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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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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0은 그 경우가 십계명을 주신 때임을 알려 준다. 그 계명은 돌에 새겨진 것이었다. 분명히 위 성구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 가운데에는 십계명이 포함된다.)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 제한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십계명에 있는 대부분의 도덕 표준은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다시 언급되었다. (그러나 안식일 법은 다시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나 법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죄의 경향이 사람의 욕망을 지배하는 한, 불법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율법 계약을 대신한 새 계약에 관하여, 히브리 8:10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계약은 이것이니,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정신에 넣고, 그것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한 법은 돌판에 새겨진 것보다 얼마나 훨씬 더 효력이 있겠는가!
로마 6:15-17: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과분한 친절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을 것입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자기를 종으로 계속 내주어 그에게 순종한다면, 여러분이 그에게 순종하므로 그의 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의 종이든지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이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으나 그 넘겨받은 가르침의 방식에 여러분이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또한 참조 갈라디아 5:18-24.)
매주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누리는 “안식”이 있다
히브리 4:4-11은 이와 같이 말한다. “어디에선가[창세 2:2] 그분[하느님]은 일곱째 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자기의 모든 일을 쉬셨다.’ 다시 이곳에서 [시 95:11] ‘그들은 나의 쉼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그것에 들어갈 기회가 남아 있으며, 좋은 소식을 처음 선포받은 사람들은 불순종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그분은 아주 오랜 후에 다윗의 시[시 95:7, 8]에서 ‘오늘’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다시 어떤 날을 정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앞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을 인도하여 쉴 곳으로 들어갔다면, 하느님께서 후에 다른 날에 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안식의 쉼이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쉼에 들어간 사람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일을 쉬신 것처럼 그 자신도 자기 일을 쉽니다. 그러므로 그 쉼에 들어가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여, 아무도 같은 불순종의 본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부터 쉬도록 권고받는가? “자기 일”로부터이다. 어떤 일인가?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전에 노력했던 일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규칙이나 의식을 따름으로 하느님의 승인을 획득할 수 있다거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를 굳게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의 실책이었다. (로마 10:3) 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누구든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신분을 가지려면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의 모든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겸손히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교훈과 책망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자신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승인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행함은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다. 그들은 그러한 인생 행로를 걸음으로 유대 민족의 “불순종의 본”을 멀리한다.
창세기 2:2에 언급된 “일곱째 날”은 단지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다. (“창조” 제하 383, 384면 참조.) 마찬가지로, 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안식의 쉼”은 24시간의 하루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믿음을 나타내고 하느님의 교훈에 순종함으로 매일 안식을 즐기며, 특히 하느님의 새 제도에서 그렇게 즐길 것이다.
인류 앞에는 천 년 “안식”이 놓여 있다
마가 2:27, 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표징으로 정하셨으며, 게다가 그것은 그들에게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아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의 죽음이 그분 안에서 성취된 모세의 율법을 폐기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다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안식일의 요구 조건을 가진 율법이 “오게 될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보여 주었음을 인식하셨다. (히브리 10:1; 골로새 2:16, 17) 그 “좋은 것들”과 관련하여 그분이 주인이 되시는 “안식일”이 있다.
그리스도는 주들의 주로서, 천 년 동안 온 땅을 통치하실 것이다. (계시 19:16; 20:6; 시 2:6-8) 예수께서 땅에 계실 때, 매우 놀라운 병 고치는 일을 안식일에 여러 번 하심으로, 그분의 천 년 통치 기간에 모든 민족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실 구원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 주셨다. (누가 13:10-13; 요한 5:5-9; 9:1-14)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 “안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질문해도 될까요?’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그 점에 관해 성서에서 정확히 말하는 점이 그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좌우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그 문제에 관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얼마의 성구들이 있는데요. 함께 보시도록 하시지요. (그런 다음 앞 면들에 나오는 내용 중 적절한 부분을 사용할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어떤 안식을 염두에 두셨는가에 따라 대답해 드릴 수 있겠는데요. 성서에서는 한 가지 안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안식에 관해 말한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에 관한 법들을 주셨지요. 하지만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다른 종류의 안식에 관해 말한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런 다음에 이렇게 부언할 수 있다: (1) ‘저희는 매주 하루를 안식일로 지키지 않습니다. 성서는 그 요구 조건이 “없어질” 것이라고 알려 주기 때문이죠. (고린도 둘째 3:7-11; 236, 237면에 있는 관련된 설명 참조.)’ (2) ‘하지만 우리가 정기적으로 지켜야 할 안식이 있습니다. (히브리 4:4-11; 참조 237, 2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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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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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의: 성인이 된 여성. 히브리어로, 여자에 해당하는 말은 이시샤이며, 문자적으로 “여성인 사람”을 의미한다.
