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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4 2/1 7-10면

‘나이지리아’가 “짐”을 벗어버리다

「깨어라!」 ‘나이지리아’ 및 ‘가나’ 통신원 기

“달갑지 않은 자들의 대규모 출국” “‘나이지리아’에서 추방당한 자들: 가혹한 대규모 출국” 이러한 표제들을 달아서, 국제 언론들은 ‘아프리카’ 역사상 최대 규모 집단 인구 이동의 하나를 보도하였다. 그것은 자유를 찾은 사람들의 승리의 출국도, 압제나 전쟁이 두려워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명령으로 거의 200만명이 강제로 떠나는 대규모 출국이었다.

석유와 서 ‘아프리카’ 공동체

1975년까지 ‘나이지리아’는 내란의 황폐로부터 크게 회복되었고 주요 산유국이 되었다. 새로운 석유 자원으로 그 나라는 국제적으로 재정적인 영향력이 증가하였으며, 점점 더 정치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결과 ‘나이지리아’는 1975년 5월에 ECOWAS(서 ‘아프리카’ 국가 경제 공동체)를 설립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무역과 경제 협력의 테두리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ECOWAS 국민들은 ‘비자’없이 3개월까지 회원국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민의 수문을 열었다. “모든 길은 ‘나이지리아’로 통했다.” ‘나이지리아’는 그 공동체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나라였던 것이다. ‘차드’ 및 ‘가나’와 같은 나라들에서 온 외국인들이 어떤 때는 하루에 3,000명의 비율로 이민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유입은 그 나라의 허술하고 순찰을 돌지 않는 국경선을 통과하여 감지할 수 없게 몰래—그리고 불법적으로—들어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인들은, 대개의 경우 이주자들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종종 ‘나이지리아’인들에게 매력 없는 직업에 값싸고 숙련된 그리고 숙련되지 않은 노동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너무 엄청난 이민으로, 달갑지 않은 일들이 무수히 생겼다. 그래서 오래지 않아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이주자들이 “짐”이 되다

1978년에 이르러 이미 이주자들의 유입이 우려를 초래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값싼 외국의 노동이 ‘나이지리아’인들의 실직이 점증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이지리아’ 보도 기관에 따르면, 1980년에 그리고 1982년에 다시 불법 이주자들이 선동한 종교 폭동으로 수천명의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일거리가 없는 이주자들이 무장 ‘갱’단을 조직하여 선량한 시민들을 약탈하고 죽이며 강간하였다. 이민 온 수천명의 여자들이 매음 행위를 하고 있었다. 호전적인 외국인 거지들—남자, 여자 및 어린 아이들—은 골치아픈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부 사람들은 그 나라의 사회적 및 정치적 안전을 걱정하였다. 1980년에 그들은 “불법 이주자들”과 “달갑지 않은 외국인 체류자들”을 규탄하기 시작하였다. 그 반응으로, 1981년에 ‘나이지리아’ 정부는 ‘나이지리아’ 국적을 가지지 않고 그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아프리카’인들에게 이민국에 등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은 별 효력이 없었다.

그러다가 1982년이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국제 석유 과잉 공급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인플레’까지 겹쳐 결국 경제 후퇴를 몰고 왔다. ‘라고스’의 「데일리 타임즈」지가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와 같다. “어두운 경제 전망은 연방 정부에 ‘나이지리아’가 더는 ‘대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고 알려주는 충분한 신호가 되었다.” 따라서 석유 ‘붐’과 경제적 번영의 물결을 타고 들어왔던 사람들이 후퇴하는 경제 물결에 따라 강제로 출국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대규모 출국

그러므로 모든 불법 이주자들에게 2주 내에 그들의 신분을 정식화하던지 “출국”하라(떠나라)는 1983년 1월 17일자 정부의 “출국” 명령은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나이지리아’의 지주들은 이주 소작인들을 쫓아냈다. 고용주들은 이주 근로자들을 해고시켰다. 그 결과, 대부분의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 체류자들은 급히 그들의 소지품을 챙겼다. 한 ‘가나’ 남자는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는 한 ‘나이지리아’를 떠나지 않겠다고 최근에 친구들에게 말하였다. “떠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향을 향한 느린 행진이 되겠지요”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나 출국하려고 모여든 여세가 그가 예상한 “느린 행진”을 질주로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떠나는 수십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들의 잡다한 소지품들을 잔뜩 실은 ‘미니 버스’와 ‘트럭’에 터지도록 타고, 도로를 메웠으며, ‘라고스’의 국제 항구와 공항으로 밀어 닥쳤다. 그러나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였는가? ‘가나’의 국경선은 폐쇄되었다. ‘베닌’과 ‘토고’도 마찬가지로 수십만명의 ‘가나’인들이 그들 나라 안에 갇히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국경선을 폐쇄하였다. 이 문제가 타결될 때까지, 어린이와 임신부를 포함한 대기중인 무리는 굶주림과 비위생적인 상태로 고통을 당하였다. ‘베닌’과 ‘토고’ 당국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1983년 1월 29일이 되어서야 ‘가나’는 국경선을 개방하였다. 이제 세계는, 인간들의 물결이 ‘베닌’으로, ‘토고’를 지나 ‘가나’와 그 너머로 밀어 닥침에 따라 특이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가나’는 이미 이 쇄도하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 철수 대책 본부를 세웠다. ‘아크라’의 ‘라바디’에 있는 무역 박람회장의 넓은 대지가 도로와 배로 도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피 ‘센터’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일요일 아침까지 박람회장은 꽉 차버렸으며, 여러 개의 다른 대피 ‘센터’를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동차 소유자들에게 정부의 피난 대책 본부에 그들의 차를 빌려주라는 긴급 명령이 발하여졌다. 놀랍게도, 귀향자들이 매우 효율적으로 ‘가나’ 전역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난민 수용소를 세울 필요는 없었다.

