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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을 위해 죽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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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황을 위해 죽기로 결심하였다”
  • 깨어라!—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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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2
깨92 5/15 14-19면

“천황을 위해 죽기로 결심하였다”

1. “군인은 충성을 의무로 삼는다.

2. 군인은 예의 범절을 생활의 길로 삼는다.

3. 군인은 무용(武勇)을 소중히 여긴다.

4. 군인은 의를 존중한다.

5. 군인은 단순하게 산다.”

이러한 다섯 마디는 일본 제국 군대에 새로 징집된 사람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만든 선서 조항들이었다. 선임 장교들이 날마다 와서, 정확하게 외우지 않으면 주먹질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각 신병들로 하여금 그 5개조를 외우게 했다. 특히 천황과 나라에 대한 불굴의 충성이 강조되었다.

1938년에 내가 징집되었을 때, 일본은 1937-45년에 벌어진 중일 전쟁의 와중에 있었다. 우리는 그 전쟁이 거룩하며 몽고군이 13세기 말에 일본을 공격했을 때 “가미가제”(神風)가 그들을 쓸어버렸듯이 일본의 가미(神)가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이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우리는 “신심” 훈련을 겸한 군사 훈련을 받고서 1939년에 전쟁터로 나갔다. 부모는 1000바늘 수놓은 허리띠를 주었다. 그것은 전투에서 승리와 끊임없는 행운을 기원하는 표시로 1000명이 각각 한 바늘씩 홍실로 수놓아 만든 것이다. 중국으로 가기 위해 고국에 작별을 고하면서 여러 가지 심정이 뒤섞였다. ‘고국을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 천황을 위해 죽기로 결심했다.

중국에서 겪은 비참한 상태

1939년 7월, 우리는 중국 본토 특유의 폭염 속에서 중국 중부의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30킬로그램 되는 장비로 완전 무장한 채 행군하였지만 1000바늘 수놓은 허리띠는 언제나 착용했다. 40킬로미터 가량 되는 하루 행군을 마칠 무렵에는 물집 잡힌 발을 질질 끌면서 걸었다. 칼로 물집을 터뜨린 다음 그 상처에 살리실산을 부었다. 살을 에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고문을 반복하자 마침내 물집 자리에 굳은살이 박여 더는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무더위 속의 행군으로 심한 탈수 증세가 일어났다. 황토색 시냇물을 물통에 담아 표백분을 풀고서 그 물로 갈증을 달래기도 했다. 마신 물은 곧 땀으로 변하여 옷을 적시고 군복에 하얀 소금 자국을 남겼다. 얼마 안 되어 온 몸이 가렵고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군복의 단추를 풀고 보니 이가 여기저기 기어다니면서 알을 낳고 있었다! 한 마리씩 눌러 잡았지만 워낙 엄청난 수라서 역부족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이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내에 이르렀을 때 목욕하기 위해 물 속에 뛰어들었다. 모든 사람이 이에 물려서 온 몸에 붉은 반점이 부풀어올라 있었다. 목욕을 한 후, 우리는 군복을 끓는 물에 담가 이를 죽였다.

그 후 상하이의 사단 본부로 전속되었으며 급여 담당 하사관이 되었다. 급여 담당관의 일은 군대 회계에 관해 기장하고 금고를 돌보는 것이었다. 하루는 두 명의 중국인 하층 노동자가 금고를 가지고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경고한 후 총을 겨누고 발사했다. 두 사람 다 즉사했다. 그 후 살아가면서 이 일로 여러 해 동안 양심이 괴로웠다.

싱가포르로

1941년 말, 우리는 완전 무장한 채 배에 올라타라는 명령을 받았다. 목적지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홍콩에 도착하자, 자전거, 탱크, 장거리포가 선적되었다. 가스 마스크와 하복이 지급되었으며, 우리는 다시 출항했다. 며칠 후 우리는 이러한 말을 들었다. ‘우리는 막대한 규모의 과학전을 치를 예정이다. 이제 가족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기 바란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것임을 부모에게 알렸다.

일본군 폭격기가 진주만을 공습한 날인 1941년 12월 8일 새벽, 아직 어두컴컴한 때에 우리는 타이, 송클라 주의 해안에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a 바다가 사납게 날뛰었다. 모선에서 줄사다리를 내려뜨렸다. 우리는 그 사다리를 타고 3분의 2만큼 내려간 다음, 바람에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공격용 주정으로 뛰어내렸다. 그것도 무거운 짐을 메고 그렇게 했다! 적군은 우리에게 폭탄을 투하했지만 우리의 작전은 성공했다. 밀림을 통해 싱가포르에 이르는 진격이 시작되었다.

작전 행동중에 급여 담당관으로서 나의 주된 일은 부대를 위해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에서 오는 보급품에 의지할 수 없었으므로 현지에서 식량을 얻어야 했다. 따라서 급여 담당관들이 전선의 병사들과 함께 나아가면서 우리가 사용할 식량을 찾아 확보해야 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지 않았지만, 그것은 대규모 강도질과 다를 바 없었다.

