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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부짖는 사자에서 순한 어린 양으로
  • 깨어라!—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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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9
깨99 8/8 11-14면

울부짖는 사자에서 순한 어린 양으로

엔리케 토레스 2세의 체험담

나는 1941년에 카리브 해의 섬나라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났는데, 푸에르토리코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입니다. 서민층에 속했던 우리 부모는 로마 가톨릭교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도, 여동생들이나 (어렸을 때 죽은) 남동생이나 나도 종교 교육을 받은 적은 결코 없었으며 교회에 가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1949년에 푸에르토리코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우리가 정착한 곳은 뉴욕 시의 이스트할렘으로, 엘바리오라고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1953년까지 살았습니다.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내게는 무척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 언어 장벽 때문에 나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탈선하도록 영향을 미친 요소들

그 후 우리 가족은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하이츠로 이사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나는 동배들의 영향을 받아 거리의 폭력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그 폭력단의 두목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 후 나는 차량 절도를 일삼는 또 다른 폭력단의 두목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근 도박장 물주들의 해결사(불법 도박 빚을 수금해 주는 사람) 노릇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결국 강도질까지 하게 되어 열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학교도 그만두었습니다.

열여섯 살 때, 당국에서는 내가 유죄를 시인한 대가로 단지 5년 동안만 푸에르토리코에 유형을 보냈습니다. 나는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명망 있고 존경받는 퇴역 경찰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일 년 후에 할아버지는 나를 브루클린으로 돌려 보냈는데, 내가 술에 취해 싸움을 벌이고 불량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강도질까지 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에서 아버지가 한 역할

푸에르토리코에서 뉴욕 시로 돌아온 나는 아버지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계속하여 불경건한 생활을 하였으며 마약과 알코올 남용에 빠졌습니다. 또한 무장 강도를 일삼는 폭력단에 들어갔으며, 그리하여 1960년에는 체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며 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63년에 나는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는 강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뉴욕 시의 리커스아일랜드 교도소에서 복역한 다음 1965년에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살인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참으로 사납기 짝이 없는 사자와 같은 기질을 키워 왔던 것입니다!

재판에서 나는 뉴욕 주 북부의 단네모라에서 20년 간 복역할 것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그 교도소만의 독특한 문화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침례를 받고 할렘에 있는 한 회중에서 장로로 섬겼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자주 나를 찾아왔으며, 언제나 하느님과 그분의 이름과 목적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단네모라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나는 터무니없이 높은 이율로 돈을 빌려 주는 고리 대금업자 일당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인 1971년에 뉴욕 주에 위치한 또 다른 교도소인 아티카 교도소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폭동은 여러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세계 전역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보도되었습니다. 이 폭동이 일어난 후, 교도소장은 동일한 사건이 단네모라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려면 다른 수감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재소자들을 골라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도소장은 그러한 재소자들을 특별 수용 시설에 격리시켰습니다.

2200명의 수감자 가운데 나를 포함하여 200명가량을 격리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또 심사를 통해 사람들을 더 가려 내어 심하게 구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명 “행동 개조 치료”의 일환으로 음식에 약물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말썽을 일으켜서 격리 시설에 수용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잔인한 취급을 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며 그로 인해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손에는 수갑이,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으며 여러 차례 교도관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을 모욕하는 말을 끊임없이 들으면서도 견뎌야 하였습니다. 굴욕감을 느낀 데다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나는 3개월가량 계속된 격리 수용 기간 내내 음식을 아주 조금씩밖에 먹지 않는 식으로 단식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때문에 몸무게가 약 20킬로그램이나 줄었습니다.

아버지는 교도소 관리들에게 내 건강이 나빠진 이유를 물어 보았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절망감을 느낀 나는 정치가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와 같은 부당한 처우와 관련하여 도움을 베풀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거듭거듭 신문사들을 찾아가 특별 수용 시설 내에서 구타가 자행되고 있고 재소자들이 모욕적인 취급을 받고 있는 데다 그들이 먹는 음식에 약물까지 넣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뉴스」라는 한 신문에서만 반응을 보여서 그곳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아버지는 또한 뉴욕 주 올버니에 있는 교정(矯正) 국장도 여러 차례 찾아갔는데, 번번이 내가 정규 수용 시설에 수감되어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내가 정치가들에게 교도소의 상황을 알린 것도 묵살되었습니다. 더 이상 도움을 청할 데가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전 어느 때보다도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 아버지가 이전에 내게 해 준 이야기들 가운데 몇 가지가 기억 났습니다. 나는 기도로 하느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다

기도하기에 앞서,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 분께 기도하라고 아버지가 계속 권하던 기억이 났습니다. 나는 감방 바닥에 꿇어 엎드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만든 인생 행로를 택한 것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음을 기도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와께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열렬히 간구하였습니다. 이제 그분만이 나를 이런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께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또한 그분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지하 감옥 같은 그 독방에서 풀려나 일반 수감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단식 투쟁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나는 「신세계역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성서 번역판에 흥미를 느끼게 된 한 가지 이유는 그 녹색 표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지가 내 마음을 끌었던 이유는 죄수복이나 감방이나 벽이나 복도가 온통 잿빛이었고, 그것도 우울하게 만드는 잿빛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나중에 그 모든 것이 짙은 녹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아티카 교도소의 소요 사태 이후 교정국에서 그 색깔을 채택한 것입니다.

