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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만을 기억하라!”
  • 깨어라!—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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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1
깨91 12/15 3-5면

“진주만을 기억하라!”

오아후 섬의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본계 하와이 소녀로서 국민 학교 6학년인 애들라인은 호놀룰루 도심에 있는 자기 집 뜰에 있었다. 그는 날아오는 비행기들과 진주만 쪽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았다. 또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인가?

오아후 주민들은 군 작전과 공포 소리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해군 중장 윌리엄 S. 파이 역시 자신의 아파트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면서 아내에게 “육군에서 일요일 아침에 사격 훈련을 하다니 재미있는 일이군”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 일요일 아침은 1941년 12월 7일이었다.

13세 된 한 소년은 비행기 소리를 듣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소년은 가네오에 해군 항공 기지 사령관인 아버지에게 “아빠 저 비행기들에는 빨간색 동그라미가 있네요”하고 말하였다. 일본 제국 해군 함재기에 그려 있는, 떠오르는 태양을 묘사한 붉은 원만 보아도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습 공격이 벌어진 것이다!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H. E. 키멜 대장은 전화로 그 공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의 얼굴은 “그가 입은 제복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고 적기가 벌 떼같이 몰려와 그의 함대를 공격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어쩌다 비행기 몇 대가 일상적인 공습을 하는 것이 아님을 즉각 알았다. 하늘은 적기로 덮여 있었다.”

“도라, 도라, 도라”

어뢰와 폭탄이 터지면서 진주만의 정적이 산산이 부서지기 몇 분 전에,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에 탑승한 한 장교는 오아후 섬이 보이자 “공격하기에는 너무 평화로운 섬이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구름 사이로 틈이 열렸을 때 공격 부대 비행대장 후치다 미쓰오 중령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였다. 그는 “분명히 신은 우리와 함께 한다. 신의 손이 진주만 바로 위에서 구름을 거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오전 7시 49분, 후치다는 “도, 도, 도”라는 공격 신호를 보냈는데, 이것은 일본어로 “돌격!”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군이 완전히 불시에 당했음을 확신하고서 기습 공격이 성공하였음을 알리는 무전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그 유명한 무전 부호가 바로 “도라, 도라, 도라”(“호랑이, 호랑이, 호랑이”)였다.

기습 공격이 성공함

여섯 척의 항공 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기동 부대가 어떻게 오아후 섬에서 불과 37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몰래 들어가 레이더망을 피해 항공기 183대로 1차 파상 공격을 하여 미국 태평양 함대를 그토록 맹타할 수 있었는가? 한 가지는 일본 기동 부대가 사나운 겨울 바다에도 불구하고 북쪽 항로를 택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찰대는 진주만 북쪽이 가장 취약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항공 모함은 무전 연락을 일절 중지하였다.

하지만 전략상 중요한 그 섬에서는 레이더가 감시하고 있어서 어떤 비행기든 접근하면 탐지되었다. 그 결정적인 날 아침 7시경, 오아후 섬의 오파나 이동 레이더 기지에서 근무중이던 두 육군 병사는 레이더 스크린에 “필시 50대 이상”의 비행기임을 표시하는 듯한 특이하게 커다란 영상이 나타나는 것을 유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점에 대해 정보실에 알렸을 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정보실 장교는 그것이 미국 본토에서 오기로 계획된 미국의 B-17폭격기 비행대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미국 정부는 공격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알아채지 않았겠는가? 일본 정부는 워싱턴 주재 일본 사절들에게 14개 항의 전문을 보내 동부 표준시로 1941년 12월 7일 오후 1시 정각에 미국 국무 장관 코델 헐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그 시간은 진주만에서는 12월 7일 아침에 해당하였다. 그 전문에는 중대한 정치 문제에 있어서 일본이 미국과 맺은 협상을 파기할 것이라는 언명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그 전문을 도청하고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기억에 남을 그날 전 밤에 당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도청된 전문의 첫 13개 항을 받았다. 그는 그것을 읽은 후 실제로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군”하고 말하였다.

미국 관리들이 일본의 적대 행동이 임박했다고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그런 행동이 언제 어디서 있을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말한다. 대다수는 극동 어디쯤에서인가, 아마 타이에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오후 1시의 약속이 지연되었는데, 일본 대사관 직원들이 전문을 영어로 타자하는 데 느렸기 때문이다. 일본 대사가 헐에게 서류를 건네줄 때는 워싱턴 시각으로 오후 2시 20분이었다. 그때는 이미 진주만이 공습을 당한 때이며 2차 파상 공격을 당할 위기에 처한 때였다. 공습 소식이 이미 헐에게 당도하였다. 그는 사절들에게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은 채, 서류를 읽고 차갑게 고갯짓을 하여 그들을 내보냈다.

의도된 최후 통첩 전달이 지연된 일로 인해 미국은 일본에 대해 한층 더 격분하였다. 심지어 일부 일본인들도 그런 상황 때문에 진주만 공격이 전략적 기습 공격에서 비열한 공격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였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말은 미국인의 투쟁 정신을 고취시키는 표현이 되었다”고 1차 파상 공격의 비행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기술하였다. 그는 이렇게 인정하였다. “그 공격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도 지워지지 않는 불명예를 일본에 가져왔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2월 7일을 “치욕 속에 기억될 날”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날 진주만에서 8척의 전함과 다른 10척의 배가 침몰되거나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140여 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일본은 두 차례의 파상 공격을 감행하면서 약 360대의 전투기와 폭격기 중 29대를 잃었으며 소형 잠수함 5척을 잃었다. 미국인 233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140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국 여론은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외침 아래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뭉쳤다. 「진주만의 역사—일·미 관계 1931-1941」(Pearl Harbor as History—Japanese-American Relations 1931-1941) 책은 이렇게 말한다. “하원에서 단지 한 표의 반대 의견만을 제외하고, 의회는 (일반 미국 국민들처럼) 적을 패퇴시키려는 결의에서 한결같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지지하였다.” 기습 공격에 대해 보복한다는 것은 그들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에 대한 적대 행위를 개시할 근거가 되고도 남았다.

세계 평화를 위한 기습 공격?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들의 적대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하였는가? 믿을 수 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들은 하코 이치우 즉 ‘온 세계를 대가족으로’ 연합시킴으로써 세계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구호로 일본인들을 유혈 전쟁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1940년에 일본 내각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일본 국가 정책의 기본 목표는 나라의 기초가 되는 하코 이치우라는 고상한 정신과 일치하게 세계 평화를 굳게 확립하는 데 있으며, 첫 단계로 대동아(大東亞)에 신질서를 이룩하는 데 있다.”

하코 이치우라는 구호에 더해서 서구 세력으로부터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것이 일본의 전쟁 노력의 다른 주요 목표였다. 두 가지 대의 명분은 천황의 뜻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세계 정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국주의자들은 그 나라를 중국과의 전쟁으로 끌어들였고 그 다음에는 미국을 포함한 서방 강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의 연합 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군대가 미국을 무찌를 방법은 없다는 현실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배권을 유지하는 길은 한 가지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제국 해군이 “전쟁 시초에 미국의 주력 함대를 맹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미국 해군과 국민의 사기”를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저하”시켜야 한다고 추리하였다. 그래서 진주만 기습 공격이 구상된 것이다.

[4면 삽화]

공격당하는 진주만

[자료 제공]

U.S. Navy/U.S. National Archives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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