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79 08월호 28-30면
  • “자아제일주의”—오늘날의 우상 숭배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자아제일주의”—오늘날의 우상 숭배
  • 깨어라!—1979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자아 인식 ‘워크 숍’
  • ‘텔레비젼’의 새 종교 “호감주의”
  • 새로운 자기 도취자들
  •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자아 숭배”인가?
  • 자아(自我) 숭배
    깨어라!—1979
  • 설득 기술
    깨어라!—1998
  • 필수 요건: 하나님에 대한 인식, 타인에 대한 인식, 자신에 대한 인식
    깨어라!—1979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리라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3
더 보기
깨어라!—1979
깨79 08월호 28-30면

“자아제일주의”—오늘날의 우상 숭배

우리 세대의 대다수가 인간 제도—정부, 법률, 과학, 종교, 결혼—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였다.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어디로 향할 것인가? 다수가 내면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단지 부흥되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자아제일주의자들의 신조는 20세기에 비교적 새롭다. 그것은 금세기 초에 보다 보편적이었던, 타인을 고려하는 방식을 배척한다. 당시의 윤리는 타인을 생각하고, 선을 행하고, 격려하며, 타인에게 자신을 적용시키라고 가르쳤다. “내가 왕”이라는 새로운 이 종교에서는 그 모든 것이 금기다. 이러한 극단이 금세기에 새로운 것일지 모르나, 진정 새로운 것이 아니다. 부흥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오랜 고대 역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새로운 윤리 규범의 본보기가 있다. 이것은 최근 유행하는 자조 및 자아 인식 책자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첫째가 되려고 힘쓰라.”

“협박을 통해 승리하라.”

“세상에 이용당하는 대신 세상을 이용할 줄 아는 자는 별로 없다.”

“타인의 최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해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결코 당신의 주된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덕은 성공에 거의 쓸모가 없다.”

“당신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권리는 당신이 갖고 있다.”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윤리 규범에 따라 살고자 결심하라.”

“죄의식이란 ‘헤로인’만큼 강하고 파괴적인 마약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보다 앞서는 걸 허용하는가?”

“당신 자신의 방식을 갖는 혁명적인 새 기술.”

책자 속에서는 이러한 선언들이, 거스르는 점들을 부드럽게 미화시키는 어귀들 가운데 감싸여 있다. 때때로 도움이 되는 건전한 원칙들이 제시되기도 하며, 이 기사의 의도는 그 전체 내용을 순전히 이기적인 범주로 몰아넣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서적들의 대의는 위에 인용된 훈계와 질문에 의해 예시된 바와 같다. 그 인용문들은 독자들을 끌기 위해 광고 및 책 표지에 싣고자 고안된 것들이다. 즉 제목으로 사용되는 취지의 것들이다. 또한 독자들에게 남는 인상이다. 이 새 운동을 좇는 자들 가운데 퍼져 있는 풍조는, 일반 사회에 대하여 그 개인을 높이는 경향이다. 동일한 자기중심주의를 영화, ‘텔레비젼’, 운동 경기, 신문 및 잡지에서 볼 수 있다.

자아 인식 ‘워크 숍’

자아 탐구의 선구적 집단은 1962년에 ‘캘리포오니아’에서 설립되었다. 현재는 다른 많은 집단이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을 탐구하여 그것을 외부로 노출시키고자 한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 밖에 내다 걸어 놓자는 것이다. 정치 소설가 ‘플레쳐 네벨’은 전형적인 한 훈련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번의 훈련 과정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말없이 눈을 가리고 손을 등 뒤로 잡고, 우리 24명은 이국적인 동양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어깨, 팔, 다리, 둔부를 맞대었다. 사람들은 서로 통신하려고 말없이 더듬고 비벼댔다. 암중모색하는 이 집단은 나에게 인간 존재의 축소판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를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겨우 순간적으로, 부자유스럽게 접촉했을 뿐이다. 나는 떨어져 나와 바닥에 앉아 울었다. 왜? 아마 나 자신의 고독과 고통 때문이리라. 나는 그 경험을 결코 잊지 못했다.”

소설가 ‘네벨’은 그 ‘워크 숍’에서 행해진 자아 인식 훈련에서 어느 정도의 가치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한편 그는 다음과 같은 못마땅한 부면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운동은 상스러운 말을 거의 미해병대 만큼이나 많이 지니고 있다. 어떤 집단 지도자들은 통찰력보다는 음란함을 더 풍긴다. ··· 쉬지 않고 반복되는 동일한 네 글자 단어들은 그 지도자가 연마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인식을 오히려 둔화시킨다.

“너무나 많은 현대 미국의 도사들이 달을 약속하고는 한 줄기의 달빛을 주고 있다. ··· 한 주일 동안의 심리학적 계몽의 효과는 한 끼의 중국 음식 정도 만큼 지속될 수 있다.

“그 운동의 가장 심각한 결함은, 내 견해로 볼 때, 세상에의 적용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 굶주리는 ‘말리’의 목동들 속에서, ‘우간다’ 군대 수용소의 고문실 안에서, 혹은 ‘모스크바’의 KGB(첩보기관) 본부 앞 거리에서 인식을 감지하는 주말을 시도해 보라. 빈곤이나 학정의 손아귀에 잡힌 나라에서 개인적 ‘성장’이 있기란 힘든 것이다.”

