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믿을 수 없는 마음을 경계하십시오
1, 2. 마음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를 분별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른 아침에 아직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가슴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숨이 가빠집니다. 그러면 ‘혹시 심장 마비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럴 때 설마 아니겠지 하고 무시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즉시 조처를 취해야 합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 구급차를 불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당신을 세심하게 진찰할 것이며 심전도 검사도 할지 모릅니다. 신속한 진단과 치료를 받는지의 여부가 생사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비유적인 심장인 마음은 어떻습니까? 마음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를 분별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믿을 수 없고 무모하다.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 17:9) 따라서 마음은 우리를 속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위험 신호를 보고 걱정하는데도 정작 자신은 영적으로 문제가 전혀 없다고 믿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속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많은 성향이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사탄과 이 세상 제도 때문에 우리의 마음 상태가 실제로 어떤지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는 면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와 그 시대의 유다 백성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많은 사람은 무엇을 신으로 삼습니까?
3 대다수의 유다 사람들은 마음에 영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유일한 참하느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숭배자들에게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네가 너 자신을 위하여 만든 너의 신들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너의 재앙의 때에 너를 구원할 수 있다면 일어나 보라고 하여라. ··· 너의 신들이 너의 도시들의 수만큼 되었구나.” (예레미야 2:28) 물론 우리는 자신을 우상 숭배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사전에서는 “신”이라는 단어를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이라고 정의합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 건강, 가족, 심지어는 애완동물을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가 하면 스포츠, 유명 인사, 첨단 기기, 여행 혹은 전통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느라 창조주와의 관계를 희생하기까지 합니다. 참그리스도인도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사람들처럼 그러한 풍조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까?
믿을 수 없는 마음에 속을 수 있다
4. “주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지금 임하게 하라” 하고 말한 사람들은 얼마나 진실했습니까?
4 예레미야가 어떤 상황에서 마음을 무모하다고 했는지 문맥을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지금 임하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 17:15, 한글 킹 제임스 성경)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진실했습니까? 예레미야 17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됩니다. “유다의 죄는 쇠 첨필로 기록되어 있다. 다이아몬드 촉으로 그것이 그들의 마음 판에 ··· 새겨져 있다.”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당시의 유다 사람들이 “땅의 사람을 신뢰하고 육체를 자기 팔로 삼으며,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인도와 축복을 구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예레미야 17:1, 5, 7.
5. 예레미야의 동족은 여호와의 지시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5 대다수의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통해 마음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예레미야 17:21, 22 낭독) 예를 들어, 안식일은 일상적으로 하는 노동을 쉬고 영적 활동에 참여하는 때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동족은 안식일에 사업을 하거나 개인 용무를 처리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는 마음 상태를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들은 잘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으며, 듣지도 징계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려고 목을 곧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알았지만 자기 견해를 굽히지 않았으며 안식일에도 처리할 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예레미야 17:23; 이사야 58:13.
6, 7. (ㄱ) 오늘날 충실한 종 반열이 제시하는 지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어떤 지혜롭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습니까? (ㄴ) 우리의 집회 참석이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될 수 있습니까?
6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 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나타낸 반응에 그들의 마음 상태가 드러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골로새 2:16)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인 일을 추구하기를 포기했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을 자신이 편리한 대로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에 더해,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전념하면서 새 힘을 얻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과 교제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까?
7 예레미야 시대의 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일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결코 자기 마음에 속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내가 일을 할 수밖에 없어’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입이 좋은 직업을 구하거나 직장을 잃지 않으려면 교육을 더 받아야겠어’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어떠합니까? 그런 생각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결국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젠 시대가 바뀌었어. 실업자가 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대학 교육이 필수야.’ 이런 식으로 추가 교육에 대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지혜롭고 균형 잡힌 조언을 가볍게 여기고 집회에 빠지게 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이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추리와 생각에 서서히 물들게 되었습니다. (에베소 2:2, 3) 적절하게도 성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당신 주위의 세상이 그 틀 안으로 당신을 밀어 넣지 못하게 하십시오.”—로마 12:2, 필립스 역.a
자신의 마음에 속아서 집회에 빠진 적이 있습니까?
8. (ㄱ) 그리스도인이 무엇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까? (ㄴ) 하느님과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8 물론 1세기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부유했으며 세상에서 어느 정도 탁월한 위치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이룬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합니까?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9:23, 24 낭독)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이룬 일을 자랑하지 않으며 우주 주권자를 아는 것이 가장 값진 일이라는 점을 인식합니다. (고린도 첫째 1:31) 그러면 통찰력을 갖는 것과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홍해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재판관 시대에 그리고 충실한 왕들이 통치한 기간에 자신들의 조상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를 올바로 알지 못했고 그분에게 진정한 믿음을 나타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결백하다. 분명히 [하느님]의 분노가 내게서 돌이켜졌다.”—예레미야 2:35.
