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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7 10/8 12-15면

십자군 원정—‘비극적인 착각’

「깨어라!」 이탈리아 통신원 기

약 900년 전인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막 시작될 때였습니다. 당신이 그 당시 서유럽에 살았다면, 사람들과 마차와 말과 배가 대규모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들이 기원 7세기 이래로 점령하고 있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이었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8개의 주요 십자군 원정을 열거합니다. 이러한 원정들은 동서양 관계의 역사에 상처를 남겼습니다. 십자군 원정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과 잔학 행위가 뒤따랐습니다. 마지막 주요 십자군 원정은 174년 후인 1270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십자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크루세이드”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크룩스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많은 원정대의 대원들은 십자가 상징을 옷에 꿰매어 달고 다녔습니다.

원인들

십자군 원정의 공식적인 명분은 예루살렘과 소위 성묘(聖墓)를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는, 중동에 살고 있던 자칭 그리스도인들과 이슬람교도들 간의 관계는 비교적 평화로웠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유발한 주된 요인은 유럽에 팽배해 있던 정치적·경제적·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11세기에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골에 있는 새로운 땅을 농사에 이용하였습니다. 도시 지역은 새로운 활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구는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근으로 인해 많은 수의 농민들이 도탄에 빠지자 다수가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그 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실업과 고난이었습니다. 종종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사회 계급 제도의 상층부에는 많은 봉건 제후들이 있었습니다. 이 전문 군지휘관들은 샤를마뉴 제국의 붕괴로 야기된 정치적 공백을 이용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로마 교회 역시 혼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1054년에 로마 교회는 동방 교회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습니다. 그에 더해, 많은 교직자들이 부도덕과 정치에 간섭하는 일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클레르몽에서 있었던 호소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1차 십자군 원정대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재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이 여러 가지 목적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서방 그리스도교국의 연합을 공고히 하고 로마 교회의 우위를 재확인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상류 계급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을 해소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상류 계급이 종교적인 이익과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대가로, “고상한” 대의를 위해 전문적인 군사 기술을 사용함으로 로마 교회의 부속 군대가 될 것이었습니다.

1095년 11월 27일에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공의회가 열리기 전, 우르바누스는 한 가지 호소를 하였습니다. 교회는 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며 혹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던 사제인 푸셰르 드 샤르트르는,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원정 도중에 죽거나 전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즉시 죄 사함을 베풀어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봉건 영주들은 동족 상잔을 멈추고 “이교도들”을 상대로 “거룩한”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에서 부르짖은 이러한 외침이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두 번에 걸친 출발

일단 출발 날짜가 1096년 8월 15일로 정해지자, 교황은 군사 작전을 맡은 평신도 영주들의 지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영토를 보호해 주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들보다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기부금을 냄으로 임무 수행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라는 강력한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정해진 날짜가 되기도 전에 출발하였습니다. 이들은 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인데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파우페레스 크리스티(그리스도의 빈민들)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중 선동가들의 지휘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1095년 말경에 대중을 상대로 전파하기 시작한 수사인 은둔자 피에르였을 것입니다.

중세 연대기 편찬가인 엑스의 알베르의 말에 따르면, 피에르는 전에 예루살렘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피에르는 환상을 보았는데, 그리스도가 나타나 그에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에게 가면 신임장을 줄 것이니 그것을 가지고 서방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고 합니다. 알베르의 말에 따르면, 그 꿈은 현실로 이루어져 피에르는 신임장을 받고 나서 로마를 향해 출발했으며 그 곳에서 교황을 만났습니다. 알베르의 설명에는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었지만, 어쨌든 그의 설명에 나오는 꿈과 환상과 신임장이 대중을 이끌어 나가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은둔자 피에르 주위로 모여 든 무리는 1096년 4월 20일에 쾰른을 떠났습니다. 파우페레스는 항해에 필요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걸어서 또는 다 낡은 마차를 타고 거룩한 땅까지 긴 여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자기들에게 식량과 무기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이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도착에 깜짝 놀라는 지방 주민들을 길을 가면서 약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은 부패한 주교들에게 돈을 빌려 준다는 비난을 받고 있던 유럽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은둔자 피에르의 추종자들은 루앙과 출발 도시인 쾰른과 같은 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엑스의 알베르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마인츠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조차 살려 주지 않고 그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을 보”자, “자기들의 형제와 아내와 어머니와 자매에게 달려들어 서로 살육하였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어머니가 젖먹이 자녀의 목을 베거나 자녀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할례받지 않은 자들의 칼에 죽느니 그들 자신의 손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아시아로 가는 도중에 있는 발칸 반도로 가는 여행 중에도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폭도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하자,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는 그러한 무질서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파우페레스가 아시아 해안으로 가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이들 중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과 병자들과 노인들이 이슬람 군대에게 학살당하였습니다. 단지 몇몇 생존자들만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096년 여름에 훈련받은 군대가 출발하였습니다. 이 군대는 당대의 유명한 지휘관들이 통솔하였습니다. 먼저 있었던 파우페레스의 무질서한 출발에 걱정이 된 교황 우르바누스는, 십자군의 동방 원정을 통제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출발할 사람들은 생계 수단이 충분히 있음을 증명해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목적은 여자와 아이와 노인과 빈민의 참여를 제한하는 데 있었습니다.