항복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타이와 말라야 간 국경 근처 알로르세타르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는 식량이 가득한 거대한 창고를 발견했다. ‘이 놀라운 소식을 후방의 급여국에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국군에게서 탈취한 자동차를 타고서 운전병인 부하와 함께 출발했다. 우리는 들뜬 기분으로 달리다가 어느 모퉁이를 돌면서 영국군 탱크가 줄지어 있는 것을 보았다. 길을 잘못 들어서서 뜻하지 않게 200명 가량의 동인도·영국 군인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끝장난 것인가? 그냥 뚫고 나아갈 수 없다면 우리는 결국 불명예스러운 포로가 될 것이다. 일본 군인으로서 우리는 포로가 되어 수치스럽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운전자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고 운전자는 칼을 뽑아 나의 복부에 갖다 댔다. 나는 곧장 운전하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기관총 탄막을 헤치고 돌진했다.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우리는 막다른 곳에 이르러 자동차를 버리고 밀림으로 들어가 걷기 시작했다. 뱀의 공격과 적군의 추적을 받으면서, 우리는 아군에게 돌아가기 위해 여러 날 동안 고투했다. 도착해 보니, 우리의 전사를 알리는 보고서가 이미 작성되어 있었다.

말라야, 콸라룸푸르에서 우리는 많은 영국군 포로를 보았다. 일본 군인들에게는 포로가 된다는 것이 생각만 해도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건만, 영국군 포로들은 그와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영국군은 여전히 낙관적이었으며 언젠가는 형세가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기세 등등하게 전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싱가포르 점령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싱가포르 섬을 대하게 되었다. 해안을 따라 수없이 많은 지뢰와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거리포로 해안의 한구석을 집중 포격하는 일에 힘입어 해안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상륙했다.

싱가포르는 비교적 작은 섬이지만 모두 합해 16만 명의 군인이 그 섬에서 싸웠다. 우리는 조금씩 전진하다가 아군의 시체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영국군은 우리의 야간 습격을 두려워했다. 각각 12명 정도로 이루어진 일본 겟시다이(決死隊)는 칼을 뽑아 들고 파상 공격을 감행했다. 자원자를 더 요청할 때 열이면 열 모두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다.

우리는 1942년 2월에 말레이 반도에서 조호르 해협을 건널 때, 적군이 우리가 무방비한 바다로부터 올 것으로 생각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창이 포병대가 우리 쪽을 겨냥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일단 우리 쪽으로 향하자 그 포는 참으로 막강했다.

적군의 포에서 날아온 포탄으로 우리 앞 도로에 구덩이가 패어 군용 차량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12명의 포로를 구덩이 주위에 둘러서게 하였다. 기관총 사격대가 그들을 겨냥하여 발사했다. 또 다른 12명의 포로에게 그 시체들을 구덩이에 던지고 흙으로 덮게 하였다. 또 한 차례의 기관총 사격으로, 그들도 도로의 다음 구덩이를 메우는 희생물이 되었다. 그 과정은 도로가 완전 복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가 저지른 잔학 행위를 회상한다는 것이 이제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그 무서운 전쟁의 소름끼치는 현실의 일부였다.) 그 무렵 나의 양심은 말하자면 “화인 맞”은 상태가 되어, 그러한 잔학 행위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디모데 전 4:2.

1942년 2월 15일에 백기를 든 고위급 영국 장교가 몇몇 부하와 함께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퍼서벌 장군이다!” 하고 한 동료가 소리쳤다. ‘우리가 해냈군!’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말라야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이 항복한 것이다. 그 역사적 사건을 목격한 기억이 생생하다. 일본의 오래 된 신들의 능력에 대한 나의 확신은 강화되었다.

싱가포르를 점령한 후, 나는 뉴기니를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파견되었다. 그 후 1943년,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모를 만나게 될 것을 생각하니 기쁨이 넘쳤다. 그러나 우리가 탄 배는 적군의 잠수함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그 무렵 전세는 우리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콸라룸푸르에서 영국군 포로가 우리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정말로, 형세가 바뀌고 있었다.

히로시마의 비극을 목격함

마침내 일본에 도착하여 양손을 깍지끼고 신들과 부처에게 감사의 기도를 했다. ‘1000바늘 수놓은 허리띠와 오래 된 신들의 보호력이 나를 지켜 주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제대할 때, 담당 사령관은 우리에게 자녀를 가지라고 명령했다. 그는 “가족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다” 하고 말했다. 그 임무를 이행하기 위해,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한 친척이 결혼을 주선해 주어, 1943년 12월에 하쓰코를 아내로 맞이했다.

히로시마 교외에서 교도소 간수로 일하고 있을 때인 1945년 8월 6일에 원자 폭탄이 그 도시를 날려버렸다. 누군가 가서 폐허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했다. “여러분 중에 필사의 정신을 가지고 기꺼이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내시오” 하고 감독관이 간청했다.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지만, 군대에서 훈련받은 정신 태도에 힘입어 나섰다. 우리는 중앙에 붉은 태양이 그려 있고 겟시다이라는 글자가 쓰인 머리띠를 받았다.