마음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살필 수 있으며,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시는 견해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틀 잡으시는 방법
당신은 여호와께서 틀 잡으시는 대로 순응하고 있습니까?
9. 마음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러한 변화를 할 수 있습니까?
9 예레미야에게서 하느님의 소식을 들은 유다 사람들은 마음이 변화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유배되었다가 돌아올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나를, 곧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아는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친히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들이 ··· 나에게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4:7) 그와 같은 변화는 오늘날에도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대부분은 영적 마음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 필수적인 세 가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분명히 이해하며, 그분에 대해 배운 점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께서 마음을 검사해 주시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에 더해 성서에 비추어 그리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행동해 오셨는지에 유의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시 17:3) 그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10, 11. (ㄱ) 예레미야는 왜 도공을 보러 갔습니까? (ㄴ)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틀 잡는 방식은 무엇에 따라 정해집니까?
10 사탄은 모든 사람을 일정한 틀에 밀어 넣으려고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개개인을 고려하여 틀 잡으십니다. 예레미야의 경험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도공의 집에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레를 사용해 일을 하던 도공은 자기가 만들던 그릇이 망가지자 그 촉촉한 진흙으로 다른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 18:1-4 낭독) 예레미야가 그 모습을 지켜보라는 지시를 받은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의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1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이 원하는 대로 민족들과 나라들을 빚을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인간 도공과는 달리, 여호와께서는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자신이 만든 작품을 기분 내키는 대로 부숴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을 빚으실 때 그들이 보이는 반응에 따라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지를 정하십니다.—예레미야 18:6-10 낭독.
12. (ㄱ) 여호야김은 여호와께서 그를 틀 잡으시려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ㄴ) 여호야김에 관한 기록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12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틀 잡으십니까? 오늘날에는 주로 성서를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그에 반응을 나타냄에 따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틀 잡으실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여호야김 왕의 예를 통해 어떻게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이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에서 틀 잡힐 기회가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율법에는 “품꾼에게서 속여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여호야김 왕은 그런 일을 저질렀고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여 “널찍한 집”을 지었습니다. (신명 24:14; 예레미야 22:13, 14, 17)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여 여호야김을 틀 잡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나는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걸어온 행로를 고집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여호야김이] ··· 끌려나가 내던져져서, 수나귀가 묻히듯 묻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2:19, 21) 우리도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를 보내지는 않으시지만 분명히 지침을 주십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은 성서 원칙들을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떤 원칙들은 옷차림과 몸단장, 결혼식을 비롯한 사교 모임에서 즐기는 음악과 춤 등 일상생활의 여러 부면과 관련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틀 잡을 것입니까?
13, 14. (ㄱ) 예루살렘에서 종을 두었던 사람들은 왜 히브리 종들을 해방시키기로 했습니까? (ㄴ) 종을 두었던 사람들의 실제 마음 상태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13 또 다른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시드기야를 바빌론에 종속된 왕으로 임명하여 유다의 왕좌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느님의 조언을 듣지 않고 바빌론에 반역했습니다. (예레미야 27:8, 12) 그 결과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이제 시드기야 왕과 방백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율법에 따라 뭔가 행동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 종들이 7년째 되는 해에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던 시드기야는 그러한 종들을 해방시키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탈출 21:2; 예레미야 34:14) 적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그제서야 종들에게 자유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예레미야 34:8-10 낭독.
14 후에 이집트 군대가 예루살렘을 도우러 왔고 포위 공격을 하던 바빌론 군대는 퇴각했습니다. (예레미야 37:5) 그러자 종에게 자유를 주었던 주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해방시켰던 사람들을 다시 종으로 부렸습니다. (예레미야 34:11) 요점이 무엇입니까? 유다 사람들은 위험에 처하자, 하느님의 법을 지키면 과거의 잘못을 씻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분의 법을 지키는 척했습니다. 하지만 위험이 지나가자 다시 이전의 행로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받아들이는 척 했지만, 그들이 나중에 한 행동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지침을 따르고 그에 따라 틀 잡히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공에 관한 예레미야의 기록으로부터 어떤 실제적인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까? 오늘날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틀 잡으십니까?
