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유대인 대학살 저는 왜 아무도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과감하게 입을 열지 않았는지에 대해 늘 의아하게 여겨 왔습니다. “유대인 대학살—누가 과감히 입을 열었는가”라는 일련의 기사(한국어판은 1995년 9월 1일 호)에서 그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과감히 입을 열었으며, 저의 동료 증인들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C. B., 미국
증인은 아니지만, 귀지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주제를 다룬 점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정함을 드러낸 이 사악한 일에 관해 객관적으로 다룬 귀지의 내용은 지금까지 접한 내용 가운데 가장 계몽적이었습니다. 당시 여러분의 동료 증인들이 나타낸 용기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세상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L. B., 영국
나의 아버지는 작센하우젠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맏형 역시 나치에 의해 투옥당하여 목숨을 잃었지요. 나치가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마음이 감동되어 이 기사에 대해 감사를 표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기술되었습니다!
F. D. J., 캐나다
저는 그 기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만이 유일하게 ‘침묵 속에서 목소리’를 발하였다는 데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 역시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에 사람들에게 히틀러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결국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B. W., 독일
본지는 히틀러에게 많은 정적(政敵)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기사는 특히 종교 단체들의 태만에 대해 언급한 것이며, 대부분의 종교들은 나치 정권에 협력하였습니다. 나치는 여호와의 증인을 그들의 주된 종교적 적대자로 구별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증인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특유한 수감자 신분 표시—그 유명한 보라색 삼각형—를 받은 유일한 종교 단체였습니다.—편집자.
일본에 닥친 지진 저는 “일본에 갑자기 닥친 재해—사람들이 대처한 방법” 기사(한국어판은 1995년 9월 1일 호)를 읽다가 울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지진 때문에 아주 친한 그리스도인 자매를 잃었습니다. 그 자매는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가 부활될 것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압니다. 회중과 협회로부터 받은 모든 영적, 물질적 지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날에 일어났던 일들이 생각날 때면,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T. M., 일본
증인들이 보여 준, 잘 조직된 신속한 행동에 정말 감탄하였습니다. 한국 회중에 있는 형제들이 보내 온 염려를 나타내는 편지를 읽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따뜻한 조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니 매우 행복하였습니다.
M. K., 일본
성희롱 “청소년은 묻는다 ··· 성희롱—어떻게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기사(한국어판은 1995년 9월 1일 호)에 대해 감사합니다. 저는 열일곱 살인데, 학교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한 남자 아이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 애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애와 그 애의 친구들이 음란한 제의를 하고 위협을 하면서 저를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는 전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이성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T. G., 포르투갈
저는 직장 동료에게 성희롱을 당하였으며,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종종 그러한 괴롭힘이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도 저는 거듭거듭 그만 괴롭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고용주에게 그 남자에 관해 알렸으며, 그 후로 그 남자는 저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 기사에 대해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여자들은 이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V. A., 미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