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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거대한 기억 은행
  • 깨어라!—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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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4 2/22 12-16면

중국의 거대한 기억 은행

많은 사람들은 지면에 인쇄된 역사에는 싫증을 느끼지만, 나는 역사책이 아닙니다. 나는 역사를 실제 그대로 보여 드립니다. 나는 대만 국립 왕궁 박물관입니다.

나의 보물들을 ‘타이뻬이’ 외곽 지대, ‘쉬린’ 근교의 현 위치로 옮겨오는데 3,000여개의 나무 상자가 필요하였읍니다. 이 전시물들은 정기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한 전시실로부터 다른 전시실로 차례로 관람하도록 인도해 드릴 수는 없겠읍니다. 전시물들은 삼개월마다 한번씩 바뀌는데, 가령 당신이 매 전시 기간 동안 방문한다고 하면 내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전부를 보는데는 10년이 걸릴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 이제, 극동의 인간 역사의 태고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합시다. 당신은 저 오래된, 누르스름한 마른 뼈들을 보고있읍니까? 저것들은 복술에 사용되던 점치는 뼈입니다. 저것들은 금이 가서 갈라져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신탁(神託)을 얻는 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뼈에 작은 구멍들을 뚫고 열을 가하여 그것이 갈라질 때를 기다렸읍니다. 그 다음에 각 뼈 위에 물어볼 사항을 새겨 넣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상(商) 즉 은(殷) 왕조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청동 기록

상조(商朝)는 ‘이스라엘’의 ‘사울’ 왕의 시대까지 약 650년간 계속하였읍니다. 그 왕조의 기록은 가장 내구성있는 형태, 즉 청동기(青銅器)에 나타나고 있읍니다. 내가 보여드리는 견본들은 일상 생활 용품이 아니라 의식에 사용되던 것들입니다. 중국인들은 실용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릇은 3개의 다리로도 서도록 만들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오래된 기명들은 네개가 아닌, 세개의 다리 위에 놓여 있읍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그릇들은 여러가지 무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모양으로 만들어졌읍니다.

다른 모든 인간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사람들도 음악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초기 악기들은 여기에 있는 구리로 만든 편종(編鍾)으로서 대표됩니다. 당신은 아마 종들의 크기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들을 기울여 보고 속에 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면 더욱 놀랄 것입니다. 그것들은 정말 악기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왜냐하면 방망이로 두드리면 각 종들은 다양한 음향을 울려주기 때문입니다. 그 음조는 종의 밑으로부터 맨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차차 달라집니다.

청동의 기록은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한 왕조의 하나인 주(周)에까지 계속됩니다. 이 시대에 중국의 용이 나타나며, 이 시대의 청동기에는 판독할 수 있는 기록들이 새겨져 있는데, 어떤 것은 400여 글자가 넘는 것이 있읍니다. 이처럼 나의 역사는 세월의 흐름을 통하여 전수되어 온 실제적인 물체라는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러한 것들 중 많은 것은 역사가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들에 관하여 기록한 역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진(秦) 왕조는 매우 단명하였읍니다. 기원전 3세기에 단지 15년간 계속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조(秦朝)가 후세에 남겨 놓은 것으로 매우 장구한 것—길이가 장장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읍니다. 그 성은 이곳에 있지 않지만, 중국인들의 축성(築城) 기술은 나 자신의 전면이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보면 알 수 있읍니다. 나는 수목이 울창한 산들을 배경으로 하여, 두개의 인공으로 축조된 대지(臺地) 위에 자리잡고 있읍니다. 이러한 산들 속 깊숙히 ‘턴넬’이 뚫려 있는데, 그곳에 전시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값을 헤아릴 수도 없는 물품들이 보존되어 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 계셨을 때 쯤에는 한(漢) 왕조가 세워진지 거의 200년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200여년간 계속되었읍니다. 이 시기도 또한 청동기로서 대표됩니다. 나는 당신의 관심을 청동 항아리 혹은 화분으로 이끌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밧줄로 된 그물로 얽혀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조사해 보면 당신은 그 “밧줄” 자체가 청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악기들이 또 있군요!” 가운데 손잡이가 있는 둥글넙적한 구리 작품이 들어있는 상자를 보면서 당신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벌즈’가 아닙니다. 다시 살펴보십시오. “남비 뚜껑?” 그것도 아닙니다. 그 “남비 뚜껑”들을 뒤집어 보면 오랜 옛날에 거울로서 사용되던 반짝이는 표면이 나타날 것입니다.

