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시’의 생애
‘캐나다’ 주재 「깨어라!」 통신원 취재담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실 때에 너는 잠잠하여라. 눈으로는 보더라도 네 어리석은 혀는 놀리지 말라.” 내가 어렸을 적 특히 아름다운 일출 광경에 감동하여 보고 서 있을 때에 아주머니께선 이런 말씀을 자주 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과 감탄스런 그의 창조물에 대한 전형적인 ‘집시’의 사고 방식이었다.
우리는 창조주를 믿었으며, 단순하고 유치한 방법이지만 그분을 성실하게 존경하였다. 우리의 인생 철학은 우리의 일용품을 얻는 것이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숲속, 하천, 호수 및 바다에 사는 귀여운 생물들을 학대할 생각은 전혀 안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우리는 그 사실을 기쁨으로 인정하였다.
또 한 가지 우리의 철학이자 생활 방식은 “내일 일은 언제나 내일이 해결한다.”라는 옛 속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낙천주의적이었고 일반적으로 평화스러웠다. 우리는 현재의 필요만을 충당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것만 충족되면 편히 쉬면서 우리 가족과 그리고 밀접히 결합된 우리 동족 사회와 함께 생을 즐겼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세상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세상에 관여하지 않았다. 정치적 소란은 우리의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집시’ 소년으로서의 생활
내가 태어난 영국의 ‘이스트 앵글리아’에서부터 나는 ‘집시’ 집단을 따라 아주머니와 함께 영국 전역을 돌아 다녔다. 연장자를 참으로 존경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언제나 연상의 남자를 “아저씨”, 나이 많은 여자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나이가 든 다음 나는, 아주머니의 권위를 불경하였을 때마다 언제나 징계를 받은 데 대해 항상 감사하였다.
‘집시’ 아이들은 도저히 멋대로 놀아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나도 그러하였다. 나의 아주머니는 나를 사랑하였으며 바쁘게 해 주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데리고 양갓냉이, 버섯, 딸기 등을 따다가 이튿날 집집을 다니면서 팔든지 근처의 시장에 가서 팔곤 하였다.
생계를 위한 또 한 가지 방법으로 아주머니와 나는 농장에 가서 거름을 샀다. 그것을 ‘바케츠’에 담아 꽃이나 채소를 기르는 사람들을 집집으로 찾아 다니면서 팔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 아주머니와 우리 ‘캠프’의 다른 사람들은 사소한 도둑질을 하였다. 따라서 나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눈속임 장사를 하는 등 부정직을 배웠다. 어렸을 때에 나는 부모가 집시가 아닌 친구 하나를 사귀었다. 그 애의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죽게 되어 있었고 가족은 대단히 가난하여 먹을 양식이 거의 없었다. 그 애의 어머니에게 힘을 나게 할 만한 영양식을 주고 싶어서 나는 그 친구를 데리고 근처의 닭집으로 가서 살진 닭 한마리를 도둑질하였다. 나는 그것을 친구에게 주어 집에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도둑 물건인 것을 알고 나선 아들을 시켜 그것을 내게 돌려 보냈다.
어릴 적의 종교 교육과 종교적 견해
하나님께 대한 아주머니의 단순한 신앙은 내 머리에 항상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하루 일을 마치면 아주머니는 나와 함께 나란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신 데 대해 감사 드렸다. 우리가 남의 토끼나 버섯, 양갓냉이, 딸기 등을 도둑질하고도 그렇게 하였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집시’들은 대부분, 감리교, 성공회, ‘가톨릭’교 등 어떤 종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어느 기성 종교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여러 종파의 교직자들에 대해 그들의 위선 때문에 가증히 여기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나의 종교적 사고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분 보기엔 어떤 사제들은 위선자 “아무게”였으며, 돈을 탐하는 교직자들을 “거위 배설물 만큼 더러운” 것으로 보았으며, 또 거침없이 그런 말을 함부로 하였다.
아주머니는 또한 내 어린 정신에 폭력에 대한 반감을 강력히 심어 주었다. 어느날 아주머니가 내게 준 책망을 나는 도저히 잊지 못한다. 우리에게서 물건을 자주 사 주던 어느 부인이 나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에 군인들의 제복에 매력을 느낀 나는 군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아주머니는 그런 말을 다시는 듣기 싫다고 하면서, 만일 내가 군복을 입고 나타나면 절대 상면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아주머니는, 어느 인간도 인간이 일으킨 전쟁에서 피를 흘릴 권리가 없다는 사상을 내게 심어 주었다.
