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와 그의 말씀에 대한 충성을 나타냄
1. 교인들은 성서에 대하여 흔히 어떻게 모순된 말을 하며, 이러한 상태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대 물질주의적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람들이 성서의 신빙성에 대하여 의심을 말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교인들에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가 하고 질문하면, 그들은 그렇다고 곧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사람들이 흔히 단서를 붙이기를, 성서에는 믿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고 언명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지식이 부족하거나 혹은 회의론자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야 여하하든지 간에,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을 표시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2. 많은 교직자들은 성서 기록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표명합니까? 예시하십시오.
2 심지어 종교 교직자들까지도 성서를 불신하는 성명을 공공연히 발표하며, 그러한 교직자들의 수는 점증하고 있읍니다. 그들이 흔히 공격하는 한 가지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에 관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처녀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 영국 국교회의 한 교직자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지성있는 이십세기 사람으로서 ··· 예수가 인간 아버지의 힘이 없이 한 처녀에게서 탄생하였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만일 처녀 탄생에 관한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국 국교회를 떠나라고 요구한다면 심각한 교직자난에 봉착하게 될 것이며 우리 신학교에 남아있을 교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선데이 익스프레스」지 1967년 8월 6일호.
3. 처녀 탄생이 현대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왜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불신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합니까?
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유대’ 처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잉태하고 낳았다는 성서 기록을 못믿겠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1:30-35; 마태 1:18-25) 물론 현대의 여성들 가운데서 처녀가 잉태하는 일은 없읍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신의 충분한 근거가 됩니까? 그러면, 이러한 교직자들은 실제 그들의 눈으로 본 사건만을 믿습니까? 그들은 지구가 형성될 때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지구가 시작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까? 그들은 또한 지상의 생명이 시작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으려고 합니까?
4. 창조주께서는 처녀가 잉태하도록 만들어 주실 수 있다는 것이 왜 비합리적이 아닙니까?
4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생명있는 처녀가 잉태하도록 하신 것과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있는 첫 인간을 창조하신 것 중, 어느 쪽이 더 쉬웠겠읍니까?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에게 생식력을 부여하신 전능하신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보이지 않는 활동력인 성령을 통하여 한 여인에게 잉태하도록 하실 충분한 능력이 있읍니다. 물론 인간으로서는 처녀인 ‘마리아’가 어떻게 잉태할 수 있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나, 그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들은 정상 환경하에서도 아기가 어떻게 잉태되며 모체 내에서 발육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 인간의 성장을 지시하는 “청사진”과 기타 필요한 인체 기관이 모두 일개 난세포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도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시 139:14-16)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하여, 임신과 출산 과정을 부정할 사람이 있겠읍니까?
5. 교직자들이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인할 때, 그들은 성서의 어떠한 다른 기본 교리를 배척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의 처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은 구원의 기초가 되는 대속 희생을 배척하는 것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 하면 인류를 대속하기 위하여는 완전한 ‘아담’의 생명에 상응하는 완전한 인간 생명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 전 2:5, 6) 만약 예수께서 단순히 화신한 영자였다면, 그는 대속물이 될 자격이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인간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받았다면, 그는 ‘아담’의 불완전성을 유전받았었을 것입니다. (욥 14:4)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는 완전하였읍니다. 그리고 그가 인간 어머니에 의하여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는 인간이었읍니다. 또한 그가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것이 수세기 전에 예언자 ‘이사야’(7:14)에 의하여 이미 예언된바 있읍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예수의 처녀 탄생에 관하여 알려 주는 바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의 다른 부분과 일치조화합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 좀 더 이치적으로 생각하여 보면 성서가 예수의 처녀 탄생에 관하여 말하는 바를 믿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믿도록 격려할 충분한 근거가 생깁니다.
6. 이러한 교직자들이 예수의 처녀 탄생을 믿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떠한 사실이 이것을 알려줍니까?
6 그러면 이러한 교직자들이 예수의 처녀 탄생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사에 간섭하신다는 생각을 배격하기 때문이 아니겠읍니까? ‘캐나다’의 한 교직자는 「하나님 없는 교회」란 책에서 이렇게 언명하였읍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란 책의 저자인 ‘워너 펠즈’는 영국 교회 목사이다. ··· ‘하나님이 설혹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지존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한 ‘잭슨’ 신부는 대학교 교목이다. 「그리스도교 무신론 복음」을 쓴 ‘토마스 앨타이저’는 ‘아메리카 대학교’ 성서학부 교수이다. 나는 성공회 ‘터론토’ 교구 간부직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영국 국교회 신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39면) 이러한 태도는 교직자층에서 흔히 보게 됩니다. 「내셔널 업저어버」지는 “‘하나님은 죽었다’는 ‘무드’는 40세 미만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 90%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도하였읍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 불충 사조가 교직자층에 풍미하고 있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당신까지 그들의 견해를 답습할 필요는 없읍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함
7, 8. (ㄱ) 어떻게 함으로써만 우리는 여호와와 그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스러움을 증명할 수 있읍니까? (ㄴ) 우리는 여호와에 관하여, 그리고 성서에서 그분이 하신일로 알려 주는 일을 그분이 왜, 어떻게 하셨는가에 관하여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읍니까?
