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72 6/22 17-19면
  • ‘보로부두르’—철학이 새겨진 돌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보로부두르’—철학이 새겨진 돌
  • 깨어라!—1972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마술을 중요시함
  • 불교 진화론이 묘사됨
  •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노력
  • 기억이 없는 “환생”
  • 삶을 떠날 것인가, 즐길 것인가?
  • 더 좋은 해방의 길
  •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가?
    깨어라!—1974
  • 불교—하나님 없는 깨달음을 찾아서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 제 8부: 기원전 563년경 이후—해방을 약속한 깨달음
    깨어라!—1989
  • 불교인에게 어떻게 말할 것입니까?
    우리의 왕국 봉사—1999
더 보기
깨어라!—1972
깨72 6/22 17-19면

‘보로부두르’—철학이 새겨진 돌

‘인도네시아’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보로부두르’는 중앙 ‘자바’의 초록색 계단식 논을 아름다운 배경으로 삼고 있다. 기원 800년 경에 건립된 ‘보로부두르’는 “언덕 위의 수도원”이라고 생각되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도원이라기보다 언덕 꼭대기를 덮은 높이 42‘미터’의 거대한 정방형 돌축대이다. 이 거대한 돌축대에 석가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불교에서는 하나님을 실제자로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관심의 중심을 이룬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를 신봉하면서 불교의 종교적 결함을 메꾸기 위하여 도교와 유교를 신봉하는 중국인이 많다. 불교는 신앙이라기보다 철학이므로 ‘보로부두르’는 숭배의 장소라기보다 명상의 장소에 가깝다.

오늘날 ‘보로부두르’는 관광지로도 애호를 받지만 ‘인도네시아’ 불교인들에게는 거의 그에 못지 않게 성지 역할을 한다. 많은 불교인들이 매년 이곳을 순례하여 5월 보름날 밤에 그들의 가장 중요한 축제인 석가의 성도(成道)를 기념한다.

마술을 중요시함

그날 밤에 불교인들은 ‘보로부두르’ 주위의 논에 모인다. 그들은 그곳이 마술의 강력한 저장소라고 믿는다. “악마의 마술”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들은 천사의 마술을 얻는다고 한다. 그들은 석가의 영이 남쪽 산꼭대기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하며, 축제가 끝나면 그들은 축제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고치기 위하여 ‘보로부두르’에서 “마술 물”을 떠온다.

석가의 성도를 기념하는 ‘와이칵’을 구경한 사람들은 영매술 혹은 신비주의가 불교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안다. 그러한 사람들이, 불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자들의 마술을 왜 그렇게 중요시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불교 진화론이 묘사됨

‘보로부두르’ 기념물의 생김새 자체가 불교 철학을 닮았다. 어떻게 그러한가? 꼭대기에 작은 방이 있는 열개의 층층대로 된 ‘보로부두르’는 인간이 점진적으로 전이하여 부처의 최종 운명인 열반에 이른다는 불교 사상을 묘사하고 있다. 열반은 중앙에 있는 윗방으로 상징되어 있다. 뚜렷한 출입구가 없다. 그러나 사방으로 계단식 ‘피라미드’의 윗방에 이르는 계단과 통용문이 있다.

진화론은 불교 철학의 일부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이 그 기원을 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돌이 모래가 되었고 모래는 식물이 되었고 식물은 곤충으로 변하였고, 곤충은 야수로 변하였고, 야수는 가축으로 변하였고, 가축은 인간으로 변하였다고 불교인들은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과 같은 연쇄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 하면 불교인들은 환생을 통하여 진화가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인들은 ‘구담 불타’ 자신이 인간이 되기 전에 한 때는 토끼였다가 거북이 된 시절이 있었고, 그 후에 원숭이가 되었다고 믿는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그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으며, 그 후에 영이 되었고, 마침내 열반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불교 사상에 따른 생명의 이러한 변천 단계가 ‘보로부두르’ 기념물의 전체에 걸쳐서 예술적인 조각물과 조상(彫像)을 통하여 묘사되었다. 예를 들면 불교인들이 믿는 불타의 인간 이전의 생애가 토끼, 혹은 파선된 배의 선원들을 안전하게 해변으로 귀환시켜 생명을 구출하는 선한 거북으로 묘사되었다. 이처럼 조각품들이 인간 진화의 불교 철학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노력

인생은 고통으로 충만해 있다는 불교 사상이 처음 다섯 개의 층층대 위에 있는 잘 보존된 수백개의 부조(浮彫)로 설명되었다.

아명이 ‘구담 싯달타’인 불타(깨달은 자라는 뜻)는 기원전 563년-483년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돌연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을 느끼고 인간의 고통을 제거해 줄 지혜를 찾아 가출하였다. 그것은 매우 오래 전 일이며, 그의 가르침은 ‘아시아’ 전역에 파급되었다. 그러나 잠간 생각하여 보자. 그가 이룩한 일이 무엇인가?

‘구담’의 의도는 좋았지만 그는 마침내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였는가? 그는 병과 병의 원인, 노쇠 현상, 죽음과 죽음의 원인을 제거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구담’이 성도한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병들고, 늙고, 죽는가? 당신은 “물론 나도 역시 가끔 아프고, 사람들이 늙고, 죽는 것을 보아왔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타는 인간을 진정으로 고통에서 해방시켰는가?

