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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력 생활을 청산하려는 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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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력 생활을 청산하려는 나의 투쟁
  • 깨어라!—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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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7 12/15 18-21면

폭력 생활을 청산하려는 나의 투쟁

8년 동안이나 나는 잘 알려진 오토바이 클럽에 속해 있었다. 이런 단체들 대부분은 다른 오토바이 클럽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며, 따라서 끊임없이 경쟁 의식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밤 우리 클럽에 속한 여러 명은 뉴올리언스 (미국) 중심가로 들어가 타지역에서 온 경쟁 클럽을 찾아다녔다. 우리는 모종의 분풀이로 “몇 녀석을 두들겨” 주고 싶어 안달이었던 것이다.

그 경쟁 클럽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뿔뿔이 헤어졌다. 하지만, 몇몇은 술집에 들어가 있다가 사복 경찰관 두명과 주먹 싸움을 벌이고 말았다. 그 경찰관들은 총을 꺼내 발사하기에 이르렀고, 내 친구 중 하나가 총상을 입고 말았다. 나는 제법 오래된 인근 주점에 앉아 있다가 그 벌어진 일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나는 친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지 못해 병원으로 찾아 나섰다. 내가 병원에 당도하자마자 한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도 한패다! 잡아라!”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싸움과 전혀 무관했음에도, 장발과 긴 수염 탓에 우리 모두가 한 패거리로 보였던 모양이다. 아뭏든 그들은 나를 잡았고, 나는 결국 여러 주일간 수감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같은 난폭한 생활 방식에 뛰어들게 되었는가? 나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첫눈에 반하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그러한 생활 방식에 빠지게 되면 실망하고 마는데, 우리 부모의 경우도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다. 부모는 내게 친절하면서도 엄격하였으며, 징계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의 문제는 고교 마지막 학년 때에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부모의 권위에 반항하기 시작했고 또한 폭음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루는, 내가 다니던 고등 학교 현관 계단에 무심코 서 있다가, 그후 여러 해 동안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 대단한 것을 보게 되었다. 크롬 도금이 되고 반짝이는 칠을 한 “할리챠퍼” 오토바이 한대가 지나갔는데, 내 앞에서 쭉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오토바이를 탄 사람은 세상에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오토바이에 대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고등 학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그전부터 애써서 모았던 자금을 다 털어 750cc 영국제 대형 오토바이를 샀다. 그해 여름, 나는 중서부 여러 주(州)들을 횡단 여행하여 아이오와 주까지 갔고, 거기서 대학에 진학했다.

오토바이 “가족”

베트남 전쟁이 진행중이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고달픈 인생 시기였다. 참전하여 전사한다는 생각만 해도 내게는 몸서리 쳐지는 일이었다. 사실,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강제로라도 그런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환멸을 느끼는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대대적인 항의를 벌이기로 작정했다. 나는 반전 단체에 가입했으나, 그 모임들은 조직이 안 돼 혼란스러웠다. 얼마 후에, 나는 이 단체로는 체제를 변화시켜 더 나은 상태를 가져올 수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또 다른 단체에 가입할 생각도 했지만, 그들도 다른 폭력 행위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폭력에 항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이런 일이 내게는 올바른 일 같지 않았다.

대학 시절, 나는 또한 종교적 위선도 의식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죽으면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배웠다. 내게는 하늘에 갈 정도로 그렇게 거룩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같이 여겨졌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참전하여 싸우고 살상하는 일을 승인한다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환멸을 느낀 나머지 나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중단했고, 이제 더 이상 가톨릭 교회 성원으로 간주되고 싶지 않았다. 좀더 이해를 얻을까 하여 종교 철학 강좌를 수강하였다. 담당 강사는 알고 보니 무신론자였고, 산타클로스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없다고 가르쳤다!