도자기 수장품

한조(漢朝) 다음의 200년간에는 3국과 6왕조가 할거(割據)하던 혼란기가 뒤따랐읍니다. 그 다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에 뒤이은 이러저러한 나라들과 수(隋) 왕조를 빨리 지나쳐 7-10세기 경의 당(唐) 왕조에로 내려와 보겠읍니다. 나는 당신에게 우리의 당대(唐代)의 말(馬) 상을 보여드리고 싶읍니다. 이것은 도기(陶器), 즉 오지 제품입니다. 이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표면이 채색되었으나, 지금은 단지 그 갈기의 붉은 빛 속에서 그 광채의 자취가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 형태의 아름다움, 그 예술적 및 물리적 균형의 통일적 감각은 색갈의 퇴색을 보충하고도 남읍니다. 이 동물의 상은 한쪽의 발굽은 높히 치켜든 자랑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비교적 큰 작품으로서, 발굽으로부터 갈기까지는 2‘피트’ 반, 그리고 코 부분부터 꼬리까지는 2‘피트’가 조금 넘습니다.

여섯 왕조가 다음 218년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금은 이 왕조들을 지나쳐서 화려하던 송(宋) 왕조의 시대로 당신을 인도하기로 하겠읍니다. ‘유럽’이 암흑 시대의 횡포에 신음하고 있을 때 송대(宋代)의 예술은 4세기의 중국 문화를 가로질러 화려하고 꽃피우고 있었읍니다. 문학, 미술, 건축 및 가구등은 훗날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표현의 극치에 도달하였읍니다. 나에게는 당신에게 그 시대의 변통자재함을 알려줄 소장물이 많읍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자기(磁器)를 통하여 이 시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송대(宋代)의 자기들은 단색 자기로서, 사용된 광활제의 순수함을 강조해주는 한가지 색갈로 되어 있읍니다. 나에게는 나를 종종 방문하는 서양인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그는 나의 여기(汝器)를 내게 수장된 최대의 보물로 칩니다. 당신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히 여길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읍니다. 첫째 그 독특한 색갈은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요(汝窯)에 의한 독특한 결과로서, 변색 즉 가마(窯) 속에서 색갈의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송대(宋代)의 자기에 있어서 그 제도(制陶)상의 목적을 비취 즉 옥의 특유한 부드러움, 반투명의 찬란한 빛과 색, 및 그 싸늘하고, 매끄러운 “느낌”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읍니다. 중국인들은 비취의 모든 색갈로서 그것을 중히 여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옥을 모방하기를 원하였으며 그 약한 회색빛이 감도는 연한 연두색을 재생하려고 하였읍니다. 그런데 여기(汝器)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상자속에 손을 넣어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세번째의 이유를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매끄럽기 때문에 그것은 비취와 거의 차이가 없읍니다. 전세계를 통털어서 여요 자기가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단지 약 30여개 밖에 없는데, 그중 23개가 이곳에 있읍니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고 지방으로부터 ‘징기스칸’(成吉思汗)의 군대가 물밀듯이 엄습해 내려왔읍니다. 칼과 ‘탈타르’종의 조랑말을 이용하여 그들은 송대(宋代)의 평온함을 깨뜨리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송조(宋朝)가 중국의 막대한 수의 국민에게 남긴 유산은 이러한 외래의 이방인들이 지워 없앨 수는 없었읍니다! 왕조의 계통은 지워졌지만, 중국은 그 정복자를 흡수하였던 것입니다. 때가 되자, ‘징기스칸’의 손자인 ‘구빌라이칸’(忽必然汗)은 중화(中華)의 비단과 상아의 광채를 등에 업고 오늘날 우리들이 원조(元朝)라고 부르는 시대로 군림하였던 것입니다.

원조(元朝)는 명조(明朝)에 그 길을 양보하였으며, 그때는 ‘컬럼버스’가 ‘아메리카’로 항해하던 때입니다. 그러면 이제 명대(明代)의 자기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가보기로 합시다. 당신은 숨이 막히는 듯 감탄을 하는군요! 이것이 실로 놀라움과 즐거움의 조화입니다. 그렇지요? 명자(明瓷)의 찬란한 빛갈은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이 왕조 시대의 전시물 가운데서 당신은 목이 높은 병을 하나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노랑 바탕색에 그려진 초록색의 용 무늬가 있읍니다. 그것은 유약을 칠하지 않은 바탕 위에 무늬를 새긴 다음 그 속에 채색을 하여 만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명대(明代)의 도공(陶工)들은 색갈을 통제하여 굽는 과정에서 그 채색이 “흘러 내리”거나 없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기술을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청조(清朝)가 명을 뒤 이었으며, 청조를 마지막으로 1911년에 중국의 역대 왕조의 문은 닫기고 말았읍니다. 중국은 마침내 왕의 계통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청조(清朝)가 중국에 남긴 업적은 동시대의 명공(名工)들이 만든 작품들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선대(先代)의 왕조들의 유품을 궁성에 모아둔 사실도 들 수 있읍니다. 이것이 나의 소장품의 핵심을 이루고 있읍니다.