우리의 사명은 히로시마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을 구조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 교도소 쪽으로 가면서, 시체로 메워진 강을 건넜다. 사람들은 폭발로 인한 열을 견디다 못해 강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교도소에 도착하여 죄수들을 응급 치료한 후 트럭에 실어 병원으로 날랐다. 전시에 일본에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한 여호와의 증인 미우라 가쓰오가 종교 때문에 그 당시 그 교도소에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함

1주일 후 히로시마의 공병대 급여국에 보고해야 했다. 타고 갈 차를 향해 걷고 있을 때 그 지방의 한 학교가 공중 확성기로 특별 방송을 전해 주었다. 히로히토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똑바로 서서 천황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눈물이 글썽하다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천황은 자신이 ‘인내할 수 없는 것을 인내’하겠노라고 말했다. 굴욕을 감수하고서 연합군에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신과 같은 천황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용납할 수 없는 말이 나오다니!

“신풍”은 결코 불지 않았으며 “신국” 일본은 패배했다. 천황과 나라에 대한 나의 확신은 산산이 부서졌다. 아무런 목표도,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내가 믿었던 신들 가운데는 참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러 종교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종교가 이기심에 영합하여 신앙 요법과 탐욕스런 이득을 강조했다. 나는 결국 내 나름의 종교를 믿게 되었다. 삶의 궁극적 목표는 일을 통해 이웃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자전거포를 경영하면서 싼 값에 질 좋은 자전거를 팔고 친절한 태도로 신속히 수리해 주려고 노력했다. 이전에 신들이 차지했던 마음을 일이 대신 차지한 것이다.

참 하나님을 발견함

1959년 초, 점포에서 일하고 있을 때 한 부부가 나를 방문하여 「파수대」지와 「깰 때이다」지를 제공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었으며 며칠 후 다시 와서 성서 연구를 권했다. 나는 언제나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했기 때문에 기꺼이 동의했다. 또한 아내에게도 권하여 매주 연구를 함께 하였다.

마침내, 전에 믿었던 것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구원을 베풀 입장에 있지 않는 누군가에게 열렬히 헌신했던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시편 146편 3절과 4절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천황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내가 전시에 천황과 나라에 바쳤던 무조건 충성은 이제 위대하신 우주 주권자이며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중국에서—그리고 특히 싱가포르에서—전쟁중에 저지른 유혈죄였다. 피로 얼룩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위대하신 우주 주권자를 섬길 수 있단 말인가? 이 난제는 1960년에 한 순회 대회가 우리가 사는 이와쿠니에서 열렸을 때 해결되었다. 우리는 그 대회를 주재하기 위해 도시를 방문한 선교인 에이드리언 톰슨과 그의 아내 노린에게 숙소를 제공했다. 나는 기회를 잡아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경험을 말함으로써 마음 깊숙한 곳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많은 유혈죄를 저질렀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승인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제1세기 로마 장교 고넬료의 행로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걸렸던 마지막 것이 말끔히 사라졌으며 이튿날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았다.—사도 10:1-48.

지존하신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즐거움

내가 섬겼던 다른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신, 우주의 가장 위대한 인격체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영적 싸움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디모데 후 2:3) 나는 가정에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침례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엿들었다. ‘도미지는 불단에 절하지도 않을거고 우리 가묘에 더 이상 차례를 지내지도 않을거요.’ 일본 사람들은 자녀가 조상을 공경하기 위해 해마다 차례를 지내는 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여긴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진리를 전했다. 아버지는 나와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1961년 가을에 침례를 받았다. 딸 에이코와 아들 아키노부도 함께 침례를 받았다. 막내딸 마사코도 그들의 본을 따랐다. 어머니는 종교를 갖고 있어서 처음에는 연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여러 해 후에 역시 우리와 함께 여호와를 섬기게 되었다.

1975년에 나는 정규 파이오니아로서 전 시간 봉사에 아내와 합세했다. 그 때 이후 회중의 전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봉사할 수 있었다. 약간 피로함을 느낄 때면, 천황과 나라를 섬기면서 가졌던 열심을 기억하면서 ‘내가 천황과 나라를 그처럼 큰 정성으로 섬겼다면 위대하신 우주 주권자를 섬길 때 그보다 덜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혼자 생각한다. 그래서 계속할 힘을 되찾는다. (이사야 40:29-31) 더는 강요된 5개조 선서에 따라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지식에 근거하여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정성으로 지존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그분은 온 영혼을 다한 충성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히로나카 도미지의 체험담.

[각주]

a 진주만 공격은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에 있었는데, 일본과 타이 시간으로는 12월 8일이었다.

[15면 삽화]

전시의 히로나카 도미지

[16면 삽화]

싱가포르 전투에서 소화 작업을 하는 민방위 대원

퍼서벌 장군이 일본군에 항복하는 장면

[자료 제공]

The Bettmann Archive

[17면 삽화]

1945년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후의 히로시마

[자료 제공]

USAF photo

[18면 삽화]

삶을 변화시켜 준 책인 성서를 들고 있는 아내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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