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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귀한 그리스도인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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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귀한 그리스도인 유산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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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3
파93 10/1 5-9면

진귀한 그리스도인 유산

블라섬 브랜트의 체험담

나는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태어났다. 때는 1923년 1월 17일이었다. 바깥은 추웠지만 나는 인정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 저지 노리스와 헬렌 노리스의 포근한 품에 안겨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의하면, 부모가 하는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숭배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여덟 살 때인 1910년에 외조부모는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부근에서 텍사스 주, 앨빈 외곽에 있는 한 농장으로 이사하였다. 그 곳에서 그들은 한 이웃 사람에게서 성서 진리를 배워 알게 되어 기뻐하였다. 어머니는 왕국 희망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찾는 데 여생을 바쳤다. 어머니는 가족이 텍사스 주, 휴스턴으로 이사한 뒤인 1912년에 침례를 받았다.

어머니와 외조부모가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초대 회장인 찰스 T. 러셀을 처음 만난 것은 러셀이 휴스턴에 있는 회중을 방문했을 때였다. 외가는 종종 집에서 당시에는 순례자로 불리던,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자들을 환대하였다. 몇 해 뒤에, 어머니는 부모와 함께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 이사하였는데, 러셀 형제는 그 곳에 있는 회중도 방문하곤 하였다.

1918년에, 외할머니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자 의사들은 외할머니에게 따뜻한 기후에서 살 것을 권하였다. 외할아버지는 풀먼 철도 회사에서 일하였으므로, 1919년에 전근을 신청하여 텍사스로 돌아갔다. 그 곳 샌안토니오에서 어머니는 저지 노리스라는 젊고 열심 있는 회중 성원을 만났다. 그들은 즉시 서로에게 끌려 얼마 후에 결혼하였으며, 그 젊은 남자는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성서 진리를 배우다

아버지는 태어나서 저지(판사)라는 유별난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처음 보고서 “이 애는 판사처럼 근엄하게 생겼군” 하고 말했다고 하며, 바로 그 말이 아버지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17년에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발행한 전도지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Where Are the Dead?)와 「영혼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Soul?)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이태 전에 사망하였으며, 아버지는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 궁금해 하던 차에 대답을 그 전도지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아버지는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즉시 회중 활동에 참여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전파할 수 있는 구역을 받았으며, 수업을 마친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맡은 구역에 가서 전도지를 배부하곤 하였다. 아버지는 왕국 희망을 전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1918년 3월 24일에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 침례를 받았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샌안토니오로 이사하자, 아버지는 당신 말에 의하면 이제껏 본 것 중에 “가장 달콤한 미소와 가장 푸른 눈”을 가진 사람에게 즉시 반해 버렸다. 그들은 곧 서로 결혼하고 싶다는 것을 알렸으나, 외조부모의 반대에 부닥치고 말았다. 하지만 1921년 4월 15일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부모는 둘 다 전 시간 봉사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찍 시작한 봉사

아버지와 어머니는 1922년에 열린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 대회에 참석하려고 분주히 계획을 세우다가 나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후에, 아버지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회중 봉사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모든 야외 봉사 마련을 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어머니는 출산하고 나서 몇 주 만에 호별 방문 봉사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사실 외조부모 역시 나를 봉사에 데리고 나가기를 좋아하였다.

내가 두 살일 때, 부모는 텍사스 주, 댈러스로 이사하였으며 3년 뒤에는 파이오니아로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부모는 밤이면 나를 자동차 뒷자리에 누이고는 길가에서 간이 침대를 놓고 잤다. 나는 물론 이런 생활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부모가 아직은 파이오니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윽고 아버지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로서 작은 이동 주택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으며 나는 구구단을 4단까지 외울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가르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접시를 닦을 때면 옆에 갖다 놓은 의자에 나를 올려 놓고 접시를 말리는 일을 시키고는, 내게 성구들을 외우게 하였고 당시에는 찬송가라고 하던 왕국 노래를 부르는 법을 가르쳐 주곤 하였다.

부모와 함께 하나님을 섬김

1931년에 우리는 모두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가슴 설레는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그 대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나는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그 이름이 이제껏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멋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아버지의 사업체가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일을 파이오니아 봉사를 다시 시작하라는 “주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32년 여름부터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봉사를 즐겼다.

부모는 아직 샌안토니오에 있던 외조부모와 가까이 있기 위해 텍사스 중부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임지에서 임지로 이사하다 보니 나는 자주 전학해야 하였다. 때때로 생각 없는 벗들은 마치 내가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아이를 위해 한 곳에 정착하여 단란한 가정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우리의 생활이 흥미진진하며 내가 봉사의 직무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나는 나중에 나 자신의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을 위해 훈련받고 준비한 셈이었다.