상아, 칠기 및 비취

이 시대에도 계속 아름답게 생산된 자기의 분야를 떠나서, 동 시대에 대표적 작품으로서 상아(象牙)에 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언제나 방문자들을 매혹시키는 한 가지 기술은 바로 상아 구슬의 조각술입니다. 그 조각은 너무나 정교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훌륭한 ‘레이스’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매혹케 하는 것은 단지 그 ‘레이스’같은 무늬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한 덩어리의 상아로 조각되어 있는 구체(球體)들 속에 들어 있는 구체들로 되어 있읍니다. 이들 중 하나는 13개의 각각 움직이는 층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 하나가 다 각각 다른 층의 속에 들어 있읍니다. 각 구슬은 다른 구슬의 속에서 회전할 수 있읍니다.

또 놀라운 다른 것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점심 도시락이라고 할 수 있는 상아 상자입니다. 이것은 각각 납작한 잇수시개의 두께 보다도 얇게 섬세한 조각을 한 타원형의 상아 상자 여러 개를 한벌로서 층층이 쌓아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음식을 식은 상태로 보존하며 동시에 벌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일종의 공기가 통하는 차폐물로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개중에는 방문자들 가운데 이것이 ‘레이스’ 천에 풀을 먹여서 빳빳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히 설명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도 있읍니다.

소형술은 또 하나의 중국인의 특기입니다. 상아 소장품들 가운데는 길이가 불과 2‘인치’에 지나지 않는 작은 유람선이 들어 있읍니다. 모든 세부점들이 다 예리하며 선명합니다. 배 안에 타고있는 승객들이 보이는가 하면, 선실의 창이 미닫이로서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읍니다.

이제 우리는 현대에 이르렀읍니다. 그러나 나는 조각한 칠기(漆器)에 관하여는 미처 언급할 겨를이 없었읍니다. 이것을 만들 때에는 표면에 약 36차례나 칠을 주의깊이 입히는데, 그렇게 한다음, 매번 말린 후에 모래로 문지르며, 계속 이러한 일이 반복됩니다. 그 다음 조각을 합니다. 조각가의 일은 칠한 곳을 조각하는 것이지, 그 속의 나무를 다치면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여러가지 색갈의 칠을 입히며, 조각가는 원하는 색갈 위에 조각을 하며, 그 속으로 파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나의 소장품들 중의 어떤 것들은 깊게 조각되어 있으며 세가지 색의 무늬로 되어 있읍니다.

나의 가장 값진 소장품들 중의 하나는 비취옥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것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은 어느 한 왕조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취에 대한 중국인들의 존경심은 우리의 문화사(文化史)라는 긴 직물의 날(縱線)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비취와 가장 큰 비취를 소유하고 있읍니다. 나는 당신에게 후기의 비취 공예품들 중에서 윗부분은 초록색의 잎사귀로 되어 있고 두 마리의 메뚜기가 붙어 있으며, 줄기는 흰색을 띠고 있는 배추 모양으로 된 것을 보여드릴 수도 있읍니다. 이것은 모두 채색을 하거나 염색을 하지 않고 단지 천연 광물질 속에 들어있는 색 무늬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식별할줄 아는 조각가의 익숙한 감별력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족자에 그린 그림들