또한 나는 아버지가 내게 배달되도록 마련해 준 「파수대」와 「깨어라!」지에 실린 기사들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킨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나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은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체험담을 읽으면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지만 하느님께 충실을 지킨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나는 당연히 겪어야 할 고통을 겪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체험담들을 읽으면서 나는 마음이 감동되었으며,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고무되었습니다.

마침내 1년 후에 나는 가석방 위원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특별 수용 시설에서 고통을 겪은 일을 비롯하여 내 문제가 검토되었습니다. 기쁘게도 나는 1972년에 가석방으로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석방된 지 2주 후에 나는 할렘의 스페인계 거주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 참석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호와의 백성과 연합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과 백성에 관해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또한 아주 오랫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사회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전 생활 방식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또다시 마약과 범죄와 불경건한 생활 방식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다시 15년 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내 마음에 조금이나마 선한 것이 있음을 보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점 한 가지는, 우리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에 관해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교도소에서 성서 연구를 하다

다시 단네모라에 있는 교도소에 가게 된 나는 이번에는 여호와의 증인 봉사자와 매주 성서 연구를 할 수 있는 마련을 활용하였습니다. 후에 나는 뉴욕 주 북부에 있는 경비가 덜 삼엄한 교도소인, 미드-오렌지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이것은 단네모라의 경비가 매우 삼엄한 교도소에 있었던 나에게는 큰 변화였습니다.

미드-오렌지 교도소에서 2년을 지낸 후 나는 한 동료 재소자가 교도소 당국의 승인 아래 하고 있던 성서 연구에 적극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마련해 준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인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지식을 계속 섭취함에 따라 나는 마침내 성서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영적으로도 진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일곱 번이나 가석방 기회를 놓치고는 여덟 번째에야 가까스로 가석방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가석방시킬 수 없었던 이유로 제시된 것은 나의 “선천적인 범죄 성향”이었습니다. 나는 형기 15년 중 8년을 복역하고 석방되었습니다.

마침내 어둠에서 풀려나다

석방되자마자 나는 다시 곁길로 빗나갔으며 잠시나마 마약에도 빠졌습니다. 또한 어떤 여자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거 생활이 시작된 것은 사실은 1972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983년에는 다시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인 집회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연구와 집회 참석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약 사용을 중단하고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동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양심에 가책을 느낀 나는 동거하던 여자가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고 나와 결혼하게 해서 합법적인 부부가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동거하던 여자는, 성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지배하려고 지어낸 남자들의 책이며 결혼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결혼에 대한 하느님의 법을 존중하지 않는 여자와 부도덕한 관계를 유지하는 생활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와의 관계를 정리하고는 브루클린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내 사생활이 하느님의 법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과 그분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나를 얽매고 있던 모든 비성경적인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3년 간 성서 연구를 한 후, 나는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헌신하였으며 그에 대한 상징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늘 언급하던 이름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에 관해 알아보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나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많은 축복들을 베풀어 주실 때까지, 나는 단네모라에 있는 교도소의 지하 감옥 같은 감방에서 여호와께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낙원을 고대함

나는 여호와께서 이 땅 전체를 아름다운 낙원으로 변모시키실 때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시 37:11, 29; 누가 23:43) 또한 죽은 자들을 부활시켜 땅에서 영원히 살 기회를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또 다른 약속도 성취되기를 고대합니다. (요한 5:28, 29; 사도 24:15)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비롯하여 내가 사랑하는 이미 사망한 사람들과 그 밖에 때 이르게 죽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무덤에서 부활되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게 될 그때는 참으로 놀라운 때가 될 것입니다! 나는 자주 그 희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기쁨으로 벅차 오릅니다. 또한 두 누이와 누이의 자녀 중 몇 명이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는 것을 보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현재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시편 72:12-14에 기록되어 있는 시편 필자의 이러한 위로의 말을 알려 주는 것이 그저 흐뭇할 따름입니다.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내게 나타내신 참을성은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분이 자신의 백성에게서 원하시는 특성들을 내가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사나운 사자 같은 특성들이 아니라 어린 양이 가진 것과 같은 평화롭고 친절하며 온화한 특성들을 배우고 실천하게 해 준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알려 주는 바와 같이, “그는 ·⁠·⁠· 겸손한[온유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잠언 3:34, 「신세」 참조.

[12면 삽입]

“나는 강도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뉴욕 시의 리커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복역한 다음 1965년에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해에 살인 혐의로 또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참으로 사납기 짝이 없는 사자와 같은 기질을 키워 왔던 것입니다!”

[13면 삽화]

침례받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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