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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02 3/1 26-30면

클로비스의 세례—프랑스 가톨릭교의 1500년 역사

“교황의 이름으로, 꽝.” 1996년 9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할 예정이었던 프랑스의 한 교회에서 발견된 가설 폭탄에는 이와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황이 다섯 번째로 프랑스 본토를 방문했을 때 끊이지 않았던 반대 가운데 극단적인 한 가지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해에는 약 2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교황과 함께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왕의 가톨릭교 개종 1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프랑스의 도시 랭스로 왔습니다. 이 왕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의 세례가 프랑스의 세례로 일컬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행사를 기념하는 것이 그토록 논쟁을 불러일으켜 온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쇠퇴하는 제국

클로비스는 기원 466년경에 프랑크족에 속하는 살리 지족(支族)의 왕 힐데리히 1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기원 358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정복된 후, 이 게르만계 민족은 로마의 국경을 수비하고 로마 군대에 군인을 대주겠다는 조건으로 현재 벨기에가 위치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 부족 사람들은 그 지역에 거주하던 갈리아계 로마인들과 긴밀하게 접촉하게 되어 점차 로마화되어 갔습니다. 힐데리히 1세는 로마인들의 편이 되어, 서고트족이나 색슨족과 같은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의 침략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갈리아 지역 로마인들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갈리아 속주는 북쪽의 라인 강부터 남쪽으로 피레네 산맥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원 454년에 로마의 아에티우스 장군이 죽자, 그 지역은 정권 공백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기원 476년에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몰락하고 서로마 제국이 사라지면서 그 지역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해졌습니다. 그 결과 갈리아는 그 지역 경계 내에 사는 여러 민족들 중에 어느 하나가 따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잘 익은 무화과와 같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클로비스가 자신의 왕국의 경계를 넓혀 나가기 위해 애쓰기 시작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기원 486년에 수아송 시 근방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그는 로마를 대표하여 갈리아를 다스리던 마지막 통치자를 물리쳤습니다. 그는 이 승리로 북쪽의 솜 강과 갈리아의 중심부 및 서쪽 지역으로 흐르는 루아르 강 사이에 있는 모든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왕이 될 인물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과는 달리, 프랑크족은 여전히 이교도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클로비스가 부르군트 왕국의 공주 클로틸드와 결혼한 일은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던 클로틸드는 남편을 개종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쏟았습니다. 기원 6세기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쓴 역사 기록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기원 496년에 톨비아크(독일의 췰피히) 전투에서 알라만족과 싸울 때, 만약 아내의 하느님이 그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면 이교 신앙을 버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클로비스의 군대는 패배 직전에 있었는데도, 알라만족의 왕은 죽임을 당했고 그의 군대는 항복했습니다. 클로비스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아내의 하느님이 그에게 승리를 준 것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클로비스는 기원 496년 12월 25일에 “성” 레미기우스에 의해 랭스의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세례받은 때는 그보다 좀 더 나중인 기원 498년이나 499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클로비스는 남동쪽으로 부르군트 왕국을 점령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서고트족과 벌인 전쟁은 기원 507년에 푸아티에 근처의 부예에서 그들을 격퇴시킴으로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승리로 그는 갈리아의 남서쪽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클로비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로부터 명예 집정관의 직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클로비스는 서방의 다른 모든 왕들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게 되었고, 갈리아 지역 로마인들이 보기에 그의 통치권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동쪽으로 라인 강 유역에 살던 프랑크족들의 영토도 지배하게 된 클로비스는 파리를 자신의 왕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말년에 클로비스는 성문법인 렉스살리카를 공포하고, 오를레앙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규정함으로 자신의 왕국을 강화시켰습니다. 아마도 기원 511년 11월 27일에 사망할 때, 그는 갈리아의 4분의 3을 지배하는 단독 통치자였습니다.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클로비스가 가톨릭교로 개종한 때를 가리켜 “서유럽의 역사를 결정짓는 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이교도 왕의 개종이 그렇게도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사건이 의미심장했던 것은 클로비스가 아리우스파와 대립하고 있는 가톨릭교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아리우스주의로 인한 논쟁

기원 320년경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혁신적인 사상을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 곧 같은 실체라는 생각을 부인했습니다. 아들은 시작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되거나 아버지와 동등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골로새 1:15) 또한 성령에 관하여는 그것이 인격체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나 아들보다는 열등하다고 믿었습니다. 폭넓은 지지를 받은 이 교리는 교회 내부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원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추방되었고, 그의 가르침은 정죄되었습니다.a

하지만 그것으로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로 출현한 황제들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간에 편을 들면서 이 교리에 관한 논란은 60년가량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기원 392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하는 정통 가톨릭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동안 고트족은 이미 게르만족 주교인 울필라스에 의해 아리우스파로 개종하였습니다. 다른 게르만계 민족들도 재빨리 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b

클로비스 시대에 갈리아의 가톨릭 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리우스파에 속한 서고트족은 주교들이 사망하면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게 함으로 가톨릭교를 억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게다가 교황권이 두 개로 분열되어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반대파 사제들을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교회는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에 더하여, 일부 가톨릭 저술가들은 기원 500년에 세상 끝이 올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따라서 프랑크족의 정복자가 가톨릭교로 개종한 일은 “성자들의 새로운 천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길조로 여겨졌습니다.