여러 달 동안, 침례받고 싶다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계속 말하자 부모는 그 문제에 대해 자주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는 내 결정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내가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를 원하였다. 1934년 12월 31일은 내 인생에서 이 중대한 행사가 있은 날이다. 그렇지만 전날 밤에, 아버지는 내가 여호와께 기도로 나아갔는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는 실로 아름다운 일을 하였는데, 우리 모두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딸이 여호와께 헌신하기로 결정하여 매우 행복하다고 여호와께 말씀드렸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앞으로 영원토록 그날 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외조부모에게서 받은 훈련

1928년과 1938년 사이에, 나는 샌안토니오에 사는 외조부모를 방문하여 많은 시간을 보냈다. 외조부모의 일과는 부모의 일과와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 외할머니는 콜포처—예전에는 파이오니아를 그렇게 불렀음—로 일하다가 단축된 시간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1929년 12월에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으며, 따라서 야외 봉사는 항상 일과였다.

외할아버지는 밤이면 나를 안고서 별들의 이름을 가르쳐 주곤 하였다. 내게 시를 읊어 주기도 하였다. 철도 회사에서 일할 무렵에는 나를 데리고서 풀먼 기차를 타고 자주 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외할아버지는 어려움이 있을 때면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분이었다. 나를 위로해 주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잘못하여 징계를 받고 나서 위로를 받으려고 할아버지를 찾아가면 단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조는 매우 분명하였다.) “얘야, 죄인의 길은 몹시 험하단다.”

박해 기간

1939년에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며 여호와의 백성은 박해와 집단 폭행을 당하였다. 1939년 말경에, 어머니의 병이 중하여 마침내 수술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 우리는 다시 샌안토니오로 이사하였다.

우리가 샌안토니오 거리에서 잡지 봉사를 할 때면 폭도가 규합되곤 하였다. 그러나 매주 우리는 한 가족으로서 각자 임명받은 거리 모퉁이에서 봉사하였다. 나는 종종 폭도가 아버지를 경찰서로 끌고 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할 때에도 계속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제 일로는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 수 없어서 아버지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1939년에 학업을 마치고 나서 직업을 가졌다.

저지(판사)라는 아버지의 이름이 그 기간에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일단의 벗들이 증거하기 위해 샌안토니오 바로 북쪽에 있는 한 읍에 갔는데, 보안관이 그들을 모두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보안관은 외할아버지를 포함하여 약 35명을 체포하였다. 아버지는 전갈을 받고서 그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아버지는 보안관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샌안토니오에서 온 저지 노리스요”라고 말하였다.

“아, 판사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보안관이 물었다.

“이 사람들을 유치장에서 나오게 하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오는 길이요” 하고 아버지가 대답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안관은 보석금도 없이 그들을 풀어 주었다—아무 질문도 없이!

아버지는 사무실 건물이 밀집된 지역에서 봉사하는 것을 즐겼으며, 특히 판사와 변호사를 방문하는 일을 좋아하였다. 아버지는 접수계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나는 저지 노리스요. 아무개 판사를 만나러 왔소.”

그리고 나서 판사를 만나게 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말머리를 꺼냈다. “우선 방문한 목적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선생님이 판사가 되기 오래 전부터 제가 판사가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판사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자기가 그 이름을 갖게 된 경위를 설명하곤 하였다. 그렇게 하면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며, 아버지는 당시에 여러 판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부모의 지도에 감사함

나는 십대 시절에 혼란을 느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지켜 보며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까 하고 걱정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어린이가 다 그렇듯이, 나는 부모가 허락하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 무엇을 하게 해달라거나 어디에 가게 해달라고 조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러 번 시험하였다. 때로는 눈물 공세를 펴기도 하였다. 사실, 만일 부모가 “가서 네 마음대로 하거라. 우리는 상관하지 않겠다”라는 식으로 말했더라면, 나는 몹시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조른다고 부모가 표준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내게 안전감을 주었다. 사실, 이것은 다른 청소년들이 건전하지 않은 오락을 제안할 때 내게 도움이 되었는데, “아버지가 못하게 하셔”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내가 운전하는 법을 배우도록 그리고 운전 면허증을 따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이 무렵에 아버지는 내게 집 열쇠를 맡겼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신임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감격하였다. 성인이 되었다고 느꼈으며, 그러자 책임감과 부모의 신임을 저버리지 않아야겠다는 욕망이 생겼다.

당시에는 결혼에 대한 교훈이 많이 베풀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성서 및 “주 안에서만” 결혼하라는 성서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 (고린도 전 7:39) 아버지는 내게 세상 청년을 집에 데리고 오는 날에는, 아니 거들떠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척 실망할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바로 “주 안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부모의 결혼 생활에 행복과 연합이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 나던 1941년에, 나는 회중의 한 청년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파이오니아였으며 법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들떠 있었다. 우리가 내 부모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자, 부모는 승인하지 않거나 실망하는 대신에 단지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네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괜찮겠지. 우리 생각에는 너희가 너무 젊은 것 같으니 일 년만 기다리라고 부탁하고 싶구나. 둘이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일 년 기다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잖니.”

