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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다운 가치관의 근원
  • 깨어라!—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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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2
깨92 2/1 6-10면

참다운 가치관의 근원

이 가치관을 적용하면 도덕 붕괴가 사라진다

사람은 별이 가득 찬 밤하늘을 바라볼 때, 외경감과 경이감에 사로잡힌다. 저 멀리 별이 총종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자신이 미소하고 보잘것없음을 느낀다. 오래 전에 시편 필자가 말한 이런 표현이 떠오를지 모른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3, 4) 시편 필자는 몇 천 개의 별을 보고도 자신의 미소함을 느꼈다. 오늘날 사람은 각각 수십억 개가 넘는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가 수십억 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미소함을 느낀다. 이런 질문이 연이어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내가 중요한 존재일 수 있는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짐승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주위의 다양한 생명체를 보면서 실용적인 목적을 이루게 되어 있는 놀라운 설계에 유의한다. 수천 킬로미터를 이주하는 새들, 추운 겨울 동안 동면을 하는 포유 동물들 그리고 그 외에도 사람이 상상조차 하기 오래 전부터 음파 탐지기, 냉방 장치, 제트 추진 장치, 탈염 장치, 부동액, 수중 호흡 장치, 부화기, 온도기, 종이, 유리, 시계, 나침반, 전기, 회전 기관 및 그 외의 여러 경이로운 것을 사용한 생명체들을 본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궁금해 한다. ‘이 모든 놀랍고 복잡 미묘하며 의도적인 고안물은 과연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 그 배후의 위대한 지성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금 말하건대, 짐승은 그런 점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것을 생각한다. 지상의 수많은 피조물 중에서 왜 유독 사람만이 위의 천체와 아래의 이곳 생명의 신비스런 것으로 인해 외경감과 경이감으로 감탄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다른가?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 하시[니라.]” (창세 1:26) 이것은 사람과 짐승 사이에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지상의 어떤 피조물도 사람과 도무지 비슷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사람이 왜 생각하는 피조물이고 주위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도덕적 가치관에 관심을 갖는지를 설명해 준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는가? 하나님의 속성과 특성 중 일부를 소유함으로써이다. 그런 속성과 특성 중에는 사랑, 자비, 공의, 지혜, 능력, 친절, 선함, 참을성, 정직, 진실성, 충성, 근면성, 창의성이 있다. 이런 훌륭한 특성들이 원래 사람 속에 프로그램되었다. 그러나 첫 인간 부부가 선택의 자유를 오용하여 반역을 하자, 그런 특성들은 왜곡되었으며 그로 인해 후손에게 완전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 특성들은 균형을 잃게 되었고, 일부 특성들은 사용하지 않음에 따라 잊혀졌다. 하지만 골로새서 3:9, 10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새 성품을 입고 다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에는 참다운 가치관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십계명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훈계가 있었다. (레위 19:18; 출애굽 20:3-17) 이런 가치관은 후대에게 유산으로 남겨야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율법에 순종하라고 말하였으며,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라.]” (신명 32:46, 47) 여러 세기 후에, 잠언 8:18은 그 법을 ‘가치 있는 유산’이라고 묘사하였다. (「신세」 참조)

도덕 붕괴를 회복시키는 가치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회가 이제는 아주 다원화되어서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단 하나의 가치관은 있을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문화로 인해 요구되는 가치관도 가지 각색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현대의 어떤 문제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을 실천하는데도 해결되지 않을 것인가? 혹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데도, 십계명에 들어 있는 원칙대로 생활하는데도, 갈라디아서 5:22, 23에 제시된 영의 열매를 산출하려고 노력하는데도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무엇이겠는가? 그 구절은 이러하다. “영의 열매는 사랑, 즐거움,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믿음, 온유, 자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반대하는 법은 없습니다.” (「신세」) 그중 어느 것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중 한 가지만으로도 사회의 당면한 재난 중 상당 부분을 제거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아요!’ 하고 소리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해결책이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손쉬운 대책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그런 해결책을 적용할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다. 현세대는 자유를 잘못 사용하고 고통스런 결과를 당할망정, 그 자유를 제한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보텀 라인/퍼스널」지는 “자제는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질문한다. 그 잡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시대의 성적 방임의 결과를 무서워한다”고 평한 후 계속해서 이렇게 지적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성욕에 온전히 몰두하는 것의 중요성을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 사람들에게는 건강을 위해 규정식을 하고 운동을 하고 흡연을 중단하고 생활 방식에서 자기 징계를 할 것이 기대된다. 오로지 성적 만족은 한없이 탐닉에 계속 빠지는 것을 허용하는 신성 불가침권이 부여된 듯하다.” 사람들이 가치관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적용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심은 대로 거두고 있다.

