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새로운 집—독일
태양은 아직 솟아오르지 않았다. 새벽 이슬이 초원과 들판에서 살아지기도 전, 나는 나의 집 나의 고향—‘그리스’ 중부의 한 작은 마을—을 떠났다. 부모님들은 기차역까지 나를 배웅하였다. 우리는 서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입을 뗄 수 없었다. 곧 이별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우리의 사고 기능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객원 노동자들”의 독일로 향하는 여행의 시발지인 철도역에 도착하였을 때, 우리는 흐르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들과 고별의 목메인 소리 밖에는 보고 들을 수가 없었다. 울적한 기분에 잠겨 있는 가운데, 달려오는 기차를 본 우리들에게 그것은 마치 얼마의 기간 동안—혹은, 어떤 경우에는, 영원히—밀접한 가족의 띠를 끊어 놓는 쇠로 만든 괴물처럼 보였다.
나는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 나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자기의 품에 나를 끼어안으시던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나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흐느끼면서, 어머니는 내가 객지에 가서 성공할 것을 기원하셨다. 지금까지도 나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내 볼을 쓰다듬고 결코 자기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주시던 그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곧 기차는 출발하였고 우리는 모두 손수건을 흔들어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이러한 이별의 순간이 지난 후, 나의 생각은 분주하게 나의 장래를 맴돌고 있었다. 독일에서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나는 ‘뮨헨’에 있는 큰 기계 공장과 취업 계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 살게 될 것인가? 어떻게 나는 새로운 동료 노무자들과 서로 이해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이틀 후 기차는 ‘뮨헨 하우프트반호프’(본역)으로 진입하였다. 수천명이 기차에서 몰려나와 단조로운 역사로 들어가 그곳에서 새로운 배치를 기다렸다.
장거리 여행에 지친 나는 단지 무의식적으로 떠들석한 목소리들을 들어넘겼다. 내 귀에 울려오는 생소한 소리들은 내게 고향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얼마후, 나도 한 집단에 배속되어 숙소로 인도되었다. 내가 머므르게 될 곳을 보았을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금 내게 덮쳐왔다. 내가 부한 생활을 하지는 않았었지만 나는 이제 나의 부모님의 집을 감싸고 있던 깨끗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진가를 한층 더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곳에서 나는 ‘바라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통역자가 내게 내 침대의 위치와 내 물건들을 넣어둘 작은 옷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와 함께 같은 방에 동숙할 동료 고향사람들이 또 다섯명이 있었다.
독일의 외국인 노동력
내가 독일에 도착한 것은 이 나라가 ‘가스트 아르바이터르’, 문자적인 뜻으로, “객원(客員) 노동자”의 모집을 시작한 직후인 1962년이었다. 비록 이것은 잠정적인 조치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외국인 노동자의 수입은 계속 극적인 증가를 보았다. 단지 1969년 한해 동안 독일의 산업은 약 400,000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수입하였다. 그런데도 노동 관계 사무소들의 보고를 종합한 바에 의하면, 그래도 700,000명이 더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대부분이 남부 ‘유럽’ 제국으로부터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객원 노동자들”의 물결이 서부 독일로 계속 밀려 들어왔다. 외국인 노동력은 1969년에 150만명에 이르렀으나, 1972년 1월에 이르러서는 독일은 이미 210만명이 족히 넘는 수를 삼키었던 것이다. 이들 중, 384,303명은 ‘이탈리아’인, 264,427명은 ‘희랍’인, 175,998명은 ‘스페인’인, 449,676명은 ‘터어키’인, 57,180명은 ‘포르투갈’인 그리고 434,893명은 ‘유고슬라비아’인이었다. 현재 서부 독일의 매 10명의 노동자 중 한 사람은 외국인이다.
처음에, 대부분의 수입된 노동자들은 비교적 높은 독일의 임금으로 얼마간 돈을 적립하기에 족할만큼만 독일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최근 많은 사람들이 독일에서 자기들의 가정을 꾸리려고 하고 있다. ‘스투트가르트’에는 약 80,000명의 외국인 체류자가 있는데, 그들 중 약 70‘퍼센트’는 이미 적어도 5년 동안 서부 독일에 거주하였다.
독일은 “객원 노동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투트가르트’에서 시 당국의 봉급자 명부에 등제된 4,000이상의 고용인들 중의 거의 40‘퍼센트’는 다른 나라 국민들이다. 흔히 외국인들은 가장 원직성(願職性)이 낮은 일을 하도록 고용된다. 그들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 도로를 청소하는 일, 분묘를 파는 일 등을 한다. ‘스투트가르트’의 시 관리 한 사람은 “더러운 일이나, 마음 내키지 않는 일, 혹은 위험한 일을 할 만한 충분한 독일인들을 우리는 더는 찾을 수 없읍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객원 노동자들”은 독일의 산업 인력으로서도 필수불가결이다. ‘스투트가르트’의 굴지의 대공장 중의 한 곳에서는 전체 고용인 중의 75‘퍼센트’가 비독일인이다. 그리고 ‘볼크스바겐’ 자동차의 고향인, 독일 ‘볼프스부르그’에는 자동차의 일관 생산 작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8,000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수입되어 있다.
