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8 8/1 24-27면
  • 재즈 드럼 연주자가 참된 행복을 발견하다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재즈 드럼 연주자가 참된 행복을 발견하다
  • 깨어라!—1988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어린 시절의 꿈이 실현되다
  • 참된 행복?
  • 유럽에서의 성공
  • 아내의 본
  • 자신과의 투쟁
  • 연주 그룹을 떠남
  • 참된 행복을 누림
  • 어느 고수(鼓手)가 행복한 증인이 되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9
  • 음악을 합당한 위치에 둠
    깨어라!—1981
  • 음악은 나의 인생의 전부였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3
  • ‘요루바’인들의 말하는 북
    깨어라!—1980
더 보기
깨어라!—1988
깨88 8/1 24-27면

재즈 드럼 연주자가 참된 행복을 발견하다

둥! 둥! 둥! 극장 무대의 현란한 불빛을 받으며, 드럼 연주자는 박자를 맞추었다. 나는 드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내 심장은 그 소리에 따라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1945년 1월, 제 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내 가족은 일본, 가쓰누마에 있는 외가댁으로 피난해 있었다. 전쟁 후 아버지는 그 도시의 청소년 악단 지휘자가 되었다. 그들의 연주회를 지켜 보면서 나는 드럼의 울려 퍼지는 둥둥 소리에 매료되었다.

고등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재즈 드럼 연주자가 되어야 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음악 교사는 음악 대학교에 진학하도록 격려해 주었고, 부모도 입학 시험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었다. 1964년, 나는 일본 전역에서 모인 많은 수험생 가운데서 도쿄 국립 대학교 예술학부 타악기과에 입학이 허가된 세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대학교는 일본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망을 느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는 학생들이 재즈 드럼 연주자가 되는 데 필요한 훈련을 전혀 시키지 않았으며 학생들도 재즈를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타악기를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다양한 기술을 연마하였다. 점차 나는 재즈 드럼 연주자가 되려는 내 꿈을 포기하고 유명한 관현악단에 입단해 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격스러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자네는 성공하지 못할거야”라고 한 관현악단 단원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 “자네가 대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새로운 단원들이 선정되었지.”

나는 낙담하고, 의기 소침해져서 나의 열정을 재즈 드럼으로 돌이켰다. 나는 ‘재즈의 세계에서는 드럼 연주 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가진 연줄이나 연고 관계 따위는 필요없다’고 자각하였다. 졸업이 가까와 옴에 따라 나는 여러 대학교의 재즈 클럽 연주회에 합류하였다.

어린 시절의 꿈이 실현되다

그러던 중, 1967년에, 나는 야마시타 요스케라는 피아노 연주자를 만났다. 그는 재즈를 연주할 뿐 아니라 정통한 음악 혁신가이자 연구가였다. 우리는 피아노, 색소폰, 드럼이라는 이색적인 3인조 그룹을 결성하였다. 처음에는 평론가도 청중도 모두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괴상하고 강렬한 재즈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의 공연장에는 청중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만족하였다. 요스케도 나의 연주를 좋아하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서로 더 예리하게 호흡을 맞추게 되면서, 변주곡도 풍부해졌다.

나의 드럼 연주 솜씨는 독특해졌다. 심벌, 스네어 드럼, 베이스 드럼, 톰톰 등을 조화를 맞춰 끊임없이 두들겨 댐으로, 드럼 부분은 항상 울려 댔다. 손발을 민첩하고 힘있게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청중을 놀라게 했고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가 도쿄에 있는, 잘 알려진 고세이 넨킨 홀 지하에서 청중에게 연주하고 있는 동안 일본의 요미우리 교향악단은 위층 대강당에서 연주회를 열고 있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그 교향악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발표가 실렸다. ‘어젯밤 지하 홀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우리의 연주회를 즐기는 청중에게 폐를 끼쳤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심심한 사과를 표하는 바입니다.’ 후에 그 홀은 방음 장치를 개선하기 위해 개축되었다. 그후로 나는 괴물 드럼 연주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참된 행복?

