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소방관의 생활
「깨어라!」 집필 위원 취재담
“소방관 노릇은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사다리를 오르고, 사람들을 구출하고, 불길과 싸우는 것을 그들은 매혹적인 재미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상당히 다른 인상을 주게 되면 그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뉴욕’ 시의 소방관 생활 18년 동안 나는 수천건의 화재를 취급해 왔다. 자동차로 달려가서 불붙는 건물 속으로 뛰어들기를 수백번 하였다. 그러나 연기 자욱한 방안이나 복도—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에서는 매혹적인 재미도 흥분도 없다. 이곳에서 소방관들은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또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위하여 사투하게 된다.
위험한 중노동
어떤 경우에는 연기가 심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지척지간에 있는 밝은 전등도 보일락말락한다. 모든 행동을 촉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눈을 못보고 낯선 건물 속을 더듬거리고 있노라면, 절망감마저 든다.
소방관은 황급히 벽을 찾아가서 벽을 따라 더듬어 나간다. 그는 사람의 몸둥이가 만져지지 않나 신경을 곤두 세우고, 독한 연기를 빼내기 위해 창문을 찾아서 깨뜨린다. 기침을 하고 숨이 막히므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기를 쓴다. 때로는 숨을 쉬기 위하여 코를 마루 바닥에 바짝 대기도 한다. 고통스러운 숨을 한번 들여마실 때마다 무서운 일산화탄소와 다른 유독 ‘가스’들이 들어 있는 독한 연기를 더욱 들여 마시게 된다. 눈이 화끈거린다. 숨막히는 열기(熱氣)가 힘을 빼앗아가는 동안 체온이 상승한다.
소방관이 연기와 열기에 휩싸여버리는 때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그를 끌어 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불행을 당한다. ‘뉴욕’ 시에서 매년 약 8명의 소방관이 임무 수행 도중 순직한다. 다른 사람들도 화재로 인한 유독 ‘가스’를 매주 마시기 때문에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반적인 도시 공기의 오염도 건강에 해롭다고 하니까, 시야를 가려버릴만큼 연기가 가득한 건물 속을 자주 들어가는 소방관은 얼마나 해를 받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위험성도 있지만, 너무 늦어서 도움을 베풀 수 없게 되었을 때엔 가슴이 아프고 절망감을 느끼기도 한다. 화상을 너무 많이 입어 내 팔에 실제로 죽어 넘어지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죽음의 장면, 또는 죽은 자녀의 시체에 매달려 흐느끼며 실성하는 어머니를 볼 때에는, 매혹적인 점이 없다. 재산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들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할 때에, 흥분되는 것도 없다. 나는 이러한 입장을 여러 차례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실로 처량하기 그지없다.
화재의 위험성
소방관들은 화재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불이 얼마나 무서우며,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가를 알고 있다. 몇 시간 동안 연기만 조금씩 올라오던 것이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방 하나를 삼켜버린 경우를 나는 보았다. 발화한지 몇 분도 채 안되어 여러 층짜리 건물에 완전히 퍼져버린 화재도 보았다. ‘매트리스’ 타는 연기가 얼마나 독성이 강한가도 보았다. 화재가 난 곳에서 여러 층 위에 사는 사람이 그 연기를 마시고 즉사한 일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불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려 주고자 한다. 사람들을 놀라게 혹은 겁에 질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조처를 강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화재가 미국에서만도 매년 12,000명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또한 다행히 살아 남기는 해도 크게 화상을 입으며, 일생 동안 불구가 되는 수만명을 생각해 보라.
통계 숫자는 냉정하고 실감이 없다. 그러나 일단 자신이 관련되게 되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게 된다. 나는 체험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불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어느 통계 수자보다 더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장의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
수년 전, 통보를 받고 ‘브루클린’의 어느 ‘아파트’에 도착해 보니 사태가 완전히 수습된 것같이 보였다. 불은 꺼졌다. 화재의 흔적이라곤 ‘커튼’이 약간 탄 것뿐이었다. 하지만 일곱살 가량 된 여아가 데었다. 그애가 ‘커튼’에 불을 붙여 놓고는 엉겹결에 불을 끄려고 ‘커튼’을 끌어 당기니까 치마에 불이 붙었던 모양이었다. 부모들이 불길을 잡아버렸다.