여호와께서 틀 잡으시는 대로 순응하라
15. 당신은 여호와께서 틀 잡으실 때 어느 정도나 순응할 것입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15 우리는 여호와의 세계적인 회중의 도움 덕분에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성서 원칙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료 형제 때문에 속이 상할 경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 4:32) 또한 성서의 교훈이 올바르고 지혜롭다는 것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어떤 진흙이 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틀 잡으실 때 순응할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말랑말랑한 진흙과 같다면 우리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며, 위대한 도공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에게 더욱 유용한 그릇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로마 9:20, 21; 디모데 둘째 2:20, 21 낭독) 우리는 시드기야 시대에 종을 부리던 사람들이나 여호야김과 같은 마음 상태를 나타낼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귀하게 쓰기 위해 틀 잡으시는 대로 순응해야 합니다.
16. 예레미야는 어떤 중요한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까?
16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도 틀 잡으셨습니다.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그의 태도가 이러한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걷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을 한 다음 그는 “오 여호와여, 저를 시정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예레미야 10:23, 24)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예레미야를 본받을 것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앞으로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청소년들은 ‘자기 발걸음을 스스로 인도’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은 결정을 내릴 때 하느님의 인도를 구할 것입니까? 예레미야처럼 인간에게는 자기 발걸음을 인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할 것입니까? 당신이 하느님의 인도를 구한다면 그분이 틀 잡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7-19. (ㄱ) 예레미야가 유프라테스 강까지 먼 길을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예레미야는 어떻게 순종의 시험을 겪었습니까? (ㄷ) 예레미야가 띠와 관련된 일을 수행한 결과 무슨 일이 가능해졌습니까?
17 예레미야가 임명을 수행하려면 하느님의 인도에 순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예레미야라면 주어진 지침은 무엇이든 받아들였을 것입니까? 한번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아마포 띠를 구해서 허리에 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지도를 보면 유프라테스까지의 거리가 약 500킬로미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곳에 가서 바위 틈에 그 띠를 숨긴 다음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후에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가서 띠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13:1-9 낭독) 예레미야는 모두 합해 약 1900킬로미터를 여행했을 것입니다. 성서 비평가들은 그가 여러 달 동안 걸어야 하는 그 먼 여행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b (에스라 7:9)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이었고 예레미야는 그에 따랐습니다.
18 예레미야가 유프라테스로 가려고 유다 산지를 터벅터벅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후 어느 길로 갔느냐에 따라 사막을 통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아마포 띠를 숨기려고 그 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가 오래도록 보이지 않자 이웃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했을 것입니다. 돌아왔을 때 그는 아마포 띠를 매고 있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하느님께서는 다시 그 먼 길을 가서 띠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썩어서 “아무 데도 못쓰게 된” 띠를 말입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웠겠습니까? ‘이건 정말 너무하잖아. 대체 뭐하러 이런 일을 한담.’ 하지만 하느님께서 틀 잡으시는 대로 순응해 온 예레미야는 그런 식의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평하지 않고 지시받은 그대로 했습니다!
여호와의 지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예레미야가 두 번째로 유프라테스 강에 갔다 온 다음에야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일을 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강력한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자기 마음의 고집대로 걷고 있으며, 다른 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몸을 굽히려고 그들을 따라 걷고 있으니, 또한 아무 데도 못쓸 이 띠처럼 될 것이다.” (예레미야 13:10)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매우 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사소해 보이는 일에서 여호와께 마음을 다해 순종함으로,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힘쓰시는 하느님의 노력에 보탬이 될 수 있었습니다.—예레미야 13:11.
20.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일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20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교훈을 베푸실 수 있도록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가라는 지시를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웃이나 동료가 우리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인 행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당신의 옷차림과 몸단장, 당신이 선택하는 교육, 선호하는 직업, 심지어는 술에 대한 견해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인도에 따르겠다고 굳게 결심할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틀 잡으시는 대로 순응하는 가운데 결정을 내리다 보면 훌륭한 증거를 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호와의 말씀에 나오는 지침에 순종하고 충실한 종 반열을 통해 주어지는 인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유익합니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마음을 따라가는 대신 예레미야를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틀 잡으시는 대로 순응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오래도록 사용할 귀한 그릇으로 빚어 가실 때 그 인도에 따르기 바랍니다.
사탄과 우리의 불완전한 마음과 세상에서 오는 압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 왜 필수적입니까?
a 한 성서(NET Bible[2005년판])에는 이 성구가 “현 세상에 동화되지 마십시오”로 번역되어 있다. 이 성구의 각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현 세상에 ‘동화되는’ 일을 수동적인 개념으로 본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일이 어느 정도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 그처럼 동화되는 과정은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아마 그 두 가지가 결합된 결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b 일부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간 곳이 인근의 어떤 장소였지 유프라테스 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 학자는 이렇게 기술한다. “그들은 그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는 고생을 하지 않도록 구제해 주고 싶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