그리고 회화(繪畫)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중국의 족자(簇子) 즉 두루마리 그림 가운데서 중국의 역사가 가장 뚜렷히 드러납니다. 당신이 언제고 나를 방문한다면 나는 그 때 두개의 유명한 족자들 중에 적어도 하나라도 진열 되기를 바랍니다. “중화도시도(中華都市圖)”라는 그림은 과거의 왕주들의 시대의 생활을 기록해 놓은 괄목할 만한 그림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장장 37.82‘피트’의 평면 족자 즉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그 그림은 강의 하구(河口)로부터 시작하여 강뚝을 따라가며 여기 저기 외딴 지역의 장면들이 펼쳐지는 전원의 경치를 지나서 마침내 한 도시에 이르게되는 그림입니다. 작지만 정교하게 그려진 수천의 인물들이 그 경치에 생동감을 줍니다. 이러한 경치들로부터 과거의 생활, 의상, 상업 등에 관한 그림—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눈에 보는 듯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다른 위대한 두루마리 그림은 “백준도권(百駿圖券)”이라고 불리우는 족자입니다. 이것은 25.46‘피트’ 길이의 풍경화인데, 온갖 용도와 일상 생활에 쓰이던 모든 종류의 말들로 가득차 있읍니다. 한두 마리의 죽은 말의 그림도 있읍니다. 그러나 먼저 당신에게 질문을 해야겠읍니다. 당신은 중국인들의 그림의 “화법”을 식별할 줄 압니까? 당신은 그것이 중국인의 그림이라고 “느껴”지는 어떤 특징을 꼬집어낼 수 있읍니까? 중국인의 그림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이 들어 있읍니다. 하나는 투시 화법인데, 그것 때문에 당신이 어떤 그림을 볼 때, 공중으로 갈고리에 의하여 끌어 올려져서 그 바라보는 경치의 위에서 떠돌며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또 하나는 그림자 즉 명암의 구별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리감은 화가에게 가까운 물체는 짙게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은 연하게 그림으로써 나타냅니다.

그러나 “백준도권”에서 당신은 그림자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말들의 눈이 강렬한 빛을 띠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화가들이 사용하는 화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이 그림이 중국의 그림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국 화법의 모든 기술이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 의해서 사용된 동시에, 그러한 두가지 서양화의 기법이 더하여졌던 것입니다. 그 화가는 중국에서 ‘랑시닝’(郎世寧)이라고 알려져 있읍니다. 그는 1700년대 초에 청조(清朝)의 궁성에서 화가로 일하였읍니다. 그러나 그의 본명은 ‘쥬세폐 카스틸리오네’로서 그는 예수회 사제로서 중국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는 중국인들에 의하여 중국화의 화가로서 간주되는 유일한 외국인입니다.

불교 의식에 사용된 물건들

이외에도 중국 문화에 흡수되지는 않았으나, 중국에 침투하여 중국의 민중 다수에 의하여 포용된 또 다른 외래의 영향력이 있읍니다. 그것은 불교인데, 이것은 인도 형태와 술어를 계속 유지하면서 중국인들의 사상과 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읍니다. 하나의 박물관인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것도 나의 기억 은행의 수장되어 있는 것들중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티베트’로부터 비밀[비전(秘傳)을 받은 자에게만 알려져 있는 비밀을 소유하고 있는] 불교가 들어와서 ‘뻬이핑’(北平)의 황성(皇城)과 ‘제호루’의 피서산장(避暑山莊) 등에서 행하여졌읍니다. 나의 수장품들 가운데는 이러한 의식에서 사용되던 물건들이 들어 있읍니다. 이것은 마치 죽음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쇠와 해골로 만든 염주나 혹은 사자(死者)의 두개골이 가득 달려있는, 승려가 입던 조각한 상하 “법의”를 보여드릴 수도 있읍니다. 내가 진열하고 있는 인간의 해골로 만든 잔들은 그들의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을 담는 데 사용되었읍니다. 보통 귀족이나 고위 승려들의 두개골만이 사용되었읍니다. 해골로 만든 물건이 또 있는데 그것은 절의 악사들이 사용하던 해골 북입니다. 이것은 두개의 어린이 해골의 윗 부분으로 만들었는데, 정수리와 정수리를 맞붙이고 잘라낸 밑 부분은 양이나 원숭이의 가죽으로 덮습니다. 다른 악기도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다리뼈로 나팔을 만들고 취구부(吹口部)는 금속으로 만들어 붙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미술적으로 볼 때 조잡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아하게 채색 및 장식되어 있읍니다.

관람객들은 염주의 사용면에서 뿐만 아니라 내가 전시하고 있는 승려의 복장에 있어서도 너무나 뚜렷한 종교적 동일성을 보게 됩니다. 나의 수장품 가운데 들어있는 승려 관(冠)들은 서양 종교의 그것들과 흡사합니다. 많은 방문객들은 그 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곤 합니다. 당신은 더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를 일차 방문해 주십시오.

이제껏 내가 당신을 모셨지만, 우리는 단지 나의 역사 책 양 표지 사이에 들어있는 내가 보여 드릴 만한 것들 및 나의 나라가 나의—이 지상에서 가장 많은 수인—백성의 역사에 관하여 당신에게 말씀드릴 만한 것들의 표면만을 긁었을 뿐입니다. 사실 나는 매우 오랜 기억을 가지고 있읍니다.—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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