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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고로우트’족을 방문함’
  • 깨어라!—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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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고로우트’ 습관과 생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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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6 6/8 15-17면

‘이고로우트’족을 방문함’

‘필리핀’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이른 오후 아내와 나는 냉방 장치가 된 ‘버스’에 올라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특이한 여행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우리는 ‘이고로우트’족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외세가 자기네 문화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굉장히 저항을 하였던 종족이다. 이들은 ‘루손’ 북부의 산간 지방에 살고 있다.

‘이고로우트’족은 ‘말레이’ 인종으로서, 피부는 검고 머리는 곧은 흑발이고 중간 키에 건장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특이한 점은, 여러 세기에 걸쳐 단지 손 도구와 순전한 노력으로 계곡 전체를 세계에서 가장 넓은 계단식 논으로 바꾸어 놓은 점이다.

‘이고로우트’족을 찾아가는 길에 다섯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조그마한 마을들과 논이 산재해 있는 ‘루손’의 아름다운 중앙 평야를 지나 ‘필리핀’의 하계 수도인 ‘바구이오’에 도착하였다. 습하고 무더운 ‘마닐라’에 있다가 서늘한 이곳의 기후에 접하니 참으로 기분이 상쾌하였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5시 30분 발 ‘바나우에’행 ‘버스’를 타려고 일찍 일어났다. ‘버스’ 정류소에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사람들은 친절하다. 승객 한 사람이 몸짓을 하자 그들은 자는 아이들을 자기들의 무릎에 눞히고 채소를 옆으로 밀쳐서 우리의 좌석을 마련하였다. 한 남자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내밀어 우리를 올라 오도록 도와 주었다.

그 ‘버스’는 다른 ‘버스’보다 짧고 ‘트럭’ 같이 생겼으며 안락함 보다는 튼튼함을 위주로 하여 만들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한쪽은 완전히 터져 있었고 나무 의자들이 가로 놓여 있었다. 보기에는 거칠게 생겼지만 상당히 편안하였다. 늘어뜨려서 바람과 비를 막아줄 수 있는 포장도 있었다.

‘바구이오’에서 ‘바나우에’까지는 약 110‘킬로미터’ 밖에 안되지만 해발 2,000‘미터’ 이상의 구름 사이를 지나는 구불구불한 산길인지라 9시간이나 걸렸다. 산지에 들어서니 아침 해는 하늘을 ‘오렌지’ 색깔로 물들였고, 우뚝 선 소나무 꼭대기엔 아침 안개가 서려 있었다.

‘이고로우트’ 습관과 생활 양식

‘본톡’ 마을이 가까와지자 ‘이고로우트’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지이-스트링’으로 알려진 ‘와네스’라는 밝은 색깔의 허리 덮개를 두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위가 납작한 작고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지 주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두툼하고 밝은 색깔의 천으로 만든 ‘타피스’라는 ‘스커어트’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손으로 짠 것이다. 그것은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흰색, 초록색 및 검은색의 줄무늬가 옆으로 나 있었다. ‘타피스’를 입은 다음 두툼한 노끈으로 짠 폭 20‘센티 미터’의 ‘와케스’라는 혁대를 둘러서 흘러내리지 않게 하였다. 우리가 본 대부분의 여자들은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지만 마을에는 상의를 입지 않고 다니는 여인들도 있었다.

거리에는 여자들이 아이들을 담요에 싸서 등에 업거나 옆구리에 안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소녀들까지도 그런 식으로 남동생이나 여동생 아이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다녔다. ‘버스’가 멈추었을 때 어린 소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짐을 들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물건을 가득 넣은 내 가방 보다도 더 무거웠다! 그런데도 그 소녀는 우아하게 그것을 집어들어서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었다!

‘본톡’은 산간 지역의 수도이다. 이곳의 ‘이고로우트’족은 전기와 수도가 있는 현대적인 소도시에서 ‘시멘트’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강 건너 ‘사모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조상들 대대로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고 있다.

함께 여행하는 동료이자 통역인 여자와 함께 그곳을 거닐 때 그 여자는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말을 걸었다. ‘이고로우트’인들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 행선지를 말하여 인사를 하고 의례적으로 함께 가자고 초대를 한다. 그러나 인사하는 사람은 그 사람들이 실제 자기를 따라 오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팔 전체에 문신을 한 ‘이고로우트’ 여인들이 많았다. 우리의 안내인은 “그것은 아름다움의 표시이며 15세에 만들게 됩니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물었다. “출생 기록이 없는데 15세가 되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처녀가 청년을 처음 사랑하는 시기로 그 나이를 추측합니다.”

구애, 결혼 및 활동

‘이고로우트’인들의 구애 습관은 아주 원시적이면서도 흥미있다. 마을에는 ‘울록’ 혹은 ‘아그-감’이라는 오두막이 있는데, 결혼할 나이가 된 소녀들은 거기서 잠을 잔다. 결혼 의향이 있는 청년은 ‘울록’에 가서 그가 선택한 처녀에게 다가가 결혼하자고 요청한다. 그 때가 그 두 사람이 생전 처음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본 경우일 수도 있다.

