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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학—“음울한 학문”
  • 깨어라!—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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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6
깨86 4/15 17-19면

경제학—“음울한 학문”

경기 후퇴, 불경기, 인플레이션, 불황 속의 물가고,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이 모든 것들은 어떤 사람이 “음울한 학문”이라고 부른 바 있는 경제학에 사용되는 음울한 단어들이다. 그러나, 이 위협적인 용어들 배후에 실제로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학은 우리 대부분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모종의 해결책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영국의 경제학자 라이오넬 로빈즈는 경제학을 정의하기를, “목표, 그리고 대체 효용을 지닌 불충분한 수단과의 관계에 따른 인간 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목표” 즉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사물들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들은 사실상 무한하다. 한편, 소득과 같은 우리의 “수단”은 보통 매우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가족과 함께 아침 식탁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코오피에 탈 설탕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제 그는 어떤 경제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들의 불충분한 “수단”(설탕)은 어떻게 모두의 “목표”를 충족시켜 줄 것인가? 그는 각자가 아주 조금씩만 넣어야 한다고 결정내릴 수 있다. 아니면, 더 나아가 자기에게 다 필요하다고 결정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설탕을 요리에 사용하고자 할지 모른다. 따라서, 경제적 결정이란 순전히 뛰어난 두뇌를 가진 수재의 영역에 속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독자가 가족 단위나 또는 소비자와 같은 개별적 입장에 근거하여 경제학을 논할 때, 미시(微視) 경제학이라는 것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원리들이 국가와 같이, 개인들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집단들에 적용될 때, 거시(巨視) 경제학을 다루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 용어에 현혹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경제학이란 그다지 정밀한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관찰자의 말에 의하면, 6명의 다른 경제학자들에게 그들의 의견을 물어볼 경우 7가지의 다른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학문에 관해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

스미드에서 케인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역사를 통하여, 보통 사람의 경제적 선택의 폭은 매우 제한되었었다. 보통 가난한 가운데 출생한 사람은 가난 속에 죽어갔다. 부유한 가운데 태어난 사람은 필경 부유한 가운데 죽었을 것이다. 어떤 (침략군과 같은) 경제 외적인 요인들이 닥치지 않는 한 그러했다.

그러다가 산업 혁명이 일어나자,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인들도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경제 상황이 개선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봉건 제도가 그 종말을 고함에 따라, 이제 정부들은 경제 결정을 내리는 일에 직면하게 되었다. 지도자들은 어떻게 미래의 경제 상태를 통제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1776년이 되자, 아담 스미드는 현대 경제학에 관한 최초의 저서인 「국부론(國富論)」(“여러 나라 국민의 부(富)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한 고찰”[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집필하였다. 그는 경제적 발전을 가져올 시장과 개인의 양쪽 능력에 대한 확신을 표명하였다. 스미드는 인간의 타고난 이기주의가 발전 배후의 추진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론화했던 것이다. 좋은 임금과 많은 이윤에 대한 욕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가진 자본과 재능을 시장 제도에 투자하도록 부추길 것이다. 다른 두명—데이비드 리카아도와 토머스 로버어트 맬더스—이 스미드와 더불어 경제학 분야를 개척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문필가인 토머스 카알라일은 바로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음울한 학문의 존경받을 만한 교수들”이라고 불렀다. 왜 “음울”한가? 왜냐하면 이들은, 여러 국가들의 경제는 발전하겠지만, 일반 근로자들은 여하한 수익이 있다해도 생필품 수준 이상으론 결코 오래 유지하지 못하리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맬더스는 부양할 인구의 증가로 어떤 번영도 상쇄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카알 마르크스가 등장하였다. 그는 경제 이론가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 행동 및 정치 사상의 연구생이었다. 그 역시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동일한 염세적 태도를 보였다. 마르크스는 실직자 즉 ‘산업 예비군’이 존속하는 한 취업 경쟁이 항상 임금을 하락시켜 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굶주린 실업자가 저임금으로도 기꺼이 일하려 들터인데, 고용주가 임금을 인상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라고 그는 추론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또한 자본주의 내에서 자멸의 씨앗을 간파해 내었다. 즉, 부는 점점 더 소수의 손에 축적될 것이고, 근로자들은 점점 더 비참해져서 마침내는 공공연한 유혈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인기를 얻어가는 동안, 또 다른 운동이 커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회 다아윈주의였다. 다아윈의 진화론을 사회 문제에 적용시킴으로써, 그 운동의 주도자들 중 하나인 허버어트 스펜서는 “적자 생존”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은 추정하기를, 시장 전쟁의 승리자들이 그 전리품을 취할 것이며, 패배한 자들로 말할 것 같으면—여하튼 간에 적자(適者)들만이 생존하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식의 사고 방식은 얼마의 매우 파렴치한 상행위 및 가장 호전적인 자들이 엄청나게 재산을 축적하는 현상으로 이끌어 갔다.