오늘날 그런 가치관은 멸시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며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될 것임이 이렇게 예언되어 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 [것이라.]” (이사야 5:20) 하지만 점점 더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사는 철학이 초래하는 썩은 열매를 보면서 현대의 도덕 붕괴가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종교와 가정은 도움이 될 수 있는가?

가치관 회복을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이 제안되었다. 한 가지는 종교다. 종교는 영적 힘을 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힘을 그리스도교국에 속한 정통 종교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일부 종교들은 이교주의에 빠져 삼위일체, 영원한 고초, 영혼불멸 같은 신성 모독적인 교리를 부활시켰다. 그런가 하면 대속과 창조를 배격하고 진화론이라는 과학 종교에 굴종한 종교들도 있다. 그런 종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충실도를 불신케 하는 고등 비평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질을 떨어뜨리고 더럽혀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게 하였으며, 그로 인해 젊은 세대는 오로지 위선과 허울뿐인 겉모양을 본다. 그렇다. 우리는 영적 힘을 얻기 위해 그런 병든 종교들이 아니라 여호와의 왕국을 세상의 유일한 희망으로 선포하는, 성서에 근거를 둔 유일한 참 숭배로 향해야 한다.

하지만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근원이 있다. 그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치관을 심어 줄 수 있는 곳인 가정이다. 태어날 때 시작된 애착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부모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자녀는 부모처럼 되기를 원하고, 부모가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모방하며, 부모의 행실을 흉내내고, 부모의 도덕관을 흡수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의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 체계에 받아들인다. 효과적인 방법은 장황한 훈계가 아니라 간단한 설명, 독단적인 지시가 아니라 쌍방 의사 소통이다.

자녀에게 참다운 가치관을 가르칠 뿐 아니라 실천도 하는 부모의 자녀는 그런 가치관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이다. 그런 자녀는 학교나 다른 곳에서 불건전한 역할 모델인 동배들에 의해 위험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잠언 22:6에서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가치 있는 교훈으로 훈련시켜야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 있는 본으로 훈련시키는 것이다.

유전자 속에 수록된 가치관의 잠재력

예수께서는 “자기들의 영적 필요를 의식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마태 5:3, 「신세」) 그 필요는 일부 정신과 의사들이 말하였듯이, 우리 속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본능적인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영적 힘이 있어야만, 오늘날 기세를 떨치는 거짓 가치관을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으며, 가치관의 잠재력을 타고났다는 사실과 일치하게, 교육학 교수 토머스 리코나는 “선을 위한 역량은 시초부터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부모는 자녀가 훌륭한 독서가 혹은 운동 선수 혹은 음악가가 되도록 도움을 주는 것과 같이 그런 본능을 키워 주어야 한다.”

TV 프로듀서 노먼 리어는 미국 교육 연합회의 전국 대회에서 연설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는 “우리 가운데 보다 세련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형이상학적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유별난 것 혹은 경박한 것으로 일축한 사람들—의 문제”를 인정한 후에 이렇게 말하였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건대, 삶에 대한 반응, 존재에 대한 반응, 자신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믿으려는 충동은 우리의 유전자 속에 수록된 방식의 일부이자 분리시킬 수 없는 특성이 될 정도로 매우 강하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다.”

리어는 대기업 그리고 40년 간 “새로운 가치 체계”를 전달하여 대중의 도덕과 개인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줌으로 많은 사회 병폐를 초래한 텔레비전을 지탄한다. 그러한 병폐 중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학교와 대학들, 마약 상용 증가, 십대 미혼모, 저축은 없이 부채의 심연에 빠져드는 가정 등이 있다. 리어는 이어서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가 수많은 사회 병폐에 대해서 말할 때, 내가 보기에는, 텔레비전의 지원을 받아 전체 문화를 몰락시켜 온 침투식 가치 체계에 대해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금 그는 “우리의 삶을 틀잡는 더 큰 세력과 신비가 있다는 신념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장되어 있으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 C. G. 융은, 종교는 “인간 특유의 본능적 태도로서, 인간 역사 전체를 통해서 그 점을 밝혀 주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옳고 그른 것을 감지하는 양심 역시 선천적인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 2:14, 15) “양심”은 “자신 속의 지식”으로서 우리의 행동을 고발하거나 변명하여 판결을 내리기 위해 우리 속에 소집된 법정과 같다. 하지만 우리가 양심을 위한 “법정을 멸시”한다면 양심의 민감도는 무감각해지고 기능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하나님만이 신비를 풀 수 있음을 안다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은 과학이 지구와 우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일부 과학자들은 그 모든 것 배후에 최고의 지성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기울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들은 성서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한다.

