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연구를 통하여 장성을 얻는 것은 즐겁다
“지혜는 . . . 아름답고 . . . 유익하도다 . . . 지혜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전도서 7:11, 12.
1. 우리는 어떻게 장성을 얻을 것을 기대할 수 있읍니까?
장성을 향하여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즐거운 경험입니다. 장성은 유전되는 성품이 아니라, 온전한 성장 즉 장년에 이르기 위하여 훈련하고 세워 나가는 결과로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4:12, 13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는 온전케 훈련, 신세하며. . . . .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라.』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식을 취하는 것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연구를 의미합니다. 분명히 개인 연구는 한 개인이 장성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유망한 통로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만족을 주며 즐겁습니다.
2. (ㄱ) 장성의 척도가 되는 성품들은 무엇입니까? (ㄴ) 이 방향의 진보는 그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입니까?
2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고 하므로, 장성을 반영하는 성품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올바른 영적 양식으로 정신을 철저히 양육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성품들이란 헌신, 사랑 균형잡힌 견해, 믿음, 신뢰받을 만함, 영적 분별력입니다. 장성은 정신 기능의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므로 장성 되기 위해서는 훈련 계획이 그 바탕이 됩니다. 올바른 정신태도로써 그리스도인 성공의 목표가 일단 마음에 정해지면, 연구는 즐겁습니다.
3. (ㄱ) 어떤 이들은 연구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모릅니까? (ㄴ) 더욱 많이 하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읍니까?
3 어떤 이들은 연구가 지루하고 어렵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연구가 더는 지루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고 마치 신체가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기듯 이 연구를 즐기도록 무슨 대책을 세워 보십시오. 다른 이들은 「나는 학생이 아니므로 연구나 독서에 개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태도는 정신적 나태의 소치가 아닐까요? 먹는 일이 싫은 일일지 모르나, 노력하지 않고 기아를 면할 수 있읍니까? 가치있는 업적과 특히 영생에 관한 것은 노력, 그것도 많은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만족과 평화와 즐거움을 가져 오므로 가장 즐거운 것입니다.
4. 어떠한 조건하에서 우리가 연구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읍니까?
4 누차 「나는 공부할 시간이 없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일 당신이 다른 모든 일을 먼저하고 그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연구할 계획을 하였다면 연구할 수 없읍니다. 당신은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게 합니까? 혹은 시간을 내서 정규적으로 먹습니까? 물론 당신은 시간을 내서 정규적으로 그렇게 할것입니다. 먹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진미를 즐기는 것과 꼭 같이 연구하고 연구를 즐기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연구를 통한 성공
5. (ㄱ) 그리스도인 성공의 척도는 무엇입니까? (ㄴ) 잠언 7:1, 2와 1:5, 6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하여야만 합니까?
5 어떠한 노력을 하든지, 각자는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여호수아」는 『율법책』에 관해서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여호수아 1:8)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일을 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을 정규적으로 취한다면 깊은 즐거움을 주는 내적 만족을 가질 것을 기대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주신 계명들을 잘 간직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간직하며, 계속 생활하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음의 성경 표현에 둔다면 연구할 생각을 금방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헤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듣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청각으로 지식을 취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읍니다. 우리가 인쇄된 「페이지」를 읽고 보는 것도 듣는 것입니다. 지식은 시각을 통하여 취해집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 말을 쓴 저자로부터 『듣는』 것이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진적으로 이해력을 얻고 장성으로 발전합니다.—잠언 7:1, 2; 1:5, 6.
6. (ㄱ) 지식을 얻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여야만 합니까? (ㄴ) 예수께서 자신에 관한 성경을 설명하셨을 때 두 제자의 느낌은 어떠하였읍니까?
6 지식을 찾고 발굴하려는 열망은 우리 마음속에서 불타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잠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금을 구하는 자의 열망과 같아야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 금강석이 여러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배움에도 여러 가지 가치 있는 면이 있읍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약 12 「킬로미터」 걸어가던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것을 자세히 설명하』신 후에 느꼈던 바와 같이 동일하게 마음 속으로부터 느껴야만 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디하더냐?』 우리가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 회중과 연합하게 되었으므로, 이 동일한 뜨거움 즉 열망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된다는 것을 강력히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즐거움에 분명히 공헌합니다.—잠언 2:4, 5; 누가 24:13, 27, 32; 로마 11:33.
묵상
7. (ㄱ) 묵상은 무엇이며, 어떻게 묵상할 수 있읍니까? (ㄴ) 어떠한 환경하에서 묵상은 건강한 영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읍니까?
