는 식으로 발행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반부터는 완역된 사모아어 서적들이 출판되면서 전파 활동을 가속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직에서 발행한 제본 서적들은 사모아 제도 전역에서 널리 배부되어 왔습니다. 전도인들이 1955년에 「당신은 아마겟돈을 살아남아 하나님의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You May Survive Armageddon Into God’s New World) 책을 배부하였을 때는 아메리칸사모아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 책을 한 부씩은 갖게 되었습니다. 월리스 페드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사람들이 성서를 읽기는 했지만 대부분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가족의 아이들은 종종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면 ‘아마겟돈이 왔다!’ 하고 소리치며 우리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심지어 자녀의 이름을 아마겟돈이라고 짓기도 하였습니다.”
1972년에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사모아어로 발행되었을 때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선교인들 대부분은 그 서적이 처음 나왔을 때 책을 간절히 원하는 독자들에게 매달 두 박스 이상씩 전하였습니다. 프레드 웨그너는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다가왔고 심지어는 버스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는 「진리」 책을 달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회상합니다.
대회를 통해 강화되다
1957년 6월에는 아메리칸사모아의 파고파고에서 최초로 열리게 될 순회 대회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서 기대감이 고조되었습니다. 사모아의 전도인들도 프로그램을 즐기기 위해 배를 타고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사람들을 대회로 초대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와 사모아어로 대회 프로그램을 널리 광고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모아와 아메리칸사모아의 전도인 60명은 금요일 첫 회기에 106명이 참석한 것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사모아의 문화와 구경하던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인해 식사 시간에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로널드 셀러스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식사는 사모아의 문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사람들은 식사 시간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습적으로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대회 점심시간에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하던 많은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자 급식부에서 예상치 못한 부담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급식부에서는 대회에 참석하는 형제 자매들이 먹을 양만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식사 시간은 구경을 하던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모아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릴 때, 관습적으로 남자들이 여자들과 아이들보다 음식을 먼저 먹습니다. 외국인들과 교직자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앉아 가장 좋은 음식을 먹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회에서는 달랐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외국 선교인들과 현지인 가족들이 똑같이 함께 앉아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사랑과 연합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대회들은 전도인들에게 격려를 주고 그들을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곧 닥치게 될 호된 시련에 대비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아피아에서 배교가 일어나다
사모아 제도에서 격려적인 성장이 있었지만, 한편 사모아에서는 문제들도 생겨나고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한 고집 센 마타이(가족의 우두머리)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이 신권적 인도를 거부하고 아피아 회중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남자의 집에서 집회가 열렸기 때문에 회중에는 계속해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마침내 1958년에 반항자들은 회중에서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연구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당시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성원으로 피지를 방문하고 있던 더글러스 헬드가 사모아로 건너와서, 불만을 품은 이들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회중의 충실한 사람들은 장성된 그의 성경적 조언을 듣고 큰 격려를 받았지만, 집회에 참석하던 사람들 중 4분의 1은 결국 반항자들과 함께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굽힐 줄 모르는 자존심에 희생된 이들 중 몇몇은 후에 제명되어야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여호와의 영이 어느 편에 머물고 있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반항자들의 무리는 결국 분열되었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피아 회중은 그해에 전도인 수가 35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그 회중은 아피아 병원 근처에 있는 리처드 젱킨스와 글로리아 젱킨스 부부 집에서 임시로 집회를 보다가, 결국 아피아의 파아토이아에 있는 마아투시 레아우아나이의 집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에는 전도인들 간에 정말 따뜻한 사랑과 협력의 영이 흘렀습니다. 나중에 마아투시가 소유한 땅에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 있는 한 회중의 재정적 지원으로 아피아 최초의 왕국회관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격려적인 교제
아피아 회중은 1959년에 더욱더 강화되었습니다. 그해에 사모아 정부는 아피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순회 대회에 참석할 목적으로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오고자 하는 다섯 명의 선교인들의 입국을 허락하였습니다. 288명이 대회에 참석하였고 열 명이 침례를 받게 되어 모두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2년 후 아피아 회중은 화이트호스인이라고 하는 여관 근처에 있던 오래된 독일 병원 건물에서 최초로 지역 대회가 열렸을 때 손님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정표가 된 이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 중에는 멀리 뉴질랜드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그러한 대회들로 인해 대회 조직과 관련하여 소중한 훈련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후에 사모아 정부가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선교인들의 입국을 거절하였을 때, 형제들은 그처럼 훈련을 받은 덕분에 직접 대회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1967년에는 사모아에서 처음으로 고대 의상을 갖춘 한 시간짜리 성서 드라마를 조직하고 상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드라마는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하느님의 도피 도시 마련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 드라마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에 아메리칸사모아와 피지에서 인근 섬들의 형제들을 초대하는 대회를 열면, 사모아 전도인들도 참석하여 유익을 얻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희생을 치러야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려면, 여행 경비와 식비가 들 뿐만 아니라 길게는 한 달 동안 사모아를 떠나 있어야 하였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가 발전을 거듭하다
1966년에 아메리칸사모아 형제들은 파고파고에서 “하나님의 해방의 아들들” 지역 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이 역사적인 대회에 372명의 대표자가 참석하였으며, 이들은 뉴질랜드, 뉴칼레도니아, 니우에, 바누아투(이전의 뉴헤브리디스), 사모아(이전의 서사모아), 오스트레일리아, 타히티, 통가, 피지에서 온 여덟 개 언어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에 현지 회중 전도인 수는 겨우 28명에 불과했지만 여러 언어를 말하는 다채로운 청중들로 인해 대회 기간에 파고파고의 인구 대 증인 비율은 35 대 1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적은 수의 전도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방문객들에게 숙소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까? 프레드 웨그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이곳을 찾은 많은 대표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현지 주민들은 후대를 잘하였고 형제들을 기꺼이 환영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걸 알고는 매우 언짢아했죠.”
이 대회는 파고파고 회중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습니다. 6개월 내에 집회 참석자 수가 59퍼센트 증가하였으며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좋은 소식의 전도인으로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로널드 셀러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로 인해 회중은 자극을 받아 집회를 보기에 좀 더 적합한 시설을 마련하고자 하였습니다.” 파고파고가 위치한 투투일라 섬에는 빈 땅이 거의 없었지만 한 전도인은 친절하게도 도시 서쪽의 타푸나에 있는 한 부지를 30년간 임대하여 주었습니다.
프레드 웨그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땅이 해수면보다 낮았기 때문에 회중은 3개월 동안 열심히 용암을 모아 회관이 들어설 자리에 토대를 놓았습니다.”
콘크리트를 부어 바닥을 만들 때가 되자, 「파수대」와 「깨어라!」를 정기 구독하고 있는 그곳의 가톨릭 사제는 형제들이 교회 소유의 콘크리트 믹서를 빌릴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 사제는 후에 결혼에 관한 「깨어라!」 기사를 읽고는 즉시 사제직을 내놓고 결혼을 하였다”고 로널드 셀러스는 기술합니다.
해외의 형제들이 이 왕국회관 건축 공사를 관대하게 지원하였습니다. 초창기에 아메리칸사모아에 선교인으로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고든 스콧과 퍼트리샤 스콧은 자신들의 회중에 있는 의자들을 새 왕국회관에서 사용하도록 기증하였습니다. 로널드 셀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증받은 의자들 중 남는 의자들을 영화관에 팔아 의자를 이곳으로 운반하는 데 든 비용을 지불하였습니다!” 1971년 타푸나에 130석 규모의 새 왕국회관이 완공되어 봉헌되었습니다. 나중에 회관 위층에 선교인 숙소가 추가되었습니다.
사모아가 문을 열다
1974년까지 사모아에서는 증인 선교인들의 입국을 막는 정부의 제한 조치들이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였습니다. 그해에 책임 맡은 현지 형제들은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총리를 직접 찾아가 면담하였습니다. 면담을 한 형제들 중 하나였던 무파울루 갈루바우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토의 중에 우리는 한 정부 관리가 공인되지 않은 위원회를 구성하여 선교인들의 모든 입국 신청을 검토하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위원회는 우리의 종교적 적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총리에게는 보고하지도 않은 채 선교인들의 비자 신청을 모조리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갈루바우는 계속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러한 책략에 대해 모르고 있던 총리는 사실을 알고는 즉시 출입국 관리소장에게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서류철을 가져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총리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엉터리 위원회를 해산시켰고 폴 에번스와 프랜시스 에번스에게 1회 연장 가능한 3년 만기의 선교인 비자를 내주었습니다.” 정말 가슴 설레는 소식이었습니다! 선교인들은 19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온전히 적법한 자격으로 사모아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폴과 프랜시스 부부는 처음에 무파울루 갈루바우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1977년에 존 로즈와 헬렌 로즈가 사모아로 오자 그 부부와 함께 아피아의 바이알라에 새로 임차한 선교인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선교인들도 왔는데 1978년에는 로버트 보이스와 베티 보이스가, 1979년에는 데이비드 요시카와와 수전 요시카와가, 1980년에는 러셀 언쇼와 레일라니 언쇼가 사모아로 왔습니다.