정복과 또 다른 학살

이 군대들과 제후들 그리고 생존한 파우페레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뒤 목적지를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또다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연대기 편찬가인 페트루스 투데보두스의 설명에 따르면,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포위 공격할 때 적을 학살한 다음, “모든 시체를 집단 무덤에 던져 넣고는 숫자를 세기 위해, 자른 머리들을 [자기들의] 진영으로 가져갔다. 바빌론 군주의 사절단에게 주려고 네 필의 말에 실어 해안으로 보낸 머리들은 예외였다.”

1099년 7월 15일에는 예루살렘이 십자군에게 함락되었습니다. 라이문디 데 아길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름끼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운 좋게 참수당한 [적들이] 있는가 하면, 화살을 빗발치듯 맞고 성벽에서 떨어진 자들도 있고, 불에 타 죽은 자들도 많았다. 도시의 거리와 광장에서는 잘린 머리와 손발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십자군은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폭력을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착각의 끝

이 승리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루살렘 왕국이 탄생하였습니다. 이 왕국은 동방에 자리잡은 봉건 영주들 간에 곧 벌어진 경쟁 때문에 그 존재가 위태로워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슬람교도들은 군대를 재조직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영토를 잃고 싶은 생각이 분명히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십자군들이 조직되었고, 1270년에 마지막 십자군이 조직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패배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그러한 모험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이 “거룩한” 전쟁들을 승인하셨다면 그분의 축복을 받으며 행동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은혜를 베푸셨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3세기 이후로, 교회 법학자들은 그러한 종교 전쟁들과 그러한 종교 전쟁들에서 교직자들이 한 역할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첫 번째 십자군 원정에 활기를 불어넣은 열정은 식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계속되면 결국 서방 세계는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그리스도교국 내부에 있는 적들, 즉 스페인의 아랍인들과 “이단자들” 그리고 북유럽의 이교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291년에 십자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크레 시가 이슬람교도들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묘’는 여전히 이슬람교도들의 손에 있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2세기 동안, 경제적인 이익과 정치적인 이익이 종교적인 문제보다 우선하였습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인 프랑코 카르디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때쯤에는 십자군 원정이 정치적·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문제로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 주교, 대수도원장, 왕, 기부금 모금원, 은행가들이 관련된 복잡한 권력 다툼이 된 것이다. 이러한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 예수의 성묘는 중요한 의미를 모두 상실해 버렸다.” 카르디니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군 원정의 역사는 그리스도교국을 통틀어 가장 큰 실수와 가장 복잡한 속임수의 역사이며, 또한 가장 비극적이고 어떤 면으로는 가장 우스운 착각의 역사이다.”

무시된 교훈

십자군 원정과 그 원정의 실패로부터, 경제적인 탐욕과 정치적으로 탁월해지려는 욕망은 광신적 행위와 학살을 저지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훈은 무시되어 왔습니다. 우리 지구의 여러 곳을 계속 피로 물들게 한 많은 분쟁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쟁에서 종교는 종종 혐오스러운 행위를 은폐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얼마 안 있어, 십자군 원정을 조장하였고 현대의 “거룩한” 전쟁을 계속 조장하고 있는 영은, 모든 거짓 종교 및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전체 제도와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시 46:8, 9; 요한 첫째 5:19; 계시 18:4, 5, 24.

[12면 사진 자료 제공]

The Complete Encyclopedia of Illustration/J. G. Heck

[15면 삽화]

위: 독일 보름스에 있는 유대인 공동 묘지—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저질러진 학살을 생각나게 한다

왼쪽: 십자군 병사의 석조 두상

왼쪽 끝: 어느 유명한 십자군 가문의 문장(紋章)

[자료 제공]

문장과 두상: Israel Antiquities Authority; 사진: Israel Museum,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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