자란 후엔 내 자신이 교직자들의 위선을 목격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자 그들이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 뚜렷이 보였다. 한 사람이 나의 아주머니에게 찾아와서 나를 입대시키라고 권유하였을 때에 아주머니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내가 이른바 종교인들과 접촉을 하면 할수록 세상 종교의 위선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다. 청년들이 토요일 저녁엔 술에 취하여 허랑 방탕하고서도 일요일 오전에는 미사에 참예하였다. 그들이 죄를 용서받고 다음 일요일 미사 전날 또 동일한 부도덕을 자행하는 것은 가증스러웠다.
색다른 종교
1942년에 나는 결혼을 하였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말하기를 어느 여인 둘이 우리 집을 찾아 와서 성서와 밝은 미래에 대한 성서의 약속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종교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면 무엇이나 비웃던 터라 그 문제를 이야기할 의향이 생기지 않았다. 후에 북부 ‘스코틀랜드’에서 한 남자가 ‘캠프’를 찾아와 내가 없을 때 내 아내에게 축음기를 들려 주었다. 내 아내는 그 남자가 용감하게 세상 종교를 올무와 속임수라고 폭로하는 축음기를 틀어 주는 데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내는 그 남자가 떠나기 전에 식사를 대접하였다.
후에 우리가 다시 영국 ‘뉴캐슬’ 근처에 오게 되었을 때 아내는 그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는 것 같으니 그들을 찾아 보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우리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는 생활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이사한 것이다.
자녀를 기르다
그 동안 아이들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고물을 사고 팔고하는 사업에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고물 쇠붙이를 장사에게 팔아 넘길 만큼 충분히 수집하면 나는 내 아들에게도 한 무더기를 주어 혼자서 팔도록 하였다. 그러나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감독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기의 생활을 꾸려 나가도록 훈련을 받았다.
아내는 딸에게 요리, 빨래, 수선, 아기 보기 등 ‘집시’ 특유의 훈련을 시켜, 후에 ‘집시’ 남편에게 좋은 아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아내는 또한 딸에게 옷감 행상도 가르쳤다. 창고에 가서 물건을 살 때면 딸도 데리고 가서 이 거래가 어떤 식으로 행해지는가를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어느 아저씨는 우리 딸에게 나무로 꽃을 조각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하여 어머니를 따라 집집을 다니면서 주인이 옷감을 사지 않으면 자기가 만든 “꽃”을 주인에게 팔아 자기 용돈을 마련하곤 하였다.
북 ‘아메리카’에서의 생활
북 ‘아메리카’에 사는 동안 나는 ‘캐나다’, 미국, ‘멕시코’ 전역을 다른 ‘집시’들과 함께 돌아 다녔다. 우리는 속임수로 돈을 벌려고 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했던 일은 일반 ‘집시’들의 공통된 행위는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집시’들은 그처럼 철저히 사기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밀수입해온 동양의 양탄자를 팔고 다닌다고 하였다. 어느 부락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그 지방 사제를 직접 찾아 간다! 나는 그 사람에게 자기 친구로서 역시 양탄자에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면서 소개해 주면 그에겐 더욱 싼 값으로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보통 사제들은 그 지방의 의사나 장의사들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가 부정 물품이라고 말을 해 주어도 “밀수” 양탄자를 사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사제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 때문에 소위 그리스도교와 관계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더욱 멀어졌다.
새로운 생애가 열리다
몇년이 지난 다음 ‘온타리오’의 ‘사르니아’ 근처에 ‘캠프’를 쳤다. 내가 집에 있을 때 젊은 여자 한분이 우리집을 찾아 왔다. 그의 열정적인 말씨와 그의 내용은 내 관심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의로운 원칙에 따라 평화롭고 일치하게 함께 살게 될 새로운 사물의 제도란 거의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여자는 떠나면서 내게 더 이야기를 해줄 남자 두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그 사람이 오면 내가 없더라도 기다리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그 여자는 약속을 지켰으며, 남자들이 우리를 방문하였을 때에 나는 집에 있었다. 우리의 토론은 약 다섯시간 계속되었다. 그들이 떠날 때 내 아내와 나는 우리가 드디어 “진리”를 발견하였음을 확신하였다.