‘텔레비젼’의 새 종교 “호감주의”

‘워싱턴’ 「포우스트」지의 ‘톰쉐일즈’는 ‘텔레비젼’ 광고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이러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해 그토록 호감을 느끼도록 강요된 적은 아마 역사상 결코 없었으리라. 이것은 광고업자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이기의 술책과 관련을 맺어 왔으며, 상품을 파는 새로운 도구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호감 광고—당신 자신에게 호감을 갖게 하며 그 목적을 위하여 당신에게 제공되는 무엇이든지 즉 방취제, ‘푸딩’, 혹은 새로운 장신구 등에 대해 호감을 갖게 하는 광고다. ···

“의문의 여지없이 이 선전 연설들에는 종교적 열정이 있다. ··· 그러나 새로운 광고에서 실제로 신격화되고 있는 것은 시청자-소비자 자신이다 ··· 지배적인 요점은 극단적 자아 숭배가 악이 아니라—사실은 덕(德)이라는 점이다. ···

“‘텔레비젼’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능력껏 모두 붙잡으라고 말한다. 그것은 당신의 기호가 타인의 기호를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절대로 암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가서 손에 쥐어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라고 말할 뿐이다. ···

“역사상 발명된 가장 위대한 외판원인 ‘텔레비젼’은 아마도 우리 자신을 판매하는 일에서 너무나도 빛난 업적을 수행해 왔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심각한 경제 혼란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금욕과 같은 아주 상상도 못할 일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인가?”

새로운 자기 도취자들

희랍 신화에서 ‘나르시수스’는 강의 신 ‘세피수스’와 ‘님프’인 ‘레이리오페’의 아들이었다. 신화에 의하면, 그는 아주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녔다. 어느 샘에서 자기의 비친 모습을 보고, 그는 제 자신과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는 다른 자들을 사랑할 수 없었으며, 어찌나 자기 자신에게 매혹되었던지 먹기 위해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는 사랑으로 수척해진 나머지 죽었다. 오늘날 정통 정신 분석학에서는 자기도취증(Narcissism)이라는 용어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주목하고 찬양하게 할 수 있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정도의 몹시 강한 자기애를 의미하는 데 사용한다.

재삼 재사, 오늘날의 자아주의는 새로운 혹은 신 자기도취증이라고 불러왔다. ‘나단 파인’은 「나르시수스의 시대: 얘, 여기서 나를 쳐다보고 있구나!」라는 제목의 한 잡지 기사에서, 그 추세를 “우리가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유형의, 그야말로 범국민적 자기도취증의 범람”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것을 “미국의 마지막 성장 산업, 즉 자기 몸속으로의 후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부언했다.

“그것은 마지막—그리고 아마 궁극적—개척 분야다. 그리고 정통파 그리스도교인들이 죄의식을 깨우치고 두려움을 불어넣고 일반적으로 감정을 제어하게 하는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자기애의 예술은 무르익은 고전적 시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자아 숭배”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자아를 높이는 것을 “하나의 새로운 종교”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자아 숭배”라고 부른다. 자아 인식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다 이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더러는 그러하다.

성서는 자아 중심주의가 숭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욕은 우상 숭배의 한 형태입니다.” (골로새 3:5, 개역 한글판 및 현대 영어 번역) 이 두 번역이 “탐심”과 “탐욕”으로 번역한 희랍어 단어는 ‘플레오넥시아’이다. ‘바클레이’의 성서 주석에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플레오넥시아’는 기본적으로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이다. 희랍인들 자신이 그것을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정의했으며, 그 욕망을 채우는 것은 구멍뚫린 그릇에 물을 채우려 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그것을 타인에게 속한 것에 대한 죄많은 욕망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은 그것을 취득하려는 정욕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무자비한 자기 추구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한 자들에 관해, 빌립보서 3:19은 “저희의 신은 배”라고 말한다. 혹은, 현대 영어 번역에서는 “그들의 신은 그들의 신체적 욕망입니다”라고 번역한다. 그러한 자들은 완고하게 그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며,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뜻을 우상화한다. 그리스도 수세기 전에 이것은 우상 숭배로 불리웠다.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사무엘 상 15:23.

사실상, 자아숭배는 첫 인간 부부에게까지 소급한다. 그들은 옳고 그름에 관한 그들 나름의 규범을 세우기 원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는 거짓말을 들었을 때, 그 여자는 바라던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먼저 그 여자가, 다음에 남편이 이 행로를 취하였다. 그것은 치명적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아 제일주의자들의 신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역사의 반복이다. 그것은 인류 시초에 존재했었으며, 마지막 날에도 있을 것임이 예언되었다. “마지막 날에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리라].”—디모데 후 3:1, 2, 새번역.

[29면 네모]

자아 제일 신조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

소유하지 말고 사랑하라.

당신의 감정을 나타내라.

그 모든 것을 노출시키라.

독단적이 되라.

죄의식을 느끼지 말라.

당신이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라.

당신 나름대로 행동하라.

내가 좋으면, 당신도 좋다.

판단하지 말라.

전파하지 말라.

으시대며 걸으라.

현재에 살라.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