섬 생활에 적응함
여러 해에 걸쳐 사모아로 이주한 외국인 증인들은 이처럼 낙원 같은 곳에서의 생활도 어려운 점들이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어려움은 교통 문제였습니다. 존 로즈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아피아에서 선교 봉사를 한 처음 2년 동안 우리는 집회에 참석하고 증거를 하기 위해 먼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대중들이 많이 이용하는 울긋불긋한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지요.”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는 이러한 버스는 보통 중소형 트럭 뒷부분에 나무로 된 객실을 얹어 만든 차량입니다. 객실을 꽉 메운 승객들은 농기구에서부터 갓 생산된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을 가지고 다닙니다. 시끄러운 음악과 흥겨운 노랫소리에 객실 안은 잔칫집 같은 분위기입니다. 버스 정거장과 시간표와 노선이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한 여행 안내 책자를 보면 “바바우행 버스는 꼭 오긴 오지만 언제 올지는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존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길가에 있는 뭔가를 사고 싶다면 그저 운전사에게 멈추어 달라고 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물건을 산 뒤에 다시 버스에 오르면 버스는 가던 길을 다시 갔습니다. 그렇게 해도 늦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버스의 자리가 다 차면 새로운 승객들은 이미 앉아 있는 사람의 무릎 위에 겹쳐 앉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인 남편들은 그에 대비하여 아내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는 방법을 금세 터득하였습니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아이들과 어른들은 귀에서 작은 동전을 빼내어 버스 요금을 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귀가 편리한 동전 지갑이었던 셈입니다!
선교인들과 전도인들은 섬들 사이를 오가는 데 비행기나 작은 배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러한 여행은 위험할 수 있으며 예정보다 늦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남편 피터와 함께 남태평양 전역에서 오랫동안 순회 활동을 한 엘리자베스 일링워스는 “우리는 인내심을 나타내고 유머 감각을 기르는 법을 배워야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섬 내에서 이동할 때는 폭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생기며, 사이클론이 발생하는 철에는 특히 그렇습니다. 선교인이었던 제프리 잭슨은 회중 서적 연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범람하는 개울을 건너려다 미끄러져 사나운 급류 속으로 넘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흙탕물에서 흠뻑 젖은 몸으로 나온 그는 계속 집회 장소로 향했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집의 가족은 잭슨 형제가 몸을 말리고 검은색의 긴 라발라바(몸에 두르는 폴리네시아식 킬트 혹은 스커트)를 입게 해 주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한 새로운 관심자가 그를 가톨릭 사제로 착각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현재 잭슨 형제는 통치체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새로 도착한 선교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그 밖의 어려움들로는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열대의 끊임없는 더위에 적응하며, 익숙하지 않은 건강 문제를 극복하고, 현대적 편의 시설이 거의 없이 살아가며, 벌레 떼에 물리지 않으려고 피하는 일 등이 있습니다. 무파울루 갈루바우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선교인들은 정말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많은 부모들이, 우리를 사랑스럽게 지원해 준 그 소중한 선교인들의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바이에 좋은 소식이 퍼지다
이제 사모아 제도를 통틀어 가장 큰 섬이며 자연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사바이로 주의를 돌려 보겠습니다. 이 섬의 많은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으며 높은 산들, 화산 작용으로 인해 분화구가 450개가량이나 되는 들쭉날쭉한 산등성이, 통과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정글들, 울퉁불퉁한 용암 지대가 특징을 이룹니다. 주민들 대부분은 해안을 따라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들에 삽니다. 사바이 섬에 처음으로 좋은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55년의 일입니다. 우폴루 섬에 있던 렌 헬버그와 일단의 전도인들이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이 섬에 잠깐 들렀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6년 뒤에 두 명의 선교인 자매—사모아 사람으로는 최초로 길르앗에 다녀온 티아 알루니와 그의 짝 아이비 카우헤—가 초대를 받고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사바이로 이주하였습니다. 1961년에 사바이에 도착한 두 자매는 섬의 동쪽 연안에 위치한 마을인 포가포아에 사는 한 노부부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후, 사바이에 살았던 적이 있는 한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가 한동안 이 두 자매와 함께 일하였습니다. 여섯 명 내지 여덟 명으로 이루어진 이 새로운 집단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아피아에 있는 형제들이 매달 한 번씩 이곳을 방문하여 공개 강연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임은 포가포아의 한 작은 팔레(집)에서 열렸습니다.
티아와 아이비는 1964년까지 사바이에 머물다가 임지가 바뀌어 다른 섬으로 갔습니다. 그 후 10년간 사바이에서는 영적 활동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몇몇 가족들이 사바이에서 활동을 재개하는 일을 돕기 위해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리사티 세기와 마레타 세기, 해피 걸드너 바넷과 마오타 걸드너 바넷, 파이가아이 투, 팔로타 알라기, 쿠미 팔레마아(나중에는 톰슨),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온 로널드 셀러스와 돌리 셀러스가 있었습니다. 포가포아에 형성된 그 작은 집단은 해변가에 있는 세기 부부의 팔레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후에 그 근처에 선교인 집과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또 다른 집단이 섬의 서해안에 위치한 타가라는 마을에 형성되었습니다.
1979년부터는 현지 전도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더 많은 선교인 부부들이 사바이 섬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한 선교인들로는 로버트 보이스와 베티 보이스, 존 로즈와 헬렌 로즈, 레바 파아이우와 테니시아 파아이우, 프레드 홈스와 타미 홈스, 브라이언 멀카히와 수 멀카히, 매슈 쿠르츠와 데비 쿠르츠, 잭 와이저와 메리제인 와이저가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은 훌륭한 모범을 보였고 사바이에서의 전파 활동은 꾸준히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전통과 가족의 유대가 사바이 주민들의 발목을 꽉 붙잡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활동을 금지한 마을이 전체 마을의 3분의 1에 달했으며, 일부 마을에서는 심지어 그러한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주민들에게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사람들을 발전하도록 도우려면 많은 시간과 인내심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진리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중에는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건강 문제를 극복하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메투셀라 네루가 있었는데, 그는 열두 살 때 말에서 떨어져 등뼈가 부러졌습니다. 한 선교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사고를 당한 후, 그는 걸을 때 마치 몸이 반으로 접힌 것처럼 보였으며 고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열아홉 살에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메투셀라는 결연하게 가족의 반대를 인내하였습니다. 장애만 없었다면 회중 집회 장소까지 5분이면 걸어갈 수 있었겠지만, 장애 때문에 45분간이나 힘들게 걸어야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투셀라는 잘 발전하였고 1990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후에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여 전 시간 봉사자가 되었고 장로의 자격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30명이 넘는 그의 친족들이 파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해 왔으며 그중 여러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메투셀라는 지속되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는 얼굴의 낙관적인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우말루 타우아나이 역시 심각한 건강 문제를 극복하고 영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 사람입니다. 사우말루는 나병으로 인해 외모가 심하게 손상되었고 외딴 마을인 아오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이 아주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이번 톰슨과 편지를 통해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뒤에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아사 코가 사바이로 왔고 그 연구를 인계받았습니다. 사우말루는 1991년에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섬의 반대편에 있는 마을인 타가까지 차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였습니다.
사우말루는 처음으로 특별 대회일에 참석하였을 때, 자신의 손상된 외모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자신의 차에서 프로그램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점심 휴회 시간에 형제 자매들이 친절하게 그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환영해 주자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형제 자매들의 따뜻한 초대를 감사히 받아들인 그는 청중석에 앉아서 남은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얼마 안 있어 사우말루와 그의 아내 토리세는 파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집회에 참석하려면 편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가야 하였습니다. 사우말루는 1993년에 침례를 받았고 때가 되자 봉사의 종으로 일할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의사들이 그의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하였을 때도 여전히 그는 차를 몰고 집회에 갔습니다. 그가 사는 마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활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우말루와 토리세는 비공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증거하며 전화 증거도 합니다.
현재 두 사람은 아피아에 살고 있으며, 사우말루는 여러 건강 문제들로 인해 그곳에서 정기적인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부부는 강한 믿음 때문에 깊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토켈라우에서 시련들이 있다
세 개의 독립된 환초들로 이루어져 있는 토켈라우는 사모아 북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왕국 소식이 1974년에 처음으로 이곳에 전해졌습니다. 의사인 로파티 우일리가 그해에 피지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토켈라우로 돌아왔습니다. 로파티의 아내인 엠마우는 침례받은 증인이었으며 로파티는 피지에 있을 때 잠깐 동안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f
토켈라우로 돌아온 로파티는 자신과 같은 의사인 이오나 티니엘루와 그의 아내 루이사 티니엘루가 침례받은 증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누메아 포우아라는 관심자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친족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세 남자는 정기적인 성서 모임과 공개 강연을 조직하였고 얼마 있지 않아 평균 25명이 그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세 사람은 가족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증거하는 일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권 활동을 모두가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한 런던 선교회 목회자의 선동으로 인해 토켈라우 원로 회의에서 이 세 명의 가장을 소환하였습니다. 로파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모임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만약 명령에 불복한다면 우리를 집과 함께 산 채로 불태우거나 뗏목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사용하여 그들과 추리하려고 애썼지만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최후통첩을 받은 세 가족은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대는 시련의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12년 뒤에 로파티의 누나와 매형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다니던 교회에서 탈퇴하자 마을의 원로들은 모든 증인을 마을에서 쫓아냈습니다. 로파티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날 밤 증인 가족들은 저마다 개인 사물을 작은 보트에 싣고 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들의 집과 농장은 이웃 사람들에게 약탈당하였습니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도인들은 용감하게 숭배를 위해 계속 함께 모였습니다. 로파티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가족들은 토요일 아침에 주말 나들이를 가는 척하면서 한 작은 외딴 섬으로 노를 저어 가서는 집회를 보고 일요일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그 시기에 몇몇 가족들은 토켈라우에서 배를 타고 사모아로 가는 길고도 힘든 여행을 하여 연례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가족들은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1990년 무렵에는 토켈라우에 증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아피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던 아이번 톰슨은 섬들 간을 오가는 서신을 통해 토켈라우에 사는 로네 테마라는 젊은 남자와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로네는 영적으로 잘 발전하였고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몇몇 전도인들이 토켈라우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사모아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던 제프리 잭슨은 토켈라우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뉴질랜드 판무관과 만나 여호와의 증인이 토켈라우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에 관해 토의해 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프리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하지만 나는 언어학자의 자격으로 토켈라우를 방문할 수 있다는 허락을 얻었습니다. 토켈라우로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선장이 나에게 선장 휴게실로 와서 다과를 나누자고 초대하였습니다. 휴게실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우리가 만나 보려고 했던 토켈라우 담당 판무관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가 끝날 즈음에 그는 내게 감사를 표했고 토켈라우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은 토켈라우에서 여전히 공식적인 반대를 받고 있습니다. 2006년에 푸이마누 키리피와 하테사 키리피의 막내아들이 사망하였을 때, 푸이마누는 장례식에서 성경에 근거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원로 회의는 푸이마누 가족을 토켈라우에서 추방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후에 푸이마누가 그곳의 교회에서 일하기를 거부했을 때에도 그런 협박이 가해졌으며, 그와 그의 아내는 정치 활동에 참여하라는 압력에 직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푸이마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시련의 시기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야고보 1:2-4)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충실한 종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신명 31:6.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여호와의 축복을 누리다
좋은 소식이 처음 사모아에 도달한 이후로 여러 지부에서 이곳의 왕국 활동을 감독해 왔습니다. 현재는 열심히 일하는 네 명의 형제로 구성된 전국 위원회가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의 감독 아래 사모아 제도의 활동을 돌보고 있습니다. 사모아 제도의 형제들은 여러 해에 걸쳐서 아주 외딴 지역에까지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에서는 정기적인 특별 증거 활동을 통해 투투일라 섬에서 각각 북쪽으로 320킬로미터,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외딴 지역인 스웨인스 섬과 마누아 제도의 구역을 돌보고 있습니다. 전도인들은 그러한 구역을 방문하여 수백 부의 출판물을 전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과 수십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또 어떤 전도인들은 자기가 사는 구역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파함으로 구역을 확장시켜 왔습니다.