보리수 그늘 밀에서 7주를 보낸 후에 그는 어느 날 밤에 자비와, 모든 욕심의 포기가 열반에 이르는 관건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의 이론은, 사람이 만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맛보고, 생각하는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자유로우며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생노병사의 고통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열반이라는 것에 이른 것이다. 열반은 어느 곳에 있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고생의 종말인 상태라고 한다.

당신은 당연히, 주위 사물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생활이 어떻게 가능한가 의문시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의 친구가 아주 무시무시한 일을 당하거나 참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을 때 당신은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주 뜨거운 것에 손을 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동적으로 손을 그 물건에서 치우지 않는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이다.

기억이 없는 “환생”

불교 철학의 다음 단계가 그 다음 네개의 층층대에 표시되어 있다. ‘보로부두르’의 이 부분은 아랫 부분처럼 정방형으로 생기지 않고 둥글며 일흔 두개의 종처럼 생긴, 구멍뚫린 석실로 덮여있다. 각 방에 불상이 있다. 아무런 장식품이 없는 이들 불상들은 인간 생활보다 수준이 높은 영적 생활을 암시한다고 불교인들은 생각한다. 불타의 기본 자세와 각 불상의 자세가 같지만 여러 가지 다른 손가짐은 더 높은 덕행으로의 진보를 암시한다고 불교인들은 믿고 있다.

인간이 인간의 짧은 생애에서 생활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 어떤 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 감각도 느끼지 않고, 보지도, 듣지도, 냄새 맡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으므로 ‘구담’은 환생이라는 ‘힌두’ 신앙 즉 인간이 사후에 더 고등한 형태로 진화한다는 신앙을 이어 받았다.

이 개념에 의하면 사람은 사후에 그의 진정한 영적 개성이 즉시 다른 어떤 곳에서 신생아가 되고, 이제 그는 인간에 이어서 무의식의 생활에 이르기 위하여 계속 발전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전생에서 선한 생활을 하였다면, 그 새로운 생활은 진보하게 될 것이다. 즉 그는 더 부유한 부모를 갖게 될 것이고 용모가 더 좋고 더 나은 성품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그가 전생에서 나쁜 생활을 하였다면 그는 불우한 가문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며, 더 용모가 추해질 것이며, 만일 아주 고약한 사람이었다면 가축으로 다시 태어나 퇴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전생에서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다면 환생의 유익이 무엇이며 경험의 유익이 무엇이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전생에서 배운 교훈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으면 인격의 향상이나 더 높은 소원을 추구하는 노력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삶을 떠날 것인가, 즐길 것인가?

네개의 층층대 위에 있는 일흔 두개의 불상을 방문하는 동안 불교 순례자들은 인간 생활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각 불상은 손가짐으로써 어떻게 삶을 떠날 것인지, 삶에 무감각해지는 방법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을 떠난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행복에 참여할 수 있는지, 당신은 의문시할 것이다. 인생을 즐기려면 그 반대 즉 참여하는 것, 감각을 사용하고 두뇌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타’는 진실로 생활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가? 그와는 반대로 그의 철학은 생활을 두려워할 것을 암시하였는가? 삶에서 도피하려고 하고, 삶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은 자신이나 남을 행복하게 만드는 성공적인 방법이 아님이 확실하다. 오히려 ‘구담’의 철학은 삶을 제거하는 길, 삶의 존재를 종결시키는 길을 제시하면서도 자신과 남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숭고한 일인 것처럼 믿게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사후에 불이 타는 지옥에서 고초를 당할까봐 ‘힌두’교인들은 항상 두려워하였다. 불교에서는 독자적인 사색에 집중함으로써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려고 한다. 지옥이 공포의 장소가 되려면 감각을 사용하는 것이 요구될 것이므로 불타는 감각이 마비된다면 지옥이 무력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아의 경지에 이르면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즐거운 것도, 불쾌한 것도,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보로부두르’의 열번째이자 마지막인 층대는 거대한 종모양의 건축물로 되어 있다. 이 건축물 안에 두개의 격실이 있는 빈방이 있다. 순례자가 이러한 방에 이르면, 그는 완전한 침묵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이제 상징적으로 열반 즉 최고 형태의 해탈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아직도 존재하지만 그는 세상에서 탈피하였다. 어떠한 물질적인 것도 어떠한 영적인 것도 더 이상 그와 관계가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끝났으며 그 후에 아무 것도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더 좋은 해방의 길

약 6,000년 전에 인간이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병들고 늙고 죽는 고통을 겪어온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인간이 이러한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주 자신에게 고통이 마침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 문의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땅에서 순종하는 인류의 고통을 종결시켜 주실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순종하는 인류에게 열반이 필요 없다. 그들은 풍요하고 행복한 삶을 즐길 것이다. 식물도 좋고, 지구도 좋고, 동물도 좋다. 좋은 것을 사랑하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성서는 이렇게 약속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계시 21:4, 새번역.

‘보로부두르’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보로부두르’를 설계한 철학도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리고 ‘보로부두르’는 ‘인도네시아’인의 예술과 기교의 대표적인 표본이긴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해방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인류를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을 간단한 말로 알려 준다. 그리고 모든 인종과 피부색과 언어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병들고 늙고 죽는 일로부터 해방시키실 때가 매우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힘을 얻을 수 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