우리 그룹이 점점 더 성공을 거두게 됨에 따라, 나는 마음 내키는 대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일본 전역을 여행하면서 내가 원하는 때면 언제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었다. 그 무렵에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 유키코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아내는 여성 관현악단 타악기 연주자였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경쟁 상대가 될 만한 드럼 연주자라면 누구든 시기하였고 내 인기와 수입이 내 이상에 못미치자 욕구 불만이 커졌다. 공허감이 나를 엄습해 왔다. 나는 동료들에게 이와 같이 묻곤 했다. “일하고, 마시고, 이처럼 흥청거리는 일에 무슨 의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고민하지 말게. 중요한 것은 향락이야”라고 그들은 대꾸하였다. 그러나 향락 지향적 삶을 추구함으로 인해 나는 간에 병이 생겨 1972년 여름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심한 메스꺼움과 허약함을 경험하면서 나는 죽게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드럼 연주를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내는 그가 속한 관현악단과 연주 여행중이었다. 아내는 마침내 돌아와서 내가 얼마나 아픈지를 보고는 직업을 그만두었다. 아내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막 시작했던 참이었다. 나는 아내의 돌봄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아내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나는 꾸준히 회복되었고, 3개월간의 회복기를 거친 후에 우리의 음악 그룹에 다시 합류하였다. 우리는 때때로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출연하였고, 우리의 청중도 많아졌으며 수입도 늘게 되었다.

유럽에서의 성공

1973년에 우리는 첫 번째 유럽 연주 여행을 떠났다. 첫째 날 우리는 독일의 뫼르스 재즈 축제에서 연주했다. 우리가 연주를 끝냈을 때, 숨죽이는 순간이 지나가고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그 축제 후원자는 이렇게 물었다. “자, 여러분! 이 그룹을 내년에도 초청할까요?” 청중은 더 커다란 박수 갈채로 대답하였다. 그 다음날 신문에는 “일본에서 온 가미카제 드럼 연주자”라는 굵은 표제와 함께 내 사진이 실렸다.

그 다음해에는 우리의 출연료와 공연 신청이 늘었다. 우리는 베를린 재즈 축제, 도나우에싱겐 현대 음악 축제, 하이델 베르크 재즈 축제, 류블리아나 재즈 축제, 북해 재즈 축제 등에서 연주했다. 청중들은 계속해서 앙코르를 청했고, 어떤 축제에서는 열광적인 팬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고 무대 앞에 경찰들이 대열해 있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능가할 정도로 드럼 연주자로서 상당히 성공하게 된 것이다.

아내의 본

아내가 음악에 관여한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었지만, 이제 아내가 그리스도인 집회와 전파 활동을 위해 외출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속이 상했다. 나는,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며, 종교란 약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속임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내에게 새로운 종교를 버리도록 온갖 이야기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술집에서 술을 마구 마셔대고 있는데 아내가 찾아와 내 옆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아내에게 위스키를 끼얹으며 “꺼져 버려!”라고 소리쳤다. 아내는 침착하게 손수건으로 머리와 옷을 닦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술집 주인과 손님들이 나를 비난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곯아 떨어질 때까지 계속 술을 마셨고, 그후 아내가 나를 집으로 데려왔다.

또 다른 날 밤, 나는 아내를 아파트 밖으로 쫓아낸 뒤 문을 잠그고 쇠사슬로 단단하게 걸어 놓았다. 아내는 떠나기는커녕 문을 따고는, 쇠톱을 구해 가지고 쇠사슬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사람들이 자고 있는 건물 전체에 울려 퍼져서 나는 아내를 들어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포 자기한 나머지, 나는 자주 술에 취했다. 나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 아내는 당황하지도 않았고 나의 학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저녁에 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아내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을 읽어 주며 들어 보라고 간청하곤 했다. 아내는 매일 밤 내게 읽어 주었다. 내 반응은 “조용히 해!”라고 말하던 것이 점차 바뀌어 “더 읽어 봐요”라고 말하게 되었다.