번역을 위한 노력을 강화하다
전도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사모아어 출판물에 대한 수요도 증가하였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투발루에서 선교 봉사를 하던 제프리 잭슨과 그의 아내 제니가 1985년에 사모아 지부 사무실로 오게 되었습니다. 제프리는 두 명으로 이루어진 사모아어 번역 팀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번역자들은 베델 식당에 놓여 있는 식탁에서 일했지요. 매일 아침 식사 후에 식탁을 치우고 나서 번역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정오가 되기 직전에 번역하던 것들을 치우고 점심을 위해 식탁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식탁을 다시 치우고 번역 일을 계속 하였습니다.”
작업이 반복적으로 중단되었기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번역하는 과정 역시 집중적인 노력과 많은 시간이 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제프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손으로 먼저 쓴 뒤에 타자를 치는 방식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인쇄할 준비가 되기 전에 교정과 수정 작업을 위해 원고마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타자해야 하였습니다.” 1986년에 지부 사무실에서 최초로 컴퓨터를 구매하면서 그러한 많은 반복 작업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다른 도구들을 통해 번역과 인쇄 과정이 더욱더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번역과 출판을 위한 노력은 특히 「파수대」와 「깨어라!」에 집중되어 왔습니다. 1993년 1월 이후로 사모아어판 「파수대」가 영문판과 동시에 발행되고 4색으로 인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연 4회 발행되는 사모아어판 「깨어라!」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제프리는 “「깨어라!」가 나왔다는 소식은 신문과 라디오뿐만 아니라 전국 텔레비전 뉴스로까지 보도되었지요”라고 회상합니다.
현재 일단의 사모아어 번역자들은 사모아어로 번역하는 일과 관련된 필요에 잘 부응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곳의 다른 번역 팀들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하는 사모아어 번역자들 역시 언어에 대한 이해와 번역 기술에 대한 질 높은 훈련을 받아 왔으며 그러한 훈련을 통해 더욱 정확하고 능률적으로 번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부 확장의 필요
밀턴 G. 헨첼이 1986년에 지구 감독자로 사모아를 방문하였을 때, 지부의 늘어나는 필요를 감당하기에는 시나모가 선교인 집이 너무 좁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따라서 통치체는 브루클린의 설계/건축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의 형제들이 사모아를 방문해서 더 큰 시설이 필요할 것인지 평가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제안이 있었습니까? 시나모가에서 내륙 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시우세가에 있는 3헥타르의 부지를 매입하여 새로운 베델 복합 건물을 건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완공하게 되면 시나모가에 있는 기존의 베델 집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대회 회관을 지을 수 있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지부를 위한 건축 공사가 1990년에 시작되었으며 그 공사는 참으로 국제적인 공사였습니다! 공사를 위해 총 44명의 국제 종들과 69명의 국제 건축 자원 봉사자들, 38명의 현지 전 시간 자원 봉사자들 그리고 많은 시간제 봉사자들이 합심하여 수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에 갑자기 재난이 닥쳤습니다.
재난이 닥치다!
남태평양에 불어 닥친 가장 강력한 폭풍 중 하나였던 사이클론 발이 1991년 12월 6일에 사모아를 강타하였습니다. 시속 260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람이 닷새 동안 작은 섬들을 강타하여 초목의 90퍼센트가 잎이 다 떨어져 버렸고, 미화 3억 8000만 달러 상당의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1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신속하게 구호 활동을 조직하였지요”라고 존 로즈는 회상합니다. 며칠 내에 피지 지부에서 보낸 구호물자를 가득 실은 화물 컨테이너가 도착하였습니다. 태평양 지역의 다른 지부들에서 보낸 구호 기금도 신속히 그 뒤를 이었습니다.
시우세가의 새로운 지부 시설을 위해 일하던 국제 종인 데이브 스테이플턴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당장 필요한 일부터 우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당면한 일에는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에게 깨끗한 물, 방수포, 등유, 의약품을 공급하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시나모가 베델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복원하였고 지부 건축 현장의 손상된 건물들을 보수하였습니다. 그 후에는 손상된 왕국회관과 선교인 집들 그리고 증인들의 개인 집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지었습니다. 일을 마치는 데는 수개월이 걸렸습니다.”
나중에 정부에서는 시설 보수를 하도록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를 위해 기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때 형제들은 이미 우리가 입은 피해를 모두 복구하였기 때문에 남은 기금을 정부 청사들을 수리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을 담은 편지와 함께 그 기금을 돌려주었습니다. 그 후로 정부 관료들은 감사의 뜻으로, 지부 건축 공사를 위해 해외에서 수입해 오는 자재들에 부과되는 관세를 경감시켜 주었고 그로 인해 상당한 비용이 절감되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꿈들을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 주셨다”
사이클론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난 뒤, 새 지부 건축을 위한 공사는 신속한 진전을 보았습니다. 1년 반 뒤인 1993년 5월에 베델 가족은 마침내 꿈을 이루었는데 시나모가에서 시우세가의 새로운 베델 집으로 이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1993년 9월에는 뉴질랜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에서 85명의 증인 기술자들이 시나모가 대회 회관 건축을 위해 사모아에 왔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비를 들여 이곳에 왔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기술자들을 이끌었던 켄 애벗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서로 다른 건축 용어와 도량형이 건축 현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영은 우리가 발생하는 그 어떤 문제도 즐거운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와이에서 온 기술자들과 함께 일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제적인 형제 관계를 직접 목격한 모든 사람이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국제적인 건축 팀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대회 회관이 단지 열흘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현지 전도인들은 해외에서 온 기술자 형제들과 함께 일함으로 가치 있는 기술을 습득하였으며 영적인 유익도 얻었습니다. 그로 인해 공사가 끝나고 나서 일부 전도인들은 파이오니아로 등록하였으며 베델 봉사를 시작한 전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1993년 11월 20일과 21일에 지부 사무실과 대회 회관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통치체의 존 바가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선교 봉사를 한 폴 에번스는 이 즐거운 행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대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셔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꿈들을 기대 이상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진리는 삶을 변화시킨다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작용하게 되면 진리는 그들이 여호와의 높은 표준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는 동기를 갖게 만듭니다. 사모아 제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의 이러한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하였습니다.—에베소 4:22-24; 히브리 4:12.
일례로 응공고 쿠푸와 마리아 쿠푸는, 사모아 제도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드 웨그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두 사람과 한동안 연구를 하였지만 그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은 우리에게 새로 발급받은 결혼 증서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응공고는 그 후에 사망하였지만, 마리아는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여전히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사모아 제도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직면하는 또 다른 문제는 피의 신성함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사모아 제도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돼지와 닭을 목 졸라 죽인 뒤에 요리하여 먹는데, 이러한 관습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창세 9:4; 레위 17:13, 14; 사도 15:28, 29) 아메리칸사모아의 한 젊은 여자는 자신의 성서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하느님의 분명한 명령을 직접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줄리 앤 패젓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족이 교회에 다니고 정기적으로 성서를 읽기는 했지만 그 여자는 어린 시절부터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 즉시 성서의 지시를 받아들여 피를 빼지 않은 고기는 어느 것이든 먹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피의 신성함에 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은 현재 사모아 제도 전역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사모아 제도의 의료인들은 일반적으로 수혈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기꺼이 존중해 줍니다.
