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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7 10/1 19-22면
  • 나는 교도소 안에서—자유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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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교도소 안에서—자유를 얻었다!
  • 깨어라!—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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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7
깨87 10/1 19-22면

나는 교도소 안에서—자유를 얻었다!

방금 떠나온 교도소의 공기와는 너무도 다르게 느껴지는 신선한 공기를 나는 깊이 들이마셨다. 내가 드디어 자유롭게 되었다니 ·⁠·⁠·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프랑스의 빌레뇌브-쉬르-로 교도소를 떠날 수 있는 자유, 내 고국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나는 23세에 수감되어 28세 때인 1976년에 출감하였다.

교도소에서 거리가 멀어지면서, 다시 얻은 자유의 쾌감이 차츰 온 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뒤돌아, 그 무서운 담들을 오랫동안 응시하였다. 머리 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 곧 나는 교도소에 있는 동안에 이미 자유를 획득했다는 생각뿐이었다!

감금되어 있는 동안, 나는 교도소를 다섯 군데나 거쳤다. 그러나 어떻게 프랑스 교도소까지 가게 되었는가? 물론, 조금도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비행 소년이었다. 분열된 가정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모순투성이의 종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반항적이고 호전적인 성격이 형성되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과 자신의 피조물을 꺼지지 않는 불에서 고초를 당하게 하는 하나님을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었다. 나는 문제아가 되었다. 다섯개의 국민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바르셀로나(스페인)에서 태어난 나는 적대감이 감도는 환경에서 자랐다. 여섯살 때, 나의 부모는 별거하였고 나는 아버지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 필요했던 확고한 지도를 해주지 않았으며, 그 결과 마침내 나의 반항적이고 불안정한 기질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감화원에 넣어 버렸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자포 자기가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감화원을 떠날 때 감화되어 있지 않았다.

프랑스 외인 부대, 아니면 스페인 교도소?

나는 두번씩이나 일반 형사범으로 체포되었다. 그후에, 밀수 사건에 말려 들어간 나는 프랑스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나이 20세였을 때이다. 나는 프랑스 헌병에게 붙잡혔으며, 그는 나에게 프랑스 외인 부대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스페인 경찰에 넘기울 것인가 양자 택일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부대 쪽을 택하였다.

그 부대에서 삼년을 복무했으나, 내 성품에는 긍정적인 도움이 전혀 되지 못했다. 첫 군사 작전을 마치자, 삼개월의 휴가가 주어졌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일단의 부대 동료들과 재미를 볼 궁리를 했다. 수지 균형을 맞추면서 우리의 자유 분방하고 흥청거리는 생활 방식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강도질을 해야 했다. 나는 그 “직업” 방면에는 박식하였다. 몇달 후에 경찰은 우리를 체포했다.

나는 몇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서류 위조죄 외에도 가장 심각한 죄로서 무장 강도 및 어린이 유괴죄가 포함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원하는 자유와 독립을 즐긴 대가로 비싼 값—8년 징역형—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프랑스 남쪽 마르세유에 있는 레 보메테 교도소의 군 죄수 구역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감방에서 감방으로, 총 63개 감방의 죄수들에게 식사를 나르는 일을 임명 받았다. 또한 감방과 복도를 청소해야 하였다.

이상스런 만남

하루는 어느 감방에 식사를 나누어 주고 있는데, 함께 있던 교도관이 “이 자들은 증인들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식사가 각 감방 문의 아래 구멍 문을 통해 재빨리 손건네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순간에 그들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 떠오른 생각은 ‘만일 그들이 어떤 범죄의 증인들이라면, 어째서 교도소에 갇혀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었으며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었다.

수일 후 그들의 방을 청소하던 중, 함께 일하던 동료가 프랑스어로 된 파란색 표지의 책을 발견했다. 그 증인들은 다른 감방으로 옮겨졌는데, 누군가가 잊은 채 남겨 놓고 간 것이 분명하였다. 그가 그 책을 내게 주기에 내 소지품이 있는 곳에 넣어 두었다. 그후 지루하고 단조롭기만 하던 어느 날,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책이었다. 2장 절반까지 읽어 내려가다가 그만 싫증이 났다. 그래도 그 책을 내려 놓기 전에 몇 페이지를 더 넘겨 보았다. 80페이지의 삽화가 내 주의를 끌었다. “1914년,” “세대,” “종말.”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장 전체를 읽어 보았다.

나는 그후 도서실로 갔는데, 증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가서, “그 1914년에 대해서 당신 성서에서 보여 주시오”라고 요구했다. 조금 놀란듯한 그 증인은, “먼저 이 책 한권을 더 읽어 보시면 스스로 대답을 찾으실 겁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당신의 뜻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이다”」책을 건네 주었다.

그 다음날 운동 시간에, 나는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물어 보았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매일 진행되었다! 내 질문은 끝이 없었다. “도박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도박은 탐욕 및 탐심과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 특성이 아니다”는 것이 대답이었다. (골로새 3:5) 이처럼 계속하여 습관, 도덕, 교리에 관해서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였다. 모든 대답 하나하나가 성서로 뒷받침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밧줄과 쇠사슬의 속박에서 풀려 해방되고 있는 느낌을 받았으며, 마치 내 거의 모든 생활을 억압하던 틀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 같았다. 감옥의 담들이 더 이상 나를 가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성서 진리들은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나는 인간 사회 즉 현존하는 “사물의 제도”가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로 대치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교도소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것이다!—마태 24:3, 신세; 베드로 후 3:13.