부모들은 어린애가 심한 화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지 않은 것같았다. 그러나 그 애를 자세히 살펴보니 내 가슴이 철렁하였다. 양 다리의 안쪽이 심히 데었고, 등의 일부도 데었다. 그애는 심한 ‘쇼크’를 받았기 때문에 통증을 못느꼈다. 사실, 그애는 정상적인 것 같았다. 태연스럽게 앉아서 자기 좋아하는 ‘텔레비 프로’를 틀어달라고 하였다. ‘앰블런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속수무책이라 안절부절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병원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애가 밤 사이에 죽었다는 것이다.
대화재만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잠간의 부주의로 앗차하는 순간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게 된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일반 사람들은 불이 얼마나 위험하며, 그것이 얼마나 신속히 번지는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또 한번의 경우에, 소방서에서 점심을 먹는데 경보가 울려왔다. ‘브루클린’에 있는 이층 집에 불이 났다. 도착해서 보니 불이 부엌과 일층 전체에 번졌다. 한낮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이 전부 피신했으려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불길을 잡은 다음에 부엌에서 남자 아이를 발견하였다. 다음 순간, 부엌 뒤 연기가 가득한 목욕실에서 나는 다른 아이에 걸려 넘어졌다. 죽어 있었다. 그들이 순간적으로 불길에 휩싸인 것이 아닌가!
그 어머니는 아들에게 벌을 주려고 그를 침실로 들여보냈던 것이다. 어떻게 하여 그 방에서 불이 났는데, 그 어머니는 불길이 보이고 아들이 뛰쳐 나올 때에야 비로소 불이 난 것을 알았다. 그 어머니는 그 순간 이층으로 올라가서 자기 집에 동거하고 있는 불구자를 부축해서 데리고 내려왔다. 그가 밖으로 나올 때쯤해서는 일층 전체가 불길에 싸였다. 여덟살과 다섯살 정도 된 두 아들은 밖으로 나왔을 것으로 생각하였었다. 어머니는 애들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그 애들이 너무나 꾸물거렸든지 아니면 겁에 질렸던 모양이다.
나는 부엌에서 그 아이를 집어 들고 길건너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화상이 너무 심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거의 실성하였다. 의사는 불에 덴 곳을 보더니 절망적이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바로 그때에 학교 아이들이 점심을 먹으려 집에 오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흥분한듯이 “야, 저기 저 불났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좀더 가까이 가더니, “우리집 근방이다!” 하였다. 그러더니 한 아이가, 전혀 다른, 수심에 찬 어조로, “아이, 우리 집이야!” 하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나는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 어린애는 자기의 두 동생이 방금 처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그 당시의 절망감을 도저히 잊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만한 일인데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가슴이 아파진다. 그러한 것은 예방할 수가 있었다. 단순한 어리석은 행동 혹은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한가지 예가 생각나는데, 그것은 오히려 일반적인 예이다.
시립 공영 건물에 사는 어느 어머니는 시장에 가면서, 아직 학교에 다닐 나이가 안된 두 아이를 ‘아파트’ 방에 두고 문을 잠가두었다. 그 어머니는 이런 일을 자주 하였던 것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이 났다. 아마 어린애들이 성냥으로 장난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는 연기가 약간 새나오고 있었다. 급히 ‘아파트’로 달려 올라갔으나 방화문(防火門)이 잠겨 있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시간이 약간 지연되었다.
방안에는 연기가 가득하였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들어가서 손으로 더듬어 기어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소방관들은 사람을 만지거나 그 사람에 걸려 넘어져서 사람을 찾아 낸다. 우리는 남자 아이 두 명을 발견하여 밖으로 내왔다.
한 아이는 연기 때문에 죽었다. 다른 아이는 생명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즉시 입에다 입을 대고 인공 호흡을 시켰다. 그러자 다른 소방관들이 자동차에서 인공 호흡기를 가지고 왔다. ‘앰블런스’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그 일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 아이도 죽고 말았다.
