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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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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가?
  • 깨어라!—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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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4
깨74 5/22 8-11면

불교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인가?

불교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며, 아직도 불교 신도 대부분은 ‘아시아’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세계 다른 곳에서도 높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가 깨달음에 이르는 즉 성각(成覺)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불교는 ‘실달다구담(悉達多瞿曇)’ 개인과 그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는 “불타”(각자(覺者)라는 뜻)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실달다’는 기원전 6세기에 인도의 한 왕가에서 태어났다.

‘실달다’는 아직 어렸을 때에, 인간 누구에게나 병과 고통, 늙는 것, 죽음(病苦老死)이 닥친다는 사실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는 왕궁을 버리고 진리를 찾는 방랑자가 되었다.

6년 동안 ‘구담’은, 극도의 금욕 생활을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여러 스승들과 철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지만 인생이 왜 이다지도 고통으로 가득찼는가에 대해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였는가?

‘구담’은 ‘힌두’인으로 성장하였으며, ‘요가’를 익혔는 데, 그것에는 정신 통일로 수련을 쌓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는 명상을 통하여 진리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보리수라 불리우는 거대한 무화과 나무 아래 좌정하였다. 여기서 그는 성각(成覺)하였다고 하며, 그래서 그가 불타(佛陀)가 되었다고 한다.

무엇에 관한 “깨달음”인가?

여러 세기 동안 그렇게도 많은 추종자들의 마음을 이끌었던 점 곧, 불타가 깨달았다는 점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하여 기원전 6세기의 인도 사람들의 배경을 고찰해 보자.

불교 학자인 ‘티. 더불류. 라이스 데이빗’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 나라는 정치적으로 조그마한 여러 후국(候國)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옹졸한 폭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그 폭군의 관심사는 그 사회의 관심사와 일치하지 않은 예가 많았다. ··· 영혼의 윤회설에 대한 편리한 신앙은 불우한 사람들을 안도시켰으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재난은 전생에서 지은 자신들의 행위의 자연스런 결과라 하고, 그러므로 현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세의 선행으로써 미래에는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하였다. (그들은) 내생(來生)에서 더 좋은 운명을 받기를 바라보았다.”

불타 자신도 사후에 영혼이 윤회한다는 그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윤회 사상에 기초를 둔 복잡한 철학을 발전시켰다. 일반적으로 불교도들은 다섯 가지 다른 상태로 재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1) 지옥(지옥에는 팔열지옥(八熱地獄), 팔한지옥(八寒地獄) 및 기타 소지옥이 있음); (2) 축생(畜生); (3) “아귀(餓鬼)”(작은 입에 큰 배를 가지고 있어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귀신); (4) 인간; (5) 천상의 신. 물론 어떤 종단은 이러한 여러 상태를 얼마간 달리 열거할 것이다.

그리하여 불타는 일체 만상은 이러한 순환을 부단히 계속하여 하나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끊임없이 변한다고 믿었다. 그는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불타는 자신의 인생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늙는 것도 괴로움이다;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고, 아프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불타의 깨달음은 끝없는 재생의 순환으로부터 어떻게 탈피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사제(四諦)”를 통해서라고 한다. 사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범부(凡夫)의 생존은 고(苦)이다; (2) 고뇌는 갈애(渴愛) 곧 욕심에서 기인한다; (3) 갈애(渴愛)를 그치면 고뇌도 끝난다; (4) 고뇌에서 해방되는 길은 네 가지 도덕계율—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노력하고 (正精進), 바르게 행하고(正業), 바르게 일하는 것(正命)—과, 네가지 정신적 계율—바르게 인식하고(正見), 바른 소망을 갖고(正思), 바르게 정신을 통일하고(正念), 바르게 생각하는 것(正定)—으로 이루어진 팔성도(八聖道)를 따르는 것이다.

불타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을 재생의 연쇄에 예속시키는 것은 갈애 곧 욕심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인간은 감각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없애야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생에 대한 온갖 애착을 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명상이라고 그는 보았다.