7 당신이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진실로 충성스럽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는 성서에 포함된 내용을 알 필요가 있읍니다. 당신은 성서가 참으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읍니다. 당신은 성서 내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월등한 지혜와 사랑의 증거를 이해할 필요가 있읍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삼척동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읍니다. (마태 5:44, 45; 요한 1서 4:8-10)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성서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라고 알려 주는 모든 일을 그분이 어떻게, 왜 하셨는가에 관하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이 이치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한 사람은 로마 11:33에서 이러한 사실을 시인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고 말하였읍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판단의 깊음을 측량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한편,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기 뜻대로 하실 권리가 있음을 충성스럽게 시인하였읍니다. 왜냐 하면 ‘바울’은 36절에서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계시 4:11 참조.
8 그러므로 이 영감받은 성서 필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봉사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제공하라고 격려할 때, 아무런 이해도 없이 맹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로마 12:1에서 말하고 있듯이 ‘추리력을 사용하여’ (신세 참조)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추리력을 올바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9. 만약 성서가 우리의 개인 생각에 부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왜 우리는 난관을 가지게 될 것입니까?
9 성서 연구에 임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서가 그들 자신의 개인 생각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읍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 때문에 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 하면 성서가 알려 주듯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9)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잘못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던 ‘솔로몬’ 왕은 이 사실을 시인하여,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읍니다. (열왕 상 8:46) 이 말이 참됨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인간의 불완전한 견지에서 사물을 본다면, 하나님의 판단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성서가 인간의 불완전한 관점에 부합되어야 한다면, 성서가 하나님의 책이라는 증거가 되겠읍니까? 결코 될 수 없을 것입니다.—에스겔 18:29, 30.
10. 우리는 여호와의 길을 배울 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10 우리가 여호와의 길을 배울 때, 우리는 모름지기 우리의 사고방식을 조정하여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문제를 이렇게 결정하셨어야 될텐데 하고 논쟁을 펴는 대신, 하나님이 하신 일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갈망하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태도를 보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하나님의 판결로부터 배움
11. 사물을 올바른 관점에서 볼 때, ‘가나안’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연구하므로 어떠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까?
11 일예로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키라고 하신 판결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고려해 봅시다. 이 판결에 포함된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우리의 관점은 넓어지고, 믿음이 강화되고, 아마 이전에 느끼지 못한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서 기록을 함께 살펴봅시다.
12.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모세’는 백성에게 무엇이라고 교훈하였읍니까?
12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출하셨고, 그들은 이제 약속의 땅의 경계선에 야영하고 있었읍니다. 여호와의 예언자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니라].” (신명 7:1, 2) 그러나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13. 여호와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것은 그분의 신실성에 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13 ‘모세’는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명 9:5) 이 때로부터 약 4백 여년 전에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충실한 종인 ‘아브라함’과 공식 언약을 체결하셨고,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바로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을 ‘이삭’과 ‘야곱’에게 재확인하셨읍니다.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될 때가 왔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잊어버리지 않으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족이 그 땅에 있다는 이유로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읍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시지 않습니다. (창세 15:5-21; 디도 1:2)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를 상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다음에 다른 것을 주시는 법이 없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며,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바입니다.—하박국 2:3.
14. ‘가나안’족을 멸절시키는 결과로 무죄한 사람들이 피해를 받게 되었읍니까?