성서는 여자를 격하시키거나 열등한 사람인 것처럼 대우하는가?
창세 2:18: “여호와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속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를 위하여 그의 보완자로서 돕는 자를 만들겠다.’” (여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여자가 하느님의 마련 안에서 남자를 보완하게 될 특성들을 가질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보완하는 것은 둘이 함께 하여 완성하는 것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집단으로서의 여자들은 어떤 특성과 능력 면에서 탁월하다. 또한 남자들은 다른 면에서 그러하다. 비교 고린도 첫째 11:11, 12.)
창세 3:16: “여자에게 그분[하느님]이 말씀하셨다. ‘··· 너의 갈망은 네 남편을 향하고,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의 이러한 선언은 남자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이 인간 생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여호와의 예지에 관한 말씀이다. 그 뒤에 나오는 얼마의 성서 기록은 남자의 그러한 이기적인 지배로 인하여 발전된 매우 불행한 상황들에 관하여 알려 준다. 하지만 성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행위를 승인하셨다거나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할 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자에게 머리 직분을 임명한 것은 여자의 신분을 낮추는 것인가?
머리 직분 아래 있다는 것이 원래의 신분을 낮추는 것은 아니다. 머리 직분은 질서 있는 마련 안에서 문제들을 다루는 데 기여한다. 여호와는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고린도 첫째 14:33)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느님의 머리 직분 아래 있으며, 그분은 그러한 관계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는다.—요한 5:19, 20; 8:29; 고린도 첫째 15:27, 28.
특히 가정과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도, 상대적인 머리 직분이 남자에게 부여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에게 여자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주시지 않았다. 남자는 그러한 머리 직분을 행사하는 방법에 대해 그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린도 첫째 11:3) 더구나,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며, 자기 아내를 ‘존중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에베소 5:28; 베드로 첫째 3:7) 남편의 성적 필요가 부부에 관한 하느님의 마련 안에서 아내의 필요보다 우선하지 않는다. (고린도 첫째 7:3, 4) 성서에 설명되어 있듯이, 유능한 아내의 역할은 가족과 지역 사회에 대한 아내의 가치를 강조해 준다. 성서는 아내가 남편의 머리 직분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면서 솔선력을 사용할 수 있는 폭넓은 분야를 허용한다. (잠언 31:10-31) 성서는 자녀들에게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존경을 나타내도록 명한다. (에베소 6:1-3) 또한 성서는 과부의 필요를 돌보는 문제에도 특별한 주의를 돌린다. (야고보 1:27)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여자는 커다란 안전감, 개인으로서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및 자신의 활동에서 개인적인 만족을 얻는다.
여호와께서 충성스러운 영적 피조물로 이루어진 그분의 조직을 여자, 그분의 아내, 그분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부르신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마련 안에서 여자가 갖는 존귀한 지위를 더 잘 나타내 준다. (계시 12:1; 갈라디아 4:26)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회중은 예수의 신부로 불리어진다. (계시 19:7; 21:2, 9)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왕국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영적인 관점에서 남녀 사이의 차별이 없다.—갈라디아 3:26-28.
여자들이 봉사자가 되어야 하는가?
