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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들은 우리 딸을 빼앗아 가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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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들은 우리 딸을 빼앗아 가려 하였다
  • 깨어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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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9
깨89 11/1 11-15면

의사들은 우리 딸을 빼앗아 가려 하였다

마흔 두살에 임신을 하다니! 의사들은 내 나이의 여자가 직면할 수 있는 문제만 아니라 갓난아기에게 생길 수 있는 문제들도 재빨리 지적하였다. 양수 검사를 받아 보라는 것이었다. 자궁으로부터 소량의 양수를 채취함으로써, 의사들은 다운 증후군과 같은 유전적 결함이 있는지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결함이 발견되면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낙태를 제안한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태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설명하면서, 그 검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일을 해결하였으므로, 나는 즐거운 임신 기간을 고대하였다. 남편과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므로, 순서상 취해야 할 다음 단계는 우리의 원하는 바를 존중하여 수혈을 하지 않을 소아과 의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우리는 예약을 하고, 의사와 만나서, 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창세 9:4, 5; 레위 17:10-14; 사도 15:19, 20, 28, 29) 그는 이해하였으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일이 쉽게 풀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분만은 잘되었으나 ·⁠·⁠·

분만일이 가까워오자, 우리는 참으로 가슴 설레었다! 재혼할 당시 나는 세 아들을 둔 과부였다. 새 남편 지노는, 첫 남편이 죽은 이래로 나와 함께 생활해 온 나의 어머니도 떠맡았다.

1986년 2월 17일 월요일 밤에 진통이 시작되었다. 남편, 어머니 및 나는 막내 아들 매슈를 데리고 병원으로 떠났다. 큰 아이들은 집에서 기다리고 싶어했다. 우리는 산과실에서 정 간호원인 동료 증인, 에블린을 만났다. 에블린은 내가 진통중이며 즉시 병원으로 갔다는 말을 이미 들었다. 우리는 분만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는 가정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남편이 탯줄을 자를 수 있기까지 하였다. 한 간호원이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우리는 칼레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였다.

이틀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도와주는 사람은 충분하였다. 84세인 어머니가 그러한 도움과 격려의 근원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쉽게 피로하였으므로, 어머니가 나와 아기를 돌봐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히 여겼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간 후에, 우리는 칼레이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아기는 젖을 잘 먹지 않았고, 신생아들이 자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은 잠을 잤다. 아기의 피부색은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소아과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당일의 진료를 예약하였다.

오후 2시경에, 의사는 아기에 대한 진찰을 끝마쳤고, 검사하기 위해 필요한 혈액을 채취하였다. 그는 결과를 나중에 전화로 알려 주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다섯시경에 전화가 왔다. 우리는 칼레이가 온전한 혈액 교환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북서쪽으로 16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대학 병원으로 아기를 즉시 데리고 가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임을 의사에게 상기시키고, 어떤 상황에서도 수혈을 받지 않을 것임을 거듭 밝혔다. 그가 우리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존중해 줄 의사를 찾을 수 있도록 즉시 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보고 나서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그는 답변하였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회답 전화를 기다렸다. 저녁 7시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남편은 전화를 걸었는데, 의사가 자기의 생각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칼레이를 즉시 치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므로, 우리는 이제 의심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격려와 지원을 받기 위해 동료 증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3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저녁 9시에 의사가 전화를 걸어 칼레이를 우리 인근 병원에 입원시켜 좀더 검사를 받게 하라고 하였다. 남편은 칼레이가 일단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의사들이 아기에 대한 온전한 권한을 얻을 수 있고 아기를 대학 병원으로 옮겨 반드시 혈액 교환을 받게 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남편은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침에 의사에게 알려 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는 동안, 동료 증인들은 전화를 걸어 다른 소아과 의사를 찾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들의 노력은 헛되었다. 칼레이는 괴로운 모습이었고, 나의 감정적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칼레이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중증 황달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하여 의사가 경고한 말이 끊임없이 뇌리를 스쳤다. 아기를 부둥켜 안고 울면서, 의사가 우리를 속였다는 것을 알고서, 도대체 의사가 양심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함께 모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였을 때 참으로 위안이 되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놓여 있든지 그것을 직면할 수 있도록 크게 강화되고 격려받았음을 느꼈다. 의사를 찾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었는데, 이제 밤 11시 30분이 되었다. 남편은 우리가 집을 떠나는 게 좋겠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는 의사들이 무엇인가를 꾀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나는 그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즉시 이곳에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소”라고 거듭 말하였다. 그래도 나는 우두커니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어서 밤 11시 45분경에 전화가 왔다. 에블린이 병원에서 전화한 것이었다. 그는 그날 밤 예정에 없던 교대 근무를 하도록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분만실에서 거들어 주고 있는 동안, 의사를 불러내어 수혈을 하는 일과 그렇게 하기 위해 법원 명령을 얻어내는 일과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더라는 것이다. 이제 나는 확신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여행 가방에 물건들을 던져 넣고, 음식 등을 식품 봉지에 챙겨 넣고, 자동차로 달려갔다. 우리는 도움을 줄 수 있는, 플로리다 주, 잭슨빌에 있는 한 의사의 명함을 받았다. 그곳을 가려면 320킬로미터를 운전해야 하는데, 우리가 떠날 때는 영시 오분이었다.