나는 매우 감사한 나머지 그 현명한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1년이 되지 않아서, 나는 좀더 성숙해졌으며 이 청년에게는 좋은 배우자가 되는 데 필요한 특성이 없음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침내 조직을 떠났으며 나는 인생에서 재난이 될 뻔한 일을 피하였다. 현명한 부모의 판단력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결혼과 여행하는 봉사

6년간 파이오니아 봉사와 시간제 일을 하고 난 뒤인 1946년 겨울에,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청년이 왕국회관으로 들어왔다. 진 브랜트는 여행하는 ‘형제들의 종’의 보조자로 임명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순회 감독자를 형제들의 종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 끌렸으며 1947년 8월 5일에 결혼하였다.

얼마 안 있어, 아버지와 남편은 회계 사무실을 차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무실이 집회와 신권 마련에 방해가 되는 날, 나는 미련없이 사무실 문을 닫아버리겠네.” 여호와께서는 이런 영적인 견해를 축복하셨으며, 그 사무실은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충분히 공급하였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시간을 내 주었다. 아버지와 남편은 사업가로서 재능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쉽사리 부유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1954년에 남편은 순회 활동에 초대되었으며, 이것은 우리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였다. 내 부모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언제나처럼, 부모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의 권익과 자녀들의 영적 복지에 관심을 보였다. 부모는 결코 우리에게 “손자 좀 안아 보고 싶구나!” 하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전 시간 봉사하는 데 우리가 도와줄 일은 없겠니?” 하고 물었다.

따라서 떠날 날이 왔을 때, 우리는 우리의 웅대한 특권에 대해 격려하고 축하해 주는 말만을 들었다. 부모는 결코 우리에게 우리가 그들을 버렸다는 느낌을 받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를 온전히 지원해 주었다. 우리가 떠난 후로도 부모는 10년 동안이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샌안토니오의 도시 감독자로 임명되었으며 30년 동안이나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아버지는 1920년대에 그 도시에 회중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1991년에 사망하기 전에 회중이 71개로 증가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누렸다.

남편과 내 생활은 흥미진진한 일로 가득하였다. 우리는 31개가 넘는 주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섬기면서 넘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또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57년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29기로 참석하는 특권을 누린 일이다. 졸업하고 나서 다시 여행하는 봉사를 시작하였다. 30년을 순회 및 지역 활동에 바친 뒤인 1984년에, 협회는 친절하게도 남편의 순회 활동을 샌안토니오로 임명하였다. 내 부모가 80세가 넘었는데다 건강도 나빴기 때문이다.

부모를 보살핌

우리가 샌안토니오로 돌아온 지 1년 반 만에 어머니는 반혼수 상태에 빠지더니 사망하였다.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나는 어머니에게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을 교훈삼아 나는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65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 왔으므로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였지만, 우리가 옆에서 사랑과 지원을 베풀었다.

그리스도인 집회 참석, 연구, 봉사에서 일평생 세운 아버지의 본은 사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우리가 봉사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혼자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집에 돌아오면 으레 “외롭지 않으셨어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책을 읽고 연구하는 데 바쁜 나머지 외롭다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

우리에게는 평생 지속해 온 또 다른 습관이 있었다. 아버지는 특히 일용할 성구를 고려하는 아침에는, 가족이 함께 식사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 성구를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집을 나설 수 없었다. 이따금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이러다가 학교에 (또는 직장에) 늦겠어요.”

“네가 늦는 것은 일용할 성구 때문이 아니다. 네가 늦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고 아버지는 늘 말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앉아서 성구 토의를 들어야 하였다. 아버지는 죽음이 임박한 날까지 이 훌륭한 본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가 내게 남겨 준 또 하나의 유산이다.

아버지는 임종할 때까지 정신이 맑았다. 까다롭거나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보살피기란 손쉬운 일이었다. 가슴 아프게도 아버지는 이따금 지병인 관절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진짜 병은 “아담염”이라고 상기시키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과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는 1991년 11월 30일 아침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나는 지금 일흔 살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인자한 그리스도인 부모의 훌륭한 본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내가 이 유산을 앞으로 영원토록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부모가 물려준 유산에 대해 마음속 깊은 감사를 나타내겠노라고.—시 71:17, 18.

[5면 삽화]

어머니와 나

[7면 삽화]

1. 내가 처음 참석한 대회: 텍사스 주 샌마르코스, 1923년 9월

2.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대회: 텍사스 주 포트워스, 1991년 6월 (앉은 사람이 아버지임)

[9면 삽화]

진 브랜트와 블라섬 브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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