아내는 또한 내가 연주 여행을 떠날 때 「파수대」와 「깰 때이다」지를 내 여행 가방에 살짝 넣어 주었다. 개종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에 나는 그 잡지들에 실린, 그리스도교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의 경험담을 읽기 시작했다. 비록 그런 이야기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긴 하였지만 읽은 내용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마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유난히 차분해져서 아내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나는 이렇게 자문했다. ‘아내가 성서를 연구하는 일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아내에게 성서를 대체할 만한 것으로 무엇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가?’ 그 다음날, 아내를 시험해 보았다. 나는 ‘성서를 전적으로 포기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혼하게 될거요’라고 도전하였다.

오랜 침묵 끝에 아내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혼하지 않을 거예요. 성서 연구도 중단하지 않을 거구요.”

안심이 된 나는 “나도 당신을 반대하던 일을 중단하겠소”라고 말해 주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나는 아내를 따라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좋은 행실과 합리적인 가르침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계속 집회에 참석하게 됨에 따라 점차 증인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막연하게나마, 내가 갖게 되는 공허감에 대한 해결책을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나는 또한 성서를 연구하려면 내 생활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과의 투쟁

그리하여 내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흡연과 부도덕에 대한 욕망으로 몹시 괴로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에 더 이상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로마 7:18-24) 자신을 강화하기 위해서, 나는 가능한 한 자주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했다.—히브리 10:23-25.

집회들은 내 사고 방식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영예, 부 그리고 세상적 쾌락은 더 이상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세상적 욕망이 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왕국회관에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나는 이전에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정신의 평화를 느꼈다. 처음으로 나는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연주 그룹을 떠남

1975년, 성서 연구를 요청한 직후에 나는 네번째 유럽 연주 여행을 떠났다. 전과 마찬가지로 청중은 열광적으로 환호하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전처럼 불타오르지 않았다. 그 후원자가 “내년에 다시 와 주십시오”라고 또다시 말했지만 나는 연주 그룹을 떠나야 겠다고 이미 결심하고 있는 터였다.

도쿄에 돌아와서 성서 연구를 즉시 재개했으며, 그후 곧 내가 즐기고 있던 참된 행복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국내 연주 여행 때, 항상 각별한 친밀감을 가져온 우리 후원자 중 한 사람에게 내가 가지게 된 새로운 희망에 관해 이야기해 주어야 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는 그와 이야기할 기회를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 것인가?

“행복이란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생각납니까?”라고 나는 물었다.

“병과 죽음이 없고,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함께 거하는 상태를 상상하게 되지요”라고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이처럼 꼭 알맞은 반응에 기뻐서 즉시 그에게 “그것이 바로 내가 이 그룹을 떠나는 이유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내가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그의 마음에 심은 씨가 계속 자라도록 해주셨다. 그는 후에 그가 살고 있는 지방에서 최초로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이 경험으로부터 얻은 즐거움은 드럼을 두들겨 얻었던 기쁨을 훨씬 능가하는 깊고도 지속적인 즐거움이었다.

참된 행복을 누림

내가 그룹을 떠난 후, 어떤 사람이 자기를 방문한 증인에게 “당신들이 모리야마를 죽였소”라고 말한 일이 있다. 사실이다. 재즈 드럼 연주자로서의 모리야마는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봉사자로서의 모리야마가 태어난 것이다. 나는 여호와께 대한 나의 헌신의 상징으로 1976년, 6월에 침례를 받았다.

1979년에 아내와 나는 전 시간 파이오니아 봉사자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래로 우리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참된 행복을 발견하도록 돕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있다. 나는 또한 도쿄와 나고야 회중에서 장로로서 섬기는 특권을 가졌다.

젊은 시절에 나는 행복을 드럼과 꼭 결부시켜서 생각했었다. 나는 여전히 이따금씩 드럼을 연주하긴 하지만 참된 행복은 음악 활동을 추구하는 일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나의 전 생활은 아내와 2년 전에 태어난 딸 사오리와 함께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참된 행복을 누릴 희망에 집중되어 있다.—모리야마 다케오의 체험담.

[26면 삽화]

(딸 사오리를 안고 있는) 아내와 나는 지상 낙원에서 참된 행복을 영원히 누릴 것을 고대한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