감방에서 감방으로의 전파 활동

개종시키는 행위는 교도소 안에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물론 나는 감방에 식사를 분배할 권한을 받은 터였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해방감을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요한 8:32) 그래서 바닥을 쓸 때나 음식을 분배할 때나, 나는 육중한 금속 문 밑으로 잡지들을 살짝 밀어 넣었다. 심지어는 내가 남긴 잡지의 발행 호수를 기억하기 위해 감방별 방문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즐거운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 교도소에서 이감되어 여러 교도소를 거쳤는데, 그 중에는 파리에 있는 교도소도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위험한 인물인가를 판별하기 위해 그곳에서 한 동안 감시를 받았다. 또 이감될 것이 예상되었을 때, 나는 프랑스 남서부의 이세로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곳에 증인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과연 거기에 형제 한명이 있었으나, 3년 동안 그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한번도 마주치질 못했다. 그는 내 출입 구역이 아닌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나의 활동을 조직하였다. 나는 교도소 안에서 잡지를 배부하기 시작하였고, 여러 건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나는 일요일마다 수감자 두명과 모여서 「파수대」 연구를 사회할 수 있었다. 마침내 세건의 성서 연구를 갖게 되었는데, 한명은 프랑스인, 또 한명은 스페인 사람이고 세번째는 모로코 사람이었다.

교도소 안에서의 중립의 시험

어느 교도소이든지 단결 정신이야말로 죄수의 도덕 윤리로 되어 있다. 과거, 인종, 국적을 떠나서 수감자 모두가 같은 ‘태반’—감옥—에 공동 ‘탯줄’에 의해 매여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일단 범죄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범죄자 집단’의 한 성원이 되는 것과 같다. 이 공동의 연줄은 대중의 뜻이 결정될 때면 언제라도 감옥 폭동—자신의 감방에 불지르기, 공격, 스트라이크—에 참여해야 할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제 나는 그 ‘집단’과의 관계를 끊었다. 나는 중립을 고수하고 다른 죄수들의 활동에 연루되지 않았다.

중립을 유지한 까닭에 나는 얼마간 보복을 당했다. 세번 매 맞고, 한번은 내 침대에 물 한 양동이가 부어졌으며, 죽이겠다는 위협도 받았다. 그럼에도 내가 놀란 것은,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는 참으로 최소한의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다른 죄수들은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리거나 몹시 구타당하였었다. 그러면 나는 어째서 그 정도의 가벼운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났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에게는 보호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찌된 것인가?

파리 교도소에서 이세 교도소로 이감되던 중, 나는 그 무리의 한 기결수에게 증거를 했다. 그는 대단한 영향력을 가진 죄수로서 마피아단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왕국 소식이 그에게 감명을 주긴 했으나, 그의 생활을 변화시킬 정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연구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가 나의 보호자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죄수들이 시위 조직을 결정할 때마다, 그는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하면서 내 편을 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에 그는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 무렵 또 다른 폭동이 계획되었다. 그들은 교도소에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나는 당할 수 있는 보복 행위를 피하려고 독방 감금을 자청하였다. 나는 독방에 감금된 상태에서 9일을 지냈다. 10일째 되던 날 전체적인 소동이 일어나더니 드디어 불길이 솟았다. 완전한 황폐였으며 보안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몸에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 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사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교도소 안에서 전파 활동을 조직할 수 있었던 일이다. 개종시키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교도소장이 “이 사상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나를 지원해 주었다. 나는 또 각 구획의 믿을 만한 죄수들에게 내가 타이프한 소책자를 배부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출입할 수 없는 곳에 그들은 갈 수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도움에 대해 인스턴트 병 커피로 보답을 했다.

침례, 그리고 선을 위한 자유

나는 그 지방 프랑스 회중 형제들의 방문을 받았다. 마침내, 침례받고 싶은 내 욕망을 그 형제들에게 표시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교도소 안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그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나를 내보내 줄 것인가? 실현 불가능한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순회 대회가 교도소에서 아주 가까운 로데 읍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참석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상 외로, 나는 삼일간의 휴가를 허락 받았으며, 지방 회중의 형제들과만 다니도록 하였다. 그 결정에 반대한 교도소 관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허락은 이미 내려졌다.

1975년 5월 18일, 나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 침례를 받았다. 나는 선을 위해 자유케 된 것이다! 물론, 나는 교도소로 돌아갔으며, 내가 받은 허락에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후 나는 각각 엿새 씩 두번이나 더 허락을 받았다. 나는 그 날들을 전파하고 형제들을 만나는 데 사용했다. 참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였다!

1976년 1월, 마침내 모범 행실로 3년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드디어 나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었다. 내 인생의 5년이란 파란 많은 세월을 뒤에 남기고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 즉시 여호와의 증인 회중과 연락을 취했다. 그때 얼마나 정상적인 생활을 갈망하고 있었던가!

참된 감화의 길

나는 지금 결혼했다. 우리에게는 어린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으며,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맛보지 못한 것—연합되고 행복한 가정—을 즐기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넘치도록 자비로우셨음을 깨닫는다. 시편 103편 8절부터 14절에서 ‘그는 우리의 죄를 따라 갚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는 말씀을 읽을 때면, 나는 사랑의 하나님만이 현 부패한 사물의 제도를 대치시킬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경험을 통하여, 나는 교도소가 감화시킬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앞으로도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능력은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내적 힘과 동기로부터 나와야 한다. (에베소 4:23) 감옥에서 질이 더욱 나빠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석방될 때 그들은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감정적으로 타락해 있다.

다행히도, 나의 경우는 교도소의 그 무너뜨릴 수 없는 담들이 석방되기 오래 전에 허물어져 버렸다. 아무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제한할 수 없고 그 말씀의 진리를 활동하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그 사실을 아는 이유는,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에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엔리케 바르베르 곤잘레스의 체험담.

[21면 삽화]

범죄자였던 엔리케 바르베르 곤잘레스가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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