십오분 후에, 자동차 한대와 구급차 한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우리 집에 도착하였다. 플로리다 주 보건 재활부에서 온 직원 다섯명이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가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문으로 가서, 아기와 부모가 없다고 간단히 밝혔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살펴보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기를 데려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방마다 철저히 수색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아이들의 옷장 서랍 하나를 들여다보기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당신들은 정말로 부모가 아기를 그 안에 가두어 놓았을 거라고 생각하시오?”라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잭슨빌에 도착한 것은 새벽 다섯시경이었다. 이제 네 시간을 기다려야 하였다. 우리가 만나보기를 바라던 의사는 오전 9시가 되기까지 진찰실 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비로비치의 이전 의사들이 과연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것만큼 나의 아기의 건강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이 호의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칼레이가 심각한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혈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입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칼레이의 상태에 대한 비혈액 치료법이 의학적으로 인정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이다.

오전 9시가 되자 즉시, 우리는 의사 진찰실에 전화를 걸어서, 상황의 긴급성을 간호원에게 설명하였다. 간호원은 의사가 가급적이면 속히 우리에게 전화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반복해서 전화를 걸었다. 마침내, 간호원은 의사가 전화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시각은 이제 오후 1시가 되었다. 우리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고 심한 좌절감을 갖게 되었다. 방에 있는 전화기가 계속 통화중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아래층 휴게실로 내려가서 거기 있는 전화기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도움의 근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왕국회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한 증인이 친절하게 귀기울여 듣고서 즉시 우리를 돕기로 했다. 그는 급히 모텔로 와서 우리를 데리고 두 군데의 진료소로 갔지만, 양쪽 다 적합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므로, 우리를 도와줄 수 없었다. 칼레이는 특수 광선 치료 즉 광선 요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아기의 빌리루빈 수치는 100밀리리터당 29밀리그램으로 상승하였는데, 빌리루빈 수치가 25밀리그램이면 심각한 것으로 고려된다.

그때 그 증인은 어느 증인 부부의 딸아기에게 최근에 무혈 수술을 행한 병원과 의사를 생각해 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곳으로 갔다. 하지만 성서에 근거하여 우리가 바라는 것이 존중될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까지 칼레이 곁에 머물러서 지켜보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응급실로 들어가서 묻는 질문에 모두 대답하였다. 의혹을 가지고 간호원은 계속해서 이렇게 질문하였다. “비로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차를 몰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플로리다 주에서 당신같이 멋진 사람에게서 사실상 아기를 강제로 빼앗아 가려 했다니 믿을 수 없군요.”

서류 절차가 끝나자, 일들이 빠르게 진전되었다. 우리는 검사실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칼레이는 옷이 벗겨졌으며, 응급 치료팀이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는 복도 아래로 울리는 반향음과도 같은 이러한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야. 피는 안 돼. 피는 안 돼.” 곧 응급 치료팀을 인솔한 의사가 들어와서 자기는 온전한 혈액 교환을 하기 원한다고 말하였다.

남편은 다시 한번 우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밝혔으며, 의사는 자기 동료들과 상의하기 위해 나갔다. 칼레이에게 이제 정맥 주사를 놓는 일이 필요하였다. 나는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기진 맥진해 있었고, 아기가 더 이상 주사를 맞는 걸 보거나 아기의 비명을 듣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 남편은 아기가 이 모든 것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기의 머리털 몇 가닥을 조심스럽게 모아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어린 딸을 기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칼레이는 치료팀이 그러한 경우에 사용하는 특수 광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에 안대를 댄 채 인큐베이터 같은 침대에 눕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수혈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존중될 것인지 여전히 의심스러웠으므로, 이틀째 밤을 새우는 것이지만, 아기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주치의가 방으로 들어와서 칼레이에게 수혈을 하고 싶다는 말을 다시 꺼냈다. 또다시, 그에게 피에 관한, 성서에 근거한 우리의 입장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요점이 무엇입니까?” 남편은 아기가 수혈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사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한밤중에 차를 몰고 320킬로미터나 달려 왔다. 남편은 의사에게 또 다른 법원 명령을 얻을 필요가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우리는 가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또다시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우리는 아기를 안고 도망을 가야만 할 것인가? 나는 방을 살펴보고 복도를 내려다보았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은 아주 지루하였다. 두 시간마다 칼레이의 발뒤꿈치로부터 혈액 표본이 채취되었다. 높이 올라갔던 수치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이틀 동안, 두 시간마다 정기적인 혈액 검사를 실시하였다. 칼레이의 작은 발뒤꿈치는 하도 바늘로 찔려서 살갗이 벗겨졌다. 아기는 실제로 바늘에 익숙해져서, 때로는 바늘을 찔러도 울지도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잭슨빌 지역의 많은 증인의 애정어린 방문을 즐겼다. 첫 방문객 중에는 최근에 어린 딸을 수혈 없이 수술한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참으로 격려가 되었다! 이제 심장병 전문의사는 수혈의 위험률이 오히려 황달의 위험률보다 더 높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한 말을 듣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삼일 만에 처음으로 안심하고 아기 곁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온전한 회복

