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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전쟁의 무익함을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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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전쟁의 무익함을 체험하였다
  • 깨어라!—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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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8 4/15 17-21면

나는 전쟁의 무익함을 체험하였다

전 미군 위생병, 러셀 딕슨의 체험담

필리핀의 레이테 섬에서 1944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찌는 듯한 정글 속에서 적군—숲이나 땅 밑에 숨어 있는 일본군—을 찾기 위해 수색중이었다. 나는 당시 19세의 위생병이었으며, 대개는 대열 맨 뒤에서 전투중에 붕대를 가지고 응급 조치를 해줄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어찌해서인지 내가 대열 맨 앞, 수색대 선두에 서게 되었다. 나는 위장 폭탄과 급습에 대비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 장교 하나가 내 앞,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튀어 나오더니 흰 천을 흔들면서 “쏘지 마시오! 쏘지 마시오! 나는 시카고 출신이오, 시카고 출신이라니까요!”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우리의 방아쇠가 쏘기 직전까지 당겨져 있었기 때문에 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뒤에 있던 군인이 그의 총으로 몇방을 쏘았는데—빗나가고 말았다. 나머지 대원들은 그 장교가, “나는 시카고 출신이오”라고 계속 외쳤기에 사격을 중지하고 있었다.

그는 급히 주머니에서 몇장의 사진을 꺼내면서, 분명한 미국식 영어로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나는 무척 놀랐다. 이 정글 한 가운데에서 일본인 대위가 우리에게 시카고에 있는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그는 정말로 일본계 미국인이었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일본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기 위해 전쟁이 선포되기 직전에 시카고를 떠났었다. 그는 일본군에 징집되어 이곳 필리핀에서 미국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일행이 있소?”라고 물었다. 그는 자기 뒤 몇보 떨어진 곳을 가리키며 지하에 한 사람이 숨어 있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숨어 있는 사람에게 빨리 나오라고 명령했다!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일본 군인이 걸어 나왔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소?” “저 뒤에 있읍니다.” 그 일본인 대위는 자기 뒤의 정글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 대위와 협상을 시작했다. “당신이 부하들을 항복하도록 설득하면 당신을 포로로 데려가겠소.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을 죽일 것이오!”라고 우리 중사가 말했다. 그 장교의 이러한 대답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항복하도록 권한다면 우리를 죽일 겁니다.”

우리는 그 일본인 장교로 하여금 같이 있던 젊은 병사를 그의 부하들에게 보내도록 강요했다. 1분 남짓도 안 되어 총성을 들었다. 우리는 그 일본인 장교를 바라 보았는데, 그는 “그들이 그를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그 젊은 병사를 가엾게 여겼다. 그것은 내가 이전에 여러 번 경험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이 겪게 될 감정 곧 전쟁은 아주 무익하다는 느낌이었다.

우리 대원 두명이 그 장교를 우리 막사로 데려 갔고 나머지 대원들은 수색을 계속 하였다. 위생병이었기 때문에 나는 후진을 따라가며 우리 부원이 총탄을 맞게 되면 응급 조처할 준비를 하였다. 몇 미터 더 가서 우리는 그 나머지 적군을 발견했다. 짧은 총격전 끝에 그들은 전멸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진기한 일—일본계 미국인 장교를 사로잡은 것—을 성취하였는데 그는 비교적 소수였던 생포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는 살상을 보고 괴로와하였다.

나는 종종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오클라호마 주(미국) 시골 의사의 아들인 내가 이 외딴 정글 섬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실은 내가 만약 아버지의 지침을 따랐더라면, 결코 전장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독자는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모든 것이 평화로왔을 때

나는 1925년, 5형제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미국 남서부 지방의 평화로운 농가 분위기 속에 있는 오클라호마 주, 무어랜드라는 소읍에서 자랐다. 우리 부모는 1931년 이래로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진, 평화를 사랑하는 성경 연구생이었다. 부모는 우리들을 데리고 성서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으며, 나는 아버지가 축음기를 가지고 호별 방문하면서 이웃 사람들에게 증거할 때 따라다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읍들을 두루 다니면서 성서 공개 강연을 광고하던, 이른바 통보 행진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일에 흥미를 가졌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 농구와 야구를 좋아했다. 유별났기 때문이 아니라, 평범한 소년으로서, 흔히 그렇듯이 스포츠를 즐겼다. 그로 인해 나의 형들처럼 나도 16세 가량 되었을 때, 증인의 집회와 교제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는 영적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이 일은 분명히 우리 부모를 슬프게 하였을 것이다.