창조주를 찬양하는 청소년들
사모아 제도의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이 요리와 청소를 하고 텃밭을 가꾸며 동생들을 돌보도록 훈련시킵니다. 사모아 제도의 많은 어린이들이 어린 나이에 영적인 책임 역시 받아들이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가족의 도움 없이 여호와의 편에 서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까지 하는 데에는 그처럼 일찍부터 받은 훈련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네 로파티는 열세 살 때 부모가 집회 참석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네가 늘 오빠와 남동생과 여동생을 불러 모은 뒤에 8킬로미터를 걸어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으며 시우세가 지부 사무실 건축 현장에서 일하였습니다. 아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인들은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내가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네는 지부 사무실 건축 현장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자원 봉사자인 스티브 골드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였고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러시아의 건축 현장에서 국제 종으로 봉사하다가 사모아 베델로 돌아갔습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한 교육
여호와의 증인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효과적인 방법 한 가지는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피아에 근거지를 둔 한 독립된 FM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1996년 1월부터 “성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라는 주 1회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해 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방송 대본을 마련하고 프로를 진행하는 일을 사모아 지부의 레바 파아이우와 팔로타 알라기가 맡았습니다. 레바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 프로에서 알라기 형제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가 있었는가? 그 많은 물은 어디에서 왔는가? 홍수로 인한 물은 어디로 갔는가? 어떻게 모든 동물이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가?’ 나는 우리 출판물에서 발췌한 내용을 가지고 그 질문들에 대답하였습니다. 이 프로의 끝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 주에 다룰 주제를 소개하였고 시청자들에게 의문이 있다면 근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직접 만나 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다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직 한 명의 아내만 있어야 하는데도 솔로몬에게 많은 아내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의 하느님께서 사람이 불타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초를 당하게 하실 것인가? 성서는 사람의 책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책인가?’”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일 년이 넘게 계속되었으며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이번 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기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즐겨 듣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처럼 흥미로운 질문들에 관해 대답해 주는지 미처 몰랐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이 필요하게 되다
1990년대에 사모아와 아메리칸사모아에 있던 대부분의 회중은 개인 집에서 집회를 보거나 숲 속에서 구한 재료로 지은 건물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전국 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한 스튜어트 두갈은 “이러한 모임 장소들은 종종 지역 사회로부터 무시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아메리칸사모아의 타푸나에 있는 25년 된 왕국회관도 노후되었음이 역력하였습니다. 노후된 시설을 새로운 왕국회관으로 대치할 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왕국회관을 지으려면 더 넓은 부지가 필요하였는데, 매우 작은 섬인 투투일라에는 그런 부지가 부족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기존의 왕국회관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페테사에 빈 땅을 소유하고 있는 유력한 가톨릭 신자인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는 형제들이 숭배 장소를 지을 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 문제를 자기 딸과 이야기해 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여자의 딸은 그 부지에 상업용 건물을 지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흘 뒤에 형제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형제들에게 그 부지를 팔겠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첫째로 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월리스 페드로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 여자는 심지어 우리가 돈을 지불하기도 전에 토지 권리 증서를 주면서 ‘당신들은 정직한 사람들이고 땅값을 정확히 다 지불할 사람들이라는 걸 알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였지요.” 냉방 시설이 갖추어진 250석 규모의 아름다운 왕국회관이 이 부지에 건축되어 2002년에 봉헌되었습니다.
1999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재원이 부족한 나라들에서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돕기 위한 새로운 마련을 시행하였습니다. 사모아 제도에서 이러한 마련으로 건축된 최초의 왕국회관이 우폴루 섬의 남해안에 있는 한 외딴 마을인 레파가에 세워졌습니다. 열 명의 증인으로 이루어진 레파가 회중은, 이전에는 한 전도인의 집 앞에 바짝 붙여서 벽이 없이 초가지붕을 이어 만든 방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아내 코럴과 함께 통가에서 7년간 봉사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잭 시디가 건축 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멀리서 보면, 농부, 어부, 가정주부들로 이루어진 건축 봉사자들이 건축 현장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개미들처럼 보였습니다.”
60석을 갖춘 왕국회관이 2001년에 완공되자 마을 주민들은 새 왕국회관의 외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건물은 품위가 있으면서도 단순해서 정말 마음에 드네요. 우리가 다니는 교회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화려한 장식에다 비품들로 꽉 차 있는 교회 건물은 어수선하고 지저분하게 보일 때가 많지요.” 집회 참석자 수 역시 크게 늘었습니다. 2004년에 이 새로운 왕국회관에서 거행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20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2005년 말까지 사모아 제도 전역에서 재원이 부족한 나라들을 위한 건축 프로그램을 통해 네 채의 새 왕국회관이 지어졌고 세 채는 개축되었습니다. 그에 더해 사모아의 아피아에 있는 시나모가 대회 회관도 개축되었습니다. 재원이 부족한 다른 곳의 형제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사모아 제도의 전도인들은 세계 전역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의 이러한 사랑 넘친 지원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베드로 첫째 2:17.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다
사모아 제도의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그리고 특히 하와이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모아인 지역 사회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700명이 넘는 증인들이 11개의 사모아어 회중과 2개의 사모아어 집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민을 간 나라의 영어 회중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모아 전도인들도 있습니다.
사모아 제도 출신인 다수의 증인들은 해외로 가서 영적인 훈련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 그처럼 받은 훈련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990년대에는 탈랄렐레이 레아우아나이, 시티비 팔레소오, 케이시 피타, 페아타 수아, 앤드루 코, 시오 타우아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한 뒤, 왕국 활동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모아로 돌아왔습니다. 현재 앤드루와 그의 아내 포투오사모아는 사모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시오와 그의 아내 에세는 어린 아들인 엘 나단을 데리고 수년 동안 순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현재 시오는 전국 위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른 졸업생들은 장로로, 파이오니아로, 전도인으로 회중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활동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2008년에 사모아와 아메리칸사모아에 있는 12개 회중의 최고 전도인 수는 620명이었습니다. 2300명이 넘는 사람이 2008년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모아 제도는 앞으로 더 성장할 잠재력이 풍부합니다.
여호와의 조직과 함께 전진함
사모아 제도의 마음이 정직한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에 반응을 나타내 왔습니다. (마태 24:14) 그들은 바다를 여행한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사탄의 낡은 세상을 떠나 여호와의 영의 인도를 받는 조직 가운데 있는 새로운 영적 보금자리로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해 냈습니다. 가족의 반대, 마을에서 추방되는 일, 교직자들의 선전, 정부의 제한 조치들, 육체적인 유혹과 같은 장애물과 그 밖의 시련들도 그들이 참하느님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중단하도록 막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 첫째 5:8; 요한 첫째 2:14)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현재 영적 낙원에 안전히 거하고 있습니다!—이사야 35:1-10; 65:13, 14, 25.
하지만 그들의 여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최종 목적지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하느님의 왕국 정부의 의로운 통치 아래 있을 지상 낙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히브리 11:16) 사모아 제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세계적인 형제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강력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목표에 달하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습니다.
[각주]
a 라피타는 이들이 만든 특색 있는 도기가 처음으로 발견된 곳을 이르는 뉴칼레도니아의 유적지이다.
b 서사모아는 1997년에 국명을 사모아로 바꾸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사모아라는 이름을 일관되게 사용할 것이다.
c 해럴드가 유숙했던 집주인이었던 탈리우타파 영의 자손들 몇몇은 나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그의 손자인 아서 영은 현재 아메리칸사모아에 있는 타푸나 회중에서 장로이자 파이오니아로 섬기고 있다. 아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 중 하나는 해럴드 길이 그의 집안에 전해 준 성경이다.
d 사모아 사람들은 ‘펠레’와 같은 이름과 성을 갖고 있다. 펠레는 아버지로부터 푸아이우폴루라는 성을 물려받았다. 또한 사모아 사람들 중에는 추장명을 부여받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런 추장명을 포기하거나 거절하는데, 그러한 이름에 정치적·세상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책에서는 펠레 푸아이우폴루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개인 이름 뒤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을 사용할 것이다.
e 이 영화는 1995년에 비디오카세트로도 발표되었는데,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독일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중국어(광둥어와 표준 중국어), 체코어, 포르투갈어(브라질용과 유럽용), 프랑스어, 핀란드어, 한국어로 나와 있다.
f 로파티는 그 뒤에 뉴질랜드에 갔을 때 침례를 받았다.
[77면 삽입]
“어르신이 오늘 밤에 왕국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것이죠. 어르신이 이 소식에 귀를 기울이시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98면 삽입]
“아이들은 종종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면 ‘아마겟돈이 왔다!’ 하고 소리치며 우리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108면 삽입]
“바바우행 버스는 꼭 오긴 오지만 언제 올지는 모른다”
[69, 70면 네모와 삽화]
사모아의 종교—과거와 현재
사모아의 고대 종교는 다신 숭배, 정령 숭배, 심령술, 조상 숭배가 뒤섞인 형태였으나 신전이나 우상이나 조직화된 사제직은 없었습니다. 종교가 생활의 모든 부면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1830년에 런던 선교회가 들어왔을 때, 사모아 사람들이 종교적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모아의 한 고대 전설에는 강력한 새 종교가 옛 신들의 통치를 종식시킬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사모아의 추장(마타이)들은 선교사들이 이 새로운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말리에토아 왕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인 여호와를 숭배하기로 하였고 자신의 신민들도 그렇게 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가톨릭, 감리교, 모르몬교,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들은 많은 신도들을 얻게 되었고, 오늘날 사모아 제도 전역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사모아 정부와 아메리칸사모아 정부는 각각 다음과 같은 종교적 신조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사모아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삼는다.” “사모아여, 하느님을 첫째로 두라.” 이곳의 텔레비전 채널에서는 종교 방송이 널리 방영됩니다.