그렇지만 클로비스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종교적인 동기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분명 정치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클로비스는 가톨릭교를 선택함으로써, 주로 가톨릭교를 믿었던 갈리아 지역 로마인들의 민심을 얻었으며 영향력 있는 교직 계급의 지원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클로비스가 그의 정치적 경쟁자들보다 우위에 서게 해 주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은 미움의 대상이던 아리우스파 이단자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해방 전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클로비스의 참 모습은?

1996년에 있었던 기념 행사의 준비 기간에 랭스의 대주교인 제라르 데푸아는 클로비스를 가리켜 “잘 계획하여 행해진 분별 있는 개종의 상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에르네스트 라브스는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개종했어도 클로비스의 성품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부드럽고 평화를 강조하는 복음서의 교훈이 그의 마음을 감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또 다른 역사가는, “그는 오딘(고대 노르웨이의 신) 대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을 뿐 이전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소위 그리스도교 개종 이후의 행동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클로비스는 자신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는 일에 착수하여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남김없이 차근차근 제거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족들을 촌수가 먼 사람까지 모조리” 죽였습니다.

클로비스가 죽자, 그를 잔혹한 전사에서 명망 높은 성인(聖人)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신화 만들기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1세기가 지난 후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남긴 기록은 클로비스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첫 번째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와 연관지으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클로비스가 30세 때 침례받았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그레고리우스는 클로비스를 그리스도와도 유사한 인물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누가 3:23.

이러한 작업은 랭스의 주교였던 앵크마르에 의해 9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대성당들이 순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전임 주교였던 “성” 레미기우스의 전기를 쓴 것은 자신의 교회의 명성을 높이고 부를 늘리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앵크마르의 기록에 보면, 클로비스가 세례받을 때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그를 기름부을 기름이 들어 있는 작은 병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신 것에 대한 내용을 근거로 삼은 것임이 분명합니다. (마태 3:16) 그렇게 하여 앵크마르는 클로비스와 랭스와 군주 정치 사이에 연관성을 부여하였고, 클로비스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라는 사상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c

논란이 된 기념식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민족에 의해 프랑스의 왕으로 선택된 클로비스야말로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클로비스의 세례 1500주년 기념식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05년 이래 공식적으로 교회가 국가와 분리된 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종교적인 기념행사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랭스의 시의회가 교황의 방문 기간에 사용할 단(壇)을 만들기 위해 자금을 지출할 계획을 발표하자, 한 단체는 법정에서 그러한 결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 내어 그 결정을 번복시켰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가 또다시 프랑스에 도덕적·세속적 권위를 행사하려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기념식 행사는 클로비스를 극우 정당인 국민 전선과 근본주의적인 가톨릭 단체들을 상징하는 인물로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로 더욱더 복잡해졌습니다.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기념식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톨릭교가 갈리아 지역 로마인들에게 이미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클로비스의 세례 때문에 프랑스가 가톨릭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의 세례로 인해 프랑스가 하나의 국가로서 탄생하게 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샤를마뉴의 왕국이 분열된 기원 843년을 프랑스 국가가 탄생한 때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며, 클로비스가 아니라 대머리왕 샤를이 프랑스의 첫 번째 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톨릭교의 1500년 역사

1500년이 넘도록 “교회의 장녀”로 행세해 온 프랑스 가톨릭교는 오늘날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1938년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세례받은 가톨릭교인의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필리핀과 미국과 같은 나라들에 밀려 여섯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4500만 명의 가톨릭교인들이 있지만, 단지 600만 명만이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석합니다. 최근에 프랑스 가톨릭교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성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이 65퍼센트나 되며, 그들 중 5퍼센트는 예수를 “대수롭지 않은 분”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한 좋지 않은 추세 때문에 1980년에 프랑스를 방문한 교황은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여, 당신의 세례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였습니까?”

[각주]

a 「파수대」 1984년 11월 1일호 12면 참조.

b 「파수대」 1994년 5월 15일호 8-9면 참조.

c 루이라는 이름은 클로비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인데, 클로비스 이후에 (루이 17세와 루이 필리프를 포함하여) 19명의 프랑스 왕이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

[2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색슨족

라인 강

솜 강

수아송

랭스

파리

갈리아

루아르 강

부예

푸아티에

피레네 산맥

서고트족

로마

[26면 삽화]

14세기의 한 사본에서 묘사하는 클로비스의 세례

[자료 제공]

© Cliché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Paris

[28면 삽화]

프랑스의 랭스 대성당 바깥쪽에 있는, 클로비스(가운데)의 세례를 묘사한 조각상

[29면 삽화]

클로비스의 세례를 기념하기 위한 요한 바오로 2세의 프랑스 방문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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