그때서야 그 어머니가 돌아왔다. 그 여자의 상심이 어떠하였겠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가 아이들만을 남겨 두었으니 자기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어떠하였겠는가! 소방관들은 이러한 참상을 볼 때면 사람들이 좀더 지혜있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화재가 1년에 미국인 12,000명을 희생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미리 생각함
방화에 대하여 나는 학생들이나 다른 단체에게 연설을 많이 한다. 나는 근본을 파헤쳐서 솔직하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금 더 미리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다면,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차이를 내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건물 안에 들어가면, “불이 나면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를 자동적으로 생각한다. 특히 자기 집에 대하여는 이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한다. 당신은 집에 달린 모든 출구를 다 알고 있는가? 당신이 사용하는 다른 건물의 출구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없이 자기가 들어온 길로 나가려고 한다. 그 결과 길이 막힌다. ‘시카고’의 ‘이로크이스’ 극장에서 여러 해 전에 재난이 발생하였는데, 10개의 출구 가운데 세개만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575명이 죽었다!
미리 생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화재는 보통 밤에 발생하며, 사람들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 방향을 잃어버린다. 미리 생각을 해두지 않아서 정확히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른다면, 당황해버린다. 꼼짝않고 서 있다던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거나 옷장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다른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일은 흔히 일어나며,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다. 그러나 2차 대전 중 적의 공습으로 화재가 났을 때에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세우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오늘 저녁에 불이 나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어떻게 밖으로 나가겠읍니까? 어디로 가겠읍니까? 침실 문이 잠겨 있는데, 달려가서 손잡이를 만져보니 그것이 뜨겁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 문을 열고 나가겠읍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행동이다. 문을 열면 불길에 산소를 공급하게 되고, 아마 그 사람이 나갈 겨를도 없이 불길이 방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므로 문이 뜨거우면 절대 열지 말라.
그리고 층계를 통해 내려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위험하다. 이것은 열과 화염은 위로 올라가며, 계단을 타고 급히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였더라면, 내가 몇년 전에 불속에서 끌어낸 한 아버지와 아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세대가 사는 3층 건물에 불이 났었다. 일층에서 발화하였다. 자기 ‘아파트’에 연기가 차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어린애 하나를 안고 변소 방문을 통하여 안전하게 빠져나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 안고 앞문으로 달려나갔다. 불길이 앞문을 가로막자 그는 지붕을 향하여 윗층으로 황급히 달려 올라갔다. 조금 후 내가 지붕에 올라가 보니 아버지와 아들이 거의 지붕까지 다 올라와서 죽어 있었다. 그들이 안전한 곳에까지 미처 나오지 못해서 열기와 화염이 그들을 덮쳤던 것이다.
가정 화재 연습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혹은 치명적인 행동을 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학생들에게 가정에서 화재 연습을 해 보라고 권고한다. 그들이 학교에서는 화재 연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생명을 상실하는 가정에서 그러한 연습을 안할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좋은 탈출구는 창문일 때가 많다. 특히 밤에 깨어났을 때는 그렇다. 그러나 연습이 필요하다. 연기가 가득한 방에서는 앞을 볼 수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어지므로, 모든 일을 더듬어서 하는 수밖에 없다. 실제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일이 어떻다는 것을 전혀 이해 못한다. 먼저 벽을 찾은 다음 그것을 따라가서 창문으로 가는 것이 좋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면, 눈을 감고 혹은 눈에 수건을 두르고, 창문을 찾아가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창문을 열 수 있는지 보십시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놀랄만치 어렵다. 특히 덧창이나 ‘스크린’이 달렸을 경우에는 그렇다. 그러나 그 문을 속히 여는 방법을 아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다. 그리고 또한 줄 사다리를 구하여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는 연습을 시키고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보관하도록 권고한다.
그러한 연습을 미리 해두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살아있을 것이다. ‘뉴욕’ 시 근교의 ‘자마이카 이스테이트’에서 일어난 일인데, 가족이 모두 이층으로 잠자러 간 다음 일층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변호사인 아버지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하여 아이들의 침실로 달려 갔다. 그 때문에 모두가 죽고 말았다. 만일 각자가 자기 창문을 열고 탈출하였더라면 살았을 것이다. 이층에서도 창문들에 매달린채로 떨어지면 된다. 떨어질 때에 상처를 입을지 모르지만, 거의 틀림없이 죽는 것보다는 낫다.