그 구애가 받아들여지면 그 다음 단계로 처녀의 부모를 찾아가서 돼지를 선물한다. 그 돼지를 잡아서 담즙을 검사한다. 담즙이 양호하면 그 두 사람은 약혼을 한 것이 된다. 두번째 돼지를 또 잡는다. 담즙이 양호하면 결혼은 공식적인 것이 된다. 담즙이 좋지 않으면 그 결혼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란 징조로 인정된다. 이어서 많은 음식과 춤으로 결혼 잔치를 베푼다.

그러나 결혼은 아직도 벼를 추수한 후 잡는 세 번째 돼지의 담즙에 달려 있다. 담즙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그 결혼은 무효가 된다.

‘이고로우트’인들의 가정에서는 작업을 부부가 반분하고 있다. 하루는 남자가 논을 갈고 아내가 가정을 돌본다. 그 다음 날에는 남자가 가정일을 돌보고 아내는 논에 씨 뿌리고 곡식 재배하는 데 온 종일을 바친다.

‘이고로우트’ 가정

우리는 ‘버스’ 여행을 계속하여 결국 우리의 목적지인 ‘바나우에’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한 가족과 ‘이고로우트’ 오두막에서 지내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어두어진 후 도착하였으며 숙소를 향하여 30분 거리를 출발하였다. 회중 전등으로 앞을 비추면서 거대한 바위를 쪼아서 만든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 갔다. 꼭대기에 이르러서는 6‘미터’ 높이의 축대 위에 나 있는 25‘센티미터’ 정도의 좁은 논둑 길을 조심 조심 불을 비추면서 걸어 갔다. 얼마 후 우리는 좁고 깊은 골짜기에 다달았다. 아래를 내려다 보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후 우리는 1.1‘미터’를 건너 뛰었다. 그들의 집에 다다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 그것이라니 기가 막혔다!

결국 우리는 산허리의 조그만 평지에 도달하였다. 달빛 아래 2.5‘미터’ 정도의 높이에 폭이 2‘미터’ 정도되는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연로한 한 남자가 미소를 띄우며 우리를 맞았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창문은 없고, 한쪽 구석에서 타고 있는 모닥불 위쪽 천정에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을 뿐이었다. 또 다른 빛의 근원으로는 유리 병과 노끈으로 만든 조그마한 기름 등잔이 있었다. 책상이나 의자는 없고 ‘빌라우’라고 하는 가는 대나무 비슷한 것으로 만든 조그만 돗자리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것은 앉는 방석이나 식탁으로도 사용되었고 후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의 침대로도 사용되었다.

아직 초저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 ‘페드로 킨다잔’은 일본 점령시에 자기가 이 오두막을 지은 경위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찾아가기 힘든 곳에 집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벽은 ‘빌라우’로 만들었으며 지붕은 ‘골론’이라는 풀로 이은 것이라고 그는 설명해 주었다. 모닥불 위의 선반에는 연기의 열에 마르도록 장작 더미가 쌓여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오후 8:30경까지 계속되었는데 ‘이고로우트’인들은 아침 일찍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 때가 취침 시간이었다. 작고 얇은 요를 펴자 우리가 깔고 앉아 있던 돗자리는 즉시 침대가 되었다. 생각과는 달리 그것은 매우 편안하였다. 우리 주인과 그 가족은 그들의 다른 오두막에서 잤다.

보람 있는 방문

해뜨기 전에 새 날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밖에 나가 세수를 하였다. 아침 식사는 삶은 달걀, 삶은 ‘카모테’(고구마), ‘커피’ 등이었다. 나는 오전에 ‘페드로 킨다잔’ 씨와 함께 오리, 닭, 돼지 치는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페드로’ 씨는 골짜기 건너편 최근에 쟁기질을 해 놓은 언덕을 가리키면서 위에다는 ‘카모테’를 심고 아랫쪽 계단식 논에는 벼를 심겠다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바나우에’ 계단식 논이 참으로 광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쪽, 북쪽, 서쪽 어디를 보아도 눈이 닿는 끝까지 층층이 쌓여 있는 푸른 계단식 논 뿐이었다. 계단식 논은 산밑에서부터 산 꼭대기까지 계속 뻗어 있었다. 어떤 산의 경우에는 연이어 있는 축대의 층이 50층 이상이 되었다. 그 축대는 약 250평방 ‘마일’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만일 그 축대를 계속 이어 놓으면 약 22,400‘킬로미터’의 거리에 이른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놀라운 업적 중에서도 그 논은 보기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현대 공학의 도움 없이 간단한 연장만 가지고 그 논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이고로우트’인들과 며칠 생활해 보고 아내와 나는 가치 있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를 계속 바쁘게 만드는 현대의 발명품들은 없었지만 훌륭한 이 지구에 관하여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점들을 계속 배울 수 있었다. 조금도 따분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떤 경우 현대 공학이 인간 생활을 호전시켜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에 ‘이고로우트’족의 방문을 통해 우리가 느낀 바와 같이 인간으로 하여금 보금자리인 이 지구의 일부로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공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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