14 그러나 이러한 처사로 말미암아 그 당시 그 땅에 거주하던 무죄한 사람들이 부당한 피해를 당하지나 않았읍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읍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신명 9:5) 성서와 고고학은 그들이 극도로 타락한 민족이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간음, 동성애, 수간을 자행하였고, 그들은 우상신인 ‘몰렉’에게 자기 자녀까지 희생으로 바쳤읍니다. (레위 18:3, 20-25) 이들에 관하여 ‘메릴 엉거’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나안’인들의 신화에 나오는 잔인성과 색욕 및 방종은 그 당시 근동 지방의 다른 어느 곳보다 훨씬 더 악하였다. ‘가나안’ 사람들의 신들의 특성은 그들에게 도덕적 성격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신봉자들에게 최악의 습성을 갖게 했으며, 종교적 매음, 자녀 희생, 뱀 숭배 같은 그 당시 가장 문란한 관습을 따르게 했음에 틀림없다. ··· ‘우가리트’ 문학에 묘사되어 있는 ‘가나안’인들의 종교의 성격은 ‘가나안’ 거민들이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극도로 타락하였다고 한 성서의 진술이 ···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15. 타락한 ‘가나안’족에 대하여 내리신 여호와의 심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악행에 대한 여호와의 태도와 인간에 대한 그분의 오래 참으심에 관하여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됩니까?
15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읍니까? 한가지 명백한 것은 여호와께서 의를 사랑하시는 반면에 악을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시 45:7) 이 사건은 또한 여호와께서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범죄하자마자 곧 성급하게 멸망시켜 버리시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창세기 15:16에서 알려 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사는 ‘아모리’족의 죄악을 사백여년 동안 주목해 오셨지만, 그때 그 족속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오래 참으셨읍니다. 심지어 ‘가나안’족에 대하여 심판을 집행하실 때가 임박하였을 때에도, 여호와께서는 ‘여리고’ 성의 ‘라합’, ‘기브온’ 성과 인근 성의 주민들을 살려 주셨읍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를 믿었고 ‘이스라엘’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두 가지 면으로 안심시켜 줍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악행을 무한정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피조물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그들에게 긍휼을 보이신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에스겔 33:11; 베드로 후 3:15.
16. ‘가나안’ 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여기 나타난 원칙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에 흐르지 말아야 합니까?
16 ‘가나안’족의 자녀들에게 일어난 일 또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악한 부모들이 처형당할 때 자녀들도 함께 죽임을 당하였읍니다. 이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가 감상주의에 흐르지 않고 냉정하게 사리를 따져보면, 이 원칙으로부터 우리는 커다란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다.
17, 18. (ㄱ)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미성년 자녀에 대한 전적 책임을 누구에게 맡기셨읍니까? (ㄴ) 그러면 자녀들이 부모의 행동의 결과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막아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은 왜 원칙에 어긋납니까?
17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특권이지만, 특권에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미성년 자녀들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부모들에게 맡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언명하셨읍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신명 30:19, 20)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취하는 행동에 따라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가져 올 수도 있었고 사망을 가져올 수도 있었읍니다.
18 우리는 자녀들이 부모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유익을 받거나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읍니다. 만약 부모가 근면하고 인자하며, 여호와를 독실히 섬긴다면, 그 자녀들은 크게 유익을 받을 것입니다. 그 반면 만약 부모가 나태하거나 술주정군이라면, 그 부모의 악행의 결과를 자녀들이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기대할 권리가 그 부모에게 있겠읍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 부모의 책임을 대신 떠맡으시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탁해 줄 의무가 있겠읍니까? 그러한 사람이 책임을 회피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방조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원칙을 따르시는 것이 되겠읍니까? 분명히 그렇지 못합니다.
19. ‘가나안’ 자녀들에게 죽음을 택해 준 것은 누구였읍니까? 그들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읍니까?
19 ‘가나안’ 부모들은 그들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생명을 택할 수도 있었읍니다. ‘라합’이 그렇게 하였고, ‘기브온’ 성과 인근 세 성의 ‘가나안’ 거민들도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들은 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계심을 인정하였고,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 편에 섰읍니다. 이 때문에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구원을 받았읍니다. (여호수아 2:1-21; 6:25; 9:3-21)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읍니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과 그들 자녀들을 위하여 스스로 사망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20. 오늘날의 부모들은 그들의 미성년 자녀들이 여호와의 신원의 날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어떻게 보일 수 있읍니까?
20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무절제한 생활을 택한 부모들은, 여호와께서 임박한 신원의 날에 그들의 미성년 자녀들이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살려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읍니다. 올바른 숭배의 본을 세우고, 자녀들을 그 길로 인도할 책임은 부모에게 있읍니다. (에베소 6:4) 자녀들은 당신에게 얼만큼 소중합니까? 당신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합니까?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께 생명을 바쳤고, 현재 그 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분에 대한 당신의 충성을 증명하고 있읍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가나안’ 거민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생생하게 알려 주는 원칙을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그 원칙을 충성스럽게 옹호하고 있음이 틀림없읍니다.—잠언 2:7, 8.
압력을 받을 때에도 충실함
21. 많은 그리스도인 청소년들은 압력을 받을 때에도 학교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을 나타냅니까?