본국에서는 취업의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 도착한 우리들은 기쁨으로 작업에 임하였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목동들로서 농촌 생활에만 익숙해 있었다. 이제 우리들은 공장에서의 일이나, 건설 작업을 위하여 훈련을 받으며, 새로운 환경에 맞게 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굉장한 변화였다.
어린 시절의 생활과 종교
우리들의 출신지인 남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가족의 유대가 대단히 강하다. 가족은 한 연합체로서 계획하고 행동한다. 심지어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도 가족 성원들은 보통 엄격한 관습과 습관을 지킨다. 이러한 유형의 생활은 자연히 각자의 종교적인 견해에 영향을 준다.
아버지는 일반적으로 모두에 의하여 가족의 머리로 인정을 받는다. 그의 결정은 제반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그의 종교적인 견해를 가족의 성원 모두는 받아들이며, 올바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흔히, “나는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계속 행하렵니다”라는 말을 듣는다.
서부 독일에 새로이 도착한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부모들로부터 이어 받은 종교 외에 다른 종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우리들은 으례이 촌장들이나 사제들을 “학식이 있는” 사람들로서 존경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였었다. 그러므로 우리들 중 대다수는 유전된 가족의 전통을 굳게 지키리라는 확고한 결심을 안고 독일에 왔던 것이다.
귀중한 발견
부모님들로부터 받는 편지들은 나와 내 고향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았다.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소식을 듣기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곤 하였다. 때때로 이러한 편지는 나로 하여금 고독과 슬픔을 잊게 해주었다. 그러나 잠시후 나는 또 다시 고독에 잠기곤 하였다. 비록 나는 자주 나의 동숙자들과 우리들의 문제들을 이야기하곤 하였지만, 모든 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다시 명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 우리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 남자는 나에게 전해 줄 하나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설명하기를 자기는 66통의 대단히 중요한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 편지들은 집에서 온 편지를 읽듯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읽을 만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그 편지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의 책들이라는 것이다.
대화 도중 이 방문자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 의로운 질서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 새질서는 그의 설명에 의하면, 모든 인류를 연합시킬 것이며, 국가적인 장벽이 없어지게 할 것이며, 가족들이 더는 분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각자는 자기 자신의 수고의 열매를 즐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말은 내 심장을 울리었다. 나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하여 더 많은 것들을 배우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나의 종교를 바꾸지는 않을 생각이라고 설명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이 전도인은 자주 와서 성서의 놀라운 진리를 배우도록 나를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나의 동숙자들은 나를 비웃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내가 배우는 것들은 내게 너무나 감격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비평의 말에도 불구하고 성서 연구를 계속하기로 다짐하였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그 곳에서 나와 비슷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이해하며 나를 돕기를 원하는 사람들 중에 있게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나의 성서 연구와 희랍어 집회에의 참석은 내게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노력
내가 생활하던 ‘바라크’에는 나와 비슷한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가 새로 발견한 희망을 이야기해 주어야 할 책임을 느꼈다. 얼마후 나는 물의 침례로서 여호와께 대한 나의 헌신을 상징하였고, 성서 지식에 있어서 발전을 계속하였다.
나는 우리들 “객원 노동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독일의 증인들이 바친 노력에 대하여 대단히 감사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주 많은 수의 독일인들은 외국어, 특히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를 배웠다. 희랍어는 숙달하기 더 어려운 언어이지만 많은 수의 희랍어 서적들이 배부되었는가하면 나와 같은 관심자들은 독일에 희랍어를 말하는 증인들과 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에 따른 결과는 굉장하였다.
곧 독일에는 수백명의,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천명이 넘는 희랍어를 말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게 되었다! 1972년 1월에 이르러서는 1,443명이 되었다! 처음에 희랍어를 사용하는 관심자들은 소규모의 성서 연구 집단으로 조직되었다가, 그 뒤에는 회중들이 형성되었다. 1966년에 독일에서 여러 회중으로 첫 희랍어 순회구가 조직되었다. 이제 이곳에는 그러한 순회구가 둘이 있다.
독일에 있는 다른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1972년 1월에 여러 회중들과 한 순회구로 조직된 ‘이탈리아’어를 말하는 증인들이 803명 있었다. 또한, 415명의 증인들로 이루어진 한개의 ‘스페인’어 순회구가 이미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독일에는 157명의 ‘유고슬라비아’인 증인과 65명의 ‘터어키’인 증인들이 있다. 우리들 “객원 노동자들”에게 감명을 준 것은 우리의 배우는 일에 도움을 주려는 독일인 증인들의 자진적인 정신과 여호와의 증인들간에는 계급의 구별과 인종적인 장벽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나는 독일의 나의 집에 있다. 나의 “가족”도 이곳에 있다. 이러한 나의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참된 추종자가 될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나는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을 얻었다는 것이다. (마가 10:29, 30)—기고.
[20면 도표]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독일의 “객원 노동자”
1968
1970
1972
포르투갈
스페인
희랍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터어키
(단위: 천) 100 200 300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