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우울증
“우울증—싸워 이길 수 있다!”라는 기사가 실린 귀지 (한국어판은 1987년 11월 1일호)를 처음 보았을 때 먼저 스친 생각은, ‘아니야! 단지 행복한 생각을 하고 미소를 짓기만 하면 우울증이 사라질 것이라는 식의 흔한 기사에 지나지 않겠지’ 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S.A.D. (계절적 정서 장애)에 걸린 것으로 진단받았기 때문에 그 기사에서 그 증세를 언급한 것을 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읍니다! 특히 그 점을 묘사한 부분에 바로 뒤이어 “우울증은 언제나 ‘머리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된 그 문장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J. E. G., 미국
대학 교육
“대학 교육—무엇을 위한 준비인가?”라는 기사 (한국어판은 1987년 1월 15일호)와 1987년 8월 22일호 (한국어판은 1987년 9월 1일호)에 실린 편지 내용에 동의할 수 없읍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젊은이들은 대학에 다녔으면서도 고무적인 직업을 갖고 건실한 그리스도인 결혼 생활을 영위합니다. 인생이란 그저 실용적인 것을 배우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숲속을 거닐고, 별을 바라보고, 테니스를 배우거나, 예술에 관한 책을 읽을 때, 그러한 일은 실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풍요롭게 될 수 있읍니다.
A. J. M., 미국
대학 교육에 관한 여러분의 기사를 읽고 괴로왔읍니다. 그 기사가 불공정하고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 어떤 독자의 생각에도 동감이지만, 여러분의 회답에도 동의합니다. (한국어판은 1987년 11월 15일호) 대학 생활에는 장단점이 있읍니다. 대학에서든 종교 조직에서든 각자의 성공 여부는 배운 것을 개인적으로 얼마나 잘 적용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T. M., 미국
우리는 고등 학문 기관이 베풀 수 있는 증가된 지식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헨리 포드처럼 정규 교육을 거의 혹은 전연 받지 않았던 사람들로부터 사회가 받아온 유익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위 고등 교육이라는 것 자체를 정죄하지 않으며 전에 밝힌 점, 즉 대학 진학은 개인적인 문제라는 점을 재확언하는 바입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대학 환경의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예외가 있을 수 있지만, 대학 교육의 추진력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반하며 인문주의 철학에 편승합니다.
둘째로, 대학 교육은 예수와 사도 요한의 충고와는 반대되게, 대개 출세와 물질적 성공을 강조합니다.—마태 6:19-21, 25-34; 요한 1서 2:15, 16.
세째로, 대학 환경은 보통 독립 정신과 방임주의의 영을 조장하여, 결과적으로 많은 청소년들이 저항하기 어려운 성적 부도덕과 마약 남용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이 지식, 특히 성서에 들어 있는 지식을 계속 획득하도록 격려하는데, 그 지식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 17:3)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첫째로 구하라는, 마태 복음 6:33에 있는 예수의 말씀에 중점을 두면서 유용하고도 생산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배양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네째로,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누가 21:34-36; 에베소 5:15, 16) 남아 있는 시간을 우리의 창조주를 섬기는 일에서 매우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읍니다.—편집자.