7 묵상은 정신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라.』(디모데 전 4:15, 16) 묵상은 백일몽이나, 아무 목적 없이 마음이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은 생각을 특정한 제목에 속박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우 중요한 날자인 1914년을 지적하는 예언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적하는 성귀들을 마음 속에 열기하고, 가능한 한 모든 예언들을 회상해 볼 수 있읍니다. 이것은 가치있으며 자극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개인 연구 부문에 들어을 것입니다. 「다윗」은 다음의 말에서 그것을 잘 표현하였읍니다.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라.』 (시 77:12) 특정한 환경하에서 즉 감금되어 있다거나 성서나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끊어졌을 경우 묵상은 우리가 개인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하에서 묵상하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일 것이며, 장성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딴 데 정신을 파는 일을 막으라
8. 연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8 개인 연구에 있어서, 손에 들고 있는 책에 한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딴 생각에 정신을 팔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을 때, 그 말씀에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그때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영적 식별력은 장성으로 향하는 전진입니다. 그러한 면으로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완전한 지혜를 예비』 하도록 도우실 것이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운동 선수가 그의 신체를 단련하는 것 같이 우리의 정신을 긴장시키고 정력적이고 활동적이 되게 함으로 영적 장성을 추구하여야만 합니다.—디모데 후 2:7; 잠언 2:7, 8.
9. 우리가 읽는 것이나 연구 하는 것을 방해하게 하는 어떠한 일이 있읍니까?
9 그러나 앉아서 연구하려고 할 때, 흔히 우리의 정신은 그 날의 여러 가지 하였던 일을 생각하며 방황합니다. 우리는 세속 직장에서 일어났던 어떤 일이라든가 그날의 우연한 사고로 인한 불쾌함에 대해 계속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파수대」를 연구하기 위해 앉읍니다. 잠시 읽다가 『그 항에서 무엇을 읽었더라?」하고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특정한 제목을 연구할 때 우리의 마음에서 다른 것들을 지워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정신이 그 날의 사건에 대한 생각으로 옆길로 흐를 수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구를 방해하고 그 즐거움을 방해할 뿐입니다. 한편 우리는 너무 마음이 풀어져서 한 항을 읽은 후에 졸음이 오기를 원치 않읍니다.
연구 자료
10. 어떠한 여러 가지 연구 자료들이 있읍니까? 그리고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읍니까?
10 개인의 장성을 향해 일하는 데 귀중한 도움이 되는 연구 자료들이 많이 있읍니다. 주요 연구 자료는 「파수대」에 매호마다 나오는 연구 기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짧은 기사나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읍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사를 등한시합니까? 혹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읍니까? 우리는 그 주제에 유의합니까? 우리가 어떠한 기사이든 연구한 다음에, 중요한 점을 기억하며, 강조된 성귀들을 연구할 수 있읍니까? 만일 그리스도인 전도인에 대한 충고가 그 지면을 통하여 나올 때, 우리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적용합니까? 「파수대」에 표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생각은 당신의 확신을 표현합니까? 시편 필자는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라고 말하였읍니다. (시 16:11) 이 말씀이 당신의 태도를 반영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이 여러분의 생각을 틀잡고 있읍니다. 「깨어라!」지는 어떠합니까? 당신은 그 잡지를 읽으며 그 다양한 교훈으로부터 유익을 얻읍니까? 당신은 다른 「왙취 타워」 출판물들을 연구 하십니까? 「연감」이라든가 신간 서적들을 연구하십니까? 당신은 다른 성서 보조 서적을 참조하고 사용합니까? 그러한 것들을 신권적 사고 방식과 일치하게 고려한다면, 배경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귀중하며, 개인 연구의 한 자료가 될 수 있읍니다. 성서 「용어 색인」 역시 연구에 가치있는 것이며, 특히 제목별로 연구할 때 그러합니다. 1930년 이래 출판된 모든 서적의 「왙취타워 제목 색인」은 개인 연구에서 자료를 발견하는 데 가장 유용합니다. 제목별로 복습하는 것은 가장 유익합니다. 예를 들면, 색인에서 『복습』(Reviewing)이란 제목을 찾아 본다면, 그에 관한 지식을 1962년 「파수대」 499,527면 (국문 1962년 436, 453면)에서 찾을 수 있읍니다. 지식을 얻는 생각을 고려함에 있어서 개인 연구에서의 기억력의 가치를 찾아 보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색인」에 의하면 「전도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함」 151, 152면을 참조하도록 합니다.
11. (ㄱ) 우리의 연구는 어떻게 효과적이 될 수 있읍니까? (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성서를 연구하여야 하며, 무엇이 효과적입니까?
