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부다처 생활의 경험
‘다오메이’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나는 ‘다오메이’ 태생으로 소년기에 나의 아버지의 ‘콤파운드’에서 성장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12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나 외에도 많은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여러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은 가까운 가족내에 많은 동무들이 있는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행복하고 안일한 생활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콤파운드’의 우두머리였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관습은 가정내에 여러 가지 문제를 초래하지 않는가 하고 아마 당신은 질문할 것이다. 한 마디로 대답해서 사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어려움들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 나도 결국 여러 아내들을 갖게 되었다.
먼저 ‘콤파운드’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당신이 나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콤파운드’란 햇볕에 말린 홍토로 높이 쌓아올린 담으로 둘러싸인 지대를 말한다. 그 안에는 ‘시멘트 불럭’이나 혹은 홍토로 지은 여러 채의 가옥들이 들어서 있다. 그곳에는 부엌이 하나 있는데 보통 담벽이 둘이나 셋 쯤 붙어있는 오두막이다. 이곳은 대체적으로 일기가 좋은데, 그런 때에는 옥외에서 음식을 준비한다.
‘콤파운드’의 소유자의 아내의 수가 증가되면 그는 새로운 아내를 위하여 ‘콤파운드’로 직접 통하는 독립 가옥을 세운다. ‘콤파운드’에서의 생활은 작은 부락에서 생활하는 것과 같다. 부엌이 하나라고 해도 별로 어려움이 없다. 일정한 식사 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하며, 모두가 동시에 시장기를 느끼지는 않는다.
올바른 의향
결혼 적령기에 달했을 무렵 나는 한 아내와만 결혼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왜냐 하면 내게는 ‘콤파운드’에서의 생활의 득실(得失)을 저울질해 볼 충분한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다처가 어느 정도 유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여러 아내와 대가족은 부와 세력의 상징이다. 그러한 가장은 수 많은 권속들로부터 명망을 얻으며 그 사회에서 높이 존경을 받는다. 물신(物神)들이 그러한 사람에게 다산(多産)의 복을 내렸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콤파운드’는 종종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내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던 많은 경우를 기억하고 있다. 어떤 때는 아버지가 다른 아내들 보다 한 아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총애받는 아내에게는 심각한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다른 아내들의 질투는 아주 위험할 때도 있다. 사실상, 나는 지나친 질투로 말미암아 어떤 아내들이 그들의 경쟁자나 남편을 독살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한 아내만을 취하기로 가장 올바른 결심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행복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내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나는 자녀를 갖기를 대단히 원하였다. 그래서 자녀가 없이 생활한지 2년 후 나는 자녀를 낳아 줄 둘째 아내를 맞이해야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아내들을 더 얻음
특별한 기회가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주연(酒宴)을 즐기고 춤을 추곤 한다. 이러한 잔치는 며칠 밤 계속하며 그 동안 물신(物神)들에게 제사를 지내서, 복을 내려 풍년이 들게 해달라고 축원한다. 나는 이러한 축제의 기회를 이용하여 새로 두 아내를 맞이하였다.
먼저 나는 후보자를 선정하였다. 그 다음, 관습에 따라서, 나는 친구를 장래에 나의 신부가 될 사람의 부모에게 보내서 중매하게 하였다. 이 일에는 신부가 가지고 올 결혼 지참금에 관한 결정도 포함된다. 그는 또한 남편감의 훌륭한 점들을 이야기하여 그들의 마음에 들게 해야 한다. 장인(丈人)은 자기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사위까지도 그 가족의 일부로 간주한다. 신랑은 그들에게서 결혼 지참금을 받지만 그들은 신랑에게 일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으며, 후에 그들이 요청하면 그들을 부양해야 한다.
모든 타협이 이루어지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결혼식을 위하여 택일하고 그 다음 부모는 딸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다. 어떤 경우에는 결혼하기 며칠 전까지 그 일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남편과 가정을 원하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부모들로 자기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마련하게 한다. 큰 도시에서는 이러한 관습이 변화를 격고있지만, 시골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관습이 널리 행하여지고 있다. 이곳의 풍속에는 구혼하거나, 약혼을 하는 일은 없다.