열반(涅槃)에 이르는 길

그가 주창한 명상은 한개의 대상, 신체의 어느 한 부분 혹은 어떤 문귀나 문제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면, 모든 사념과 감정과 망상이 사라지고 정신이 공허하게 된다. 그러한 명상을 통하여, 공중 부양(空中浮楊), 자신의 형상을 먼 곳에 투영시키는 능력, 및 정신 감응 등의 “초인적 성품”이나 능력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명상에 잠긴 사람은 고락(苦樂)에 무관하고, 더 이상 생에 대한 욕심이나 그와 관련된 아무런 쾌락에도 무관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재생될 필요가 없게 된다고 한다. 그는 열반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월터 이. 클라크’라는 ‘샌스크리트’어(범어) 교수는 열반이란, “인간의 지식이나 언어로서는 묘사할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상태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인식 세계 내의 모든 사물과는 현격히 다른” 것이다. 당신에게 이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들리는가? 생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나 욕망이 없는 그러한 상태가 당신이 인생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불교는 인간의 영적 필요를 만족시키는가?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숭배하려는 선천적 본능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는 인간의 영적 필요를 만족시켜 주는가? 불교는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생명이 어떻게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왜 악이 존재하며, 그것이 끝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만족한 해답을 줄 수 있는가?

우주의 기원에 관하여 불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상의 기원은 이해할 수 없고, 무지때문에 좌절되고 욕심 때문에 올무에 빠지는 중생의 시작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불경에 의하면, 우주는 쇠멸되어버린 이전의 우주의 파편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한다. 때가 되면 현존하는 것도 해체될 것이고, 그로부터 또 다른 것이 일어날 것으로 불교도들은 기대한다.

선종(禪宗)의 원로 ‘다이세쯔 티, 스즈끼’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 하나님도 없고, 창조주도 없고, 만물의 시작도 없고, ‘말씀’도 없고, ‘로고스’도 없고, ‘무(無)’도 없다. 서양인들은 ‘그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것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면 동양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이 옳다.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 한 당신들은 불합리라는 궁지 혹은 무저갱에 빠지는 것을 피치 못할 것이다.’”(고딕체는 우리가 바꾼 것)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사람이 자신의 사고력을 사용한다면, 분명히 “터무니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러한 것을 믿기를 원하겠는가? 당신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생각은 오직 “불합리한 궁지와 무저갱”으로 빠지게 만드는가? 당신이 생각하려 하지 않을 때에 인생의 문제를 더욱 성공적으로 극복하게 되는가? 창조주가 없다고 하고, 증명할 수 없는 진화론을 믿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인가? 그러한 철학은 결코 당신의 영적 필요를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이다. 고대 불타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못하였다.

‘앨버트 에스. 게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념적 대상을 사랑하고 숭상하려는 인간의 열망은 매우 강하다. ··· 그러한 욕구는 (불타가 죽은 후) 그를 신격화함으로써 충족되었다; ···그와 함께 중요하고 그들에게 잘 알려진 ‘힌두’ 신들이 재도입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들은 언제나 속성과 능력이 불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신론(理神論) 체계가 사실상 다신론이 되었다.”

통용 기원 초에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소박하던 불당들이 화려한 사찰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찰 중에는 ‘힌두’의 신들인 ‘비쉬누’, ‘시바’, ‘가네샤’의 신상을 갖춘 곳도 있었다. 불타가 제자들에게 신에 대해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생겼던 공백은 불타 자신의 신격화와 타종교의 신들 및 종교적 의식을 도입함으로써 메꿔졌다.

일상 생활에 대한 지침은 어떠한가? 불교는 얼마간의 도덕 계율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살인, 도덕질, 간음, 거짓말, 술취함을 금하는 “5계”가 있다. 그러나 도덕 계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서 믿을 만한 지침을 필요로 한다. 많은 불교도들은 이러한 지침을 구하기 위하여 어디로 향하는가? ‘엘. 에이. 워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하여, 그리고 출생, 결혼, 사망과 같은 생애 중 중대한 경우나 병이 들었을 때, 점을 친다. ··· [보수적인] ‘남방’ 불교라고 할 수 있는 ‘버마’인들은 천궁도를 보거나 무당에 의존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불교도들도 문제에 직면하면 영적 지침을 필요로 한다. 불타의 철학이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점에 의존하고 있다.

장래 소망에 관하여는 어떠한가?

불교는 미래에 대하여 소망을 제시하는가? 불교도들은 우주의 진화와 쇠멸의 기간을 네가지 “영겁(永劫)”의 기간으로 구분한다. 불타는 이들 각 기간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철산(鐵山)이 백년에 한번씩 무명 옷자락에 스친다고 가정해 보라. 영겁의 세월이 다하기 전에 그 산은 멸할 것이다.” 이 네가지 “영겁”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이 전체 순환이 또다시 시작된다. 그러므로 불교 신앙에 의하면, 악과 고뇌는 항상 존재하였으며, 순환하는 세계의 일부로서 앞으로도 영속한다는 것이다.