천체 물리학자 조지 그린스타인은 저서 「공생하는 우주」(The Symbiotic Universe)에서 “생명을 출현케 한, 어마어마하고도 있을 법하지 않은 우발 사건들의 놀라게 하는 연속 결과 같을 뿐인 것을 상술”하면서 “동시 발생한 것들의 목록이 있는데, 그들 모두는 우리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린스타인은 그 목록이 더 길며, 동시 발생은 우연히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모종의 초자연적 작용물이 활동한다는 생각이 커간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가 갑자기 뜻하지 않게 최고자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증거와 마주친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인가? 하느님이 개입하여 섭리에 따라 우리를 위해 우주를 고안하였는가?” 그는 그런 생각에 “강력한 거부감”을 가졌으며, “하느님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하였다. 그렇지만 “동시 발생”의 목록이 늘어남으로 인해 그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천체 물리학자인, 노벨상 수상자 프레드 호일은 저서 「지성 있는 우주」(The Intelligent Universe)에서 그린스타인을 고민케 한 것과 같은 신비한 동시 발생을 이렇게 논하였다. “그러한 특성은 연줄연줄 발생하는 행복한 우발 사건들처럼 자연계의 구조에 두루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에 필수적인 그러한 이상스런 동시 발생이 매우 많이 있으므로, 그러한 것의 원인을 제시하기 위하여는 설명이 되는 존재가 필요할 것 같다.” 호일 역시 그런 동시 발생이 우연히 있을 수 없다는 데 있어서 그린스타인과 의견을 같이한다. 결론적으로 호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의 기원은 지성적 존재’ 즉 ‘더 고등한 지성적 존재’, ‘우리보다 앞섰고, 생명에 적합한 구조를 의도적으로 창조하는 활동을 주도한 지성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였으나, 정통 종교의 관념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자연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그가 이해한 “무한히 탁월한 영”과 관련이 있다. 티머시 페리스는 그의 논고 “아인슈타인의 이면”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내가 자연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오직 매우 불완전하게밖에 파악하지 못하는 장엄한 구조다. 이 장엄한 구조는 생각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한 심경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신비주의와는 하등 관계없는 순수한 종교적 심경이다. ·⁠·⁠· 내 신앙은 무한히 탁월한 영에 대한 겸손한 경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영은 우리가 미약하고 덧없는 오성(悟性)으로 그 실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부분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계를 창조했는지 알기 원한다. 나는 하나님의 생각을 알기 원한다. 그 나머지는 모두 곁가지들일 뿐이다.”

가이 머치는 저서 「생명의 칠대 불가사의」(The Seven Mysteries of Life)에서 우주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 몇 가지를 논한 후 이렇게 평한다. “필시 최근 여러 세기 동안의 다른 어떤 과학자들보다도 훨씬 심도 깊게 미지의 세계로 지식의 경계를 넓혀 온 현대 물리학자들이 흔히 하느님으로 일컬어지는 우주의 총체적 신비를 받아들이는 데 대부분의 동료들보다 앞장서는 이유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다.”

하나님을 찾고, 유익을 얻으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

사람은 더듬거리고 있다. 사람이 더듬어 찾는 대상은 하나님이다. 바울 시대에 그렇게 더듬어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사도 17:27) 어떤 짐승도 하나님을 더듬어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조금이라도 가진 짐승은 없다.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졌고, 가장 고등한 짐승과도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격이 벌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성구에서 알려 주듯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다.]”

우리는 우리 주위 어디서나 그분의 창조물에 반영되어 있는 그분에 대한 증거를 본다. 로마서 1:20에서 이렇게 말하는 바와 같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설명할 수 없는 동시 발생과 복잡한 것들에 대해 과학자들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그리고 우주의 외경스런 경이에 대해 숙고할수록, 그러한 특징들 배후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지성적 존재를 감지하고 그들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학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은 여호와께 속한다. 그분은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표준을 세우신다. 행복한 생활의 지침이 되는 참다운 가치관을 주셨다.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도 주셨다. 사람들은 그분에게 억지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심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심은 것을 거두기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에 있는 그분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참다운 가치관을 주셨다. 그러므로 이사야 48:17, 18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라.]”

여호와의 간곡한 부탁을 청종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땅히 행할 길로 가고, 그들의 창조주의 명령을 들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강과 같은 평화와 바다 물결 같은 의로 유익을 얻을 것이다. 모두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치관을 적용하고 다시는 도덕 붕괴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모든 일은 언제 있을 것인가? 머지않아 “당신의 왕국이 임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응답될 때 있을 것이다.—마태 6:10, 「신세」.

[7면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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