전쟁의 실상

1943년, 18세의 나이로 미 육군에 징집되어, 사병(GI)이 되었다. 증인과 연합하는 일을 포기하였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중립에 관한 강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투옥되는 일을 초래할 중립 문제를 회피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텍사스 주, 엘패소의 포트 블리스 부대에 배치되어 위생병으로 훈련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들이 왜 나에게 위생병 훈련을 받도록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우리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이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생병 훈련을 받은 후 나는 남태평양 섬인 뉴칼레도니아의 미군 보충 부대로 보내졌다. 나의 첫 번째 전투 임명 소속 부대는 뉴욕 부대인 괌의 제 77 보병 사단이었다. 호주와 일본의 중간 쯤에 있는 그 전략적인 섬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우리는 제 3 해군 함대와 함께 1944년 7월 21일에 그 섬에 상륙하였다. 우리는 즉시 전투에 들어갔다. 나는 곧 첫 번째 실전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괌에서 느낀 독특한 인상은 비,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 그리고 혼란스러움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맹렬한 포화와 박격포 공격을 당하였다. 발사되는 포구에서 일단 “쾅”하는 소리가 나면, 포탄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섬뜩한 소리가 뒤따른다. 나는 포탄이 각기 얼마나 가까이 떨어지나를 지켜보았다. 다른 대부분의 사병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여러 번 공포에 질렸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어리석게도 조건을 내세우며 이러한 혼란에서 구해 달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해 주신다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일인용 참호 속에서 위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신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밤을 두려워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땅에 바위가 많지 않다면 약 45센티미터에서 60센티미터 정도로, 가느다란 참호를 파야 했다. 이것은 적이나 동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잠을 잘 (꿈같은 희망!) 수 있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였는데, 밤의 규칙은,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쏘라. 질문은 나중에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몸이 지표면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심지어 빗물 속이나 진흙 속에서 자야 할 경우라도 마찬가지였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한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우리의 기본적 본능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하나님과 조국”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확언할 수 있다. 다른 많은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수많은 생명이 총과 화염 방사기, 박격포, 포탄, 자살 부대 공격, 칼, 총검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곧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빠져 나갈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나의 주된 목표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생존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태도는 일본군의 태도와는 달랐다. 그들은 사상적으로 철저히 주입되어 있어서 일본과 천황의 영광을 위하여 죽는 것을 영예로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미해군 함정과 수송선에 가미카제 (자살 부대) 비행기를 보낼 수 있었다. 육지에서 일본 자살 부대 군인들은 등에 폭탄을 담은 작은 가방을 묶은 채 우리측 참호로 기어들어와 우리측과 그들 자신을 가루로 만들곤 하였다. 잘못된 종교 사상을 사용해서 지도층은 그들을 얼마나 현혹시켰던가!

그러나 괌 도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파푸아뉴기니 북쪽 마누스 섬에서 얼마간 전열을 정비한 후 우리는 다음 전장인 필리핀의 레이테 섬으로 보내졌다.

“나는 죽게 될까요?”

레이테 섬에서도 역시 부상당하고 죽는 똑같은 전투의 반복이다. 나는 부상병을 찾아 치료하기 위해서 진흙 속을 기어다니느라 바빴다. 여러 경우에 나는 진흙 속에 있는 동료 옆에 엎드려서 지혈시켜 주고 그를 좀더 안전한 곳으로 끌어오기 전에 압박 붕대로 응급 조치를 해주곤 했다. 종종 나는 부상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소매나 바지를 찢고 재빨리 황산 모르핀 주사를 놓아야 했다. 어떤 병사들은 나에게 물었다. “상태는 얼마나 심한가요? 나는 죽게 될까요? 나를 여기에 버려 두지 말아요!” 때때로 너무나 돌보아야 할 사람이 많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들을 진정시켜 주고 돌봐 주러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해 주는 일뿐이었다. 사실 여러 경우에 도착하고 보면 때는 이미 늦었다. 그들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무익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의 다음 전투 임명지는 그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오키나와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이시마라는 작은 섬이었다. 나와 여러 전투에 동참했던 한 전우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아주 주의 깊었고 불필요한 모험을 하거나 전장에서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모든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살아 남기를 원했다. 어느날, 이시마에서 마지막 소탕 작전을 하면서 우리들 몇명은 적군의 총탄을 피하려고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그는 내 앞쪽 몇보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갑자기 우리 측 탱크의 기관총이 부주의하게 회전하면서 오른쪽으로 치우치더니 일제 사격을 가해 그와 그리고 다른 세명의 사병을 즉사시켰다.

또 다른 경우에 아군 비행기에 의해 기총 소사를 당해 아군 몇명이 죽는 일도 있었다. 인간의 실책과 전쟁의 무익함을 한층 더 절감케 하는 일이다.