곧, 나의 가정과 ‘콤파운드’는 나의 아버지의 것처럼 비대하여졌다. 내가 사회에서 영향력과 존경을 얻게 됨에 따라, 나는 심지어 세 사람의 아내로서도 더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나는 두명의 아내를 더 사들였다. 이제 나는 상황이 재현되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모든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다. 질투와 시기가 나타났으며 나의 ‘콤파운드’ 속에서는 사소한 일로 말미암은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어서, 한 아내의 친척이 죽으면, 관습에 따라서 나는 염소를 한 마리 사서 제물로 바쳐야 하였다. 그러나 그 염소는 다른 아내의 친척을 위하여 바친 염소보다 좋은 것이어서는 안되었다. 만일 내가 한 아내를 조금이라도 편애(偏愛)하는 것을 나타내면 다른 아내들이 그를 괴롭혔다. 말다툼과 싸움은 종종 나를 분격케 하였다. 이렇게 가내가 평화롭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들과의 교제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러한 행로가 내게 진정한 어려움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일부다처제(一未多妻制)를 부도덕한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미혼녀와 관계를 맺는 일도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여자들은 이미 결혼하기 전에 어린 아이를 하나나 둘 데리고 있다. 이로 인하여 남자들은 그러한 여인들에게 출산의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남편을 얻는데 방해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가? 많은 사람들이 대가족을 원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왜 독신녀의 부모들이 자기들의 가족에 그러한 새 식구가 첨가되는 것을 환영하는지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결혼하면 입장이 달라진다. 어떤 남편이고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와 일부다처
우리 사회에는 수 많은 종교가 난립해 있다. 고래의 물신종교(物神宗教)에 부가하여 웅장한 ‘가톨릭’ 교회가 하나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수 많은 ‘프로테스탄트’ 종파가 있다. 이러한 교회들은 일부다처의 관습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한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물신숭배(物神崇拜)와 일부다처의 관습을 행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교회 내에서 좋은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내가 항상 성서를 존중히 여기긴 했지만, 처음에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어느날 사제가 나에게 영세를 받지 않는다면, 결코 천당에 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나로 근심케 하였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교인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 후 수년간 나는 훌륭한 교회 성원으로 계속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여전히 여러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물신종교를 숭배하고 있었다.
그 후 1947년, 나는 처음으로 ‘왙취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보았다. 나의 친구 한 사람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더는 그 책을 원치 않았으므로, 나는 성서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에게서 그 책을 샀다. 그 책을 읽은 결과 나는 그 책이 성서의 가르침과 조화됨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 사회내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이, 성서가 명한 일들을 실천하는 일에 관한 한, 물신종교와 다를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교회에 가는 일을 중지하였으며, 물신종교에 대한 관심도 차차 식어졌다. 그러나 내가 성서로부터 배운 교훈들은 나의 생활상에 여러 가지의 큰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나는 나의 모든 애인들과의 유대를 끊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참 자유가 도래하다
그러든 어느 날, 우리 도시에서 수명의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전도사업을 하는 도중, 체포되어 투옥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내게 진정한 감명을 주었다. 성서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박해까지도 기꺼이 인내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이곳에도 있구나! 나는 이제 무엇인가, 심지어 그것이 내 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뜻한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어, 가족 모두가 참여하였으며, 그 후 즉시, 1960년에 나는 단지 한 아내만을 남겨두고 다른 모든 아내들을 멀리하였으며, 여호와께 헌신하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이전에 ‘가톨릭’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었을 때에는, 고래의 물신종교에 대하여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었다. 그러나, 즉시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의 생활을 성서의 요구 조건과 일치하게 틀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진실로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즐거움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의 다른 네 명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나의 모든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의 전처(前妻) 두 사람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여호와께 헌신하였다고 말할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자녀들은 모두 나와 함께 있는데, 그들 중 둘은 지금 전 시간 전도인이며 또한 다른 여섯 자녀들도 헌신하였고,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관심사를 돌보고 있다. 또한 가장 나이 어린 전처를 한 전 시간 전도인과 성혼(成婚)시킨 것은 내게 있어서 대단히 행복한 경사였다. 요즈음, 그들은 ‘왙취타워’ 협회의 여행하는 대표로서 봉사하고 있다.
진실로, 나는 자유로와졌다. 나는 더 이상, 성서의 요구 조건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드는 종교적 미신과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나는 단 한 아내만 가지라는 예수의 충고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나의 양심은 깨끗하다. (마가 10:6-9) 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주의 마련에 순응하고 있다.—디모데 전 3:2.
그 뿐만 아니라, 나의 경우에도 마가 10:29, 30에 있는 주 예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나의 가족은 내가 바랄 수 있든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나의 형제들, 자매들, 아버지들, 어머니들, 또한 수 많은 자녀들이 있다. 어떻게 그러한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자비를 보이셔서, 나로 참 평화 가운데, 동거하는 그분의 거대한 지적 가족의 일부가 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다만 한 아내와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평화—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므로 오게 되는 평화가 깃들어 있는 나의 가정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사회에서 큰 세력을 잡고 있는 “유지”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영향력을 다른 사람들로 참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영적 자유를 획득하도록 돕기 위하여 사용하므로 행복을 맞보고 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사회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데서, 큰 즐거움과 마음의 평화를 발견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질투와 방종한 도덕적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 여호와의 거대한 가족의 일부가 되는 이러한 즐거움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호와께서 그분의 완전하신 뜻과 일치하지 않는 인습에 고착하는 자들에게 종말을 내리시기 전에 더 많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회중 내에 깃들어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도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17면 삽화]
일부다처주의자는 모든 아내를 공평하게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곧 알게 된다; 질투가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