그 기간 내내 변함없이 유지된 것은, 폭음과 오토바이 타기 뿐이었다. 대학과 인생 전반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나는 남녘 저 아래인 뉴올리언스로 이사했다. 거기서 나는 나와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단체를 또 하나 만나게 되었다. 그들 대다수도 역시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오토바이를 조립하는 데 관련된 많은 것들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내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내가 아플 때에 보살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염려를 나타내 주었기에 그들 집단에 마음이 끌렸다.

우리 “가족”은 커지면서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온 여러 단체들이 합류했다. 하절기에 우리는 중서부 지역 도처를, 북쪽으로는 멀리 미네소타 주와 와이오밍 주까지,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 주까지, 심지어는 멕시코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쏘다녔다. 우리는 숱한 주립 공원들을 방문하였고 시골 지방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우리 생활 방식에는 술집에서 술 마시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동료들 중 얼마는 심한 격투를 즐기기까지 했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싸움을 유발시키는 상황을 피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점잖게 그러한 상황을 피해가곤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내가 몹시 싫어하는 일들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는 달려들어 본때를 보여주곤 하였다. 한번은 내가 술집 밖에 서 있었는데 오토바이 한대가 지나갔다. 탄 사람이 누군지 쳐다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뒤에 탄 사람이 나에게 총을 겨누어 쏘았다! 어째서 그가 나를 맞추지 못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한 살인 사건으로 받은 영향

나는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 방식에 진정한 행복이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때가 되어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 마저도 잘 풀리지 않아 겨우 석달만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나중에 오토바이를 도난당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술에 몹시 취한 끝에 나는 제일 친한 친구와 심한 언쟁을 벌였다. 그로 인해 몹시 침울해지자, 아예 내 인생을 끝내 버리고자 한 움큼의 알약을 삼켰다. 그런 다음, 미시시피 강변 제방에 누워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나는 음주 문제 때문에 두번이나 더 병원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결코 잊지 못할 어느날 아침이 왔다. 아침 5시, 절친한 친구 하나가 총격을 당해 살해되었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 친구는 두명의 클럽 회원과 함께 술 한잔 하러 나갔다가, 한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마구 구타하는 것을 보고서 말리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였는데, 그 남자는 총을 쏴 내 친구를 살해하고 말았다. 우리 모두는 충격을 받았고, 나는 이튿날 종일 그 친구의 형과 함께 장례 절차를 준비하는 데 보냈다.

초상집에서 그날 밤을 혼자 보내며 나는 친구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친구는 차갑고 뻣뻣했으며 생명의 기운이 전혀 없었다. 친구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이것이 정말 모든 것의 종말이란 말인가? 분명 단지 몇년간 살다가 죽고 마는 이러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 자신이 인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서, 그때 이래로 그것을 찾고자 애썼다. 나는 영매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몇번인가 죽은 친구와 접촉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모호했고, 여전히 나의 의문점들은 풀리지 않았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느날 밤, 나는 술에 취해 몽롱한 채로 오토바이를 탔다. 그로 인해 사고가 나서 발목을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나는 걸을 수 없어서 2주간이나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던 중에, 한 남자와 그의 어린 아들이 내 집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성서에 대해 말을 나누고자 하면서, 자기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명칭을 이전에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기에 그들더러 새로운 종교 집단이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친절하게 성서를 펴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며 그분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내게 새로운 사실이었다. 하나님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다니. 청소년 시절에 내가 받았던 종교 교육도 그 점을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내가 미처 배우지 못한 것들이 그 외에 또 뭐가 있을까 하고 궁금해 하였다.

다음에, 그는 내게 성서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즉 사물의 제도의 끝에 관해 말하고 있음도 보여 주었다. “세상의 끝”이라니! 왜 이전에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가지고 있던 많은 질문들을 몇 가지 더 토론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게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라는 서적을 남겨 놓았다. 나는 그 책을 빨리 읽어가질 못했는데, 그것은 내가 드디어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발견해 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토록 짧은 기간 살다가 죽고 마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장차 사망이 종식되고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전망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내 소중했던 친구도 어디선가 의식을 지닌 채 고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니라, 깊은 잠 속에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얼마나 웅대한 희망인가! 아마 다시 그 친구를 만나 보게 될 것이다.—계시 21:4, 5; 전도 9:5; 요한 5:28, 29.