이렇게 하여 초기의 경제 이론 시대 이래로, 자유 시장 체제(따라서 정부의 경제 통제가, 설혹 있다손치더라도, 제한된 체제)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정부가 보다 더 또는 절대적으로 통제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선(戰線)이 그어져 왔다. 하지만, 1930년대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자유 시장의 붕괴가 야기한 고통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의 잠재 가치를 재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탁월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아드 케인즈는 국가가 이자율을 통제하고 정부가 과세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경제 순환을 최악의 상태로 추락시키는 일을 미연에 방지해 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의 이론에 기초한 여러 변형 이론들이 아직도 서구 세계에 퍼져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

온갖 이론들과 도표들을 갖추고 있는 경제학자들이 세계의 자금 문제들을 해결해 왔는가? 최근에 구구한 경제 이론이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아담 스미드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서 자유 시장 체제를 완전히 신봉하는 상태로 되돌아가자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들 즉 경제학자들이 다룰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문제들에 우리가 직면해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한때 「새터데이 리뷰우」지의 한 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인문(人文) 경제는 번영과 경제적 성장 이상을, 제반 자원의 효율적 분배 이상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더 큰 평등과 자유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 제도의 틀에 있어서의 변화들을 요구한다. ·⁠·⁠· 그것은 지역 사회 의식과 동료 의식을 인간 관계로 이끌어 주는 사회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인간과 과학 기술과 자연 환경의 병립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세계적인 규모로 시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 경제”를 달성하기란 요원하기 그지없다. 오늘날, 부는 여전히 부자들에 몰리며 가난한 자들에게서 더욱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노력에만 근거한 것으로는 인간에게 지속적인 해결책이 없다. 이리하여 경기 후퇴, 불경기, 인플레이션, 불황 속의 물가고,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등은 가장 부유한 국가들에서조차 경제 뉴우스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낯익은 단어들이 되었다.

장래—음울한가?

더욱 효율적인 자원의 분배가 과연 있게 될 것인가? 또는 지역 사회 의식 및 동료 의식을 인간 관계로 이끄는 사회 환경도 있을 것인가? 우리는 경제학이 근로자에게 “음울”하게 보이지 않을 날을 보게 될 것인가?

독자가 가지고 있는 성서를 펴서 이사야 65장 21절에서 23절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말은 간단하지만 그 사상은 심오하다. 각 사람이 자신의 주택을 소유하고 경제적으로 충분히 자급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무미 건조한 일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만족스런 일을 하게 된다. 모두를 위하여 풍성하게 베풀어 주는 경제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세계 정부하에 있을 것이다.—또한 시 72:16; 145:16; 이사야 25:6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음울한 학문”의 음산한 예견에 낙담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이 땅에 대한 그분의 목적에 믿음을 둔 사람들에게 그분이 마련해 놓으신 장래는 실로 매우 밝은 것이다.

[19면 삽입]

경제학이 근로자에게 “음울”해 보이지 않을 날이 과연 올 것인가?

[19면 삽화]

맬더스는 인구의 증가로 일시적인 어떤 번영도 상쇄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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