21 충성과 불충성은 고난이나 압력을 받을 때에 특히 잘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두는 이러한 사태를 경험합니다. (디모데 후 3:12) 당신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롱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어떠합니까? 예를 들어, 당신이 학생인데, 수업시간에 선생이나 동급생이 성서 기록을 경시하는 말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을 나타냅니까? 세계 방방곡곡에서 그리스도인 청소년은 바로 이렇게 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러한 기회를 포착하여 담대히 진리를 변호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이렇게 한다고 하여 동급생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베드로 전 2:19, 20)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신앙을 장시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기도 하여, 그 결과로 여호와와 여호와의 목적을 훌륭하게 증거할 수 있었읍니다.
22. 고대 ‘바벨론’에서 세 ‘히브리’ 청소년은 여호와와 그분의 법에 대하여 어떻게 충성을 나타냈읍니까?
22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항상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고수합니다. 고대 ‘바벨론’에 살던 ‘히브리’ 청소년들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여호와의 법을 범하라는 압력을 받았읍니다. 제국의 통치자인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세운 거대한 신상에 절하라는 칙령을 이들이 거절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대노하였읍니다. 그 이유는 그 왕이 ‘유대’인의 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읍니다. (다니엘 2:46-49) 그러나 교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성은 마비되었읍니다. 그는 이 소년들에게 칙령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였읍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에게 불경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법이 우상 숭배를 금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우주의 최고 주권자로 인정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여호와께 충성을 나타내야 하였읍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이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고수함으로써 충성을 나타냈읍니다.—다니엘 3:13-24.
23, 24.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은 인간 정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어떻게 나타냅니까?
23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충성 문제와 관련하여 비슷한 시험을 겪었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고등 법정에 호출을 당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전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읍니다. 그들은 성경을 전혀 읽지 말라던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관헌들은 한 가지 점을 불쾌하게 여겼읍니다. (사도 4:15-18) 마찬가지로 현대의 일부 국가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성서를 읽거나 그들끼리 토론하는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전파하는 것은 질색하여 관헌들이 압력을 가합니다. (마태 4:10)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예수께서 하신 대로 참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전파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요한 17:14) 그들은 사람들이 세상사에 개입하고, 규정된 헌신의 행동을 통하여 국가에 충성을 바칠 것을 원합니다.
24 정부 당국이 그러한 요구를 할 때,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세상의 통치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성서의 일부분을 대중에게 알려 주지 말아야 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인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들이 해야 할 충성스러운 행동이 무엇인가를 밝혔읍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두번째로 법정에 호출되었을 때, 사도들은 그들의 입장을 재확인하여,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말하였읍니다.—사도 4:19, 20; 5:29.
성서의 도덕 표준을 충성스럽게 옹호함
25-27. 교직체가 성서의 도덕 표준을 충성스럽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읍니까?
25 사도들과는 대조적으로, 말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인간의 전통으로 서슴치 않고 대치하던 자들이 ‘예루살렘’에 있읍니다. (마태 15:1-9) 현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체도 그들과 동일한 태도를 나타내고 있읍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반박합니다. 그들이 특히 반박하는 한 가지는 성 도덕에 관한 문제입니다.
26 성서를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알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로마 13:9)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 전 6:18)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 ··· 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 전 6:9, 10) 위에 인용한 성귀가 가르치는 점에는 모호한 점이 하나도 없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간음과 음행과 동생애를 엄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옹호합니까? 감독교회 신학교 교수인 ‘조셉 플레처’는 소위 “새로운 도덕”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 윤리에는 결혼외 성교를 반대하는 것이 전혀 없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좋다”고 말하였읍니다. (「콤몬윌」지, 1966년 1월 14일호) 이 정도로도 만족하지 못한지, 장로교회 목사 ‘고든 클랜턴’은 「크리스찬 센추리」지(1969년 1월 8일호)에서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호 적절히 이해하고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행해진 결혼 밖에서의 성 관계는 확실히 좋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까지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엄격한 도덕관을 약화시키는 것이 교회의 의무라고까지 역설하였읍니다. 그러나 현 추세는 이보다 더 심합니다.