그 최초의 기다란 방문이 있은 다음 우리는 성서 원칙에 따라 살아갈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향하여, ‘우리 천막 마루 밑에 묻어 놓은 물건들을 어떻게 할까?’ 하고 말하였다. “아마 강물에 던져 버려야겠지요.” 하고 아내는 제안하였다. 내 생각은 도둑질한 물건을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2‘톤’이나 되는 납덩이를 되돌려 주는 데는 위험성과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도움이 틀림없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두 증인이 정기적으로 방문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늘어갔다. 얼마 안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관련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생활에서 다른 커다란 변화가 와야만 하였다. 그 중 한가지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와서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배운 내용을 흠잡기 시작하였으며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으로 증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성서를 통한 친절한 대답은 도망갈 길을 주지 않았다. 변화를 해야 할 쪽은 성서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우리의 성서 토론에서 우리 아이들도 제외되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부터 가족 연구였으며, 1954년에 아내와 내가 여호와께 헌신을 상징할 때까지 우리는 함께 진행하였다. 아이들은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섬기기로 스스로 결정을 한 다음 1960년에 침례를 받았다.
후에, 나의 아들은 ‘폴리나’라고 하는 ‘멕시코’ 출신 ‘집시’ 소녀와 결혼하였다. 그는 원래 ‘아르헨티나’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웠었다. (「깨어라!」 영문, 1962년 12월 8일호 23면) 며느리는 아들을 따라 때때로 전 시간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우리 딸은 약 5년 전부터 하나님의 왕국을 전 시간 전파하고 있다. 그 애는 지금 남부 ‘플로리다’에서 ‘큐바’계 ‘스페인’어 회중과 함께 봉사하고 있다.
시험의 때
여러 해 전에 우리 가정에 시험이 닥쳤다. 내가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심히 실망한 경험을 한 것이다. 그 형제들도 나와 똑같이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어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창조주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평할 여지가 없는데도 이 때문에 그분의 봉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약 4년 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떠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운 점들을 생각하였으며, 그러한 점들을 자주 이야기하였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변화시켰음인지 우리는 그전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조직과 관계를 끊고 ‘집시’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타일러도 우리의 양심은 창조주 여호와께 대한 책임이 있음과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에게 진리를 공급해 주신 것을 보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다.
하나님의 진리에 고착하지 않은 것이 우리에게 괴로웠다. 결국 우리는 참된 자유의 길은 하나뿐임을 인식하고, 바로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보이는 조직의 안전한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 자유임을 인식하였다. 여기서만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 우리를 필요로 하는 참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을 가질 수 있었다. ‘사스캇치완’의 ‘멜빌’에 있는 조그마한 회중에서 우리는 다시 왕국회관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여호와의 소중한 봉사를 다시 시작할 때에 그곳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베풀어 준 사랑의 친절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 그리고 여호와의 선하심의 덕택으로,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우리의 진보를 나타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집시’ 생활보다 우월한 생활
우리가 ‘집시’의 “자유”에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그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선한 원칙에 따라 생활하지만 현재 상당수가 서양 세계의 물질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이제는 단순한 것에 만족치 않고 번득이는 자동차와 ‘트레일러’를 갖고 싶어하며, 그러한 것들을 사기 위해 속이기도 하고 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그 결과 그 옛날 걱정없던 ‘집시’ 정신은 사라지고 스스로 해를 당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웃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성실히 노력하고 있다.—잠언 10:22.
위대한 진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서를 주신 것은 대단히 큰 은혜이다. 우리는 현재 그것을 그리스도교국 교직자들처럼 “사람의 말로” 인정하지 않고 사실이 그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데살로니가 전 2:13.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집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그들을 참으로 자유케 해 줄 진리로 돌아와서 더 우월한 생활 방식을 즐기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요한 8:32) 그리고 또한 나는 언젠가 나의 아주머니께서 하나님의 의로운 새 질서에서 부활되어 다시 만날 것을 희망한다. 그곳 끝없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그분의 창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주머니의 인식은 매번 해가 새로이 떠오를 때마다 계속 증가할 것임을 확신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