같은 이시마 섬에서, 유명한 종군 기자인 어니 파일은 1945년 4월에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는 언젠가, “전쟁 생존자들이 다시는 이토록 잔인한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라고 자신의 소감을 기술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말에 동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험은 그 반대의 경우가 참됨을 증명해 준다. 인간의 잔인성은 끝이 없다.

박격포로 정확하게 겨눠지다

우리는 다음에 오키나와와 우리를 갈라 놓았던 해협을 건너갔다. 일본군은 참호나 동굴 속에 숨어 있었기에 이번에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산등성이의 커다란 바위 꼭대기에 앉아서 바로 내 앞에 있는 협곡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되는 일본군 박격포 소리가 들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포탄이 날아와 불과 몇 미터 앞에 떨어졌다. 전장의 외곽에 있는 나에게 포탄이 그처럼 가까이 날아온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에 박격포탄이 또 발사되어 바로 내 뒤에 떨어졌다! 적군이 나를 겨냥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는 급히 기어 내려가서 바위 뒤에 숨었다. 세번째 포탄이 내가 앉아 있던 곳을 정확하게 강타하였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여러 번의 위기 일발 사건 중 하나였다.

오키나와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는 치열하게 3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한 역사서는 이렇게 보고한다. “오키나와 전투는 중앙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희생이 큰 것이었다. 50만 가량의 군인이 이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미군은 12,500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49,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10,000명 이상의 일본군이 그 섬에서 전사하였다.” 거의 알려지지도 않은 2,300평방 킬로미터 정도의 한 섬을 놓고 적어도 122,000명의 군인과 수천명의 민간인이 죽은 것이다!

그러한 전투가 있은 후, 우리는 얼마간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보내졌다. 그때 나는 가슴 아픈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보충병들이 우리 사단으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그 중에 나의 동생 로저가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투를 겪지 않게 되었다. 1945년 8월 6일, 최초의 원자 폭탄이 일본의 히로시마 시에 투하되었다. 3일 후에 두번째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이로 인해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생각을 일깨워 준 죽음

내 동생과 나는 일본, 삿포로 점령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나는 제대하였고 동생은 일본에 1년 더 머물게 되었다. 나는 고향으로 향하였고 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오클라호마로 돌아와서 입대하기 전의 생활을 정리하고 대학에 복학을 해서 4년 동안 의학부 예과 과정을 거쳐 1년간 대학원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오클라호마 출신 학생인 사랑스러운 소녀, 낸시 우드를 만났다. 18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나의 충실한 동반자이다.

나는 여전히 부모의 종교인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나 자신의 관심거리들에 너무나 몰두해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에 비극이 닥쳤다.

당시 66세로 시골 의사로서 여전히 활동적이던 아버지가 심장 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우리 모두에게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우리 5형제는 아버지이자 좋은 벗을 잃은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근처 읍에서 온 여호와의 증인의 장례 연설을 듣게 되었다. 그 연설은 우리 모두에게 오래 지속될 영향을 주었다.

그 연사는 이 땅이 평화스러운 낙원 상태로 회복될 때 아버지가 부활되어 돌아올 것임을 성서로부터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수년 전에 내가 알고 있던 것을 기억나게 해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나와 낸시는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였다. 더 많이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세상이 얼마나 혼란에 처해 있으며 전쟁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는데, 전쟁에서 죽은 모든 생명은 정치 지도자들의 이기적인 야망을 증진시키기 위해 희생된 것이며 그러한 전쟁은 모든 나라의 교직자들이 묵과해 준 것이다.

사람들이 평화로운 곳에서 살게 될 때

나는 또한 1914년 이래 일어난 사건들이 예수께서 마지막 때에 관해 말씀하신 예언의 분명한 성취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한 세대 내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지상에서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져오실 공의로운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이 곧 일어나게 될 것이며 뒤이어 하나님의 왕국 정부의 평화스런 다스림 아래 이 땅이 회복될 것이다.—계시 11:18; 21:1-4.

낸시와 나는 1950년에 침례를 받았다. 대학 교육을 계속 받는 대신 우리의 일을 정리하여 1956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다. 수년 동안 우리는 미국 곳곳으로 여행하는 봉사를 하면서 전파하였는데, 나는 그곳들에서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섬겼다. 8년 이상 나는 또한 회중 장로들을 위한 천국 전도 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전 시간 봉사자들을 위한 파이오니아 강습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리고 지난 9년 동안 우리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일하고 있다.

[17면 러셀 딕슨의 사진]

[18면 삽화]

우리가 일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 앞에서 아내와 함께

[19면 사진 자료 제공]

U.S. Army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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