11 연구하는 데 있어서 지식의 섭취는 연구에 바친 시간과 노력에 비례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학교에서 8년간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면, 많은 지식을 얻었을 것입니다. 이 수학 과목 시간에 부지런히 정신을 집중시킴으로, 그는 『빈둥 빈둥』 논 사람보다 더 자격을 구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서 연구생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풍부히 뿌린 연구생은 때가 되어 영적 부를 풍부히 거둬들일 것입니다. 성서 연구를 위하여 절호한 시간을 사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렇게 하는 최선책은 연구를 위하여 정규적으로 시간을 제쳐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읽는 것이야말로 여호와의 증인들 스스로 하고자 원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도 매일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
12. (ㄱ) 성서는 우리에게 왜 귀중합니까? (ㄴ) 「바울」이 「골로새」인에게 보낸 충고를 『들음』으로 어떠한 유익을 이끌어 낼 수 있읍니까?
12 성서를 읽을 때, 우리의 생각은 은연중에 성실로 뛰어난 현명한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게 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지식을 주도록 하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것은 각 개인들로부터 교훈을 받는 것 이상입니다. 왜냐 하면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성서를 낭독할 때,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께 『듣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좀 더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읍니까? 이 질문은 즉각적으로 우리가 수동적인 마음을 경계할 필요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안에서 행』하며,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합니다. 이것은 선전 공세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이 세상의 시간을 빼앗고 기만적인 지식으로부터 우리를 막아 줍니다. 「골로새」인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현 세상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먹이는 기만적인 지식이 많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우리가 그 동일한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주는 예방 조치입니다. 동일한 편지 내에서 「바울」은 다른 이들이 정확한 지식으로 충만 할 것을 간구하였읍니다. 그것이 1장 9, 10절에 있는데 다음과 같읍니다. 『우리도. . . . .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셨다.』—골로새 2:6-10.
13. 우리는 이해력을 얻음으로 어떠한 만족을 얻게 됩니까?
13 이해력을 얻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마음에 즐거움을 가져다 주며 식물 위에 내리는 수분과 같이 생기를 줍니다. 이것은 신명기 32:2에 『연한 풀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라고 말한 바와 같읍니다. 이해력은 좋은 성장을 가져 옵니다. 즐거움과 함께 만족과 평정,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사모하고 바라는 성품들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 세상의 염려와 긴장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고. . . .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점을 잘 평하셨읍니다. (요한 8:31, 32) 이것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전진해 나감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
14. 성서를 연구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14 어떤 분은 『성서를 연구하십시오.』라는 말에 위축될지도 모릅니다. 마음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첫째로 당신이 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쪽 읽어 보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시작입니다. 통독(通讀)은 당신에게 사건들을 일어난 대로 좀 더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15, 16. (ㄱ) 논제 연구 방법이 왜 유익합니까? (ㄴ) 사건을 그려 보는 것이 왜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여 보십시오.
15 그러나 성서를 연구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은 아마 제목에 따라 연구하는 논제 연구입니다. 우리는 읽을 때 그 사건 즉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그려 보려고 노력할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훨씬 더 용이하게 포착할 수 있읍니다. 상태를 그려보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 그림을 이해하는 데 즉 그 사건을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 중요한 밤인 기원전 1913년 「니산」월 14일 해 저문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달은 만월입니다. 「이스라엘」인 아버지가 가족의 도움올 받으면서 1년이 넘지 않은 흠없는 양을 죽이는 것을 봅니다. 피를 대야에 담아 그들 집의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만 바릅니다. 거리에는 한 사람도 없고, 문은 닫혀 있읍니다. 한편 그날 밤 인적 없고 조용한 「고센」거리를 걸으면서 문설주에 떨어지는 피를 본 「애굽」인의 기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안에서는 가족들이 양과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고 있읍니다. 이 때 그들은 식탁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똑바로 서서, 허리 띠를 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신발을 신고, 지시가 떨어지자 마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읍니다. 한밤중이 가까왔읍니다. 「애굽」인의 거리에는 위험이 닥칩니다. 초태생들이 죽임을 당하자 곧 「애굽」 전역의 가정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그 나라의 자랑, 왕의 아들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모든 초태생들, 동물의 초태생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16 한 밤중이 지나자 곧 「이스라엘」백성은 이동합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수백만명이 대오 정연하게 「고센」 땅으로부터 급히 도망하여 나가는데 한 사람도 짓밟히는 일이 없이 충돌하는 일 없이 행군해 나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노인, 청년, 할머니, 처녀, 심지어 팔에 안긴 어린이들. 얼마나 장관입니까! 「애굽」의 속박을 피해서, 그리고 여호와의 손으로 현재 해방된 일군(一軍)의 백성들이 행군하고 있읍니다. 전술한 것이 당신이 출애굽기 11장으로부터 15장을 읽을 때 생생한 현실같이 떠오르도록 하십시오. 전체 그림이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17. 다니엘 5장에 기록된 「바벨론」의 멸망을 기억하는 데 무엇이 우리를 도울 수 있읍니까?