여러 분야의 의학계에서 온 많은 의사들은 아기를 철저히 검사한 후에, 아기가 황달로부터 아무런 불리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일러 주면서, 그것을 보고 자기들도 놀랐다고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정맥 주사관이 꽂혀 있지 않은 칼레이를 안아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우리는 안전한 광선 요법에 대해 잘 듣고 그 요법을 선택하였으며 온갖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혈액을 거절하였으므로, 칼레이가 AIDS나 간염 혹은 다른 어떤 무서운 질병에 걸릴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비로비치의 법원 명령이 아직도 유효하였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취소될 때까지 감히 떠날 수 없었다. 주치의는 친절하게 필요한 전화를 당국에 걸어, 아기가 받은 치료를 통고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칼레이를 원래의 소아과 의사에게 데려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을 알고 잭슨빌의 의사들은 우리가 다른 의사를 찾을 때까지 아기의 모든 기록을 보관하기로 동의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어린 딸이 얼마나 잘 알려져 있는지 그리고 비로비치의 의사들이 얼마나 편견이 심한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나는 피 문제에 대하여 여호와의 증인을 존중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어서 우리에게 추천된 다른 소아과 의사를 만나 보기로 약속하였다. 칼레이를 그의 진찰실로 데리고 갔다. 아기의 옷을 벗기자 간호원이 아기의 몸무게를 달고 체온을 쟀다. 칼레이는 진찰대에 누워 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가 들어와서 아기 옆을 지나가면서 자기와 다른 소아과 의사들은 아기를 치료하지 않을 것이며 법원 명령을 얻어냈던 소아과 의사를 지지하기로 동의하였다고 밝혔다.

나는 그에게 그가 나의 친구들에게 피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협조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글쎄요, 내 친구들은 선생님이 진심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틀림없이 생각하고 있던데요”라고 나는 답변하였다. 그 말을 하자 그는 진찰대에 누워 있는 아기를 한번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아기에게 옷을 입히면서, 사람을 돌보는 일에 헌신적인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몰인정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다시 울기 시작하였다.

칼레이가 검사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6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아기를 기꺼이 치료해 줄 의사에게 데리고 갈 필요가 있었다. 내 생각에는 생사가 걸린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에도 우리가 참으로 피를 멀리할 것이라고 믿는 의사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하고, 헌신한 증인이며 그분의 법에 대한 순종이 다른 어떤 생각보다 앞자리에 온다는 점을 알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경험은 다른 증인 부모들이 의사들과 치료 문제를 논할 때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의사가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 의사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당신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다루셨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을 예로 들어 여호와의 증인은 참으로 진심을 말한다는 점을 의사들에게 인식시켰다.

약 육개월 후에 보건 재활부로부터, 우리에 대한 의학적 태만 혐의의 고발에 관하여 조사를 끝마쳤다고 기술한 한통의 편지를 받고 놀랐다. 그 편지 내용은 그 고발이 근거없는 것임이 증명되어 종결지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기관에 전화를 걸어 조사한 내용을 물어 보았다. 나는 이 조사에 과연 무엇이 관련되었는지 호기심이 있었다. 여담당관은 자기들은 단순히 잭슨빌에 전화를 걸어 행해진 일을 확인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칼레이는 현재 세살이다. 그는 매우 건강하고 끊임없는 즐거움의 근원이다. 그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회중 내의 다른 사람들을 임시 엄마 혹은 아빠로 삼기를 좋아한다. 나는 “참으로 예쁜 손녀를 두셨군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는 단지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지 않아요. 그 아이는 나의 딸이랍니다.” 나는 인자하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다!—보니 데스킨스의 체험담.

[13면 삽입]

“그들은 자기들이 아기를 데려가게 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14면 삽입]

“우리는 아기를 안고 도망을 가야만 할 것인가?”

[15면 삽화]

딸, 칼레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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