집에서 빠져 나간 다음 가족이 바깥에서 만나는 장소를 정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우리가 화재 현장에 달려가면, 부모들이 “우리 아이가 저기 들었어요. 꺼내 주세요! 꺼내 주세요!” 하고 부르짓는다. 흔히 이미 아이들은 나와버렸는데도 우리는 아이를 찾으러 그 속에 뛰어들어간다. 이 때문에 생명을 잃은 소방관들도 있다. 바로 작년 봄에 소방대장 ‘존 던’은 ‘브루클린’ ‘아파트’의 삼층에 뛰어들어갔었다. 그는 아이들이 이미 나와 버렸는데도 그 속에 아이들 네명이 들어 있다는 하소연을 들었던 것이다. ‘던’은 불길에 싸여 죽고 말았다.
내가 강조하는 또 한 가지는 물건을 가지러 불붙은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다. 어느 회사 건물의 화재 사건을 기억하는데, 직원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었다. 그런 다음에 불길이 별로 심하지 않은 것 같이 보이니까 그들은 물건을 가지러 다시 들어갔다가 죽어버렸다.
그러한 경우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연기의 위험성이다. 그것은 독성이 극히 강하다. 불에 타서 죽는 사람은 드물다. 연기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연기의 해독은 축적되어 자주 연기를 쏘이는 소방관들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과중한 작업, 괴로움
대도시 소방관들이 져야만 할 증가된 작업 부담을 생각하면 실로 비관적이다. 실로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내가 거의 20년전에 입소하였을 때에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일이 많은 10대 소방서 중 하나인 ‘사우드 브롱스’의 ‘래더’ 17 소방서에 들어갔다. 그때 우리는 1년에 1,800회 정도 출동을 하였다. 현재 어떤 소방서는 1년에 10,000회 정도의 경보에 응해야 한다! 1966년부터 1968년 사이에 도시 전체의 화재 경보 회수는 총계 44‘퍼센트’나 증가하였으나 인원이나 소방장비는 별 증가가 없다.
화재 경보 중에 거짓 경보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세건 중 한 건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기에 응해서 출동하기 전에는 어느 것이 거짓 경보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상 항상 달리고만 있는 현상이며, 음식 먹을 시간도 없을 때가 있다. 나는 8년 동안 ‘브루클린 브라운즈빌’에서 근무하였는데, 거기는 일이 너무 많아서 젊은 사람이나 견딜 정도였다. 다행히도 나는 좀 덜 바쁜 곳인 ‘퀸스’에 있는 ‘래더 143’ 소방서로 전근되었다.
‘브라운스빌’에는 현재 급격히 증가하여 1년에 1평방 ‘마일’에 10,000건의 화재 경보가 울린다! 날이면 날마다 불, 불, 불이다. 한 사람이 하루에 몇 건씩 진화 작업을 하는 수도 많다. ‘봅 존 데일리’라는 소방관의 경험담을 들으면 그곳에 화재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아파트’에 불이 났었다. 그래서 ‘봅’은 옆집에도 불이 번졌는가 보기 위하여 다음 집으로 가 보았다. 문이 잠겨 있었다. 사람들이 나가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연기가 자욱한 방안에 중년 부인이 있었다. 그는 심심히 사과를 한 다음, 왜 문을 열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이, 이 근방에 불이 하도 자주 나니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요.”
때로는 문자 그대로 전 지역에 불길이 치솟는 경우도 있다! ‘말틴 루터 킹’이 살해당하였을 때를 나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밤에 도시 전체의 소방서 직원들이 ‘브라운스 빌’로 동원되었다. 불길에다 물을 퍼붓기 위해 어느 공장 건물에 올라갔었는데 눈에 보이는 사방 전체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것이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그 이후 여러 번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면 지난 봄에 시에서 원호 자금 지급액을 삭감하였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신문에서도 그날 ‘브라운스빌’에 120건 이상의 화재가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때로는 어느 날 어느 지역에 불이 날 것이라는 예고가 있기도 한다. 그러면 그렇게 된다. 그 결과 ‘뉴욕’ 시의 ‘브라운스빌’, ‘사우드 브롱스’ 및 기타 지역은 2차 세계 대전 직후 폭탄을 맞고 불에 탄 ‘유럽’의 도시들과 방불하다.