어려운 결단

내가 그해 여름에 최대 규모로 계획된 오토바이 클럽 여행차 떠나게 됨으로써 우리의 성서 토론은 중단되고 말았다. 나와 성서 토론을 하던 증인 대니얼에게 돌아오면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주었다. 다음 4주간의 여행 동안, 휴식차 멈출 때마다 나는 그 책을 조금씩 읽었다.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여 대니얼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함께 성서 연구할 약속을 했고, 첫 연구를 끝내자 그는 다음 일요일 오후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나를 초대하였다.

그런데 그 일요일에는 클럽 회원 전체가 오토바이를 타기로 계획되어 있었고 내가 그 선봉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일요일 아침이 오고 우리는 출발했다. 가다가 한 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후 1시경, 나는 별 생각 없이 밖으로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3시쯤, 나는 T셔츠, 청바지, 부츠, 텁수룩한 수염, 머리를 따서 뒤로 맨 차림을 하고서 왕국회관에 갔다. 증인들은 따뜻하게 영접해 줬으며 내 외관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 오라고 격려해 주었으며 나는 그렇게 했고 그 이래로 집회에 계속 참석하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오토바이 클럽 회합에 매주 나갔기에 첫 달은 어렵게 보냈다. 나는 클럽과의 관계가 지속된다면 성서 원칙들을 적용하며 살기가 어려우리라는 점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클럽을 그만 둘 각오를 했다. 그 동료들을 떠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는 동고 동락했으며, 이로 인해 친밀히 단합되어 왔었기에 말이다. 한편, 그 폭력 세계를 뒤로 제쳐 두고 여호와의 평화로운 세계적인 조직으로 들어오는 것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나는 항상 침대 곁에 두었던 총을 팔았다.

불꽃 속에 손가락을 넣지 말라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6개월 후, 침례를 받았다. 이 짧은 기간 내에, 여호와의 도움으로 음주 습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전반적인 나의 행실도 개선되었다. 이제 나는 시초에 대니얼이 나를 방문했듯이 집집으로 사람들을 방문하기를 즐기고 있다. 나는 이웃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폭력을 근절시키고 정의로 다스리며 인간 정부들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의로운 모든 것들을 마련해 주고 조만간 지상에서 폭력배들을 일소시킬 하나의 정부를 가지고 계신다는 점을 성서를 펴서 보여주고 있다. 나의 과거 폭력 경험들 때문에, 이것은 특히 내 마음에 와닿는데, 따라서 나는 할 수 있는 힘껏 그 점을 강조한다.—계시 11:18.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헌신한 그리스도인 아내와 귀여운 두 자녀로 나를 축복해 주셨다. 우리 넷은 함께 호별 방문을 하며 그리스도인 집회와 대회에 참석한다. 나는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섬기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진정코, 나는 폭력 생활을 청산하고 진정한 평화를 발견하였다.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 삶인가! 뉴올리언스로 돌아온 후에 나는 이전 친구 중 두명이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곳 루이지애나 주에 와 있은 이래, 세명이 더 총에 맞아 죽었다. 여호와를 몰랐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비록 세상이 매혹스럽고 흥분케하는 듯 보일지라도 불꽃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보려는 어설픈 짓을 하지 말라는 점이다. 나는 세상에 찌들어 있었으며 온갖 것을 다 맛보았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호와와의 관계를 얻기를 원하지만 필요한 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예수의 격려적인 다음 말씀에 유의하기 바란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태 19:26)—데이비드 L. 워지스의 체험담.

[18면 데이비드 L. 워지스와 가족 사진]

[20면 삽화]

오토바이를 타던 폭력적인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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