성서는 회중을 감독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 남성임을 알려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는 모두 남성이었으며, 후에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감독자와 봉사의 종으로 임명된 자들도 남성이었다. (마태 10:1-4; 디모데 첫째 3:2, 12) 여자는 회중에서 남자에게 도전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 면에서, 회중 집회에서 “온전히 복종하는 가운데 잠잠히 배우”라는 교훈을 받고 있다. 여자는 만일 그가 하는 말이 복종의 결핍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러한 집회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 (디모데 첫째 2:11, 12; 고린도 첫째 14:33, 34) 그러므로 여자가 회중 활동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할 수 있지만, 자격있는 남자가 참석해 있을 때 여자가 사회하거나 회중을 가르침으로써 인도하라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회중 집회가 아닌 경우, 여자들이 좋은 소식의 전파자, 선포자, 봉사자가 될 수 있는가? 기원 33년 오순절에, 성령이 남녀 모두 위에 부어졌다. 사도 베드로는 요엘 2:28, 29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내가 나의 영 얼마를 모든 부류의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너희의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리고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그 날에 나의 영 얼마를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을 할 것이다.’” (사도 2:17, 18) 여자들은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합당하게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면서, 집집으로 전파하고 가정 성서 연구를 사회한다.—또한 참조 시 68:11; 빌립보 4:2, 3.
그리스도인 여자가 특정한 경우에 머리 덮개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린도 첫째 11:3-10: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는 누구나 자기 머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 남자는 자기의 머리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하느님의 형상이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습니다. 더욱이,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자기 머리 위에 권위의 표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여자가 합당한 경우에 머리 덮개를 쓴다면, 이것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머리 직분 마련을 존경한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는 신권적인 머리 직분을 존중하신다. 남자와 여자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 남자인 아담은 여자로부터 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취한 갈빗대를 기초 재료로 사용하셨으며, 여자는 남자를 위한 돕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먼저 지어진 남자에게 머리 직분이 주어졌다. 남자는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 덮개를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머리 직분과 관련하여, 남자는 “하느님의 형상”이며, 가정에 관한 문제에서 땅에서는 다른 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머리 덮개 없이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남자에게 주신 지위에 대해 불경을 나타내는 것이 되며, 남자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된다. 여호와의 아내와 같은 하늘 조직의 성원들인 천사들까지도 충실한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쓰는 “권위의 표”를 관찰하고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복종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다.)
여자가 머리 덮개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언제인가?
고린도 첫째 11:5에서 알려 주듯이, 여자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이다. 이것은 여자가 혼자서 기도할 때나 성서 예언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머리 덮개가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보통 남편이나 다른 남자가 돌보는 숭배에 관한 문제들을 여자가 돌볼 때 남자의 머리 직분을 존중한다는 눈에 보이는 표로서 머리 덮개를 써야 한다. 만일 여자가 남편이 참석하였을 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내어 기도하거나 공식적인 성서 연구를 사회하여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설령 남편이 함께 믿음 안에 있지 않을지라도 머리 덮개를 써야 한다. 하지만 여자도 자녀를 가르칠 권위를 하느님에게서 받았기 때문에, 남편이 있지 않을 때에는 헌신하지 않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거나 연구할 때 머리 덮개가 필요하지 않다. 만일 예외적인 상황으로, 회중의 헌신한 남자 성원이 참석해 있거나 방문 중인 여행하는 감독자가 함께 있다면, 여자가 미리 마련된 성서 연구를 사회할 경우 머리 덮개를 써야 하지만, 기도는 남자가 해야 한다.
여자가 화장품이나 장신구로 단장하는 것은 합당한가?
베드로 첫째 3:3, 4: “여러분의 단장은 머리를 땋고 금장식을 달거나 겉옷을 입는 외적인 것으로 하지 말고, 도리어 마음의 숨은 사람을 조용하고 온화한 영의 부패하지 않는 옷차림으로 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눈앞에 큰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가 장신구를 전혀 지녀서는 안 된다는 뜻인가? 물론 그런 뜻이 아니다. 분명히 겉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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