열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떠한가? 이 역시 의심스럽다. 왜 그러한가? 왜냐 하면, 열반이란 인간의 재생의 순환의 종착에 달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불교 승려들은 재생의 순환으로 다시 미끌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분신(焚身)까지도 하였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재생되지 않게 되었다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불타는 이점을 “가르치기 곤란한 문제” 중 하나로 여겼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자들이 사후에 존재한다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성자들이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성자들이 사후에 존재하기도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고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성자들이 사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간에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불타는 심지어 불교 “성자”의 미래 소망에 관하여도 아무런 깨우침을 주지 않았으니 수없이 재생을 거듭해야 하는 평신도들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하여는 말할 것도 없다.

불타의 가르침의 기원

재생에 대한 신앙이나 현생의 행위가 내세에 영향을 준다는 불교 신앙은 ‘힌두’교로부터 유래하였다. 명상과 열반에 대한 관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힌두’ 신앙은 어디로부터 시작하였는가?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1952년판)은, “[인도의] 종교는 오로지 인도적인 것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고 고대 세계에 만연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고대 세계에 만연한 신앙”이 어떻게 인도까지 들어 오게 되었는가? ‘월리암 에이치. 맥네일’은 「서양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원전 2천년대]부터 ‘매소포타미아’와 ‘인더스’ 유역간에 무역 관계가 있었으므로 ··· ‘수메리아’인들이 ‘인더스’ 문명의 초반기에 기여했으리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 ‘수메르’와의 해상 접촉으로 인해 ‘인더스’인들은 기성의 체계와 사상을 받아 들여 그 지역의 특색있는 문화 전통에 융화하였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성서는 기원전 2천년대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된 후, 문명이 퍼져나간 근거지로서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바벨’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창세 11:1-9.

물론, 재생의 가르침은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에서 연유한다. 흥미롭게도 성서는 그 가르침의 기원에 관하여 빛을 밝혀 준다.

성서에서는 “영혼”이라는 말이 호흡을 하는 모든 동물 즉 곤충, 새, 물고기, 짐승 및 인간을 가리킨다. 성서가 알려 주는 바로는, 영혼이란 불멸성이거나 몸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 동물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은 그가 창조될 때, “산 영혼이 되었다”고 했지, 영혼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다.—고린도 전 15:45; 창세 1:20-28; 2:7, 신세.

인간의 기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창세기에 기술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다. 만일 먹으면, ‘아담’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창세 2:15-17) 이 말은 인간 영혼이 죽을 수 있다는 뜻이었는가? 그렇다, 예언자 ‘에스겔’은 후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설명하였다. (에스겔 18:4) 성서에 의하면, 사람의 몸이 죽을 때 아무런 영적인 것도 살아남지 않는다.—시 146:4; 전도 9:5, 10, 참조.

하지만 성서가 ‘사단’ 마귀라고 밝혀주는, 하나님의 적대자는 하나님과는 반대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다. (창세 3:1-5) 그러나 ‘아담’은 죽었다. (창세 5:5) 그리하여 “산 영혼”이 죽었으며, 그후 ‘아담’으로부터 나온 모든 인간 영혼도 오늘날까지 죽어 왔다.

불교식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단’과 그의 악귀들이 ‘바벨론’으로부터 유래된 사후 생명에 대한 거짓말을 주입시키기가 특히 쉽다. 그러한 사람들은 머리 속에서 의식이 있는 모든 생각을 제거함으로써, 악귀의 영향을 받기 쉽게 만든다. 그러므로, 때때로 그러한 자들은 정신적으로 혹은 신체적으로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악귀의 영향을 받기 좋게 만듦으로써 그들 자신에게 실제로 유익이 있는가? (마태 12:43-45에서 설명하는 원칙을 직접 살펴보라.)

거짓 위에 세워져 있고, 악한 영의 영향을 받도록 조장하는 제도로부터는 아무런 참다운 깨달음도 올 수 없다. 성서는 죽은 자에 대한 참다운 소망이 윤회(輪廻)가 아니라 부활(復活)임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요한 5:28, 29) 그렇다, 수십억의 사람들이 의로운 상태하에서, 바로 이 땅에서 인간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헛된 약속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적어도 세 사람을 생명으로 일으키심으로써 이것이 참됨을 보이셨다.—누가 7:11-17; 8:40-56; 요한 11:1-40.

성서는 또한 지구와 인간의 기원, 악이 시작된 경위, 하나님께서 이 세대 안에 인간에 대한 모든 억압을 종결시키실 방법 등에 관한 진리를 알려 주고 있다. 당신은 이러한 소망에 대하여 좀 더 잘 알고 싶지 않은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당신이 알아보도록 기꺼이 도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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