종교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는 단위는 마을로서, 마을에서는 추장들이 주민이 종교를 갖는 문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부 주민들은 지방 교역자들과 교회가 추진하는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수입 중 30퍼센트가 넘는 금액을 기부하라는 압력을 받기도 합니다. 과도한 짐이 되고 있는 그러한 요구에 분개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 늘고 있습니다. 누가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지 경쟁을 시키기도 합니다. 일부 교회들은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하여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의 이름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많은 마을들에서는 날마다, 사라고 부르는 10분 내지 15분간의 마을 기도 시간에 모든 활동이 돌연 정지됩니다. 큰 몽둥이를 든 젊은 남자들이 거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이 관습이 잘 시행되도록 합니다. 관습을 어기는 사람들은 징계를 받거나 100달러 상당의 벌금을 물거나 원로 회의나 마을에 먹을 것을 공급할 것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매질을 당하거나 추방될 수도 있습니다.
한번은 순회 감독자인 존 로즈와 그의 아내 헬렌이 힘든 여행 끝에 사바이 섬에 있는 살리무라는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사가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감시원들은 로즈 부부에게 마을 외곽에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로즈 부부는 그 지시에 따라 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숙박할 곳으로 갔습니다.
그 마을의 최고 추장은 존과 헬렌이 지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유숙하는 집주인에게 사과하였습니다. 추장은 증인들은 귀한 손님들이라고 말하였고 감시원들에게 언제라도, 심지어 사가 진행 중인 경우라도 로즈 부부가 마을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추장이 이처럼 특별 대우를 해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추장의 작은 아들인 시오가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고 영적으로 잘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시오 타우아는 사모아 전국 위원회 성원입니다.
[삽화]
존 로즈와 헬렌 로즈
[72면 네모]
사모아, 아메리칸사모아, 토켈라우 개요
국토
사모아는 폭이 18킬로미터인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우폴루와 사바이라는 주된 두 섬과 그보다 작은 몇몇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모아에서 남동쪽으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아메리칸사모아에는 투투일라라는 주요 섬이 있으며, 마누아 제도, 스웨인스 섬, 아우누 섬, 로즈 무인 환초도 포함되어 있다. 토켈라우는 사모아에서 북쪽으로 4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세 개의 낮은 환초로 이루어져 있다.
주민
사모아는 인구가 21만 4000명이 넘고, 아메리칸사모아의 인구는 약 5만 7000명이다. 토켈라우에는 대략 1400명의 주민이 있다. 90퍼센트 이상이 폴리네시아인이며, 나머지는 아시아인, 유럽인, 혼혈 폴리네시아인이다.
언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제2 언어로 말하기는 하지만 주된 언어는 사모아어이다. 토켈라우에서는 사모아어와 유사한 토켈라우어가 쓰인다.
생활
농업, 관광업, 참치잡이, 생선 가공업이 사람들의 주된 직업이다.
식품
녹말이 많이 들어 있는 토란, 익지 않은 바나나, 그리고 빵나무 열매에 코코넛 밀크를 섞어 만든 음식을 주로 먹는다.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도 먹는다. 파파야, 파인애플, 망고 등의 열대 과일이 풍부하다.
기후
적도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연중 대부분 덥고 습하다. 아메리칸사모아의 투투일라 섬에 있는 파고파고에서는 연간 강우량이 5000밀리미터가 넘는다.
[75면 네모]
“이 책 너무 좋아”
해럴드 길 형제는 사모아어로 된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 3500부를 배부하기 위해 아메리칸사모아로 가져왔습니다. 해럴드 형제가 이 소책자 한 부를 아메리칸사모아 지사에게 전해 주자 그는 해럴드에게 그 소책자를 종교 지도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보여 주어 그들이 법무 장관에게 그 책을 공개적으로 배부하는 것이 적절할지를 알려 주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면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런던 선교회 교직자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는 해럴드가 자신들의 양 떼를 빼앗아 가지만 않는다면 해럴드가 하는 일에 개의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해군 군목은 다소 냉소적이긴 했지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가톨릭 사제는 만나 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해럴드는 자신을 아메리칸사모아 지사에게 안내해 준 경찰관에게 소책자 한 부를 준 바 있습니다. 며칠 후 해럴드는 그 경찰관에게 소책자를 읽어 보니 어떠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경찰관은 서툰 영어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 주인[법무 장관]이 나한테 말했어요. ‘[가톨릭] 사제한테 가서 이 책이 좋은 건지 물어봐.’ 나는 나무 밑에서 이 책 읽었어요. 나 혼자 말했어요. ‘이 책 너무 좋아. 그런데 사제한테 이거 보여 주면 그 사람은 “이거 나쁜 책이야” 하고 말할 거야.’ 그래서 내가 주인한테 말했어요. ‘주인님, 사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이 책 너무 좋아.”’”
나중에 법무 장관은 해럴드를 자신의 사무실로 초대하였습니다. 법무 장관이 소책자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는 가운데 해럴드는 소책자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장관은 전화를 걸어 소책자를 배부하게 해도 좋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해럴드가 가져온 소책자 거의 전량이 섬 전역에 배부되었습니다.
[76면 네모]
사모아의 전통문화
1847년에 런던 선교회 선교사인 조지 프랫은 사모아 사람들을 가리켜 “전 세계에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폴리네시아에서는 가장 엄격히 예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였습니다. 파아 사모아(사모아 방식)라고 불리는 이러한 사모아 전통문화는 고도로 체계화된 것으로서 사모아 사람들의 생활 면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사모아 제도」(Samoan Islands)라는 책에서는 그러한 예법들 중 으뜸가는 것이 “자신보다 ‘높은’ 사람들을 존경하고 추앙하기까지 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한 존경심은 올바른 예의범절과 공손한 말씨와 가족과 마을에 대한 충성을 통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조상들의 관습과 종교를 배척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입니다.
가문의 우두머리(마타이)들은 이러한 전통을 수호하는 사람들로서 하나 이상의 친족 집단의 일상생활을 지도하고 마을 회의에서 자기 집단을 대표합니다. 그들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엄격한 복종을 요구하며 벌금을 물리거나 매질을 하거나 심지어는 마을에서 추방시키는 방법으로 그러한 권위를 행사합니다. 예를 들어, 한 마을의 교직자가 남자 아이들을 시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자 마을의 마타이는 그 교직자에게 벌금을 물렸습니다.
마을에는 마타이가 10명에서 50명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확대 가족(아이가)에 의해 선출되지만 일부는 자동적으로 그러한 자리를 물려받습니다. 엄격한 계층에 따라 체계화된 칭호를 붙입니다. 각각의 마을에는 수장(알리)이 있어서 마을 회의를 주재합니다. 연설을 담당하는 추장(툴라팔레)은 의식상의 문제들을 돌봅니다. 하지만 모든 마타이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임무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 일부는 가족 문제를 돌보는 임무만을 담당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가족이 소유한 토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그런 자산의 수탁인 역할을 합니다.
[79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의 사람”
사우바우 토에투
출생 1902년
침례 1954년
소개 팔레아시우 출신으로는 최초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 후에 그가 소유한 부지에 왕국회관이 세워졌다. 그의 아들인 타피가 사우바우가 전한 내용
아피아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한 사촌이 1952년에 팔레아시우에 있는 우리 가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사촌은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었는데 나의 아버지와 성서 토론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마을의 몇몇 친족이 함께 들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토요일 아침부터 월요일 오후까지, 그들은 단 한 시간 눈을 붙인 것을 제외하고는 중단 없이 함께 토론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다음 4주에 걸쳐 주말마다 그와 비슷한 토의가 있었고, 마침내 아버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궁금증이 풀렸어. 진리를 찾은 거야.” 아버지의 매제인 피나우 페오마이아도 진리를 받아들였고 우리 가족과 피나우의 가족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지체 없이 증거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친족들은 깜짝 놀랐는데, 아버지를 독실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족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조롱하는 투로 여호와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훌륭한 찬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체격은 왜소하였지만 용감하였고, 명료하게 생각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해 재치 있게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그만 우리 집단은 사모아에 형성된 두 번째 회중이 되었습니다.
[83면 네모와 삽화]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충실했다
파갈리마 투아타갈로아
출생 1903년
침례 1953년
소개 유력한 마타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고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후에 파갈리마는 시력이 나쁘고 발이 기형인데도 사모아 전역에서 여러 해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했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파갈리마와 호별 방문을 하다가 그가 안경도 쓰지 않고 성경 구절을 정확히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시력이 좋아지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파갈리마는 안경을 잃어버려서 미리 외워 둔 성경 구절을 암송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피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하기를 열망했던 파갈리마는 우폴루의 외딴곳에서 4주 동안 혼자서 코코넛을 수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발이 기형인데도 코코넛을 3킬로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한 번에 15개씩 옮긴 뒤에 껍데기를 벗기고 코코넛 과육 즉 코프라를 발라내어 말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코프라를 팔아서 피지에 다녀오기 위한 뱃삯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뱃삯을 지불하기 위해 아피아로 가 보니, 뱃삯이 올라 돈이 부족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거나 포기하거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일터로 되돌아가 코프라를 더 채취하였고 부족한 만큼의 돈을 더 벌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두 가지 언어로만 대회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도 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파갈리마는 피지에 도착하여 대회 프로그램 대부분이 자신의 언어로도 제공될 것임을 알고는 매우 기뻤습니다!