귀향자들 마다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한 ‘가나’ 남자는 국경 마을인 ‘아플라오’에 간신히 도착하였으며 ‘아크라’까지 어떻게 갈 것인지 막연하였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유개 ‘트럭’에서 빵 덩어리를 던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달려들어 공중에서 그것들을 잡아챘다. 그 광경을 뒤로 하면서, 그는 ‘아크라’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지만 ‘버스’를 타려고 아귀 다툼을 벌이고 있는 ‘아플라오’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그는 짐을 실은 ‘트럭’이 교통이 막혀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 여행 가방을 ‘트럭’에 던져 넣은 다음 천천히 기어오르기 시작하였읍니다. 매우 고맙게도 뒤에서 누군가가 계속 밀어 주는 것을 느꼈으며 덕분에 ‘트럭’에 탔읍니다. 거기에서 우리들 약 백명은 ‘아크라’까지의 3시간의 여행을 인내하였읍니다.”

때때로 역경이 동지애를 유발시켰다. 일부 귀향자들은 그들의 식량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 식품을 구하도록 도와 주었다. 공항에서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의 돈을 동료 여행자들에게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역경은 또한 야만적인 행위를 유발하였다. 한 굶주린 귀향자는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음식을 빼앗겼다. 대피 ‘센터’로 식품 바구니를 나르던 한 여자는 그것을 전혀 나누어 주지 못했다. 굶주린 귀향자들이 어느새 그것을 낚아 챈 것이다.

공항과 항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배와 비행기들이 그들을 피난시킬 때까지 사람들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인내해야 하였다. 군중이 다투어 배를 타려고 밀려드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졌고, 적어도 한명이 익사하였다. 그러나 귀향자들은 스스로 즉시 구조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구조에 성공할 때마다 우뢰 같은 박수 갈채의 물결이 ‘가나’인이나 ‘나이지리아’인이나 할 것 없이 군중 가운데서 터져 나왔다. 마침내 그들은 들어설 틈도 없을 정도로 빽빽히 탄 채 출범하였다.

후유증

이것은 가혹한 대규모 출국으로 불렸으며, 어떤 면으로는 그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명령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2주간의 기간이 너무 짧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의 시사 해설자들은, 불법 체류자들이 오래 전에 그들의 이민 신분을 정식화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영향을 받은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당국은 떠나는 외국인 체류자들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득을 가지고 가도록 허락받았다. 제한된 의료 도움이 베풀어졌다. ‘나이지리아’의 운송 업자 협회는 자진해서 그 나라 전역에서 사람들을 소개하는 일에 사용하도록 무료로 200대의 ‘트레일러’를 내놓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이지리아’인들은 또한 이미 직업과 주택의 기회가 열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안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지리아’의 행동은 확실히 국제 관계에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가 짐을 덜어 놓았기 때문에 무거운 사회적 및 재정적 부담이 훨씬 더 가난한 나라들에게로 옮겨졌다. 현재 ‘가나’에 만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새로운 입이 100만 이상 생겼으며, ‘가나’는 도움을 청하는 국제적인 호소를 해왔다. 그 반응으로, 여러 외국과 단체들은 재정적 및 물질적 원조를 ‘가나’, ‘토고’ 및 ‘베닌’으로 보냈다. ‘나이지리아’도 100만 ‘달러’(미화)의 원조를 승인하였다.

그러면 귀향자들의 장래는 어떠한가? 그들을 난민이나 피추방자 혹은 쫓겨난 불법 체류자들 중 어느 것으로 부르든지 간에, 그들이 겪는 곤경은 세계 지도자들이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혹케하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세계가 더는 그 거주자들을 돌볼 수 없다는 것을 날카롭게 고발하는 것이다.

[8면 삽화]

이 사람들의 장래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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