17 이와 동일하게, 왕이 연회를 베풀고 떠들석하던, 그리고 「다니엘」이 벽에 나타난 글씨를 해석하고 멸망이 목전에 다달음을 말해 주었을 때 그 소름 끼치는 광경이 있던 날 밤에 「바벨론」이 멸망당한 것을 읽을 수 있읍니다. 「메대」와 「바사」의 대군이 열려진 성문으로 밀려 닥쳐서 약탈하고 점령하였읍니다. (다니엘 5장) 이러한 그림을 우리 마음속에 생생하게 그려 보는 것은 「바벨론」의 멸망을 연구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됩니다.
시간과 노력을 유리하게 사용함
18. (ㄱ) 연구 시간으로부터 더 많은 가치를 얻도록 도와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ㄴ) 무엇이 가장 큰 만족과 즐거움을 가져다 줍니까?
18 시간에 대하여 해야 될 일이 매우 많읍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유리하게 사용하도록 주의깊이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일들을 밀어 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잘 계획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해할 수 있읍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1주일에 40시간 일하는 그리스도인 전도인 예로 들어 봅시다. 고용주에게 매인 시간은 매주일 중단 없이 5일간 매일 8시간을 하도록 엄격히 계획되어 있읍니다. 개인 연구를 위하여 마련한 시간은 어떠합니까? 그것도 역시 정규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 영적 양식을 계속 취하는 데 중요하지 않읍니까?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이 온전한 법을 들여다 보는 문제에 있어서 정규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 1:25) 만일 그가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고 장성으로 전진하는 자라면, 꾸준히 지식을 얻음으로 실제적인 만족과 즐거움은 그의 것이 될 것입니다. 행복은 지식을 얻음으로써만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줌으로 그들도 동일한 즐거운 마음을 함께 가지도록 하는 데서 옵니다. 행복을 함께 나누는 것은 더 많은 행복을 가져 옵니다. 마치 선한 사업에 대한 봉사가 그리스도인 전도인에게 더 많은 일과 책임을 가져오는 것과 같읍니다.
장성—일생의 목표
19. (ㄱ) 무엇이 장성으로 향하는 우리의 진보를 돕습니까? (ㄴ) 어떠한 실례가 장성을 발전시키는 수단을 예시합니까?
19 개인 연구에서의 꾸준한 섭취는 그 사람의 이해력을 명확히 선양시키고 그 사람을 장성시킵니다. 시간 계획에는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줄 시간도 포함됩니다. 「바울」이 에베소 4:15에서 진리를 말하는 데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였는지 유의하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요점을 설명하여 줄 때, 당신 자신의 마음 가운데 그 특정한 점에 대한 인식의 심도와 생각이 얼마나 더 장성되는가를 느낄 수 있읍니다. 당신이 특정한 항목의 대답을 하였을 때, 그 「파수대」 연구의 사상을 더 잘 기억하고 있음을 유의하신 적이 있읍니까? 그 사상은 다른 사람의 대답을 들었을 때보다 더 마음 가운데 새겨집니다. 그러 므로 후자를 통해서 유익을 받을 수 있으나 우리가 그 문제에 관해 말하거나 설명할 때만큼은 못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장성된 형제가 성서의 책의 하나에 대한 연설을 하는 신권 전도 학교에서도 잘 예시됩니다. 그 연설을 듣는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사는 그 연설을 철저히 살피고, 많은 연습으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의 마음 가운데 더 잘 새겼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연설이 끝난 다음에, 『내가 방금 연설한 책만큼 다른 성서의 책들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을 것입니다. 연구에 바치는 부가적인 노력과 연습 그리고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장성으로 향하는 또 하나의 발관으로서 가치가 있읍니다.
20. (ㄱ) 「바울」은 그의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전진의 분량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제안을 하였읍니까? (ㄴ) 우리는 해가 지남에 따라 어떻게 장성으로 전진할 수 있읍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20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의 장성을 쉽사리 인식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가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는 정상(頂上)에 다다르지 못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그는 장성이란 얼마나 계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인가를 설명하였읍니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은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것이라.』(빌립보 3:13-16) 그렇습니다. 장성은 일생의 사업입니다. 한가지 예로서 소년기에 전심전력하여 30세가 되기까지 주의깊게 연구한 소년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30세가 되었을 때까지 개인 연구를 통하여 많은 지식을 얻었읍니다. 그는 장성된 사람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는 순회나 지역의 감독자가 될 수 있읍니다. 혹은 지부의 한 감독자가 될 수 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음 10년간 더 계속 공부한다면 그가 40세가 되었을때 얼만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만일 그가 동일한 과정으로 다음 10년을 더 공부한다면 그가 50세가 되었을 때 그리고 60세가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진보를 하게 되었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일생의 사업인 장성과 함께 그의 즐거움은 자랄 것이며, 그의 감사와 만족은 증가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부지런히 연구하고 결코 나태해지지 않는 사람은 그러한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는 『온전히 자란 성인』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