27 동의하는 성인간의 동성애를 범죄 행위로 규정한 법을 영국 의회에서 개정한 데 관하여 보도할 때, 「뉴욕 타임즈」지(1966년 2월 12일자)는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교회들은 선두에 서서 개정을 요구하였다. 영국 교회와 ‘로마 가톨릭’과 감리교회는 [철회] 건의안을 채택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주장하였다.” 90명의 감독교회 사제들이 1967년 ‘뉴욕’에서 회합을 가졌을 때, 그들은 교회가 동성애를 어떤 경우에는 “좋은 일이기도 함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네델란드’에서는 동성애를 하는 두명의 남자가 ‘로마 가톨릭’교 사제의 주례로 “결혼”하였읍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한 자들이 그리스도인 교직자들이라고 하니 더욱 가증스럽습니다.—디도 1:16.
28. 우리가 성서의 도덕 표준을 충성스럽게 옹호하는가 여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읍니까?
28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이러한 교직자들의 행동이 잘못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짓이며 그들이 이러한 이유로 저주받고 있음을 압니다. (로마 1:32)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들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말로만 잘못이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말로는 그러한 행동이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남이 안보는데서 음행이나 간음이나 동성애나 혹은 그러한 행동으로 인도하는 방탕한 행동을 자행한다면, 그 사람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불결합니다. 자타가 무엇이라고 공언하든지 간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 아닙니다.—데살로니가 전 4:7, 8; 호세아 4:12.
29, 30. 도덕 문제에 대한 마음 태도는 여호와께 대한 충성과 어떠한 관계가 있읍니까?
29 충성은 마음과 관련이 있으며, 마음은 사람의 내부 상태를 의미합니다. (누가 5:22)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외부로 어떻게 나타나 보이는가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도 관찰하십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언 21:2.
30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평가하실 때,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 상태입니까? 좋은 상태입니까? (이사야 65:14) 당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배로 여기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까? (시 119:11, 97) 당신은 마음 속 깊이 부도덕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읍니까? 당신은 악한 것을 진정으로 미워합니까? 성서 시편 필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면하면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저가 그 성도[충성스러운 자, 신세]의 영혼을 보존”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 97:10) 만약 우리가 이 충고를 청종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충성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분명히 여호와의 눈에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자들 편에 서라
31. 성서의 가르침을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을 어떻게 나타낼 것입니까?
31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할 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인 성서에서 말씀하신 바를 참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그것을 반영할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이 그것을 나타낼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친구를 선택할 때에도 반영될 것입니다. 당신은 시편 149:1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일치하게 생활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충성스러운 자, 신세]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32, 33.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조직을 발견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에 대하여 어떠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까?
32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숭배를 위하여 모인 교회 모두가 여호와와 그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자들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들고 교회에 다닐지 모릅니다. 아마 설교시 성귀가 몇 귀절 인용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많은 교리와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교국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으로부터 너무나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크리스찬 센추리」지(1962년 9월 5일호)는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정직하게 말한다면, 먼지가 쌓이고 부고장이나 끼어 있는 성서가 ‘프로테스탄트’의 현상을 더 잘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한 ‘가톨릭’계 신문(1965년 1월 16일호 「룩셈부르크 보르트」지)은 ‘룩셈부르크’의 상태에 관하여 이렇게 논평하였읍니다. “우리 ‘가톨릭’ 신도들은 물론, 우리 사제들의 절대 다수가 성서를, 아니 신약조차도 통독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 서글픈 현상이 아닌가?”
33 이러한 사태는 최근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1929년에 침례 교회, 조합 교회, 감독 교회, 복음 교회, ‘루터’ 교회, 감리 교회, 장로 교회 신학생 500명에게 “성서는 전혀 전설이나 신화가 없는 책이라고 믿는가?”라는 설문을 제시한 적이 있었읍니다. 이들 신학생 중 95%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읍니다. 분명히 그들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읍니다.
34. 전세계적으로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열망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읍니까?
34 만약 당신이 그러한 교회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낼 필요가 있읍니다. 사실 지구 도처에서 수십만명이 그렇게 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인 성서에 대하여 불충실한 종교 조직과는 여하한 관계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후 6:14-17; 계시 18:4)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교회 참석을 중단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 숭배하기를 중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25,000여개 회중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숭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성서가 말하는 바를 믿습니다. 그들은 성서가 가르치는 도덕 표준을 옹호합니다. 그들은 거의 어느 곳에서나 매 주일 이웃 집을 방문하여, 다른 사람들도 성서를 연구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들은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성서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압도적인 증거를 기꺼이 알려 줍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고 성서에 일치한 생활을 하도록 돕기 위하여 무료 가정 성서 연구 마련을 시행하고 있읍니다.
35. 여호와께 충성을 증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미래가 놓여 있읍니까?
35 여호와께 충성스러운 이러한 종들 앞에는 얼마나 놀라운 미래가 놓여 있읍니까!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 그 성도[충성스러운 자, 신세]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시 37: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