[87면 네모와 삽화]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로널드 셀러스
출생 1922년
침례 1940년
소개 아내인 올리브(돌리)와 함께 1953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사모아에 왔다. 그는 1961년에 길르앗 선교인 학교를 졸업하였다. 로널드는 현재도 아메리칸사모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사모아 정부가 우리의 비자 연장을 거부하였을 때, 아내와 나는 아메리칸사모아로 왔습니다. 우리는 섬들 간을 오가는 배편으로 새벽 3시에 파고파고 항의 썰렁한 부둣가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전도인은 우리밖에 없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고는 12달러가 전부였습니다. 아침이 되자 이전 성서 연구생의 아버지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방이 하나인 그의 집 한구석에 커튼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공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우리는 살 집을 찾고 싶었지만, 바로 옆집부터 찾아가 증거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몇 주 후 우리는 파가토고에 있는 한 잡화점 위에 위치한 큰 공동 주택에 세를 얻었습니다. 파고파고 항의 그림 같은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노어 형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태평양의 섬들로 가게 되면 편의 시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출판물 상자를 바닥에 펴 놓고 그걸 침대 삼아 자야 할지도 모르지요.” 정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였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야 적당한 침대와 탁자와 의자들을 장만할 돈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1985년에 사망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거의 매일 봉사에 나갑니다. 파이오니아와 선교 봉사를 하면서 보낸 50년이 넘는 세월을 되돌아보노라면 정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88면 네모와 삽화]
“그들은 내 마음속에 여호와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었습니다”
월리스 페드로
출생 1935년
침례 1955년
소개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최초로 침례를 받은 사람. 아내 캐럴린과 함께 파이오니아를 하였고 그 후에는 자녀를 양육하였다. 현재는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봉사하고 있다.
내가 성서를 연구하고 전파하기 시작했을 때, 가족은 나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 나는 입고 있던 옷이 가진 것의 전부였습니다! 나는 그날 밤 해변에서 잠을 청해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무슨 일이 있든지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용기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다음 날 학교 도서관에 있는데, 폴 에번스 형제가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한 그는 “선교인 집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 보자꾸나” 하고 말했습니다. 선교인들은 친절하게도 내가 그들과 함께 머무르게 해 주었고 나는 그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선교인들과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후에 나는 피지에서 봉사한 열심 있는 캐나다 출신의 파이오니아인 캐럴린 힌시와 결혼하였고 우리는 아메리칸사모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부모님의 태도는 점차적으로 누그러졌습니다. 아버지는 사망하기 전에 성서 연구를 하였으며 어머니는 72세의 나이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초창기에 선교인들이 보여 준 모범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마음속에 여호와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었고 그 사랑은 나를 오늘날까지 지탱해 주고 있습니다!
[91, 92면 네모와 삽화]
꾸준함은 결실을 맺는다
폴 에번스
출생 1917년
침례 1948년
소개 아내 프랜시스와 함께 사모아와 아메리칸사모아에서 40년이 넘게 선교인으로 일하였다.
아내와 내가 1957년에 순회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사모아 입국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모아 정부가 현지 증인들을 고립시켜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방문객들과 관광객들은 사모아에 머무는 동안 개종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문구에 서명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순회 감독자로 사모아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을 때, 출입국 관리에게 개종 활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였습니다. 그가 헷갈려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물었습니다.
“가령 당신이 가톨릭 신자인데 다른 나라에 가서 성당에 갔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일어서서 연설을 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야 별 문제 없지요” 하고 관리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서의 소식을 가지고 사람들의 집으로 찾아간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만일 내 친구들이 그 일을 하면서 나에게 함께하자고 하면 해도 괜찮을까요?”
“뭐,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내게 뭔가 질문을 해 오면 어떡하죠? 내가 대답을 해도 될까요?”
관리는 “그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아, 그럼 됐네요. 적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제 알았습니다” 하고 말을 끝맺었습니다.
나는 성공적으로 순회 방문을 마치고 사모아를 떠날 때, 그 관리에게 우리가 방문한 것 때문에 어떤 부정적인 보고라도 들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아니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하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올 때는 어떻게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신청하지 마시고 저한테 직접 편지를 쓰세요. 제가 입국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그 후로도 몇 차례 방문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편견 없는 태도를 가진 이 관리의 후임 관리들은 덜 협조적이었고 내 뒤를 이은 순회 감독자들에게 입국 허가를 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1974년까지 계속되다가, 그해에 사모아 정부는 아내와 내게 선교인 신분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나타낸 인내와 꾸준함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삽화]
프랜시스 에번스와 폴 에번스
[97면 네모]
연설가들이 쓰는 말
사모아 말은 발음이 부드럽고 경쾌하여 듣기가 좋습니다. 하지만 “많은 단어들이 모음을 불규칙하게 뒤섞어 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선교인들이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려면 많은 연습(파아타이타이가)과 격려(파알라에이아우이나)가 필요하다”고 프레드 웨그너는 알려 줍니다.
다채로운 표현과 속담을 사용하는 화술은 사모아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추장(마타이)들과 연설가(툴라팔레, 연설을 담당하는 추장)들은 공식 행사 때 성서를 즐겨 인용하며 복잡한 미사여구를 구사하기를 좋아합니다. 필요할 경우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말을 세심하게 사용하는 사모아인들의 전통 예법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사모아 사람들은 하느님, 추장, 권위자, 외국인 방문객에게 말하거나 그들에 대해 말할 때는 고도로 발달된 정중한 “추장”의 언어(타우탈라 렐레이)를 사용합니다. 한편 일상 대화를 하거나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는 격식 없이 편하게 말하는 구어 표현(타우탈라 레아가)을 사용합니다.
사모아인들이 예를 갖추어 사용하는 “추장”의 언어에는,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문제들에 관해 논하거나 성서에 대해 말할 때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정해 놓은 정중한 표현들도 있습니다. 사모아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한 적이 있는 통치체 성원 제프리 잭슨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전반적으로 사모아어에는 예의와 존경심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증거를 할 때, 보통 왕족에게 하는 식으로 공손하게 사모아 사람들을 호칭하고 동시에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일상어를 사용하는 겸손한 관습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99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로버트 보이스
출생 1942년
침례 1969년
소개 아내 엘리자베스(베티)와 함께 사모아 제도에서 1978년부터 1986년까지 봉사했다.
우리는 아메리칸사모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이곳 사람들이 우리가 사모아어를 익히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며 우리가 저지른 많은 실수를 지나쳐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내가 계시록 12장 9절을 사용하여 사탄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귀에 해당하는 사모아어 단어(티아폴로)와 레몬에 해당하는 단어(티폴로)는 발음이 매우 비슷하였습니다. 두 단어를 혼동한 나는 “레몬”이 하늘에서 쫓겨나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을 그릇 인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머지않아 “레몬”을 부서뜨리고 멸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연히 집주인과 선교인 짝은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또 한번은 호별 방문을 하다가 사모아 여자에게 미리 암기해 둔 소식을 외워서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말한 내용 중에서 그 여자가 알아들은 부분은 계시록 21장 4절이라는 짤막한 말뿐이었습니다. 내가 전한 소식이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느낀 그 여자는 즉시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성서로 그 구절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그 한 구절의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아 나중에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고 자녀들과 함께 진리에 들어왔습니다!
기쁘게도 결국 우리는 사모아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즐거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건강 문제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사모아를 떠났습니다.
[101, 102면 네모와 삽화]
‘읍내 사람들이 전부 나왔다’
아피아에서 있었던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 중 하나는 1950년대에 있었던 프레드 윌리엄스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선장님’으로 통하던 그는 다부진 사람으로 나이가 많은 은퇴한 뱃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내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안 다녀 본 바다가 없었으며 남태평양 전역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위업을 남겼습니다. 한번은 외딴 해역에서 암초에 걸려 파선을 당했을 때, 덮개가 없는 구명보트에 선원들을 태우고 식량도 거의 없이 1000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먼 거리를 항해하여 무사히 귀환한 일도 있었습니다.
프레드 선장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동기는 대부분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위스키를 마시며 포커 게임을 즐겼습니다. 그렇지만 이 뱃사람은 윌리엄 모스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고 열심 있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침례를 받을 무렵, 프레드 선장은 시력을 거의 다 잃었고 건강이 나빠 침대에서 지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온 많은 사람에게 자신이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해 알려 주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방문객 중에는 종교 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프레드 선장은 사망할 때 남긴 유언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장례식을 주관할 것과 자신을 바다에 묻어 줄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걸리 모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읍내 사람들이 전부 장례식에 나온 것 같았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렸고 아피아에 있는 사업체들에서는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반기(半旗)를 게양하였습니다.” 모든 증인이 참석했을 뿐 아니라 변호사들, 교사들,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 사업계의 많은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연사인 윌리엄 모스가 여러 성구를 사용하여 프레드 선장이 가지고 있었던 희망 즉 부활되어 지상 낙원에서 살 희망에 대해 설명하자 참석한 모두는 열중하여 들었습니다. 걸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프레드 선장에 대해 마음속 깊은 애정을 느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 평소라면 호별 방문 봉사에서 만나거나 대화하기가 힘든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증거가 행해지도록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었지만 여전히 말하는’ 아벨이 생각났습니다.” (히브리 11:4) “프레드 선장은 사망했을 때에도 자신의 장례식을 통해 훌륭한 증거를 한 셈이지요.”
프레드 선장의 집에서 장례사가 있은 후, 50대가 넘는 호위 차량이 항구까지 나아갔습니다. “부두는 구경 온 사람들로 가득 찼기 때문에 경찰은 우리가 배를 타는 데까지 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길을 터 주어야 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고인의 가족들과 고등 판무관과 유력한 시민들과 함께 아올렐레(춤추는 구름)라는 이름의 요트에 승선하여 바다로 나갔습니다.” 걸리의 말입니다. 그 요트의 이름은 매우 적절하였는데, 요트가 파도에 심하게 출렁이고 사나운 바람이 윌리엄과 그의 옷과 성서를 잡아채고 있어서 윌리엄이 돛대를 꽉 붙잡고 있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윌리엄은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내줄 것’이라는 성서의 약속을 낭독한 뒤 기도를 하였습니다. (계시 20:13) 그런 다음, 천으로 감싸고 무겁게 만든 프레드 선장의 시신이 그가 사랑했던 태평양의 요동하는 물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 장례식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그로 인해 더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삽화]
침례받기 전의 프레드 윌리엄스 “선장”
[109, 110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자꾸 이곳으로 되돌아왔지요”
프레드 웨그너
출생 1933년
침례 1952년
소개 아내 셜리와 함께 사모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다. 프레드는 전국 위원회 성원이다.