그렇게 많은 화재와 싸우는 것은 고생이다. 그러나 이제는 방화범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불을 끄려고 하는 소방관에게 돌맹이와 유리병이 자주 날아든다. 재작년에 소방관 공격 사건이 800건에 34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지역에 사는 불우한 사람들은 완전히 좌절감에 싸여 있다. 자기들이 사는 건물은 낡고 수리하는 사람도 없다. 도시 개발에 대한 약속은 많이 듣지만 개선되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에 싸여 좀 더 신속한 조처를 강구해 줄 것을 바라는 생각에서 빈집이나 더러운 건물에 불을 지르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들의 그러한 일을 막기 때문에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우리를 “기성 제도”와 동일시 하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기도 하는 것같다.
어떤 사람들은 소방관들을 미워하는 것같다. 우리가 악의가 있다고, 불필요하게 집에 손해를 붙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불이 위험성과, 불이 번지는 방법과, 건물의 구조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 점을 설명하겠다.
진화 작업
가령 6층 혹은 7층짜리 ‘아파트’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여 우리가 거기에 출동했다고 한다면, 우리 각자는 자기의 임무를 알고 있으며, 즉시 자기 일을 착수한다. 그 일을 하고 않고에 따라서 동료 소방관의 생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한 사람은 급히 지붕으로 올라가서 칸막이 문을 열고 천창(天窓)을 제거하는 등, 내부 복도나 계단에 차 있는 독한 ‘가스’를 내보내도록 건물을 환기시킬 수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그 다음 그는 비상 계단을 타고 내려 오면서 더욱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들을 열어제친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소화기(消火器)를 쥐고 불을 찾아 달려간다. 건물 속 연기가 가득한 방에서 작업하는 소방관들의 생명과 아직 미처 도망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창문을 신사적으로 열 만한 겨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도 이해할 것이다. 창문이 보이기만 하면, 속히 닥치는 대로 아무 것이나 들고 때려부숴서 생명을 주는 공기가 들어가도록 한다. 어린 아이들이나, 독한 연기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하여 살려 낸 예가 흔히 있다.
환기 작업은 또한 그 뒤를 따라 무거운 물 ‘호스’를 끌고 와서 불에 물을 쏟는 소방관의 작업에도 도움을 준다. 만일 연기가, 분사되는 물에 밀리는데, 빠져 나갈 구멍이 없다면, 연기는 방안이나 복도에 빽빽히 압축된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호스’를 든 소방관의 머리 위로 분출되어 그 사람의 뒤에 불이 붙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 소방관은 아주 위험하게 된다. 모두가 환기 담당자가 신속하게 지붕이나 창문을 열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이 화재 현장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에 있을 경우, 자기 지붕이나 벽을 허물어트리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데도 이유가 있다. 소방관들은 불길이 번지는 길을 알고 있다. 그들은 불이 사람 눈에 보이지 않게 먼 거리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수 년전 철공장의 강철 절단기에서 불똥이 튀겨 불이 났었다. 종업원들은 수도물을 사용하여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약 30분후 불꽃이 벽 사이를 타고 나가 지붕으로 치솟았다. 실로 대 참변이었다.
소방관들은 불의 성질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접한 방이나 ‘아파트’를 조사해보는 것이다. 나는 장갑을 벗고 벽을 만져본다. 만일 뜨거우면 그 속에 불이 들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조사해 보기 위하여 벽에 구멍을 뚫지 않으면 안된다. 불은 특히 눈에 보이지 않게 수평하게 퍼져나가는 수가 있다. 만일 한 ‘아파트’의 지붕을 뚫어봐서 조금이라도 불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다음 ‘아파트’ 지붕을 뚫어서 더 이상 번지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불이 미치지 않은 ‘아파트’에도 손상이 가해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악의에서가 아니고 오히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오해, 위험성, 증가된 작업 부담, 빈번한 연기 호흡, 불길에 쌓인 희생자 구출, 재산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들을 볼 때의 허탈감, 동료 소방관이나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 모든 것이 대도시 소방관들이 당하는 처지이다. 우리의 작업은 고되고 위험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직업에서는 맛볼 수 없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보람, 도움을 부르짖는 사람들 곁에 서서 무엇인가를 도와 줄 수 있다는 그 보람이다. 이 점이 나에게는 다른 모든 고뇌를 이겨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