우리는 갓 결혼했을 때인 1956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메리칸사모아로 와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우리의 첫 임지는 파고파고 항의 동쪽 입구에 위치한 라울리라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문도, 창문도, 천장도, 수도 시설도 없었습니다. 그곳을 살 만한 집으로 만들어 놓자 곧바로 식구가 한 명 더 늘었습니다. 현지인 청소년인 월리스 페드로가 부모의 반대로 집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우리와 함께 살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2년 후 우리는 길르앗에 참석하였고 타히티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히티에 머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타히티 정부는 우리의 선교인 비자 신청을 거절하였고 정중한 말투의 서신을 통해 우리가 다음 비행기로 떠나야 한다고 알려 왔습니다. 아메리칸사모아로 돌아온 우리는 파고파고에 있는 파가토고 선교인 집에 살면서 에번스 부부 그리고 셀러스 부부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식당 탁자 위에 설치해 놓은 구식 등사기로 사모아어 「파수대」와 「우리의 왕국 봉사」를 인쇄하였습니다. 1962년에 아내와 나는 순회 활동을 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돌본 첫 순회구는 남태평양의 대부분의 지역을 망라하였으며 이 순회구에는 니우에, 바누아투, 사모아, 아메리칸사모아, 쿡 제도, 키리바시, 통가, 투발루, 피지가 포함되었습니다.
8년 후 우리 아들 대럴이 태어났고 우리는 아메리칸사모아에 정착하였습니다. 나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고 아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 출판물을 사모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며 보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를 좀 보충하기 위해 전복을 따는 잠수부 형제와 같이 일을 하였습니다. 그의 작은 보트 외부에 설치된 모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우리는 바다에서 나흘 동안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수백 킬로미터를 표류하였고, 사나운 폭풍을 통과하였으며, 32척의 배가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마침내 대형 컨테이너선을 만나 하마터면 부딪혀 박살이 날 뻔하다가 구조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아내가 다시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974년에 아쉽게도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우리 딸 타마리가 태어났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는 그리운 선교 임지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였습니다. 1995년에 아내와 내가 타마리와 함께 사모아로 와서 베델 봉사를 하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일 년 후에 아내와 나는 순회 활동을 다시 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순회를 중단한 지 26년 만이었습니다! 사모아, 아메리칸사모아, 통가에서 옛 시절 함께 일했던 오래된 많은 충실한 형제 자매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습니다!—요한 셋째 4.
현재 아내와 나는 타마리와 그의 남편 히데유키 모토이와 함께 사모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113, 114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파이가아이 투
출생 1932년
침례 1964년
소개 우폴루 섬과 사바이 섬에서 1965년부터 1980년까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현재 사바이에 살고 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발이 심한 기형인 내반족(内反足)이었습니다. 그 결과 발바닥이 안쪽으로 몹시 굽어서 걷기가 매우 불편하였습니다.
나는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 마음속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회중 집회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바위 투성이의 딱딱한 길을 걸어 집회 장소에 간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결국 나는 고무로 된 샌들을 아주 기술적으로 개조하여 나에게 알맞은 신발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좀 더 편안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침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우폴루 섬에서 9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뒤 언니 부부와 함께 왕국 전파자들이 필요한 사바이로 이사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조카인 쿠미 팔레마아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쿠미와 나는 매주 파가에서 버스를 타고 사바이의 서해안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인 라타까지 갔습니다. 라타에 있는 한 여자와 성서 연구를 한 뒤, 우리는 또 다른 여자와 연구를 하기 위해 8킬로미터를 걸어 타가라는 마을까지 갔습니다. 그러고는 이 여자의 집에서 그 가족과 함께 밤을 보내고는 아침에 버스를 타고 파가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약 2년간 그렇게 하였습니다. 기쁘게도 우리와 연구한 이 두 여자와 그들의 가족은 나중에 활동적인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친족들이 사바이를 떠난 뒤에도 나는 파가에 남아 자매들과 관심을 가진 여자들로 구성된 작은 집단을 돌보았습니다. 매주 「파수대」 연구와 회중 서적 연구를 사회하고 호별 방문 봉사에서 자매들을 인도하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아피아에서 한 장로 형제가 와서 일요일에 보는 집회들 중 한 가지를 사회해 주었습니다. 마을 추장이 집회 때 왕국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신 노래의 가사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5년 후에는 선교인 부부인 레바 파아이우와 테니시아 파아이우가 작은 우리 집단을 돕기 위해 뉴질랜드에서 왔습니다. 그 뒤로 다른 사람들도 왔습니다. 현재 사바이에는 파가와 타가에 각각 하나씩, 두 개의 번창하는 회중이 있습니다.
나는 결혼한 적이 없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며 언제나 아이들과 가까이 지냅니다. 심지어 한동안 나와 함께 살기까지 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내 영적 “자녀들”이 자라서 여호와의 편에 서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더 이상 걸어서 호별 방문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성서 연구를 사회하며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거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한계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고 그래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우리 회중의 선교인들은 나에게 전화 증거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면 여호와께서 참으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118면 네모와 도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사모아와 통가 주민들은 시계를 같은 시간에 맞춥니다. 하지만 날짜는 통가가 하루 더 빠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모아와 통가가 날짜 변경선을 사이에 놓고 양편—통가는 서쪽, 사모아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통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연례 기념식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지키는 나라들 중 하나인 반면 사모아는 가장 늦게 지키는 나라들 중 하나입니다.
[도해]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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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모아
| 저녁 7시
|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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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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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가 |
저녁 7시 | 남태평양
목요일 |
|
|
날짜 | 변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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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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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124면 네모와 삽화]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성서 번역판
1884년에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은 히브리어 성경 전체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모아어 성서 번역판을 발행하였습니다. 또한 그 성서 번역판의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는 “야를 찬양하라”를 의미하는 알레루야가 4회 나오는데, 그 표현에 하느님의 이름의 축약형이 들어 있습니다. (계시 19:1-6) 하지만 1969년에 나온 이 번역판의 개정판에서는 한 곳만 빼놓고 모든 구절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삭제하였으며, 그나마 이곳도 번역자들이 실수로 그 이름을 남겨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탈출 33:14) 교회 당국은 그들이 사용하는 찬송가집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제거하였고 신도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모아 제도에서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2007년 11월에 사모아어로 된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을 받고 기뻐하였습니다. 정확하며 이해하기 쉬운 이 번역판은 영감받은 본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충실히 복원하였습니다. 현재 통치체 성원이며 과거에 사모아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였던 제프리 잭슨이 사모아의 아피아에서 열린, 인근 섬들의 형제 자매들도 참석한 특별한 대회에서 이 새로운 번역판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번역판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은 텔레비전 방송으로도 보도되어 많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모아 베델에 전화를 하여 이 번역판을 요청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정부 고위 관리는 부하 직원들에게 주려고 열 권을 요청하였습니다. 한 교장은 학년 말에 최우수 학생들에게 수여할 상으로 다섯 권을 주문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번역판의 주의 깊은 번역에 대해 호평하였는데, 그러한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통찰력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신세계역」은 또한 사모아 제도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재차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폴루 섬의 바일렐레에서 봉사하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피나우 피나우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모본이 되는 기도를 사용하여 한 여자가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마태 6:9을 읽은 뒤 피나우는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누구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주의 이름이죠” 하고 여자가 대답하였습니다.
피나우는 이렇게 추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첫째 8:5에서는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다고 알려 주지요. 많은 거짓 신들도 동일한 이름으로 불린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이 ‘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 피나우는 그 여자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교국이 그 이름을 자신들의 성서 번역판에서 제거해 버렸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피나우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가문의 추장(마타이)명을 없애 버리거나 바꾸려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 가문 사람들 모두가 분노할 겁니다” 하고 여자가 말했습니다.
피나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지요. 여호와께서도 자신의 말씀에서 자신의 이름을 제거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바로 그렇게 느끼시지요.”
[삽화]
사모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
[126, 127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나를 백 배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루메파 영
출생 1950년
침례 1989년
소개 전직 총리의 딸로서 아피아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사바이 섬에서 성공적인 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아버지의 딸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일꾼이 200명가량이나 되는 거대한 코코아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모아의 신문들에서는 아버지를 ‘코코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수년 동안 사모아 총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11명의 자녀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다지 종교적인 분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우리에게 성서에 대해 기본적인 점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몹시 허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인 자매인 주디 프리처드가 부활 희망에 관해 증거하는 것을 듣고는,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정말 설레었습니다!
나는 주디에게 많은 질문을 하였고 주디는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성서를 사용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곧 우리는 함께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후에 나는 증인들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인 스티브는 우리 마을 교회의 유력한 집사였고, 처음에는 내가 연구를 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남편은 나를 몇몇 교직자들과 만나게 하였고 그들은 나를 설득하여 증인들의 집회에 참석하는 일을 그만두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조언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나를 데리고 아버지에게 갔고 아버지는 그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성서 연구를 하라고만 제안하였습니다. 한편 친동기들은 내가 종교를 바꾸었다고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서 진리를 배우는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왕국 전도인으로 자격을 갖추게 되어 전파 활동에 나갔습니다. 그때 내가 방문한 첫 집은 아버지가 이끄는 내각을 구성하는 한 장관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열린 정치 모임에 자주 참석했기 때문에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봉사 짝의 등 뒤로 숨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전파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당신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합리적인 분이었고 나의 새로운 믿음에 대해 변호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아버지는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즐겨 읽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였고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며, 짬짬이 방문할 목적으로 성서 연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 50명가량의 명단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 자녀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습니다. 딸인 포투오사모아와 사위 앤드루 그리고 아들인 스티븐과 며느리 애나는 현재 사모아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여동생인 마누가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도왔습니다. 반대하던 남편 스티브까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집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참으로 나를 백 배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삽화]
왼쪽: 포투오사모아 코와 앤드루 코; 오른쪽: 애나 영과 스티븐 영
[129, 130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를 택할 것인가, 프로 골프 선수의 길을 택할 것인가?
루시 라파이텔레
출생 1938년
침례 1960년
소개 프로 골프 선수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열여덟 살이었을 때 길 건너편에 사는 한 가족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에 가담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궁금해진 나는 그 가족의 가장인 시에무 타아세를 찾아가 여호와의 증인이 그런 식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의 친절한 태도와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성서 연구를 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나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나는 집회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과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다음 날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고모는 내게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네가 잘 때, ‘여호와여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하고 계속 소리를 질렀단다.” 내가 꿈을 꾸며 잠꼬대를 했던가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잠꼬대 소리에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우리 집 앞길 건너편에는 사모아에서 단 하나뿐인 골프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없어진 골프공을 찾아내어 팔아 용돈을 벌었습니다. 후에 나는 당시 사모아의 수반이었던 말리에토아 왕의 캐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내가 골프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쓰던 헌 골프채들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두 명의 현지 사업가들이 내가 프로 골프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후원하게 하였습니다. 말리에토아 왕은 내가 가진 골프 재능이 사모아를 널리 알리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정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골프 때문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방해를 받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나는 양심이 괴로웠습니다.
내가 사모아 오픈 골프 선수권 대회에서 세계적인 프로 골프 선수들을 꺾고 우승하자 이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왕은 기뻐했고 그날 밤 시상식 만찬에서 내가 미국의 한 유명한 골프 선수를 만나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제는 결정을 해야 해. 골프를 택할 것인가, 여호와를 택할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그날 밤 나는 시상식 만찬이 아니라 순회 대회 예행연습에 참석하였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왕은 격노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대면하여 긴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내게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성서로 설명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다섯 살 때 심하게 아팠단다. 사망 진단이 내려졌지. 우리가 너를 무덤에 넣고 있는데 벌 한 마리가 네 얼굴을 쏘았단다. 바로 그때, 갑자기 네가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단다! 이제는 네가 그때 살아난 것이 여호와 하느님의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는 다시는 나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뉴질랜드로 이주한 뒤에 나는 10년간 정규 파이오니아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던 로번과 결혼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세 자녀를 갖게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30년간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 시간 일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친족들이 진리에 들어오도록 도왔습니다. 나는 다시 파이오니아 대열에 가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자주 기도드렸습니다. 2004년에 퇴직을 하여 마침내 내 목표를 이루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프로 골프 선수의 길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는 길을 택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135면 네모와 삽화]
부모의 훈련은 훌륭한 결과를 낳는다
파나파 루이
출생 1967년
침례 1985년
소개 아내인 마레타와 함께 사모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우리 아들인 소파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교장에게 「여호와의 증인과 교육」 팜플렛을 한 부 주었고 종교 활동과 국가주의적 활동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소파는 말하기를 교장이 학생들과 교사들을 모아 놓고 그 앞에서 그 팜플렛을 찢어 버렸으며 증인 학생들에게 찬송가를 부르도록 강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증인 학생들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자 교장은 그들을 전교생 앞에 세워 놓고 증인들이 부르는 종교적 노래를 한 곡 불러 보라고 하였습니다. 교장은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겁을 먹고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소파는 증인 아이들에게 “‘여호와여, 감사합니다’ 노래를 부르면 되잖아” 하고 격려하였고 소파의 인도 아래 아이들은 그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교장은 감명을 받았고 소파가 나타낸 용기에 대해 칭찬하였습니다. 교장과 일부 교사들은 나중에 진리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 교장은 우리를 볼 때면 소파에 대해 물어보며 안부를 전해 달라고 말합니다. 소파는 영적으로 계속 잘 발전하여 200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38, 139면 네모와 삽화]
“집회까지 걸어가기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발루 로토누우
출생 1949년
침례 1995년
소개 여섯 자녀와 함께 산을 넘으며 22킬로미터를 걸어 집회에 참석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1993년에 레파가에 있는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는데 섬 반대편에 있는 팔레아시우까지 22킬로미터를 가야 하였습니다.
주 중 저녁에 집회가 있는 날이면 나는 일찌감치 학교로 가서 아이들을 모았습니다. 내가 우리가 집회에 참석하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기 전에는 우리 애들을 퇴학시키겠다고 겁을 준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각자 집회를 위한 옷과 성서와 노래 책과 연구할 출판물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지나가는 버스가 우리를 태워 준 적도 있었지만 보통 우리는 22킬로미터를 끝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팔레아시우 왕국회관에 마침내 도착하면 그곳의 증인들은 우리를 반겨 주고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샤워를 하고 집회를 위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도록 해 주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집까지 먼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섬을 가로지르는 능선의 꼭대기에서 쉬어 갔는데 아이들이 잠깐 눈을 붙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혹시 우리를 태워 줄 수 있는 차가 있는지 계속 살폈습니다. 보통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 날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첫 버스를 타고 다시 팔레아시우로 가서 전파 활동을 하였습니다.
한번은 마을의 최고 추장이 주재하는 마을 추장 회의에 불려 갔습니다. 그들은 내가 우리 마을에 있는 교회, 특히 내 외조부가 세운 교회에 나가지 않고 멀리 팔레아시우까지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대답을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나에게 팔레아시우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집회에 가는 것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사람들보다 하느님께 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사도 5:29.
얼마 안 있어 문제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내가 마을 토오나이(교회 목사와 집사들과 마을 추장들이 참석하는 일요일 축제)에 참석하지 않자 추장 회의에서는 그에 대한 처벌로 나에게 다섯 마리의 큰 돼지를 갖다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자녀를 여섯이나 둔 홀어머니인 나에게는 그것이 무거운 경제적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나는 내가 키우던 돼지를 갖다 바쳤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더 이상 우리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내 자녀들은 모두 활동적인 증인이며, 아들 하나는 봉사의 종입니다.
아이들과 나는 여전히 걸어서 집회에 갑니다. 하지만 이제는 22킬로미터를 걸어 팔레아시우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됩니다. 2001년에 아름다운 새 왕국회관이 바로 우리 마을에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번창하고 있는 우리 회중이 이 왕국회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더더욱 집회까지 걸어가기가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132, 133면 도표와 그래프]
연대표—사모아
1930
1931년 사모아에 좋은 소식이 이르다.
1940
1940년 해럴드 길이 사모아어로 나온 최초의 출판물인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소책자를 배부하다.
1950
1953년 아피아에 처음으로 회중이 형성되다.
1955년 길르앗 선교인들이 아메리칸사모아에 도착하다.
1955년 아메리칸사모아 전역에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가 상영되다.
1957년 아메리칸사모아에서 최초로 순회 대회가 열리다.
1958년 「파수대」를 사모아어로 번역하는 일이 시작되다.
1959년 서사모아에서 최초로 순회 대회가 열리다.
1960
1970
1974년 선교인들이 사모아에 도착하다. 토켈라우에서 활동이 시작되다.
1980
1984년 아피아의 시나모가 선교인 집에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1990
1991년 사이클론 발이 섬들을 강타하다.
1993년 사모아어 「파수대」가 영문판과 동시에 발행되다. 새로운 베델 집과 대회 회관이 봉헌되다.
1996년 주 1회 라디오 프로그램인 “성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FM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제공되다.
1999년 왕국회관 건축이 가속화되다.
2000
2007년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사모아어로 발표되다.
2010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700
400
100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삽화]
프랜시스 에번스와 폴 에번스
[7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토켈라우
스웨인스 섬
사모아
아메리칸사모아
마누아 제도
로즈 환초
남태평양
니우에
날짜 변경선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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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통가
아메리칸사모아
투투일라
파고파고
페테사
타푸나
파가토고
라울리
아우누
사모아
사바이
아오포
라타
타가
파가
살리무
포가포아
우폴루
아피아
팔레아시우
시우세가
바일렐레
레파가
바바우
아피아
바이알라
파아토이아
시나모가
[66면 전면 삽화]
[74면 삽화]
사모아 사람들로서 최초로 여호와께 헌신한 펠레 푸아이우폴루와 아일루아 푸아이우폴루
[81면 삽화]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1953년에 사모아로 온 로널드 셀러스와 돌리 셀러스
[84면 삽화]
리처드 젱킨스와 글로리아 젱킨스의 결혼식 날, 1955년 1월
[85면 삽화]
사모아로 가고 있는 걸리 모스와 윌리엄 모스
[95면 삽화]
사모아의 전통 가옥
[100면 삽화]
아피아에 지은 사모아 최초의 왕국회관
[107면 삽화]
원래 있던 타푸나 왕국회관, 아메리칸사모아
[115면 삽화]
메투셀라 네루
[116면 삽화]
사우말루 타우아나이
[131면 삽화]
아네 로파티(현재는 골드)는 청소년 때 여호와의 편에 섰다
[141면 삽화]
사모아 사무실과 베델
사모아 전국 위원회: 히데유키 모토이, 프레드 웨그너, 시오 타우아, 레바 파아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